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토패문
'''禁討牌文'''
1. 개요
토벌을 금하는 패문[1] 이라는 의미다. 임진왜란 당시에 명나라 황제의 선유도사[2] 로 왔던 담종인이 보내온 패문으로, 왜군들을 공격하지 말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2. 배경
명(明)은 벽제관 전투에서의 패전 이후로 왜(倭)와의 강화교섭을 추진한다.[3]
담종인은 심유경을 대신하여 1593년 12월부터 거제도 동쪽 웅천의 고니시 유키나가군의 진영에 머물렀다. 1594년 봄이 되자 일본 수군은 진해만 내륙 등지에서 살인·납치·약탈을 일삼았는데, 이를 이순신이 털어버리는 일이 벌어지니, 이것이 제 2차 당항포 해전이다. 이에 겁먹은 왜군이 담종인을 설득하여 '''"왜군은 싸울 생각이 없으니 왜군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고 이만 고이 돌려보내라(??)."'''는 내용의 패문을 보낸 것이 금토패문이다.
이에 격분한 이순신이 '''저 새끼들 순 나쁜 새끼들이니 개소리 하지 말라'''는 내용의 답서를 보낸 것이 '''답담도사종인금토패문(答譚都司宗仁禁討牌文)'''이다.
3. 내용
아래 내용은 패문과 답문의 전문으로, 당시 우의정이었던 약포(藥圃) 정탁(鄭琢)이 《임진기록》(壬辰記錄)에 옮겨적어놓은 이순신의 장계(狀啓) 초본에서 찾아볼 수 있다.[4] 아래 원문 및 번역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배포한 자료를 인용하였다. 임진기록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3.1. 패문
담종인이 조선군에 보낸 패문.
당장 제 2차 당항포 해전만 놓고 보더라도, 일본 수군이 우리 영토 내 민간에 자행한 살육과 약탈이 원인이었음을 기억하자. 특히 이때는 강화교섭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이를 진압한 본국 군대에게 "소란스럽게 사단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은 사건의 본질과 이쪽 입장은 완전히 무시한 처사다. 이에 삼도수군통제사[8] 였던 이순신 장군은 전염병으로 10여일 넘게 앓아누워있던 와중에 격분하여 아래와 같은 답장을 보낸다.
3.2. 답문
이순신 장군이 담종인에게 보낸 답문.
이순신은 답장을 하기에 앞서, 패문을 갖고 온 명나라 병사 두 명을 불러 경위에 대해 물었다는 내용이 임진기록에 전한다. 이에 명나라 병사가 대답하길, '담종인이 작년 11월달부터 강화사절로 와있었는데, 근래에 왜인들이 수군의 위세에 겁내어 상심하고 낙담한 끝에 담종인에게 갖가지로 애걸하므로 패문을 작성했다'는 것이었다. 즉, "황제 폐하의 성지" 운운했으나 왜군 측의 로비에 의한 패문이었다는 소리다.
이에 이순신은 지휘부였던 경략, 제독, 총병에게서 왜인을 참하지 말라는 분부가 없었으며, 다만 담종인이 강화사절로서 패문을 전달한 점, 남해 현령 기효근 또한 패문을 받고 공문을 완성해 이미 답을 보낸 점, 그리고 우리 수군 병력이 아직 결집하지 않아 미처 전세를 갖추지 못한 점 등으로 인해 일단 회답을 써주되 '공세를 멈추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다고 밝혔다.[9]
4. 기타
- 답문 중간에 이순신 장군이 격노해서 적은 "왜는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라는 구절이 인상 깊었는지, 일본 정부가 무언가를 인정하지 않거나 번복할 때마다 이를 인용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 2019년 일본 상품 불매운동 당시 한 네티즌은 손수 캘리그라피 티셔츠를 제작해서 눈길을 끌었다. #
- 류성룡도 징비록에서 "왜병이 교활하고 간사하여 많은 군사가 뒤에 있어도 정탐하러 보내는 자는 몇 명이 안 됩니다."라고 말한 대목이 있다.[10] [11] 이는 실제로 왜군이 교활하고 간사하기 때문에 척후를 소수로 보냈다거나, 류성룡이 정탐을 비겁한 행위로 알고 있었다고 이해하기보다는, 당시 침략하러 온 왜군과 그 행태에 대해 조선군이 어떤 인식과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 즉, 다분히 감정적인 맥락으로 내뱉은 말이라는 것.[12]
[1] 원래는 상급 관청이 하급 관청에 전달하는 공문이란 의미. 여기서는 명나라가 조선에 전달하는 공문이다.[2] 병란 등에 있어 백성에게 황제의 훈(訓)을 전달하던 벼슬. 임진왜란 당시 강화사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3] 1593년은 명/왜 간의 전투소강기이자 강화교섭기였다. 물론 조선군은 피 터지게 싸웠지만.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측으로 파견된 것이 바로 심유경이다. 즉,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거짓 강화를 모의했다고 잘 알려져있는 사건의 배경이 되는 시기이다. 자세한 것은 심유경, 고니시 유키나가, 임진왜란 항목을 참고하자.[4] 2016년 12월에 이순신 연구가인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이 이를 확인하여 『교감완역 난중일기 개정판(도서출판 여해, 이순신 저/노승석 역)』에 실었고, 2020년 1월에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임진기록을 완역하여 군사편찬연구소 홈페이지에서 누구나 무료로 열람할 수 있도록 배포하였으니 참고하자. 국방부 보도자료 [5] 임금의 뜻(=聖旨)[6] 다만 만력제나 명나라 조정 혹은 파견된 군 지휘부에서 직접 이러한 지시를 내린 것은 아니고, '선유관으로서 왜국과 강화하라는 황제의 뜻을 대신하여 왔으니, 내가 받은 강화교섭권을 행사하겠다' 정도의 의미이다. 이는 뒤에 이순신의 반박문에 드러난 정황으로 유추할 수 있다.[7] 공문의 마지막에 붙는 상투어. 반드시 알아서 시행하도록 하라는 뜻.[8] 오늘날의 해군참모총장에 대입해보자.[9] 이 답문에 원균과 이억기의 이름을 함께 적어넣었다고 돼있다.[10] 징비록, 2014, 구지현 역, 올재클래식스 출판[11] 실제로 이순신도 소수 정찰병력을 매우 잘 활용한 장수이며, 치밀하고 지속적인 정찰활동은 그의 백전백승의 원인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12] 해당 대목은 명나라에서 온 임세록을 평양성에서 접견한 류성룡이 함께 연광정에 올라 왜군의 정찰병을 발견한 후, 임세록이 '뭐 크게 많이 몰려오진 않았나봐?'라는 의미로 던진 말에 대한 대답으로 한 말이다. 물론 척후병 두 세명이 보인다고 실제로 적 병력이 적을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고, 류성룡도 소수 병력으로 정찰하는 게 비겁하다고 생각해서 얘기한 말은 아닐 것이다. 임세록의 경우, 명나라 조정에서 '왜가 조선을 침략해서 임금도 피난하고 난리라던데? 진짠지 엄살인지, 아니면 설마 얘네 서로 짜고 같이 쳐들어올려는 건지 니가 가서 소상히 조사 좀 해봐'라는 명을 받고 온 관리임을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