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예르모 스타빌레
1. 개요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39년부터 1960년까지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1949년부터 1960년까지 라싱 클루브 데 아베야네다 감독을 맡았다. 선수 시절 FIFA 월드컵 초대 득점왕으로 유명하다.
2. 생애
2.1. 초기 선수 시절
초대 월드컵이 개막할 때에도 스타빌레는 우라칸에서 뛰던 그저 그런 선수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스타빌레는 그저 3~4옵션 정도[4] 에 지나지 않았을 정도였고, 하도 무명인지라 저 놈 진짜 프로 맞냐? 라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5]
그저 후보로 들어간 월드컵이었지만 스타빌레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월드컵 첫 번째 경기였던 프랑스와의 경기를 끝내고 보니 주전 공격수이자 주장인 마누엘 페레이라는 대학에 시험보러 간다고 아르헨티나로 잠깐 돌아가버렸고[6] , 다른 공격수 경쟁자들이었던 에바리스토는 프랑스와의 첫 경기에서 부상, 체로는 갑자기 공황 발작을 일으켜 경기를 뛸 수 없는 상황이었던지라 스타빌레가 콜업된 것.
그저 쓸 만한 선수가 없으니 후보에게 잠깐 기회를 준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스타빌레는 깜짝 선발 출전한 데뷔전, 대 멕시코전에서 해트 트릭을 터뜨려[7] 아르헨티나는 물론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8]
이후 월드컵 경기에서도 주전 자리를 꿰찼고 그 결과는 4경기 8골이라는 월드컵 최초의 득점왕이었다.
2.2. 월드컵 이후
월드컵 이후 루이스 몬티와 같은 다른 아르헨티나 선수들처럼 이탈리아에 갔다.[9] 스타빌레의 행선지는 제노아. 하지만 월드컵 득점왕의 포스는 볼로냐전의 해트트릭을 제외하면 온데간데없었다. 제노아에서 첫 시즌에 41경기에 출전 15골이라는 다소 초라한 성적을 기록하였고 그 이후에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4년 만에 방출당하고 나폴리에 갔다가 거기서도 방출.. 다시 제노아에서 프랑스의 레드스타 파리로 옮겨 거기서 선수 생활을 마쳤다.
2.3. 감독 생활
초대 월드컵 이후의 선수 생활은 신통찮았으나, 스타빌레의 진짜 전설은 은퇴 후부터 시작되었다. 스타빌레는 후보 생활이 길다보니 다른 팀과 선수들을 분석하는데 재미를 붙였고 유럽에 건너간 이후 여러 팀에서 감독을 맡았다.
1939년에 레드스타 파리에서 선수 생활을 끝낸 후에는 아르헨티나 대표팀 감독으로 아예 자리를 옮겼다. 그는 그 이후에 무려 '''21년간''' 아르헨티나 대표팀 감독으로 재직하여 아르헨티나 대표팀 내 역대 최장기간 재임 기록을 갖고 있다.[10] 그 기간 동안 아르헨티나는 코파 아메리카를 6회나 제패하는 등 탄탄대로를 달렸다. 40년대 아르헨티나를 주름잡던 CA 리버 플레이트의 전설적인 공격진 라 마키나[11] 를 필두로 당시 남아메리카의 절대 강자로 군림했다. 1941년부터 1958년까지 125경기를 치렀고 그 중 83경기를 승리하여 66.4%의 승률을 기록하였다.
다만 월드컵에서의 성과가 없어서 스타빌레의 이후 생활이 그렇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흠이라면 흠.[12]
1960년에 감독 자리에서 은퇴한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축구 감독들을 육성하는데 힘을 쓰다 1966년에 사망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그는 거의 최강의 주력(走力)을 자랑했고 다른 건 몰라도 스피드 하나는 특출났는데 이 스피드를 이용하여 수비진의 뒤 공간을 터는 게 장기였다고 전해진다. 하긴 당시 아르헨티나 감독도 4옵션으로 무명의 공격수를 뽑을 때 무지 빠르니 이걸로 변수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 정도였을 것이다. 달리기가 너무 빨라서 상대 수비수들이 스타빌레를 쫓아가지 못할 정도였고 스타빌레는 이런 엄청난 주력을 이용해서 공을 몰고 수비수 등 뒤로 가서 골키퍼와 1:1 상황을 만들어내는 게 장기였다.
아르헨티나에서는 El Filtrador(여과기)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4. 수상
4.1. 클럽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2회: 1925, 1928(우라칸)
- 닥터 카를로스 이바구렌 컵 우승 1회: 1925(우라칸)
- 리그되 우승 1회: 1938-39(레드 스타 파리)
4.2. 국가대표
4.3. 감독
4.3.1. 클럽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3회: 1949, 1950, 1951(라싱 클루브 데 아베야네다)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3회: 1952, 1955, 1959(라싱 클루브 데 아베야네다)
4.3.2. 국가대표
4.4. 개인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공동 감독[3]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감독을 맡으면서 클루브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플라타, 우라칸 등 아르헨티나 프로팀의 감독도 겸업했다.[4] 스트라이커는 예나 지금이나 한 경기에 한두 명을 쓴다. 아무리 옛날 축구에서 공격수가 다섯 명이라고 해서 시작할 때부터 스트라이커만 다섯 명을 넣는 무식한 짓은 안했다. 게다가 옛날에는 선수 교체조차 자유롭지 않았으니 이렇게 나오면 게임 말아먹겠다는 소리밖에 안 된다. [5] 그래서 옛날에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선수라는 소리가 나왔다. [6] 지금 같으면 대학 공부와 축구 선수 생활을 병행하는 선수들을 아예 찾아보기 힘드니 더욱 나오기 힘들다. 아니, 아예 이런 상황이면 대학에서 시험 자체를 미뤄줄 것이다.[7] 2006년까지만 하더라도 이것이 월드컵 최초의 헤트트릭으로 인정되었지만, 재조사 끝에 최초의 헤트트릭은 버트 파테노드의 기록으로 수정되었다.[8] 월드컵 데뷔 당시 또 다른 신데렐라로 알려진 펠레나 살바토레 스킬라치같은 경우는 그래도 자국에서는 나름 인지도가 있었다. 스타빌레처럼 나이까지 의심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9] 당시 이 이야기는 아르헨티나 대표팀과는 영원히 안녕이라는 소리와 같다. 당시에는 비행기가 없어서 대서양을 건너가려면 배를 타고 가야했다. 당시 유럽 국가들이 초대 월드컵에 참가하려 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우루과이까지 배를 타고 오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기 때문이고, 그나마 월드컵에 왔던 유럽 국가들도 제 컨디션을 발휘하지 못했다.[10] 전세계로 범위를 넓혀도 20년 이상 한 국가대표팀을 지휘한 감독은 거의 없다. 스타빌레보다 더 오래 대표팀을 지휘한 감독으로는 독일을 28년간 이끈 제프 헤어베어거가 있다.[11] 뜻은 기계. 5명의 공격진이 짜는 팀플레이가 매우 유기적이어서 붙은 별명이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초기 선수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선배들이었으며, 그가 가장 존경한다고 밝힌 선수가 이 라 마키나의 일원인 아돌포 페데르네라이다.[12] 1958년 월드컵에는 나갔지만 아르헨티나는 본선 예선전도 통과하지 못하는 굴욕을 겪었다. 라이벌 브라질은 오히려 펠레를 앞세워 월드컵에서 첫 우승을 차지하여 아르헨티나의 속을 두 배는 더 쓰리게 만들었다.[13] 1959년 코파 아메리카에도 우승 기록이 있지만 이 대회는 CA 보카 주니어스 팀이 그대로 아르헨티나 대표로 참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