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베이징 천안문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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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글 자막이 포함된 영상. 이 버전이 홍콩 97에 배경음악으로 등장했다.
원곡에 가까운 동요 버전. 북한처럼 인민들을 어릴 때부터 세뇌하려는 의도가 돋보인다. 맨 위의 영상과 비슷한 박자의 버전도 있다. 실제로 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한다.
문화대혁명 시절 중국에서 작곡된 체제 선동가이자 동요이다. 가사는 기본적으로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2.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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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의 진웨링과 진궈린.
이 곡의 작사자는 1970년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인 12세이던 진궈린(金果临, 김과림)이라는 어린이이며 작곡자는 상하이 제6 유리공장의 견습공이었던 19세의 여성인 진웨링(金月苓, 김월령)이었다. 진궈린과 진웨링은 사촌 관계이다.[1] 그러나 이 둘이 이 노래를 만들며 서로 소통한 적은 없다고 한다. 이 노래가 나오고 나서야 서로가 작사가, 작곡가인 것을 알았다는 모양이다. 이 둘은 노래가 나온 뒤 약 10여년동안 로열티도 받지 못했으나, 이 곡을 상업적으로 이용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이후 1980년대 이 곡의 상금을 받고 음악작가협회에도 가입하며 이 곡의 로열티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아이러니 한 점은 둘 다 노래를 쓸 당시에는 천안문광장을 방문해 본 적도 없었다. 진궈린은 1982년에, 진월령은 1972년에 처음 천안문광장에 방문했다. 둘 다 2020년 기준으로도 잘 살아 있다. 2013년에는 처음으로 둘이서 같이 천안문광장을 배경으로 한 사진을 찍고, 2019년 9월에도 건국70주년 사진전에 동반 참석하며 인터뷰를 하는 등 이 노래에 여러모로 애착이 깊은 듯 하다. 출처 1 출처 2
2.1. 작사자 진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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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천안문 광장에서의 진궈린.
김과림은 1969년 11월 29일 상하이시 창더로 제2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하던 당시 이 곡의 가사를 만들어냈다. 이후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진웨링과 달리 음악의 길이 아닌 평범한 삶을 걸었으며 5·4농장에 5년 동안 일한 뒤에 부모가 일하던 공장에 들어가서 20여 년 동안 근무했다. 이후에는 사업을 하다 파산한 뒤에(...), 일반 회사에 들어가 일했다. 진궈린은 1982년에, 출장을 가는 김에 베이징 톈안먼에 처음으로 가보았다고 한다. 출처
2.2. 작곡가 진웨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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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천안문 광장에서의 진웨링.
금월령은 문화대혁명 뒤인 1977년에 유리공장을 퇴사하고 중앙 음악 학원에 진학해서 나중에 유명한 작곡가 및 지휘자로 명성을 날리게 되는 탄둔[2] 이나 천좌황[3] 등과 함께 배우고 졸업 후에는 중국의 음향 전문업체인 명창편 상하이 공사에 근무하는 등 음악편집 일에 힘썼다. 1999년에 그의 근황에 대해서 보도된 바에 의하면 금월령이 작곡한 서정 가곡은 약 200~300곡에 달하고 전국적인 음악 콩쿠르에서 여러번 입상한 적도 있다고 한다.
3. 노래의 탄생 배경
이 노래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한 마오쩌둥을 찬양하고자 문화대혁명 시절 작곡된 가곡으로, 인민들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4] 참신한 선율, 건강한 리듬, 1옥타브 범위의 음역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나, 첫번째 소절의 경우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오페라 “입맞춤”의 제1막 아리아의 영향이 짙다.
작곡 직후인 1970년 9월 상하이가 보급한 음악서적 "홍위병 가곡"의 상권에 실려 출판되었으며 1971년에는 CCTV에서 방송되면서 메스컴을 타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72년에는 중앙신문전영[5] 이 노동절을 맞아 베이징 어린이들이 모여 열린 야유회 장면을 담은 선전 영화에서 이 곡을 '''나는 베이징의 천안문을 사랑해(我爱北京天安门)'''이라는 제목을 붙여 삽입하였고, 같은해 중국 국무원 문예 담당 부서에서 출판한 "새 전선 군가모음집 1권(战地新歌 第一辑)"에 이 곡을 실음으로써 본격적으로 인민대중을 상대로 보급되기 시작한다.
또한 특유의 동요풍 멜로디가 짙어 아동 합창단이 단골로 부르기도 했다. 이 곡은 문화대혁명 시기 국가적으로 장려되어 우후죽순처럼 판을 치던 기성 가곡들이 '''마오쩌둥 어록'''의 내용에서 따온 마오쩌둥을 숭배하는 가사, 행진곡이나 응원가 스타일의 곡조 등 하나같이 틀에 박힌 특징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인기를 끌었는데, 동요풍의 멜로디 특성상 어린이들을 이념적으로 선동하기 위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무용, 율동, 기악, 아코디언이나 금관 악기 연주등 다양한 버전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1979년 당시 부총리 였던 덩샤오핑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에는 미국의 어린이들이 중국어로 이 곡을 합창하면서 덩샤오핑을 환영했다. 또한 1984년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중국 방문에 앞서서 베이징시에서 공연한 미국 예술단이 처음 선보인 합창이 바로 이 노래였다.
미국 어린이 합창단이 덩샤오핑을 환영하기 위해 부르는 모습
4. 가사
이 이후엔 음만 바꿔서 계속 루프시킨다.
가사를 잘 보면 (글자 수, 줄 수만 따졌을 때) 칠언절구인 것을 알 수 있다. 자세한 건 한시 참고.
5. 그 외
이 1970년대 선전가요를 국제적인 밈으로 등극시킨 희대의 괴작 게임 홍콩 97에서 이 곡을 '나는 베이징 천안문을 사랑해. 천안문엔 태양이 뜨네' 부분만 루프시켜서 BGM으로 사용했다. 해당 곡을 부른 가수는 얀슈쥔(Yan shu jun, 闫淑君, 염숙군)이다. 1991년에 나온 노래를 썼다.[6]
희대의 괴작 게임 홍콩 97에서 이 곡을 '나는 베이징 천안문을 사랑해. 천안문엔 태양이 뜨네' 부분만 루프시켜서 BGM으로 사용했다. 해당 곡을 부른 가수는 쟝옌쥔(Zhang Yanjun, 张燕军, 장연군)이다. [7]
한국 웹상에서는 이 곡이 중국에서 검열된다는 소문이 있고, 天安門 天安门 法輪功 李洪志 Free Tibet 劉曉波처럼 중국인 차단용 방패로 쓰기도 하고 음성 채팅을 지원하는 게임에서 중국인을 퇴치하는 주문처럼 쓰기도 한다. 다만 이는 반만 맞는 것으로 보이는데, 검열 정책이 상당히 엄격한 바이두 백과에 항목이 개설되어 있고, 요우쿠 등지에도 동요 버전의 동영상이 멀쩡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 웹에서 홍콩 97에 쓰인 얀슈쥔 버전을 찾기 힘든 건 사실인데, 원래 동요로 유명한 곡이라 동요 검색결과에 가려서 묻힌 건지 아니면 정말로 검열하고 있는 건지는 아무도 모른다. 홍콩 97에 쓰인 곡은 동요에 비해 연음 구성과 박자가 약간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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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껄끄러워 하는 것도 사실인 듯하다. 일단 천안문이 중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임과 동시에 중국에서 언급하기 대단히 민감한 사건이 벌어진 장소이기도 하고. 특히 천안문이 이어서 두 번 반복되는 첫 번째 구절을 무한 반복한 홍콩 97 버전은 효과가 직빵인 듯하다. 이걸 보면 중국 공산당을 디스하려 저런 괴작을 만든 해당 게임의 제작진들도 나름 성과를 거뒀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물론 인터넷과 게임을 주로 즐기는 청년층들은 저런 노래가 존재하는 줄도 모르고서 겁을 먹은걸 수도 있을 듯하다.[9] 또한 천안문 사태가 1989년의 일이라 청년층이 해당 사건을 아예 모를 수도 있다.
특유의 발랄함 때문에 역재생하면 오히려 소름끼치게 변하는데, 역재생의 일부분이 새드 사탄의 브금에 쓰였다.
홍콩 민주화 운동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격앙된 반공, 혐중감정의 인기로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해당 곡은 한국 노래방에도 수록되어 있다. TJ미디어에서 72460번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금영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5.1.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6. 관련 문서
[1] 이 둘의 어머니도 서로 친자매, 아버지도 서로 친형제여서 사실상 친형제처럼 지냈다고 한다.[2] 일본 영화 그린 데스티니와 HERO의 영화음악를 작곡하고 그래미상과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것으로도 유명하다.[3] 1947년 4월 14일 상하이 출생으로 베이징 중앙 음악원 피아노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1985년에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 음악 예술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까지도 중국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써도 활발히 활동중이다.[4] '''세뇌'''하기 쉽도록. 당시 이 노래를 부르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어떤 상태였는지 생각해 보자.[5] 선전영화를 찍는 기관으로 현재도 CCTV의 계열사로 남아있다.[6] 진악령(陳嶽榮, Jin Yueling)은 존재하지도 않은 사람인뿐더러 정보조차 나오지 않는다. 작곡자 금월령의 발음과 한어병음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거짓으로 보인다.[7] 진악령(陳嶽榮, Jin Yueling)은 존재하지도 않은 사람인뿐더러 정보조차 나오지 않는다. 작곡자 금월령의 발음과 한어병음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거짓으로 보인다.[8] 시위 장면이 포함되어서 그런듯하다.[9] 위에 적힌 내용으로 알 수 있듯이, 곡이 탄생한 시기가 1970년이라 꽤 오래되었을 뿐이다. 딱히 제재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