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제관 전투
[image]
[clearfix]
1. 개요
碧蹄館戰鬪
임진왜란기인 1593년 2월 27일(음력 1월 27일),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일대에서 벌어진 일본군과 조선-명나라 연합군의 전투.
2. 배경
계사년 음력 1월 6일 ~ 9일의 평양성 전투는 승리로 끝났다. 이여송(李如松)의 명군과 김명원(金命元)의 조선군이 이룩한 승리였다. 그리하여 평양성에서 6개월 동안 머물렀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3군 선봉장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의 도움을 받고 한양으로 후퇴하게 된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패전을 접하게 된 일본군 대부분은 후퇴하자는 주장을 펼쳤으나, 개성의 6군 선봉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는 사수하자는 의견을 고수한다. 물론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에 의해 묵살되고 한성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성 밖에서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와 함께 명과의 접전을 준비한다.
한편, 승전으로 기세가 등등했던 이여송은 1월 10일에 별 문제없이 개성을 장악하였으며, 1월 25일 수색대로 보냈던 부총병 사대수(査大受)의 부대와 가토 미츠야스, 마에노 나가야스가 거느린 일본군이 소규모 접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사대수의 부대가 60명의 목을 베면서 명군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이 때문에 이여송은 일본군을 점점 더 얕보았고, 한성을 한 번에 수복하자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1월 26일이 되어서야 파주까지 남하했다. 여기까지의 상황들이 패전의 화근이 되었다.
3. 전개
1월 26일, 명군은 선봉 3천의 기병을 한성으로 보냈으며, 수색을 통해 명군의 경로를 파악한 일본군은 이튿날 명군과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조총 사격과 백병전, 협소한 공간과 진흙탕이라는 악조건이 겹쳐 후퇴하고 만다. 이후 명군의 증원군이 합류하면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다시 일본군의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명군을 몰아내는 등의 양상이 반복되었다.
1월 27일, 이여송은 조명 연합군 다수의 병력과 포병 등을 놔두고 기병 1000여 병력과 호위군만 꾸려 한성으로 직접 향했다. 그러나 가는 도중 급습을 당하여 포로가 될 뻔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큰 피해를 입은 명군은 싸우는 일본군과 합류한 일본군의 수가 상당하다고 생각하고 바로 평양까지 도망갔고 뒤늦게 장수 양원(楊元)이 화병을 이끌고 도착하자 일본군이 물러났다.
4. 결과 및 영향
명사 신종 실록에서 이 전투를 자군의 승전이라고 기록했으나, 실상은 명군의 패배였다. 일본의 기록인 태합기에서도 평양, 개성을 빼앗기기는 했지만 명군 10만을 적은 병력으로 격파했다고 기록했다.
구체적인 데이터가 편린으로 남아있어 근거와 함께 저술한다. 전체적 병력 규모는 한국과 중국에 남아있지 않고 1924년 일제강점기시절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편찬된 '일본 전쟁의 역사 조선편' 에 기록되어 있다. 책에 따르면 조명 연합군 5만 중 선봉대 2만이 일본군 4만 중 선봉대 2만과 벽제관에서 맞붙었다.
명군은 2만 중 5천이 전사하였다. - 일본 전쟁의 역사 조선편(일본주장)
일본군은 120명이 전사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1593년 2월 5일(조선주장)
조명과 일본군 모두 500명씩 전사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1593년 2월 19일(조선주장)
일본측 수치가 과장되었고 조선 측 수치가 축소되었고 명군은 피해규모 언급이 없었으나 대패한 것이 확실하므로 조명 연합군의 피해는 500과 5000의 중간 정도에 있고 일본군 피해는 100~500으로 상당히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투에서 대패한 조명 연합군은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고, 이여송은 일본군을 추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후 조선에 눌러앉게 되었다.[1] 또한 큰 피해에 놀란 명이 일본측에 휴전을 제안하게되는 계기가 된다. 한편 북방에서 내려오던 조명 연합군과의 공조를 위해 행주산성에 진을 치고 있었던 3천의 조선군 병력은 고립된 신세가 되고 만다. 일본군은 행주산성의 조선군에 대해 명군을 패퇴시킨 여세를 몰아 강공을 준비했는데, 오히려 대패하고 한성에서 철수하게 된다.
5. 대중 매체에서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에서는 29회 초반에 다루었다. 역사와는 전혀 다르게 실제로는 벽제관 전투에 참전하지 않은 고니시 유키나가[2] 와 가토 기요마사[3] 가 합세해서 이여송의 명군을 함정으로 유인해서 격파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존재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았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진주 대첩에서 바로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으로 넘어가는 관계로 대충 배경 설명을 위한 해설로 때웠다. 그나마 아예 화면상으로 연출조차 되지 않은 평양성 전투와 행주 대첩과는 달리 이여송이 처절하게 발리면서 퇴각 명령을 내리는 장면으로 살짝 연출되긴 하였다.
징비록에서는 31회 후반에 다룬다.
- 일본군이 한양에서 지치기를 기다린다는 명분으로 공격을 미루던 명군에게 광해군의 요청을 받아들인 송응창의 출전 명령서가 도착한다. 이여송은 진퇴양난에 빠지는데 척후 부대로부터 일본군이 성을 빠져나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이에 이여송은 급히 조승훈의 선발 부대를 먼저 보내어 확인하도록 한다. 조승훈은 숨어서 일본군의 척후 부대로 추측되는 소규모 부대를 발견하지만 공을 세울 목적으로 이들을 공격하여 추격을 한다. 조승훈의 소식을 들은 이여송은 급히 진군 준비를 서두르고 낙상지는 적의 함정일 수 있다는 걱정과 화포 부대가 있는 남군의 준비 부족을 예로 들며 말리지만 이여송은 오히려 일본군은 조승훈을 기습하려 할 것이라며 기병 중심의 북군만 데리고 급히 출발한다. 그러나 벽제관에서는 이여송에게 평양성에서 대패한 고니시 유키나카가 복수를 하고자 매복하고 있었다. 급히 달려오는 이여송의 명군은 일본군의 기습으로 대패를 한다.
임진록 2에서는 일본군 미션으로 등장한다. 상기한 대로 사실상 왜군의 승리로 보고 있다는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도 고바야카와와 다치바나는 언급되지 않았고 고니시와 가토가 등장하는데 이는 게임 시스템상 장수가 진영당 5명 ~ 6명으로 고정되어 한두 번만 쓰고 말 인물을 따로 만들기도 뭐해서 그냥 게임에 나오는 고니시와 가토로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5] 진행상 무승부로 끝난 실제 전투를 그대로 재현하기엔 뭐했는지 왜군이 명군을 섬멸하는 섬멸전으로 꾸려져 있고, 그냥 단순히 섬멸전으로 만들면 심심할 것을 우려한건지 맵 구석에 위치한 소규모 조선군의 방해를 뚫고 명군 기지 후방에 위치한 군량 창고를 먼저 공략해 사기를 꺾은 다음 섬멸한다는 특이한 방식으로 진행했다.[6][7]
[1] 이후 명군은 민폐만 되었다는 시각이 많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정유재란 때 조선군의 전선 동원 병력은 3만 명으로 권율 부대를 대구 공산에, 권응수 부대를 경주에, 곽재우 부대를 창녕에, 이복남(李福男) 부대를 나주에, 이시언(李時言) 부대를 추풍령 등에만 각각 배치하는 한계가 있었으나 명군은 대략 10만으로 그 전력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2] 고니시 유키나가는 막 평양성 전투에서 대패하여 패주해 온 관계로 벽제관 전투 당시에는 그냥 한양에 머물러 있었다.[3] 당시 가토 기요마사와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이끈 왜군 제2군은 아직 함경도에 주둔해 있었기에 벽제관 전투와 행주대첩 모두 참전한 적이 없다.[4] 다만 이건 예산의 한계와 연출상의 문제도 있다.[5] 이 게임에서 이런 식으로 인물을 땜질(...)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후속작 천년의 신화에서는 아예 기존 영웅을 이름만 바꿔 돌려먹는 식으로 진화했다(...). 확장팩 조선의 반격까지 포함해서 임진록 2 시리즈에서 한 번만 쓰고 말 존재를 만든 건 조선군 미션 2의 선조의 어가 유닛이 유일하다... 물론 이 회사의 게임만 그런 건 아니고, 스타크래프트만 해도 인물 돌려쓰기가 빈번했던 걸 보면 90년대 특유의 용량 압박과 개발 환경의 한계 때문이라 할 수 있으니 어느 정도 참작이 된다.[6] 실제 벽제관 전투에서 왜군이 명군의 군량을 공략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명군이 임란 내내 보급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던 것은 사실이다. 오죽하면 이 게임에 등장한 명군 미션 중에도 "군량을 확보하라"라는 미션까지 있었을 정도...[7] 참고로 실제 역사에서 명군은 원래 늘 하던 대로 현지에서 군수물자를 구입하고 자국 화폐인 은전으로 값을 지불하려 했지만(당시 명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 - 심지어 유럽에서도 은을 화폐로 쓰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 한반도는 전통적으로 화폐 경제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해 아무도 은전을 받으려 하지 않아 현지에서 군수물자를 구입할 길이 막혀버렸고, 조선 조정이 나름대로 성심성의껏 준비해 줘도 일단 전쟁터가 된 국가라 나오는 것도 시원찮아 대군인 명군 입장에서는 턱도 없었던 지라, 결국 약탈로 눈을 돌리는 최악의 삽질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 와중에 명군을 전장터로 내몬 당사자인 만력제께서는 조선 백성들을 구원한다고 자기 비자금까지 탈탈 털어 대량의 식량을 사다 날라주는 은혜를 베풀어서 '고려 천자'라는 별명도 득템 하셨다. 참고로 이건 사실이라 후에 조선에 그의 공덕을 기리는 만동묘가 이때 생겼다. 물론 후기에 들어서면 조선 시장에서도 은의 유통이 이뤄졌으나 이는 전시 한정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