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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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선수였으며, 현역 당시의 포지션은 미드필더이다. 미드필더 중에서도 중앙 미드필더로 많은 경기를 소화해냈다. 울산 현대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대구 FC와 전북 현대를 거쳐, 트레이드로 입단한 FC 서울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며 2010년과 2012년 리그 우승에 큰 기여를 해 K리그 정상급 플레이어로 군림했다. 이후 베이징 궈안과 FC 도쿄, 나고야 그램퍼스를 거쳐 2017년,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서울로 다시 돌아와 선수로써의 커리어의 마지막을 보냈다.
2. 클럽 경력
2.1. 울산 현대
인천 부평동중, 부평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김승용, 백종환, 이근호와 함께 부평고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대회 3관왕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2004년 울산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한다.[1] 하지만, 울산에서는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2004년에는 2경기를 교체 출전하는데 그쳤으며, 특히 2005년에는 김정남의 수비 축구와 K리그 사기 유닛으로 군림하던 이천수가 위용을 뽐내며 우승하던 시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못한 채 한 경기도 출전하기 못하면서, 2006년에 대구 FC로 이적하게 된다.
2.2. 대구 FC
시즌을 앞두고 터키 전지훈련에 참가했다. 전지훈련에서 한 골을 기록했다.
베이징 현대와의 2006 통영컵 국제프로축구대회 경기에서 골을 넣으며 팀의 승리에 일조했다. 이후엔 인천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도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했다.
2006년에는 18경기에 출전했지만, 15경기를 교체 출전하면서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다만, 노상래, 오주포의 은퇴와 홍순학의 이적으로 인한 빈자리를 메우던 오장은을 진경선과 함께 잘 뒷받침해서 다음 시즌을 기약하게 했다.
2007년이 되자 오장은마저 울산 현대로 이적하면서 대구의 중원은 비어버리게 되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함께해온 친구 이근호와 발을 맞춰 대구 특유의 공격축구를 이끌게 된다.[2]
에닝요, 루이지뉴도 가세하면서 대구 FC의 공격 축구가 잘 살아나기 시작한다. 이 이면에는 변병주가 하대성을 중앙 미드필더로 포지션 변경을 시키면서 2선을 뒷받침하게 한 것도 한 몫했다. 진경선과 함께 중앙 미드필더로서 볼을 배급하고, 경기를 조율하는 모습을 보이며 엄청난 경험치를 쌓았던 것이다. 결국 25경기에 출전해 2골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을 펼치며 하대성은 대구의 중원 사령관으로 우뚝 섰다.
2008시즌이 시작되고, 터키 전지훈련에서 하대성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숨은 진주라 불리며 주전으로 뛰게 될 것임을 암시했으며, 시즌이 시작하면서 대구는 변병주 감독의 극단적인 공격전술과 함께 2008년 팀 득점 공동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이 당시 대구에 붙은 별명이 K리그의 로맨티스트. [3] 루이지뉴는 울산으로 이적했지만, 이근호, 에닝요, 의 삼각 편대와 함께 후방에서 경기를 조율하며, 볼을 배급하는 역할을 했으며, 결국 허정무에 의해 국가대표로 선발되기도 했다. 당시 대구에서 뛰면서 국가대표에 선발된 4번째 선수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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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6강 플레이오프에서는 탈락했지만, 대구는 창단 이래 최초로 하나은행 FA컵 4강에 진출하는 저력을 선보였고 그 이면에는 부평고 동기 이근호와 하대성의 맹활약이 있었다. 시즌 기록은 31경기 5골 2도움으로 맹활약하며 K리그의 탑클래스 미드필더로 이름을 K리그 팬들에게 널리 알렸으며, 기량을 인정받은 하대성은 2009년 광란의 영입을 선보인 전북으로 에닝요, 진경선과 함께 이적했다. 이적 당시 이적료 분쟁이 발생했다. [5][6] 결국 원만한 해결 끝에 2009년 3월 2일, 전북 현대 모터스로 이적한다.
2.3. 전북 현대 모터스
2009년 전북으로 이적하면서 동생인 하성민과 한 팀에서 뛰게 되는 진풍경을 선보이게 된다. 이들의 선발 출전을 기념해 KFA에서 기념 인터뷰를 내보내기도 했다.
한편, 전북은 최강희 감독의 날개덕후 성향에 의해 강력한 측면을 형성했으나, 중원에서 약점을 보였는데 이를 에닝요, 하대성, 김상식, 진경선을 영입해 메꾸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초반 8경기 동안 5승 3무의 결과를 보이며, 강력한 모습을 보이는데에는 김상식과 하대성의 존재가 큰 역할이라는 평가. 시즌 최종 기록으로 30경기 2골 2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창단 첫 우승에 기여했으나, 에닝요, 루이스 등에 밀려서 공격형 미드필더 진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했고,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에서도 정훈에 밀리는 등 더블 스쿼드의 일인으로선 자리잡았지만, FC 서울 시절처럼 주장이나 톱 플레이어라는 느낌을 주진 못했다.
2.4. FC 서울 1기
그리고 2010년. 2009시즌 최종 5위에 그친 이후 감독이하 스탭, 선수단 태반을 물갈이하며 절치부심하던 서울은 전북에 심우연, 김승용을 내주고 하대성, 이현승을 받아오는 2-2 트레이드를 단행한다.[7]
조직력을 강조한 빙가다 감독의 지도아래 팀에 녹아든 하대성은 중원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해내며 서울의 핵심 미드필더로 자리 잡았다. 아디, 김한윤 등 뛰어난 동료들의 지원아래 그간 자제해왔던 공격력까지 폭발시키며 33경기 8골 3도움. 개인 최다 공격 포인트를 기록한다.
2011을 앞두고 많은 전문가와 팬들은 하대성을 서울의 키 플레이어로 꼽는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수원과의 개막전을 앞두고 햄스트링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하고 만다. 하대성에 이어 고명진, 한태유까지 부상으로 쓰러졌고 최현태, 문기한만으로는 그 공백을 메울수가 없었다. 결국 서울은 악재속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시준 중반 최용수 감독 대행 체제에서 복귀한 하대성은 잔부상에 시달리면서도 서울의 6강 진출에 지대한 공을 세우는데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서울의 3위를 확정지었던 30라운드 경남전은 그 백미였다.
화려한 스쿼드를 자랑하는 서울이지만 하대성을 대체할 만한 선수는 없다. 대표적인 경기가 울산과의 6강 플레이오프. 하대성이 빠진 상황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장한 고명진은 울산의 장신 수비수들의 철저한 마크에 고전했고 파트너 한태유는 수비에 전념하며 막힌 볼배급에 전혀 보탬에 되지 못했다. 결국 서울은 울산의 조직적인 수비축구를 뚫지 못하고 패배.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이러한 역량을 인정받아 부상으로 전해에 비해 출장수가 적었음에도 2011시즌 K리그 베스트11 미드필더 부분에 당당히 선발되었다. 12시즌에는 팀의 주장을 맡아 데얀, 몰리나와 함께 우승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데몰리션과 에스쿠데로의 뒤에서 찔러주는 킬패스와 유기적인 오프 더 볼 무브가 일품이었다는 평. 무난하게 2년 연속 리그 베스트 11에도 선정되었다. 리더쉽과 실력을 높게 평가받아 2013시즌에도 팀의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2.5. 중국과 일본
2014년 중국 슈퍼 리그 베이징 궈안으로 이적했고, 2016년 J1리그 FC 도쿄로 다시 이적했다. 이로써 한중일 3국의 수도에 있는 구단에서 전부 뛰어본 커리어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도쿄에서는 부상의 여파로 많은 경기를 뛰지 못하는 중이었는데... 6월 들어 친정 FC 서울에서 하대성을 재영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신진호의 입대와 박용우의 2016 리우 올림픽 차출로 인해 두 명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카드로 공수 양면으로 다재다능한 하대성을 고려했던 것으로 보였으나 결국엔 같은 J1리그 소속 나고야 그램퍼스로 임대 이적했다. 기간은 2017년 1월 1일까지이다.
2.6. FC 서울 2기 : 계속됐던 부상, 아쉬운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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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19일, 하대성이 FC 서울로 이적했다고 발표했다!
사실상 다카하기 요지로와의 트레이드로 간주됐기 때문에, 서울팬들은 다카하기 만한 아쿼를 어디서 구하냐며 아쉬워했지만, 그래도 상암의 왕의 복귀에 환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찌됐든 서울시절 주장이였으며 핵심역할을 해줬기 때문에 오니까 다들 환영해줬다. 그러나 그런 기대가 무색하게 오자마자 바로 1달 이상 걸리는 장기 부상을 끊었다. 2라운드 강원FC 교체 투입 이후 필드에서 사라졌다.
슈퍼매치에서 부상복귀해 선발출전했고 선제골을 넣으며 팀 승리에 기여했지만 그 이후 또 부상을 당해 경기장에서 모습을 보는데 오래 기다려야 했다.
사이버 선수 나와서 못하는 것도 아니고 클래스는 여전한데 유리몸이 되어 뛰질 못한다. 몸값이 싼 선수도 아닌데 3년 계약이라 유리몸에서 빨리 탈출 하는 것이 급선무지만 부상 이력을 보면 쉬운 일이 아닐 듯 하다. 다카하기 요지로 와의 트레이드는 FC 서울의 2017년 이적 시장 중 역대에 남을 실패 트레이드로 영원히 기록될 듯 하다.
2018년에도 후반기까지 R리그에도 얼굴을 안 비추는 상황에 빠졌다가 9월 26일 인천과의 홈경기에서 복귀전을 치렀다. 1년만의 복귀. 공격포인트를 기록한 건 아니지만 기존 서울 선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터치를 보여줬다. 70여분을 소화하고 김원식과 교체.
9월 30일 상주 상무와의 홈 경기에서도 선발출전, 신진호와 짝을 이뤄 중원을 구성했다. 1년을 넘게 쉰 것이 무색하게 번뜩이는 센스를 경기 내내 보여주다 75분 윤주태와 교체됐다. 다만 하대성에게 공이 가면 전개가 느려진다 는 점은 개선해야 할 부분. 페널티박스 인근에서의 패스 판단도 조금은 아쉬웠다.
부산 아이파크와의 승강 PO 1차전에서 시종일관 좋은 모습을 보여 주다가 후반 13분 뒷공간을 완전히 허무는 롱패스로 조영욱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했다.
2019 K리그 2라운드 성남 FC전에 후반 막판 교체투입 되며 시즌 첫출전을 기록했다.
2019년 3월 30일 상주 상무와의 경기에서 후반 교체 출전했으나 들어온지 '''7분 만에''' 다시 부상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 때 하대성과 교체된 정원진이 골을 넣어버렸다. 하대성과 송진형 두 선수의 페이롤만 빠져도 괜찮은 중미 한 명 영입할 수 있는지라 팬들의 원성이 자자하다. [8]
그리고 이 부상으로 시즌이 끝날 때 까지 출전하지 못했고 결국 상호해지로 팀을 떠나게 되었다. 팀을 떠난 후 몸 상태 등을 이유로 은퇴할 것으로 알려졌고, 결국 2020년 1월 9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장문의 글을 올리면서 현역 은퇴를 공식발표했다.
후에 인터뷰등에 의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1년에 허벅지 근육이 6번이나 찢어지는 부상을 겪으면서 여러 의사와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복귀 해보려 애썼으나 결국 실패했다고 한다. 2017 시즌이 끝난 후, 2018 시즌이 끝난 후 각각 은퇴 의사를 밝혔으나 처음엔 황선홍 감독에게, 두번째엔 최용수 감독에게 반려되었다. 부상만 아니면 여전히 클래스 있는 선수이기 때문에 감독들도 미련이 남았던 모양. 서울에 복귀한 후에 한 일이 없는 것 같아 팬들에게 미안했다며 인스타글과 인터뷰 기사에서 재차 사과를 했다. 팬들은 구단에 은퇴식을 해야한다고 주장했고 구단에서도 검토중이다.
3. 기록
4. 국가대표
국대에서도 여러 차례 소집되었으나 잘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홍명보호에 들어와 좋은 모습을 많이 보여주며 드디어 연착륙에 성공할 것처럼 보여 팬들의 기대치를 높이고 있다. 기성용이 사고 크게 치고 소속팀에서의 입지도 불안해진 틈에 이명주와 함께 대표팀 중원을 책임졌다. 대표팀이 빈공과 수비집중력 저하로 질타를 받을때도 하대성-이명주가 버틴 중원은 견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유럽파들이 본격적으로 소집되기 시작하자 귀신같이 라인업에서 빠졌다. 물의를 일으켜 가면서 기성용을 데려간 홍감독의 행보를 볼때 국대 레귤러는 여의치 않아 보인다.
2014 브라질 월드컵 본선 엔트리에 포함되면서 생애 처음으로 월드컵 무대를 밟을 기회를 얻었으나 부상으로 경기에 뛰지 못했다.
5. 플레이 스타일
왕성한 활동량과 뛰어난 볼간수 능력, 좋은 축구 아이큐를 자랑하는 전천후 미드필더로 공수 양면에서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단점은 비교적 긴 드리블..) 팀의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팔색조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막강한 공격진을 보유했지만 수비력에 문제가 있었던 대구에서는 이근호 등을 후방에서 받치는 룰을 수행했고 아디와 김한윤이란 걸출한 파트너가 있는 서울에서는 훨씬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주다 아디의 광대뼈 부상과 제파로프의 임대 이적 이후에는 다시 수비적인 롤을 수행했다.
팀 내에선 스페인의 사비에 빗대 하비라는 별명으로 불리는데, 띄엄띄엄 서울 경기를 보는 타팀 팬들에겐 의외로 평가가 짠 경우가 있다. 눈에 팍 띄일 만한 플레이를 주로 하는 선수는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서울 팬들은 하대성이 빠졌을 때 팀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볼 수 있기 때문에 하대성을 좋아한다. 유기적인 연계 플레이와 오프 더 볼 무브, 공수에 걸친 뛰어난 조율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순간적으로 경기 분위기를 반전시키거나 경기의 맥을 짚고, 전체 플레이의 틀을 짜내는 플레이가 가능하다. 패스, 드리블 돌파, 볼 간수, 태클, 반칙 등 공수 양면에 걸쳐서 말이다. 높은 지역으로 올라오는 일이 적으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적게 받으며 받아봤자 k리거ㅡㅡ 하는 시선 때문에 눈에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다만 기성용과 비교하자면 아무래도 신체적 건장함은 떨어지는 게 사실이고 안정성이 부족해서 어이없는 실수도 이따금 저지르곤 한다.
6. 기타
이근호가 상주 상무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을때, 위문편지로 그에게 장난을 친 일화가 있다.
배우 조혜선과 열애설이 나기도 했다.6월 포포투 이근호 인터뷰[11]
Q. 위문편지는 많이 오나요?
A. 중략....
어느날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으로 시작되는 주소에 '권유리'라는 이름이 적힌 정말 예쁜 편지봉투가 들어왔어요. 아는 이름이 아니어서 팬인가 싶었죠. 봉투를 열어 편지를 봤더니 첫 문장이 '오빠 혼자 봐야 돼'인 거예요. 괜히 설레잖아요.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하는데. 읽다 보니 이거 하대성이 장난친 거더라구요. 어우. 전화해서 한바탕 욕을 해줬죠. 알고 보니 입대 동기 백종환한데도 '송혜교'라는 이름으로 보냈더라고요.
동생인 하성민도 축구선수이다. 2009년에 전북 현대에서 같은 팀에서 뛰었지만, 하대성이 서울로 가면서 다시 헤어진다. 하성민은 이후 울산 현대를 거쳐 2017년에 교토 상가로 이적한다. 교토와의 계약이 끝난후 2018년에는 경남FC로 이적했다.
대구 FC 시절 2006 시즌 팬미팅 때 오장은과 함께 꼭지점 댄스를 춘 적이 았다. 영상은 아쉽게도 못 구했다.
7. 관련 문서
[1] 이후 김승용, 백종환, 이근호는 강원 FC에서 2017년에 한 팀으로 만나게 된다.[2] 이 시절 이근호, 샤다라빠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샤다라빠가당시 막 주목받기 시작한 이근호를 인터뷰한적이 있었는데 이근호가 가장 잘맞고 절친한 선수로 하대성을 거론하자 샤다라빠가 '그럼 언젠가 같이 뛰고 싶으시겠어요?'라는 어이없는 멘트를 날렸다.[3] 다만 팀 실점도 1위에 그치는데 극단적인 공격전술의 맥락을 보여주는 점도 있었지만, 그 당시 공격진과 중원에서는 국가 대표로 선발되는 선수들이 있었지만, 수비진은 좋게 봐줘도 중간 정도로 평가받던 수비진의 영향이 크기도 했다. 덕분에 당시 주전 골키퍼이던 백민철은 엄청난 경험치를 쌓았으며, 만약 리그 상위권 팀으로 이적하면 국가대표로 뽑힐 것 같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4] 첫 번째는 홍순학, 두 번째가 오장은, 세 번째는 이근호, 그 다음이 하대성이다. 하지만 이 중에서 꾸준히 국가대표에 모습을 보이는 선수는 하대성과 이근호 밖에 없다.[5] 대구는 19억을 요구했으나, 전북은 이 계산에 문제가 있다며 14억을 제시했다. 두 팀은 합의 후 이적료 비공개를 결정하며 이적을 결정지었다.[6] 이 당시는 2005년 이전 입단자에 한해 적용되는 FA 이적료가 존재했기에 발생한 문제였고, 하대성과 진경선 둘 다 FA 계약자지만 FA 이적료가 발생해서 잡음이 발생한 것이다.[7] 심우연과 김승용이 당시 주전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나있던 터라 트레이드의 밸런스에 대해 갑론을박이 많았다. 2013시즌 종료 시점에서 하대성은 서울의 주장이자 K리그 최고 수준의 중앙 미드필더로 자리잡았으나 이현승은 서울에서 제대로 뛰어 보지도 못하고 전남으로 이적하고 나서야 포텐이 약간 터졌다. 장신 공격수 심우연은 전북에서 큰 키를 눈여겨본 최강희 감독에 의해 센터백으로 변신해 11시즌부터 주전 수비수로 발돋음해 활약하다 팀이 정인환을 영입하자 주전자리에 위협을 느껴 13시즌 성남으로 이적(이적료가 20억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했고 그 후 16시즌 다시 FC 서울로 돌아갔다. 정교한 크로스가 장기인 클래식 윙어 김승용은 전북에선 벤치만 지키며 큰 역할을 하진 못했지만 J리그 감바 오사카로 이적하면서 이적료로 9억이라는 꽁돈을 남겨주고 떠났다. 결국 양팀 다 한 명(이현승, 김승용)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타 팀으로 보냈으니 하대성과 심우연을 놓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트레이드다. 하대성은 상암의 왕 소리를 들을 정도의 활약으로 두 번의 리그 우승을 서울에 안긴 후 구단 레전드 반열에 올랐고 심우연은 포변 이후 주전 센터백이 됐지만 정인환이 오자마자 타 팀으로 갔으니 서울 쪽으로 기울었다고 할 수 있다.[8] 하지만 K리그에서는 보통 출전경기수가 일정 기준을 넘지 못하면 연봉을 삭감해야 하는 조건이 붙고, 계약할때 수당과 옵션이 많고 주급체계가 까다로운 FC서울의 특성상 두 선수는 낮은 연봉을 받았을 확률이 높다. 낮은 연봉 두명분을 합친들 괜찮은 중미 한명을 더 영입할 수 있을 리 만무하고, 애매한 자원들은 이미 넘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뎁스의 빈약함을 이 둘 탓으로 돌리는건 사실상 화풀이에 불가했다.[9] 승강 플레이오프 2경기[10] 승강 플레이오프 1도움[11] 이근호는 12시즌 종료후 상무 입대. 하대성은 어린 시절 앓았던 질병 탓에 병역면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