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
1. 개요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소설가다. 본관은 제안(齊安). 자(字)는 만강(晩岡)이다.
김동리와 함께 대한민국 현대 소설의 두 거장으로 우뚝 서 있는 소설가. 수능이나 교사 임용시험에서는 매년 출제 0순위에 김동리와 황순원을 꼽는다.[1]
후술하겠지만 아들이 시 '즐거운 편지'로 유명한 황동규 시인이며, 손녀 황시내도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즉 '''3대에 걸친 문인 집안'''이다.
2. 상세
젊은 시절의 그는 현대 기준으로 봐도 굉장한 미남이었다.
평안남도 대동군 재경리면 빙장리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부유한 지주 계급이었으며[2] 평양 숭덕학교 교사였던 아버지 황찬영(黃贊永)은 3.1 운동 당시 태극기를 배포하다 체포되며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와세다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하면서 이해랑 등과 '동경학생예술좌'에서 활동했다.
1930년부터 신문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활동했으며, 1931년 문학지 동광에서 <나의 꿈>을 발표하면서 정식으로 등단했으며 이후 1935년 발족한 동인 삼사문학의 일원으로 발탁되었다.
1937년부터 소설 창작에 관심을 두기 시작해 1940년 <늪>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소설을 창작하기 시작했으나 1942년 일제의 한글말살정책이 시작되자 평양의 빙장리로 낙향, 은둔하게 된다.[3] 그리고 1945년까지 작품을 발표하지 않는다.[4]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목넘이 마을의 개> 등을 발표, 활동을 재개하며 한국전쟁이후에는 <카인의 후예>,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등의 장편소설을 주로 썼고, 서울중/고등학교 교사로도 교편을 잡았다.
1957년부터 1980년 정년퇴임 시까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강단에 서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훗날 '경희사단'이라고 불리며 문단의 큰 축을 차지한 경희대 출신 문인들은, 모두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었다. 류시화, 정호승, 조세희, 전상국, 한수산, 고원정, 김종회#s-3, 이문재, 박주택, 이성부 등 문단에서 쟁쟁한 이름을 떨치는 문인들이 그의 제자들이다. 시나리오 작가로 유명한 신봉승도 그의 제자 중 하나.
1985년 산문집 <말과 삶과 자유>를 내기까지 왕성한 활동을 보였고, 1992년 <현대문학>에 시 8편을 낸 걸 끝으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다. 말년에는 산책을 하며 가끔 제자들을 만나는 걸로 소일하다 2000년에 85세로 사망했다.
3. 창작 경향
초기 단편소설, 즉 단편집 <늪>(1940)에 발표된 작품들에서 현재형 표현[5] 이 주로 쓰였고 감각적 묘사가 두드러졌다.[6] 그리고 이 경향은 훗날 발표되는 소설들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황순원의 소설을 '시적인 소설'이라 말하게 된다.
그 외로는 설화체 문장이 특이하다 할 수 있는데, 이는 대화나 묘사를 서술에서 따로 분리시키기보다는 서술하는 문장 속에 모두 녹여버리는 기법이다.[7]
4. 대표 작품
- 너와 나만의 시간 : 1958년
- 나무들 비탈에 서다 : 1960년
- 독 짓는 늙은이 [8]
- 목넘이 마을의 개
- 기러기: 1951년 출간된 단편집의 표제작이다. 이외에도 <별>, <산골아이>, <그늘>, <저녁놀>, <병든 나비>, <애>, <황노인>, <머리>, <세레나데>, <노새>, <맹산할머니>, <물 한 모금>, <독 짓는 늙은이>, <눈> 등 총 1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 소나기: 원제는 소녀少女. 해당 작품 자체는 소나기가 1953년 5월 '신문학'에 먼저 발표하였지만, 원본은 1953년 11월 '협동'에 발표된 소녀라는 연구결과가 한성대 김동환 교수에 의해 제기되었다. 하지만 반론도 있다. 그 근거와 차이점, 반론은 앞의 신문기사를 참조할 것.
- 신들의 주사위
- 움직이는 성: 1973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 카인의 후예: 1954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그동안 '단편만 잘 쓴다'고 알려진 황순원이 장편도 잘 쓸 수 있음을 보여준 명작이다.
- 학: 1956년 이를 표제작으로 하여 단편집으로 출간되었다. <학>을 비롯하여 <왕모래>, <소나기>, <맹아원에서>, <청산가리>, <참외>, <부끄러움>, <몰이꾼>, <매>, <여인들>, <사나이>, <두메>, <필묵장수>, <과부> 등 14편이 수록되어 있다.
5. 기타
- 그의 8대조 방계 조상 중에 황고집이라 불린 효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고집이라는 놈이 집안 내력이었는지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 할 것 없이 모두 원리원칙을 고집하는 성격이었던 모양이다. 윤승운 화백의 <우리 겨레 위인 이야기>에서도 나온 적이 있다.[9] 그리고 그도 이 집안 내력을 유감없이 발휘해버린다.
- 어느 해 신춘문예 심사 과정에서 동참한 심사위원이 당선권으로 미는 작품이 제자의 것인데도 차석으로 내려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그 사람이 '빙벽'의 작가 고원정이었다. 송나라의 소동파도 이런 일화가 있다.신문기사
- 보통 작가가 사망하고 나면 그 유고집이나 교정하지 않았던 원본을 찾아 읽어보는 재미가 있을 법한데, 황순원에 대해서 만큼은 해당되지 않는 상황. 이미 전집을 내었고 책을 제외한 교정본이나 교정본 이전의 원고들은 모두 치워버리는 깐깐함을 발휘해 버렸다. 때문에 후대의 연구가들은 땅을 치고 비통해하고 있다. 신문기사 #1, #2, #3
- 그는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신조를 지키며 어떠한 잡문 청탁이나 언론 인터뷰에 응하지 않기로도 유명했는데, 1990년대 후반에 월간조선에서 당시 원로 문인과 예술인들을 몇 사람 선정해서 인터뷰하러 집에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했을 정도.[10] 그러므로 황순원의 단편 소나기에서의 보라색이 소녀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라는 교과서의 해석을 황순원 본인이 부정했다는 이야기는 날조일 가능성이 높다.
- 그는 정치 자체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켜왔으며, 서정주, 김동리, 곽종원, 조병화, 조경희 등 동세대 문인들과 달리 1980년대 초 경희대 명예박사 학위나 1996년 정부측의 은관문화훈장 수여 제안을 각각 거부하는 등 눈 앞의 명예나 권력을 좇지 않았다.
- 정치와는 별개로 월남 이후 보도연맹에 가입한 적이 있는데, 그때의 기억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는 반공이 노골적으로 표출된다. 그러나 '학' 같은 작품을 보면 공산주의라는 사상에는 반대했어도, 이념 갈등으로 인해 사람들이 대립하고 동족상잔을 벌이는 상황 역시 안타까워한 것으로 보인다.
- 서기원 전 KBS 사장도 기자 시절 황순원의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 황순원 본인이 엮인 건 아니지만, 옛날 모 방송국 아나운서가 라디오 방송 도중에 스튜디오 밖에 소나기가 쏟아지자 "아 지금 소나기가 오고 있군요. 여류소설가 황순원의 소나기가 불현듯 생각납니다"라고 멘트를 했다가 청취자들에게 신나게 털렸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여류만 뺐으면 적절한 라디오 방송용 멘트였을 텐데, 아나운서가 이름만 보고 순간적으로 여자인 줄 알았다고 한다.
- 상당한 골초라 '흡연은 막힌 생각을 틔워주고, 근심을 가라앉히고 권태를 달래주며 피곤을 덜어준다'라는 말을 했으며, 담배에 대한 시를 남기기도 했다. 제목은 '대'이다. 그러나 금연에 성공했는데, 이후 담배를 일부러 앞주머니에 넣어 다니면서 안 피는 초인적인 자제력을 보여줬다. 금연을 시도해 본 사람들이라면 저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 것이다.
이젠 담뱃대만 들면
슬픈 일이 날라와 빠짝인다'||
- 그에게서 수업을 받았던 나이 지긋하신 국어선생님들의 말에 의하면 일명 막걸리 강의라고 1달에 1번 수업을 막걸리집에서 했다고 한다.(...) 그릇에 동동주 따르고 젓가락으로 그릇을 두드리며 연주하셨다고.
- 와세다 대학 출신의 일본 유학파임에도 불구, 1940년대 이후 일제의 한글말살정책으로 인해 많은 문인들이 절필하거나 변절할 때 한글로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당연하지만 당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겨우 몇 년 뒤에 한국이 독립할지 모르던 상황이였다. 한 문인이 황순원을 찾아 갔다가 골방에 틀어박혀 한글로 글을 쓰기를 멈추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고 숙연해져서 말도 붙이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는 일화가 있다.
- 앞서 언급하였다시피 아들은 <풍장> 연작과 <즐거운 편지>, <삼남에 내리는 눈>으로 유명한 시인이자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를 역임한 영문학자 황동규다. 그리고 손녀인 황시내 씨(레이싱 모델인 황시내와는 다르다)도 최근 소설가로 등단하였다.[11] 그래서 3대 문인 집안이 되었다. 그의 손자 황순신씨는 지엔피링크라는 출판사와 가이드미라는 여행잡지사를 운영하고 있다.
6. 수상 경력
- 금관문화훈장 (2000)
7. 관련 문서
[1] 그러나 실제 수능에는 출제가 잦진 않은데, 김동리는 2002년에 화랑의 후예가 출제된 적이 있는 반면, 황순원의 작품은 2017년에서야 독 짓는 늙은이가 출제됐다. 공무원 시험 계열에서는 2009년에 이미 출제됐었다.[2] 이 때문에 이북이 공산화되자 지주계급으로 몰리게 되면서 결국 월남을 선택했다. 월남 이후 그때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 바로 '''카인의 후예'''다.[3] 공교롭게도 생몰년까지 똑같은 동갑내기면서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문인(시인)이었던 서정주와 가장 대조되는 내용.[4] 이 기간 동안 써둔 글 중 대표적인 것이 독 짓는 늙은이다.[5] 보통 소설의 문체는 의도가 존재하지 않는 한 과거형 표현을 주로 쓴다는 것을 생각해보자[6] 이를 두고 평론가 김현은 '''"그가 단편까지를 시의 연장으로 본 것이 아닐까"'''(「안과 밖의 변증법」)하고 추측하기도 하였다.[7] 이는 고전소설과 같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현대소설이 설화체 문장에서 벗어나면서 그 생명력을 얻었던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면 황순원은 이러한 설화체 문장으로 돌아가면서 새로운 특성을 얻었던 셈이다. 물론 이런 설화체 문장을 이전에도 쓰지 않은 것은 아니므로 황순원만의 특수한 기법은 아니다.[8] 후자는 신봉승, 여수중 각색의 '독 짓는 늙은이' 일부. 2017학년도 9월 모의평가에 장르간 복합(현대소설/극문학) 지문으로 원작과 함께 출제되었으며, 상기 두 문구 모두 해당 신유형 문항으로 산산조각나버린 고3 수험생들의 성적을 대변한다.[9] 책에 실려있는 얘기 한토막을 싣자면 이렇다. 황고집이 한양에 볼일 마치고 귀향하려다 마침 아는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문상가자는 친구의 말에 보통 사람이면 장례식장에 문상을 가겠지만 이 황고집은 집에 들러 부인과 가족에게 얘기를 해야한다고 고집을 피웠더란다. 그리고 진짜로 먼길을 걸어 집까지 도착해 문상 가야 한다고 전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뒤돌아 한양까지 또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이 황고집도 새댁인 며느리가 인사를 오지않자 그에 대해 성을 내자 조상 사당에 먼저 인사하지 않아 문안인사를 못 들인다 말하자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는 일화도 있다.[10] 예외적으로 그가 팔순을 맞은 1995년 <작가세계> 봄호에서 소설가 송하춘과 필담으로 대담한 내용을 특집 기사로 냈다.[11] 이쪽도 아버지 황동규처럼 서울대학교를 졸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