이시하라 신타로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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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환경청 대신'''
'''제7대'''
마루모 시게사다

'''제8대
이시하라 신타로'''

'''제9대'''
야마다 히사나리
-
'''일본 운수대신'''
'''제58대'''
하시모토 류타로

'''제59대
이시하라 신타로'''

'''제60대'''
사토 신지
-



'''14•15•16•17대 도쿄도지사
石原(いしはら 慎太郎(しんたろう
이시하라 신타로'''
'''출생'''
1932년 9월 30일 (91세)
[image] 효고현 고베시 스마구
'''국적'''
[image] 일본
'''학력'''
쇼난중학교
가나가와 현립 쇼난고등학교
히토쓰바시대학 (법학 / 학사)
'''직업'''
소설가, 정치인
'''신체'''
183cm[1]
'''가족'''
동생 이시하라 유지로(1934~1987)
배우자 이시하라 노리코
장남 이시하라 노부테루
차남 이시하라 요시즈미[2]
삼남 이시하라 히로타카
사남 이시하라 노부히로
'''소속 정당'''

'''경력'''
일본 참의원
중의원
환경대신
운수대신
도쿄도지사
태양당 대표
일본 유신회 공동대표
차세대당 최고 고문
'''홈페이지'''

1. 개요
2. 일생
2.1. 소설가 시절
2.2. 정치 활동
3. 도쿄도지사 시절
3.1. 환경 정책
3.2. 청소년 건전육성 조례
3.2.1. 일본 만화와 애니를 죽여라
3.2.2. 일본 게임을 죽여라
5. 소속 정당
6. 여담
6.1. 유사한 인물
6.2. 자식 관련
6.3. 문화 관련
6.4. 토츠카 요트 스쿨 관련
6.5. 암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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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소설가이자, '''극우 발언과 행보로 악명이 높은 정치인중 한명.'''
정치 활동 당시엔 국내외적으로 도쿄도지사란 명함을 팔아먹으면서 후술되어있듯 논란이 되는 발언을 기자 및 대중들 앞에서 무수히 쏟아냈다.
행보 하나하나에 괴이함이 철철 넘치는 인물로, 한일 양국 좌우 가리지 않고 개념 좀 있다는 사람들에겐 허구한 날 까이던 인물이다. 그런데 후술되어 있지만 하는 말들을 보면, 딱히 극우 사상이랑 상관없는 뻘소리도 심심찮게 하는 사람이라 저 인간이 진짜 어떤 극우 사상에 감화되어 활동하는 정치인이 맞긴 한 건지 의심된다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될 수만 있다면 아돌프 히틀러가 되고 싶다'는 상식 밖의 발언도 서슴치 않고 하는 거 보면, 분명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인 건 틀림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아베 신조는 이시하라 신타로가 남자답고 모든걸 다 손에 넣은 남자처럼 보여서 질투한 적이 있다는 듯.
결국 2014년 중의원 선거에서 본인이 만든 차세대당이 참패하고, 비례대표로 입후보한 자신도 낙선하면서 정계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은퇴의 변도 그다운데 "죽을 때까지 말하고 싶은 말과 하고 싶은 일을 하다 미움을 받으며 죽고 싶다."

2. 일생



2.1. 소설가 시절


히토츠바시 대학 법학부에 재학하던 1955년, 데뷔작인 단편소설 〈태양의 계절〉을 문예잡지 <문학계> 7월호에 발표한다. 〈태양의 계절〉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난 한 청년의 자유분방한 삶과 비극적인 연애담으로 '''거침없고 노골적인 묘사'''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으며 문단 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데뷔한 그 해 신설된 문학계 신인상과 다음해인 1956년 아쿠타가와상을 수상. 이것은 역대 최연소 아쿠타가와상 수상이었다. 이후 1958년 오에 겐자부로에 의해 이 기록은 경신된다.[3]
〈태양의 계절〉은 1956년 영화로도 만들어져 흥행에서도 크게 성공하고, 영화 속의 패션 - 알로하 셔츠선글라스, 통칭 '신타로가리'라 불리우는 짧은 머리의 헤어스타일 - 을 따라하는 태양족[4]이라 불리는 신세대 청년문화 붐을 일으켰다.
〈태양의 계절〉이 영화화되고, 남동생 이시하라 유지로는 이 영화에 단역으로 잠깐 출연했는데, 180cm의 장신과 잘생긴 마스크는 업계에서 주목받고 다음 영화에서는 주역을 맡으며 영화계에 등장 영화배우로 대성했다. 그리고 유지로의 헤어스타일은 형의 이름을 따와 "신타로가리"라고 당시 일본 젊은이들사이에 크게 유행했다. 잘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신성일이 데뷔 초반에 이시하라 유지로를 많이 벤치마킹했고, 실제로 맨발의 청춘을 비롯한 초기 히트작에 나오는 그의 짧은머리는 사실상 신타로가리와 똑같다. 그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이시하라 신타로도 지금 기준으론 전혀 아니지만 당시 기준으론 미남의 범주에 들어가서 소설가로선 드믈게 얼빠가 있기도 했다. 이시하라 형제는 그 당시 문화 아이콘 수준이었다고 한다. 즉 스포츠머리의 원조가 이시하라 신타로고 이걸 남동생 유지로가 따라 했고 다시 유지로의 스포츠머리를 본 신성일이 스포츠머리를 해서 우리나라에 유행이 된 거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스포츠머리의 원조가 이시하라 신타로 이 할배다.''' 일본 대중매체에 흔히 나오는 머리 좋은 문과계 형, 운동 좋아하는 동생 형제 캐릭터는 이 형제가 모델이다. 미시마 유키오를 비롯한 당대의 아이콘격인 소설가들과도 절친했다고 한다.
이후, 〈화석의 숲〉을 통해 문부대신상을 수상하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고 남동생 이시하라 유지로가 태양의 계절에 단역으로 출연한 것을 계기로 영화배우로 유명해지자 유지로를 지원한다는 명목하에 본격적인 드라마영화의 각본을 집필하거나 각색하였고 본인 또한 간간히 영화배우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 이시하라 신타로와 미시마 유키오. 사실 후술하겠지만 이때부터 이미 망언을 했었다.
이 때문에 일본 문학/영화사 공부할 때 의외로 자주 나오는 이름이기도 하다. 1950-60년대 젊은 감독들이 시대를 따라 이시하라 형제를 기용하거나 이시하라 신타로의 소설을 영화화했기 때문에.
재미있는 것은 자신의 작품과 무척 비슷한 구도를 지닌 다나카 신야의 아쿠타가와 수상 즈음에서는 "요즘 애들은 소설이고 뭐고 사람을 잘 모른다." 는 식으로 비판했었다. 빡친 다나카 신야는 "내가 (수상을) 거절해 소심한 심사위원, (이시하라) 도쿄 도지사가 쓰러지기라도 해 도쿄도 행정이 혼란에 빠지면 곤란한 것 아니냐. '도지사 각하'와 도쿄 도민을 위해 받아주겠다."라 말하며 "할아버지는 신당 창당에나 신경쓰세요"라고 쏘아붙이기도.
이후에 이시하라 유지로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남동생(弟)>을 1996년에 출판했는데 이 소설은 마이니치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2004년 TV 아사히에서 실사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2.2. 정치 활동


1967년 요미우리 신문사의 의뢰로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다음해인 1968년 자민당 소속으로 참의원 선거에 출마, 일본 역사상 최초의 300만표 초과지지를 얻었다. 이는 당시 국민배우였던 이시하라 유지로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이루어진 결과라고 알려져있다. 이후 1972년에 중의원으로 자리를 옮겨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5]
이후 정치인과 소설가로서 병행하여 활동하다[6] 1983년, 자유민주당의 파벌인 나카가와파를 이어받아 이시하라파를 결성하여 본격적인 정치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7] 이때 자기 당 후보이자 경쟁자였던[8] 누군가가 아라이 쇼케이 후보 포스터에다가 북한사람이라고 대놓고 비방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시하라는 자기비서가 했다고 꼬리 짜르기를 시전한 뒤 자기 혼자 당선되었다. 뭐, 1986년 선거 때부터는 동반당선되었기는 했지만 이때의 앙금 때문에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어쨌든 1999년 지방선거에서 경기회복을 틈타서 도쿄 도지사에 당선된다. 이 때 도지사에 당선되면서 춤추는 대수사선아오시마 슌사쿠는 "도지사[9]와 같은 아오시마입니다"라는 자기소개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2003년에는 가나가와현 지사 선거에 출마한 마쓰자와 시게후미의 선거 지원을 해주었다.
이 사람이 운수성 대신 시절 나리타 신칸센 백지화랑 동시에 나리타 공항 안에 케이세이 입선 허가를 해줬다. 자세한 건 나리타 국제공항/철도 참조. 참고로 운수성 대신, 도쿄 도지사를 한국 식으로 표현하면 각각 국토교통부 장관, 서울특별시장 정도가 된다.
2009년에는 도쿄 도민들도 상당수가 반대하던 2016 도쿄 올림픽 유치를 한답시고 안 그래도 적자인 도쿄도 예산을 어지간히 거덜낸 후 침몰. 뒤에 보겠지만 2020년에도 유치한다고 한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이때 유치 슬로건이 <환경과 세계통합>인데 삼국인 발언으로 분열과 반목을 조장하던 이시하라가 통합을 외쳤으니 이빨도 안 먹힌다. 한번 이미 올림픽을 개최한 도시기도 했고. 여하간 덕분에 평창군은 그럭저럭 도움을 받게 될 기세.
2011년에 2018년 동계올림픽의 평창 유치를 축하할 때 "평창이 훌륭한 올림픽패럴림픽을 개최해 성공하기를 기원한다"고 발언했다.#
2012년 10월 25일, 뜬금없이 도쿄도지사직에서 사퇴하였다. 기사. 후임으로는 이노세 나오키가 당선되었다. 신당을 창당하여 중의원 선거에 참여, 내각총리대신이 되고 싶은 것 같다. 무산된 하시모토 도루일본 유신회와의 연대도 다시 시도하여 11월 3일 교토 오쿠라 호텔에서 이시하라와 하시모토의 회동이 있었다.
회담 장소가 교토 오쿠라 호텔인 건 막부 말기에 이곳에 사츠마번의 저택이 있었기 때문. '제2의 메이지 유신을 일으키겠다'라는 상징적 의미에서 선택한듯 하다. 그러나 하시모토는 이시하라와의 연대는 어렵다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 성과는 없었다. 다만 이시하라의 제2의 메이지 유신 발언은 조금 먹힌 듯. 이런 이시하라의 행보에 그의 절친인 가메이 시즈카국민신당 대표마저도 "요즘 이시하라가 말하고 다니는 게 뭔 말인지 모르겠다. '''뭔가 정신쇠약자 같은 게 있다'''"라고 디스했다. 대다수의 일본인들도 '드디어 맛이 갔구나!' 하는 반응.
2012년 11월 16일, 여론의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중의원 해산을 선언하면서 일본은 본격적인 선거전에 돌입했다. 이시하라의 행보도 바빠진 상황. 일단 이시하라는 자신의 신당인 태양당과 감세정책을 주장하는 군소정당 "감세일본", 히라누마 다케오의 "일어나라 일본" 등과의 통합을 선언했다. 또한 이날에 도쿄에서 하시모토 도루와 재회동을 가졌다. 하시모토가 소비세인상, 탈원전, TPP 참여 등을 이시하라가 인정해 준다면 자신은 이시하라가 주장하는 사토 에이사쿠의 비핵3원칙 수정에 동의하여 보수연대가 가능하다고 밝혔고 이시하라는 17일쯤에 이에 대한 입장을 밝혔는데...11월 17일, 이시하라가 하시모토의 요구사항을 '''모두 수용하겠다'''라고 선언하면서 태양당일본 유신회의 '''합당이 성사되었다!''' 이로서 극우 보수연대가 성사되었고 이시하라는 더욱 총리에 대한 야망을 불태울 것으로 보인다.
2012년 12월 16일 일본 중의원 총선에서 도쿄권역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 무난하게 당선되었다. 하지만 아베 신조의 수상취임 지지를 놓고 하시모토 도루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결국 성향상 차이가 있는 두 사람이 갈라설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는 상황.
이후 참의원 선거에서 유신회가 칸사이를 제외하고 전멸하는 바람에 되려 하시모토의 입지만 확인되었고 이시하라의 입지가 좁아진 가운데 2014년에 들어서는 하시모토가 결속당과의 연대를 추진하자 개헌론자인 이시하라는 결속당이 호헌주의라면서 분당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자민당으로의 복당도 고려 중이라고 한다.
결국 2014년 5월 29일 평화헌법 개정을 둘러싸고 결속당과의 연대에 대해서 결정적인 문제라면 당을 나눠 가져도 좋다고 하면서 하시모토와 분당 의견이 일치하면서 결국 분당을 하게 되었다. 이시하라는 히라누마 다케오, 나카야마 나리아키, 나카야마 교코, 마쓰자와 시게후미 등 자기 계파 국회의원 22명을 데리고 2014년 8월 1일에 차세대당을 창당했다. 대표는 히라누마 다케오가 맡기로 했고, 자신은 당의 최고고문(한국의 상임고문격)으로 추대되었다.
2014년 12월 14일 중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 9번을 받았으나 차세대당이 대패함에 따라 본인도 같이 낙선했다. 같이 나온 다모가미 도시오 전 항공막료장도 낙선.
2014년 12월 아베 내각 3기가 발족하는 날 정계은퇴했다. 물론 마지막에도 역시 망언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본인의 말로는 평생 미움받으면서 죽고 싶다고..
2016년 9월에 츠키지 시장의 토요스 이전문제에서 성토(盛土) 문제로 난항을 겪게 되자 해당 지시가 내려졌을 때 도지사였던 이시하라가 TV 토론프로에 출연하였는데, ''당시에 해당 내용에 대해선 하나도 보고를 받지 못했다. 난 완전히 속았다. 도쿄도의 공무원은 부패했다." 라면서 비판을 해댔다. 하지만 여론의 반응은 영 냉담한데, 현직 시절에는 자신이 이끌고 있는 도쿄도의 공무원들은 정말 우수하다면서 항상 치켜세우다가 일이 생기니까 손바닥 뒤집는 태도를 보였기 떄문. 게다가 재직 당시에도 1주일에 2~3번 밖에 도청에 출근하지 않는 근무행태가 비판을 받았었는데, "출근도 제대로 안한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남 탓이나 하느냐"는 비아냥을 들었다. 애시당초 총 책임자가 일이 터지니까 부하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옹호를 해줄 수 있는 여지가 없다.
2017년에 들어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이 문제가 더 커지자 증인으로 출석한다고 답변할 뿐 기자들의 질문을 회피하고 응하지 않는 중.
게다가 그가 세운 차세대당이 2018년 11월 1일에 자민당에 흡수되는 식으로 해산되었다.
그리고 2020년 6월에 이지스 어쇼어 취소에 대한 비판 트윗을 하였다.#

3. 도쿄도지사 시절



3.1. 환경 정책


도쿄의 대기는 일본의 고도 경제성장기였던 1950, 60년대 급속히 악화됐다. 일본 최대 게이힌(京濱) 산업단지의 공장과 화력발전소, 그리고 늘어난 차량들이 오염물질을 대량 배출하면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빨래를 널면 저녁에 새카맣게 변했다. 미노베 료키치(美濃部亮吉) 도쿄 도지사가 1967년 당선됐을 때 내세운 구호가 ‘도쿄에 푸른 하늘을’이었을 정도였다.
당시엔 꿈처럼 여겨졌던 ‘푸른 하늘’이 요즘 도쿄에선 일상사가 됐다. 도심인 신주쿠 도쿄도청에서 100km가량 떨어진 후지산이 또렷하게 보이는 날이 사흘에 하루꼴이다. 2016년 말, 프랑스 파리 시내 미세먼지가 사회문제가 되자 안 이달고 시장이 나서 “도쿄를 모델로 삼아 파리에서 경유차 통행을 금지할 것”이라고 선언했을 정도로 도쿄는 미세먼지 문제를 극복한 세계적인 모범사례가 되었다.
2000년 2월 4일 도쿄도청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이시하라 신타로 당시 지사가 페트병을 들고 흔들자 기자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페트병 안에는 디젤차에서 배출된 그을음(미세먼지)이 담겨 있었다. “이런 미세먼지가 도쿄에서만 하루에 12만 병이나 나온단 말입니다!”라고 말한 이시하라는 이어 “국가와 싸워서라도 디젤을 몰아내겠다. 우리가 지더라도 부끄러운 것은 중앙정부일 것”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도쿄 도는 대기질이 악화된 1960년대 후반부터 중앙정부와 함께 대기오염 대책을 마련해 시행했다. 그 결과 아황산가스(SO2) 등 오염물질 수치가 눈에 띄게 줄었지만 뿌연 하늘은 좀처럼 맑아지지 않았다.
1999년 당선된 이시하라는 노후 경유차의 배기가스를 대기질 악화의 최대 원인으로 규정했다. 미세먼지 대부분이 경유차에서 나온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경유차는 도쿄 도내 차량의 20%에 불과했지만 자동차에서 배출되는 질소산화물(NOx)의 70%를 배출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시하라는 당선 4개월 만에 ‘경유차 NO 작전’을 발표하고 경유차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국토교통성, 환경성, 경제산업성 등 부처 간 갈등으로 중앙정부가 미세먼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도쿄 도가 먼저 치고 나간 것이다.
경유차 NO 작전이란,
  1. 경유 승용차는 타지도, 사지도, 팔지도 않을 것
  2. 대체 가능한 업무용 경유차는 의무적으로 휘발유차로 바꿀 것
  3. 배출가스 저감장치 개발을 서두르고 장착을 의무화할 것
  4. 경유를 휘발유보다 싸게 만든 정책을 고칠 것
  5. 경유차 배기가스 기준을 충족하는 차를 조기에 개발할 것
지방자치단체의 권한을 뛰어넘는 것으로 보이는 도쿄 도의 파격적인 정책에 자동차 관련 업계는 경악했다. 자동차 제조업체 모임인 일본자동차공업협회와 화물차 운송업자 모임인 전일본트럭협회는 ‘경유차가 악이냐’란 내용의 팸플릿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면서 격렬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이시하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디에 가든 그을음 가득한 페트병을 들고 다니며 미세먼지 문제의 심각성을 외치는 그는 언론 헤드라인을 자주 장식했다. 또한 이를 통해 여론을 점차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경유차 제조사 사장들을 불러 모아 “시간이 지날수록 도민들이 죽어 나간다. 딱 2년이다. 그 이상은 못 기다린다”며 빨리 저공해 차량을 개발하라고 엄포를 놨다. 자민당 간부들을 만나 경유차에 유리한 세제를 바꾸라고 ‘압력’을 넣기도 했다.
2000년 1월 말 고베 지방법원은 도로에서 발생한 배기가스로 주민들이 병에 걸렸다면 국가와 도로공단이 배상해야 한다는 역사적 판결을 내렸다. 아울러 재발 방지 조치를 마련하라고 했다.
이시하라는 기회를 놓칠세라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고 “도가 도민의 건강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며 경유차와의 전쟁에 더 속도를 내겠다고 선언했다. 전담 부서인 자동차공해대책부도 만들었다.
그해 말에는 노후 경유차의 도내 운행을 2003년 10월부터 전면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다. 7년 이상 된 트럭과 버스 등이 배출가스 기준을 충족하지 않으면 운행을 금지시키고, 이를 어기면 50만 엔(약 500만 원)의 벌금을 물린다는 내용이었다. 일각에선 ‘주행 중인 차를 어떻게 일일이 단속할 수 있겠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이시하라는 시행 1년 전인 2002년 ‘위반 경유차 일소작전’을 발표했다. 경찰 출신 등으로 경유차 감시를 담당하는 ‘자동차 G맨’ 70여 명을 임명했다.
이들은 20대 이상의 자동차를 사용하는 회사 3,800곳을 일일이 돌며 규제 내용을 알렸고, 노후 경유차 운행 금지 시행 후에는 도 전역을 순찰하며 수천 대를 단속했다. 고정형·이동형 카메라를 동원해 단속을 벌였고, 주민들의 신고를 받는 ‘검은 연기 스톱 110번’ 캠페인도 시작했다. 당근도 제시했다. 중소기업에 한해 배출가스 저감장치 부착 비용 절반을 보조했고, 추가로 돈이 필요하면 대출을 알선해줬다.
도쿄 도만의 정책으로 대기오염을 줄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노후 화물차가 도쿄 도의 규제를 피해 우회도로를 주행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지자체 간 갈등으로 번질 조짐도 있었다. 이시하라는 수도권 지자체인 가나가와(神奈川) 지바(千葉) 사이타마(埼玉) 현 지사를 한자리에 모아놓고 규제와 단속을 공동으로 실시하자고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결국 이 지자체들도 비슷한 조례를 만들며 동참했다.
경유차 규제 흐름이 조성되자 정부도 배기가스 규제 강화 일정을 앞당겼다. 언론에서도 “초미세먼지(PM2.5)를 미국 수준으로 규제할 경우 도쿄 내 사망자가 연간 5,000명 이상 줄어들 것”이라며 호응했다. 결과는 금방 나타났다. 미세먼지[10]는 2005년부터 기준치[11] 이하로 나타났고, 초미세먼지의 연중 평균치는 2001년부터 10년 새 55%나 줄었다. 도쿄에서 파란 하늘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규슈대 대기해양환경연구센터의 다케무라 도시히코(竹村俊彦) 교수에 따르면 1990년대 도쿄의 시야불량[12] 연간 누적시간은 3,000시간(1년 전체는 8760시간)에 육박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100시간 미만으로 줄었다. 초미세먼지 감소의 영향으로 도쿄 도내 뇌중풍(뇌졸중) 사망률이 8.5% 줄었다는 연구 결과(오카야마대 연구팀)도 나왔다. 이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퍼져나가서 경유차 규제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이전에는 경유차와 미세먼지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실증된 바가 없다고 자동차 회사와 석유 회사가 주장해 대부분의 국가에서 규제가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이시하라 신타로가 입증을 해버렸기 때문에 전세계적인 규제가 이루어진 것이다.
극우 성향으로 한국에서 ‘망언 제조기’라고 불리는 이시하라 신타로는 도민들에게 맑은 하늘을 돌려준 공으로 13년 반 동안 지사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실 이 사람이 지금도 도쿄 도민들에게 평가가 좋은 건 딱 이거 하나다. 다른 거에 대해선 여전히 말이 많지만 이거 하나로 정치경력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그에게도 흑역사가 있는데 1977년 환경청에서 일할 당시 미나마타병 환자들을 보고와서는 "IQ가 낮은 사람들이다.", "보상금을 받으려고 가짜로 연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라는 발언을 해서 사람들을 분노케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피해자들에게 도게자를 해야했다. 그나마 이 사건 이후로는 환경문제에 대해서만은 정신을 차려서 위와 같은 업적을 만들었다.

3.2. 청소년 건전육성 조례


도쿄도지사 시절 그가 추진 한 조례다.

3.2.1. 일본 만화와 애니를 죽여라


2010년엔 '각종 매체의 비실재 청소년 표현을 규제하는' 법을 내놓았다가 만화가들의 반발을 샀고, 이 일로 그는 오타쿠들의 철천지 원수가 되었다(...). 하지만 결국 이 법은 부결되어 한숨 돌리나 했는데...이후 비실재 청소년 표현 규제는 아니지만 범법적 행위의 묘사에 대한 규제안이라는 흡사 만화계와 타협한 듯하면서도 실제론 더 폭넓은 규제안을 내놓으며 다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이 속칭 '''도쿄도 조례'''라고 부르는 법안이다.
하지만 이번엔 아키모토 오사무 같이 예전에 세간의 눈치를 보느라 비실재 청소년 규제안에 대해선 별 말이 없었던 소년 점프 및 집영사계 잡지 연재 중인 만화가들까지 극구 반대에 나섰고, 자타공인 극우계열 만화가임에도 불구하고 이시하라 신타로를 대놓고 싫어하는(...) 쿠메타 코지도 이 대열에 합세했다. 그는 절망선생 25권에서 단행본 발매시기에 열렸던 도쿄도지사 선거 투표를 독자에게 권유했고, 25권에 수록된 247화에선 태양의 계절에서 나왔던 19禁 묘사인 검열삭제로 문지방 뚫기(…)를 하고 있는 이시하라를 출연시켜 도쿄도 조례를 풍자하는 등 안티 이시하라임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다케치 헨페이타에도 비슷한 풍자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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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안은 논란 속에서도 결국 통과되긴 했는데, 결국 업계의 반발 때문인지 가상의 아동 포르노. 즉, 만화나 게임, 애니메이션들에 대한 부분은 대부분 대상외로 변경된채 통과되었다. 덕분에 일단 덕후들이 걱정할(?)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 법안 탓에 부녀자들은 2011년 3월 '이시하라 신타로 온리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태양의 계절에서 따와서 이차원의 계절.
당연히 출판사들은 이 법안에 대한 항의로 도쿄 국제 아니메 페어를 단체로 보이콧해버렸다. 이에 대해 이시하라는 "안 와도 좋다. 내년엔 제발 울면서 참석시켜달라고 할 거다."면서 한껏 허세를 부렸지만, 포켓몬스터 애니메이션 시리즈 같은 아동용 애니메이션 업체들까지 제대로 등을 돌려버려, 행사를 개최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고, 결국 이시하라는 출판사들에게 참석해달라고 고개를 숙이며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밝혔다. 하지만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이 일어나며 도쿄 국제 아니메 페어 2011년 행사는 중지되었다.

3.2.2. 일본 게임을 죽여라


상술한 만화/애니 업계에 대한 도쿄도의 탄압 정책에 게임 업계에서는 '''"진작에 우리처럼 자체규정을 엄격하게 정해서 실행했어야지 하하하!!"'''라며 강 건너 불 구경하고 있었는데... 게임업계에도 같은 법안을 적용한다고 해서 한순간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 일본 비디오게임 자체심의기관인 CESA회장 曰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거기에 이시하라 신타로가 과거에 쓴 책 '스파르타 교육 ~강한 아이로 키우는 책~'(한국에선 '아들을 남자답게 키워라'로 출간됨)에서 쓴 그의 주장들이 법안상 각종 규제와 모순되는 말들이 많은 걸로 밝혀져 안티들에게 좋은 조롱거리를 던져줬다. 몇 가지 추려보면 아래와 같은 말들이 그 책에 들어가있다.

'''아이들이 어떤 책을 읽건 간에 부모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계시의 힌트가 숨겨진 책을, 부모가 그의 짧은 인생경험으로 좋은 책과 나쁜 책으로 나누는 것은 자기 분수에 맞지 않은 월권행위가 아닌가.

인간의 상상력을 키우는 비료가 되는 독서를 어떤 기준으로 좋고 나쁨으로 나누는 것 만큼 근거없는 짓은 없다. 그 좋고 나쁨에 부모가 진부하고 통솔적인 도덕을 적용할수록 아이들의 장래성을 망치는 짓은 없다.

내 가정에선 마누라나 어머니는 반대하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누드 사진이 범람하는 잡지를 숨기지 않도록 하고 있다.[13]

그야말로 '''궁극의 이중잣대'''. 물론 본인은 과거에 자신이 집필한 작품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고보니 그 책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요절하는 아버지가 이상적인 아버지이다'''.」

4. 각종 망언들




5.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68 - 1995
정계 입문

1995 - 2012
도지사 선거 출마로 탈당

2012
입당

2012 - 2014
합당

2014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2014
창당

2014 -
정계 은퇴

6. 여담


너구리알 작의 불멸의 이순신이란 게임에서는 자폭왜구로 나온다(...).
과거 핵무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집권당이 되면 이걸 추진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중국의 영토 위협, 북한의 도발 등 일본의 안보 상황을 살펴보면 핵을 보유할 명분은 지속적으로 생기고 있기 때문에 국민감정 딴에는 이 주장에 동조할 수도 있으나, 현실은 평화헌법자위대의 전수방위 원칙에도 위배될 뿐더러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해 핵 자체에 대한 불신이 커져버려 물건너갔다는 평이 높다. 결정적으로 미국이 이것을 허용할 리도 없고...애당초 미국은 핵확산에 대해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중국 등 주변국도 반발했다. 이에 대해 미국 언론에서는 '열폭에 싸인 일본 국민들의 심리를 이용하려는 술책'이라고 깠다.
한땐 일본 청년들에게 인기가 좀 있었는지, 그가 도쿄도지사 시절인 2011년 25세에서 34세 사이의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어떤 조사에선, 현역, 은퇴 정치인 중 가장 총리에 적합한 인물 2위로 뽑히기도 했다.[14] 하지만 이후 거품이 빠졌는지(...) 2014년 중의원 선거에선 본인이 창당한 차세대당이 고작 2석만 건지는 참패를 당했고, 비례대표로 입후보한 자신도 낙선하며 정계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그를 회장으로 한 "북한에 의한 납치 피해자를 구출하는 지사의 모임"에 47개 도도부현지사들 중 이와테현지사 닷소 다쿠야가 유일하게 불참한 전적이 있다. 
한 문단으로 이시하라 신타로를 정리하자면, 일단 주변국과의 역사, 외교 문제에 있어 까막눈에다가 누구나 할 수 있는 속 좋은 소리나 하면서(ex 미국을 이기자) 정작 그것을 현실로 만들 방법은 내놓지 못하는 것 뿐만 아니라 상술했듯 일본의 만화애니메이션, 게임 산업이 일본의 소프트파워에 얼마나 공헌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오히려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극우 성향의 비뚤어진 애국자조차 아닌 '''그저 자극적인 언행과 비현실적인 공약으로 표 좀 벌어보려던 구시대적 사고를 가진 전직 정치인 A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일본 우익들이 즐겨쓰는 민도 (民度 = 시민의식)란 단어를 유행시킨 인물이다. 이 표현은 원래 과거에 쓰이다가 사어가 되었는데 이시하라가 정치 생활을 시작하고 입버릇처럼 "한국과 중국은 민도가 일본보다 낮고 어리석다." 라고 말하고 다녀 그걸 계기로 다시 퍼졌다.

6.1. 유사한 인물


사실, 구시대적 마인드를 가지고서 별의별 트러블을 일으키면서도 정당이나 성향, 인기 등으로 대충 넘어가는 케이스는 신타로 1명만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예를 들자면 프랑스장 마리 르 펜이나 북아일랜드이언 페이즐리, 러시아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 등이 있다. 다만, 아버지 르 펜은 프랑스에서도 안티가 엄청나며[15] 벌금형에 소송제기에 고소에 피선거권 박탈이니 뭐니 꽤나 수난을 당하는 거와 달리 이 인간은 일본에서 상대적으로 참 평온하게 지내니(...) 극과 극이라 할 수 있겠다. 참고로 르펭은 2011년 1월 82살 노령으로 정계를 은퇴했다. 대신 그의 당은 역시 극우 정치인으로 활약하시는 그의 딸 마린 르 펜이 이어받았다. 그나마 마린은 아버지 이미지 지우려고 열심히 입조심하며 이미지 세탁해서 이정도라는게...
그래도 가장 비슷한 인물을 추리자면 전 뉴욕시장 루돌프 줄리아니가 꼽힌다. 위의 인물들은 소수의 열렬한 지지자는 가지고 있지만 선거에서 늘상 떨어지기 마련이라 책임있는 자리에는 갈 수 없는데 이시하라와 줄리아니는 각각 도쿄뉴욕이라는 각 국가의 중심적 지방자치단체장을 역임했다는 점, 그리고 극우적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행정능력은 의외로 뛰어나다는 점 등이 비슷하다.
일본 내에서 비슷한 강도의 망언을 하는 작자로는 구 민주당, 일본 유신회 의원이었던 니시무라 신고 등이 있다.[16] 근데 이쪽은 자국민 험담은 하지 않는다(...). 다만 민주당 당적일 때부터 TV쇼프로 등에 나와 상당한 혐한 스멜을 풍겼으며(우리 일본인은 솔직히 한국인이 싫다), 이후 극우 성향의 일본 유신회 소속으로 들어갔으나 "종군위안부가 성노예로 전환되고 있다. 매춘부와 성노예는 다르다", "일본에는 한국인 매춘부가 우글우글하다. (중략) 번화가에서 '너, 한국인, 위안부지?'라고 말해도 될 정도다" 등의 신들린(...) 망언을 내뱉다가 극우 정당인 일본 유신회에서까지 제명당했다.

6.2. 자식 관련


2006년에는 도쿄 도의 예산으로 자신의 4남을 '''실질적으로 후원'''했다는 것이 딱 걸려서, 이것이 매스컴에 보도되었다. 도쿄 원더랜드의 스테인글래스의 원화제작을 노부히로에게 맡기고 제작비 300만원을 지불한 것이다.[17] 아들이라는 이유로 작품을 맡겼냐는 항의에 대해 '''"실력이 있어서 의뢰했을 뿐이다."'''라고 항변했지만, 그의 4남인 노부히로는 그 당시까지 '''수상경력은 고사하고, 한 번도 개인전을 연 적이 없었던 사람이다.''' ...개인전을 가지지 못한 것과 실력은 관계없다는 건가? 그래도 이게 켕겼던 건지, 그 후에는 자국 내 갖가지 전시회에 끼워넣기로 간간히 출품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구설수를 떠나서 노부히로는 예술가로써의 실력만큼은 분명히 있다. 구설수에 오르기 전에는 도쿄 일대의 갤러리에서 젊은 작가로 주목을 끌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커리어를 쌓아가면서 2010년에는 한국 인천에서 열리는 예술제에 참석하고 출품도 했으며 평가도 좋았다. 다만 신타로 아들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그 후 한국에서의 초청은 끊겼다. 본인도 자꾸 구설수에 휘말리는 게 부담이었는 지 2010년경부터는 계속 해외에서 미술관계 일을 하며 돌고 있다. 해외로 돌면서 구설수도 끊겼다. 2013년에는 중국발 뉴스로 그가 자살했다는 오보가 나오기도 했다.
장남 이시하라 노부테루자민당 간사장 출신으로 매우 충실한(...) 수구꼴통이다. 2011년 도지사 재출마가 아들의 정치적 영향력 보장을 위한 것이라는 견해도 나올 지경. 2011년 9.11 테러 10주기에서 자민당 간사장인 장남 노부테루가 '''9.11 테러는 역사의 필연'''이라는 발언을 해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2012년이 되면서 이시하라와 장남 노부테루 사이가 점점 험악해지고 있다. 이시하라가 '''자민당을 대체할 신당을 창당하겠다'''라고 선언한 탓. 이시하라는 자신과 코드가 비슷한 하시모토 토오루 오사카 시장 등을 영입해 신당을 만들려는 구상을 하고 있는데 자민당 의원도 영입하겠다라고 하면서 노부테루를 경악시킨 것.
노부테루도 자민당 간사장을 맡고 있고 간사장은 사실상 차기 당대표를 예약한거나 마찬가지인 자리라 노부테루가 아버지 때문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시하라가 자민당을 뛰쳐나가서 신당을 차리는 것도 곤욕스러운 마당에 자민당 의원까지 빼내가겠다고 하니 자민당내에서의 노부테루의 입지가 좁아질 것은 불문가지. 당대표는 집권시에 자동으로 총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노부테루 입장에선 '''아버지가 아들 앞길을 가로막는''' 상황에 처한 꼴이다. 이 때문에 이시하라의 아내까지 "아들의 앞날을 생각해서 신당 창당은 하지 말아달라"고 읍소하고 있지만, 이시하라는 기어코 신당을 창당해서 차기 총선에 출마해 총리가 되겠다는 야심을 굽히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자민당내 간부들이 노부테루에게 '이시하라 도지사의 아들입니다'라는 자기소개를 그만두도록 권고했다. 자민당 간사장이 도쿄도 지사보다 높기 때문이라고. 이부키 전 간사장은 도리어 '''불초 아비가 세간을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라고 당당하게 나가야 할 것 아니냐고 일침. 출처.
하지만 이시하라의 야망과는 달리 하시모토와의 회동에서 결국 보수신당 창당은 무산되고 말았다. 하시모토가 이시하라를 높게 평가하고 존경하는 부분은 있지만 원전 문제나 증세 문제에 있어서 서로의 입장차가 뚜렷한 탓에 이를 줄일수가 없었다고. 사실상 하시모토와의 연대가 없으면 이시하라의 야망은 성사되지 못할것이 분명해 보이는지라 노부테루만 오질듯 하다. 결국 이시하라의 야망이 좌절되고 아들인 노부테루는 다니가키 사다카즈 대표의 후임을 뽑는 선거에 '''당당히 출마했다.''' 당초 재임을 노리던 다니가키 대표였으나 노부테루의 배신(...)에 출마를 포기해야 했다고. 여담이지만 애비인 이시하라도 자민당 대표선거에 출마한적이 있지만 미끄러졌었다(...). 노부테루도 강력한 주자인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출마하는 바람에 미끄러질거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고, 결국 아베가 아소 다로와 힘을 합쳐 제2기 아베 정권을 만들었다.
하나 재밌는건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우익들이 독도를 되찾아라! 하고 난리칠 때 이 인간은 웬일인지 '''어차피 차지하기 힘든 독도는 놔두고 센카쿠 열도나 집중하라'''는 발언을 하였다. 따져보면 독도보다 (이미 자기네가 차지하고 있는) 센카쿠 쪽이 실익이 더 많다는걸 저울에 재고 한 말일 뿐이지만, 중국(+대만)도 영토 분쟁에 무관심하진 않다.
차남인 이시하라 요시즈미는 배우인데[18], 나친적 실사 영화판에서의 카시와자키 페가수스를 맡기도 했다.

6.3. 문화 관련


우주전함 야마토 부활편의 각본을 담당했으나 실질적으론 원안과 일부 대사만 제공했다고 한다. 물론 야마토 팬의 평가가 안 좋았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위해 죽으러 갑니다'(<俺は君のためにこそ死ににいく>, 2007)라는 카미카제 소재 영화의 각본과 총제작지휘를 하기도 했다.

6.4. 토츠카 요트 스쿨 관련


1987년에 라쿠고가 타테카와 단시, 희극배우 이토 시로[19] 등과 함께 토츠카 요트 스쿨을 지원하는 모임(戸塚ヨットスクールを支援する会)의 결성을 주도해 회장을 맡고 있다. 이시하라 본인부터 요트 애호가이기도 하고. 다만 요트를 좋아하는 건 개인의 취향이니 뭐라 할 수 없지만, 토츠카 요트 스쿨 사건을 보면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있다.

6.5. 암투병


2020년 1월, 췌장암이 발견되었다. 췌장암은 암 중에서도 최악이라 불릴 정도로 예후가 극히 불량한 질환이다.#

[1] 일본인 남성 평균신장이 170cm를 돌파한 건 1960년대. 이시하라 신타로와 비슷한 연배인 1930년대생 일본 노인들의 남성 평균신장은 160cm대다.(한국의 경우에도 20대 기준으로 평균키가 170이 넘은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생들부터다.) 2020년 시점에서도 183cm면 남녀노소를 막론한 장신이다.[2] 기상 캐스터이자 영화배우다. 1982년 Kyodan이라는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3] 오에는 이시하라와 정반대인 좌파 성향인데 둘의 사이는 개인적으로 좋은 듯. [4] 사실 태양족은 일본식 로큰롤/로커빌리문화, 다시 말해 미국식 그리서 문화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5] 이 시기에 김대중 납치 사건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때 한국 군사정권을 옹호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을 북한 김일성의 스파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방해 노란 싹수를 드러냈다.[6] 이때 도쿄도지사 직에 출마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미노베 료키치에 밀려서 낙선. 그래도 상당히 따라잡기는 했다.[7] 나리타 국제공항의 철도 접근성을 개선한 것이 운수대신 할 때의 업적이다.[8] 당시만 해도 일본 중의원은 비례대표 없는 중선거구제였다.[9] 아오시마 유키오(1932~2006). 1996년부터 1999년까지 도쿄 도지사를 지냈다.[10] SPM·우리의 PM10과 유사한 기준[11] 시간당 일평균이 ㎥당 0.10mg 이하이면서 시간당 수치가 ㎥당 0.20mg 이하[12] 대기 중 먼지에 의해 시야가 10km 미만인 경우[13] 물론 이 말 자첸 부모가 저런 잡지는 매출을 위해 선정적으로 과장, 연출한 것이라는 식으로 가이드 해주면 왜곡된 성관념을 막아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일부 타당한 면도 있다. 하지만 문젠 이런 리버럴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 저딴 조례를 내놓았다는 게(...) 그야말로 부조리 개그라 이 발언도 덩달아 까였다.[14] 재미있는 사실은 동시 진행된 '일본 연예인, 유명인 중 총리에 어울리는 인물' 조사에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2위로 뽑혔다는 것이다. 1위는 코미디언 겸 영화감독 기타노 타케시.[15] 인터넷에 홈페이지 만들기 무섭게 해킹을 마구 당할 정도.[16] 다만 민주당 당원들은 대부분 우익들에게 부정적이라, 이 사람 정도면 민주당 내에서 가장 우익적인 사람이었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일본 유신회로 넘어간거지만.[17] 이외에도 2004년 1월에도 다른 작품을 맡기고 약 120만엔을 지불한 전력이 있다.[18] 숙부 이시하라 유지로가 사망했을 때 장례식에서 영정을 들었던 젊은이가 이 사람이다.유지로는 오랜 투병으로 인해 자식이 없기 때문.데뷔 후 한동안 이시하라 프로덕션에 가입,활동하기도 했다.[19] 1983년 영화 <스파르타의 바다>에 토츠카 히로시 교장 역으로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