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용

 

[image]
'''타이 포 FC No.77'''
'''김승용
(金承龍 / Kim Seung-Yong)
'''
생년월일
1985년 3월 14일 (39세)
국적
[image] 대한민국
출신지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포지션
스트라이커, 윙어
주발
오른발
신체조건
180cm, 75kg
학력
만수중 - 부평고 - 방송대
프로입단
2004년 FC 서울
소속팀
FC 서울 (2004~2009)
광주 상무 불사조 (2007~2008, 군 복무)
전북 현대 모터스 (2010)
감바 오사카 (2011)
울산 현대 (2012~2013)
센트럴코스트 매리너스 FC (2014)
칭다오 하이뉴 (2015)
부리람 유나이티드 FC (2016)
수판부리 FC (2016, 임대)
강원 FC (2017~2018)
인천 유나이티드 (2019)
타이 포 FC (2020~ )
국가대표
U-20 26경기 8골
U-23 17경기 1골
종교
개신교
1. 소개
2.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5. 여담


1. 소개


대한민국축구선수. 상당히 많은 구단을 오갔던 저니맨이며, 청소년 대표 시절에는 박주영의 파트너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현 소속팀은 홍콩 소속의 타이 포 FC.

2. 경력



2.1. FC 서울


[image]
서울 출생이지만 학교는 인천광역시의 대표적인 축구 명문 학교인 부평고등학교 출신으로,[1] 2004년 FC 서울에서 청소년 대표팀 출신의 유망주들 중 한 명으로 입단했다. 고졸 신인임에도 그 시즌 내에 데뷔하는데 성공했지만, 곧 교체 멤버로 처지면서 기회를 잡지 못했다. 결국 2007년 이른 군 복무를 택하면서 광주 상무에 입대하여 늦게나마 실전 감각을 끌어올렸고, 2008년 11월 전역 후 2008년 11월 10일, 군 복무를 마치고 FC 서울에 복귀한 뒤 그 해 11월 30일 K리그 플레이오프 울산 현대와의 경기에서 후반 23분 교체 투입되어 1골 1도움을 기록하는 등 2008년 FC 서울의 리그 준우승에 기여하였다. 이후로는 기대치가 높아짐과 동시에 2009년 비슷한 역할의 이청용볼턴 원더러스 FC로 이적하면서 많은 출전 기회를 잡았으나 기대에 부응하는 활약은 펼쳐보이지 못하였다.

2.2. 전북 현대 모터스에서의 실패와 감바 오사카


이후 2:2 트레이드의 매물이 되어 심우연과 함께 전북 현대 모터스로 이적[2]하였으나 전북에서는 5경기 1골에 그치며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트레이드 성사 당시부터 전북 팬들은 보내는 선수인 하대성과 이현승에 비해 받아오는 선수가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는데, 심우연은 센터백으로 전환하면서 국가대표에도 올라갔지만 김승용은 2군으로 처지면서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image]
결국 2011년 J리그 감바 오사카로 이적하게 됐는데, 이적 당시 전북 팬들은 활약에 비해 많은 이적료를 받았다면서 기뻐하였다. 감바 이적 후에는 확연히 나아진 플레이를 보여주었고, 리그 28경기에서 4골 4도움을 기록하는 등 준수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초기에는 풀백으로 뛰고 있었지만, 후반기에 윙어로 올라가면서 공격적인 재능이 만개했다.

2.3. 울산 현대


[image]
J리그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부활했다는 평가를 들은 김승용은 이듬해 귀국하여 울산 현대에 입단하였고, 2012년 팀의 ACL 우승에 기여했다. 울산에서는 자신의 강점인 크로스를 살려서 좋은 활약을 펼쳤는데, 때마침 팀의 투톱을 책임지는 선수 중 하나가 제공권이 좋은 김신욱이고 또 김신욱을 보조하는 파트너는 이근호라서 그의 킥력을 살리기 좋은 환경이었다. 김신욱이 아니더라도 밑에서 활동하면서 침투를 보여주는 고슬기 역시 제공권이 좋은 선수라 호흡이 잘 맞았고, 프로에서의 전성기라 부를만한 순간이 찾아왔다. 2012 ACL 결승 알 아흘리 전에서 스코어를 3:0으로 만드는 쐐기골을 넣어 구단 첫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일조하였다. 2013 시즌에는 전 해에 비해서는 다소 애매한 플레이를 보여주었지만, 필요한 순간에 종종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2.4. 해외 진출 시기


울산과의 계약이 만료된 후에는 호주로 떠나 A리그센트럴코스트 매리너스 FC에서 뛰었는데, 매리너스에서는 출장 경기에 비해서는 꽤 많은 공격 포인트를 올리기는 했지만 정착하지 못했다. 이후 중국 2부리그 소속 칭다오로 이적해서 기량을 회복했고, 태국 부리람 유나이티드에서는 전 동료 고슬기와 재회하여 좋은 활약을 펼쳤다. 부리람에서의 후반기에는 수판부리로 임대를 떠났으나 부리람 시절보다는 다소 아쉬웠다는 중론.

2.5. 강원 FC


[image]
그러다가 2017년 K리그 클래식으로 승격한 강원 FC의 제안을 받고 입단하면서 다시 K리그로 복귀하게 되었다. 강원은 조태룡 대표가 부임한 이후 많은 선수를 영입하면서 반전을 꾀했고, 그 중심에 있던 대형 영입이 바로 이근호였다. 이근호가 부평고 시절부터 김승용과 절친한 사이였기에 김승용은 자연스럽게 강원과 연결되었고, 김승용도 긍정적으로 검토하면서 이적이 성사되었다. 2017 시즌에는 주축 윙어로 출장하면서 3골 6도움을 기록, 2012년 울산에서의 기록과 동률을 이룰 정도로 개인으로는 만족스러운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2018 시즌에는 노쇠화가 본격화되면서 로테이션 멤버로 추락했고, 설상가상으로 강원에 온 이유 중 하나인 부평고 동기 이근호와 백종환이 팀을 떠나면서 동기도 약해졌다. 거기에 시즌 중도에 부임한 김병수 감독의 전술에 김승용은 맞지 않았고, 시즌 말미에는 사실상 전력외로 분류되었다. FA 명단에도 포함되면서 거취가 애매해졌는데, 1월 중순에 인스타를 통해 강원에 작별 인사를 고하면서 강원을 떠나는 것이 확정되었다.

2.6. 인천 유나이티드


그리고 2019년 1월 16일 아침에 문창진과 더불어 인천 유나이티드로 이적한다는 단독 기사가 나왔는데, 김승용의 경우 구체적으로 '''이미 태국 훈련에 참가했고, 만 34세가 넘어야 FA 보상금이 사라지기 때문에 계약은 김승용의 생일이 지난 다음 날인 3월 15일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전해졌다. 인천으로의 이적은 사실상 확정된 분위기. 본인도 부평고 출신으로 인천이라는 도시에 애착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image]
태국 전지훈련이 종료된 후 공개된 볼 살리기 내기 영상에서 걸그룹 이름 대기를 하는 와중에 핑클을 외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 외에도 연습 경기에서 종종 출전하고 2진급 멤버들 사이에서는 주장 완장을 임시로 착용하고 경기를 뛰는 등 팀에 녹아들고 있는 상황. 오피셜이 나오지 않았으니 등번호 발표에서도 누락되었으나 강원에서 18번을 달고 있었고 마침 18번이 비어있어서 18번 배번일 확률이 굉장히 높았고, 그 다음으로 유력했던 23번이 응우옌꽁프엉에게 가면서 거의 확실해졌다. 그리고 연습경기를 뛰다가 포착된 김승용이 입은 훈련복에 18번이 붙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후 출정식에서도 아직 오피셜이 안 나왔는데도 참가하면서 공식적으로 18번 배번이 확정되었다.
최종적으로 3월 15일 '''오전 2시'''에 구단에서 공식적으로 오피셜을 내면서 3라운드 상주 원정부터 스쿼드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오피셜이 나오고 약 한 달 후 친정 울산 현대와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서브에 이름을 올렸고 후반에 곽해성과 교체되면서 데뷔했다. 그러나 이 날 경기에서 김승용은 최악의 폼을 보여주었는데, 우측 풀백으로 배치되었으나 실점의 원인을 내주었다. FA컵에서는 청주 FC를 상대로 선발로 나왔고, 윙 자리에서 명예회복을 노렸다. 그러나 이 날 데뷔한 우측 풀백 신인 주종대보다도 부족한 공격 기여도를 보여줘서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겼다. 장기인 킥력도 세트피스 상황마다 부족한 모습을 보여줬고, 올리는 크로스는 죄다 수비에게 차단되었다. 결국 팀은 K3리그 팀에게 0 : 1로 패배하는 이변의 주인공이 되었고, 김승용의 입지도 약화될 듯.
실제로 어느 순간부터는 서브에서도 사라졌고, R리그에서도 기회를 못 받으며 입지가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인천이 여름에 윙어를 보강하면서 앞으로도 그라운드에서 볼 확률은 낮아 보인다. 그래도 팀 내에서는 고참 선수로 좋은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김호남은 인터뷰를 통해 김승용이 이적생들과 기존 선수들이 융화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고 밝힌 바 있으며, 실제로도 김승용은 사석에서 선수들에게 밥을 사주는 등 정신적 지주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남준재가 이적한 이후 주장 자리가 비었는데 현 시점에서는 '실질적 주장'이라는 평가도 있고, 실제로 기사에서 주장 김승용이라는 표현이 나오기도 했다. 경기에는 못 나오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정산이 조금 더 주장에 가깝지만, 김승용의 공헌도도 상당한 듯. 이렇게 오랫동안 보이지 않다가 34라운드 성남 FC 원정에서 오랜만에 서브로 이름을 올렸다. 란레 케힌데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생긴 자리에 선택을 받은 듯. 다만 해당 경기에서 출전은 결국 불발됐고, 앞으로도 출전 기회가 많이 올지는 의문.
그 뒤의 경기에서는 명단에 제외된 원정 경기에서도 선수단과 동행해 코치진과 함께 워밍업을 돕는 등 플레잉코치로 전환한 듯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최종전을 마친 후에는 라커룸에서 감독에 이어 선수들 앞에서 연설을 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명예 주장에 가까운 위치임을 다시 보여줬다. 사실 선수로는 팬들에게 그리 좋은 평가를 듣지 못했지만, 구단의 기강을 잡고 하나의 팀으로 만드는 데는 김승용의 공헌이 매우 컸다. 수많은 선수들이 인터뷰에서 그의 공로를 이야기할만큼 김승용은 이윤표조차 없고 남준재가 떠나버린 인천의 진정한 리더였다. 때문에 시즌 진행 중에는 김승용에 대해 박한 평가가 주를 이루었으나 그의 노고가 드러난 이후 팬들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듣는 중. 따지고 보면 구단에서 있던 기간은 1년이 끝임에도 불구하고 팀에 대해 보여주는 애정은 상당한 편이기도 하다.
영입 당시에는 1년 계약으로 알려졌었지만 어째서인지 공시된 FA 명단에서는 제외되었다. 시즌 중반에 계약을 연장했으리라는 추측이 있었지만, 사실은 2004년 이전의 입단자에게 적용되는 FA 규정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자격을 취득하지 못한 것. 2004년 이전 K리그 입단자는 계약 기간 내에 절반 이상의 경기를 치러야 FA 선수가 되지만 김승용은 이를 충족하지 못했다. 결국 예정대로 계약이 만료되었고, 인천과의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팀을 떠나게 되었다.

2.7. 타이 포 FC


인천을 떠난 후에는 홍콩 리그 소속의 타이 포 FC로 이적하게 되었다. 팀이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한 만큼 마지막 불꽃을 태울 듯. 팀 합류는 조기에 했지만 비자 발급 문제 때문에 합류가 늦어졌다.

3. 국가대표 경력


청소년 대표 시절에는 박주영을 보조하는 공격 자원으로 유명세를 떨쳤고, 2대 부평고 3인방인 하대성, 이근호와 묶여서 언급되기도 했다. 2004년 AFC U-19 챔피언십에서는 박주영과 투톱을 이루어 득점을 기록하는 등 쏠쏠한 활약을 펼쳤지만, 그 이후로는 서서히 청대에서의 입지가 좁아져 과거만큼의 위상을 회복하지 못했다. 실제로 프로 무대에서의 활약도 기대치에 비하면 아쉬움이 남았다.

4. 플레이 스타일


전성기에는 빠른 발과 양질의 크로스가 장점인 윙어로 평가받았다. 실제로 킥력은 많이 노쇠화된 시점까지도 녹슬지 않아 김승용의 최대의 강점으로 꼽혔고, 거기에 풀백, 섀도 스트라이커, 최전방까지 고루 소화할 수 있는 다재다능함도 고평가를 받는다. 윙 포지션에 뛰는 선수로는 꽤 이상적인 피지컬을 지니고 있고 주력도 괜찮아서 울산에서는 주력과 킥력을 통해 역습을 전개하는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주력과 체력이 떨어지면서 과거만큼의 활약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 외 템포를 다소 잡아먹는 부분이나 소극적인 모습이 아쉽다는 말도 있었다.

5. 여담


  • 골 세레모니로 주로 리마리오의 '더듬이춤'을 췄기 때문에 '리마리용'이라는 별명이 있다. 그러나 '더듬이춤' 이외에도 박명수의 '거성체조', 원더걸스의 '텔미' 등의 참신한 골 세레모니로 축구 팬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다. 본인은 이러한 골 세레머니의 아이디어의 원천을 개그 프로그램 시청이라고 밝혔다. 또한 그는 FC 서울 선수로 활약하던 시절 FC 서울에서 뛰어 행복하며 오래도록 뛰고 싶다는 입장을 자주 밝히기도 하였다.
  • 이근호와의 인연이 꽤 깊은 편인데, 고등학교 동창인데다가 과거 울산과 감바 오사카에서도 같이 뛰었던 경험이 있고, 이후 강원에서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실제로도 선수들 사이에서 이들의 우정은 매우 끈끈한 편이라고 한다.
  • 김승용의 인천 이적은 FA 보상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계약을 늦게 체결한 희귀한 케이스이다.
[1] 이근호, 백종환, 하대성이 그의 고등학교 동창이다. 이들 중 이근호와 백종환과는 김승용이 강원에 입단하면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2] 이때 전북에서는 하대성이현승이 서울로 이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