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용

 


'''자칭'''
'''평양성주장군(平壤城主將軍)'''
'''이름'''
금용(黔用)
'''생몰연도'''
? ~ ?
1. 개요
2. 상세


1. 개요


신라 말기와 후삼국시대군웅이자, 호족. 한자음를 다르게 읽어서 유금필을 유검필로도 읽는 것처럼 검용이라고도 한다.

2. 상세


신라 말기 진성여왕 시대에 전국에서 호족도적떼가 들고 일어나 난세가 시작될 때 금용은 평양성주장군(平壤城主將軍)으로 있었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평양을 자기네 땅으로 삼았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다소 논란이 있어서, 금용을 발해의 변방 지배자로 보거나 혹은 신라나 발해 어디의 간섭도 받지 않던 토착 세력 정도로 보는 관점도 더러 있다. 사실 신라도 나당전쟁 끝나고 얻은 영토에서 계속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고 주민들 이주시키고 개척하면서 조금씩 북쪽으로 올라갔었기 때문에,[1] 삼국사기 지리지상 최서북단인 황주나 중화에서 평양이 멀지 않으니[2] 아마도 9세기 후반쯤 가면 평양도 통치권에 들어갈랑 말랑 했을 수도 있다고 대충 추론은 해볼 수 있다. 대체로 남북국시대 지도에는 발해가 평양을 먹은 것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지만 발해 중심지는 평양에서는 매우 먼 상경용천부였고, 발해가 평양을 접수해 다스렸다는 근거도 딱히 없는 데다 9세기 후반 이때쯤 가면 발해도 끝물인 건 신라와 비슷했기에 뭐라고 확언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어땠든 궁예가 한참 사방으로 땅을 넓힐 때 평양과 인접한 패서왕륭, 박지윤, 황보제공, 유천궁 등 군소 호족들에게 항복을 싹 받아내고 905년에는 패서 13진(鎭)을 만드는 등 태봉국의 기반을 다지자 바로 인접하게 된 금용도 궁예에게 항복해왔다. 같은 시기 인근 증성(甑城, 지금의 남포특별시 강서군)의 적의적(赤衣賊), 황의적(黃衣賊), 명귀(明貴) 등이 항복하고 염주 지역에서 대항하던 유긍순을 무너뜨리고 그 땅을 먹으면서 궁예 세력이 대동강 이북 일부까지 뻗치게 된다.
[1] 676년 나당전쟁 승리(임진강선) → 694년(효소왕3) 송악성 축성(예성강선) → 748년(경덕왕7) 대곡성(오늘날 평산군) 등 축성 → 선덕왕대 패강진(황해도 일대) 개척 → 헌덕왕대 취성군(오늘날 황주군중화군) 설치[2] 특히 중화군은 북한 치하에서 평양에 편입되었던 적도 있을 정도로 바로 앞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