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어록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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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나온 중영대역본 표지.
중국어 제목은 모주석 어록(毛主席语录). 외국에서는 모택동 어록, 마오쩌둥 어록으로 출판된 경우가 많다. 영어로는 'Quotations from Chairman Mao Tse-tung.'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미 한어병음방안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었으나 외국어 표기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오쩌둥의 영어 표기를 당시에 널리 쓰였던 Mao Tse-tung으로 하였다(지금은 보통 한어병음에 따라 Mao Zedong으로 표기한다.). 붉은 표지의 소책자이기 때문에 'Little Red Book'이라는 별명도 있다.
1964년 중국 공산당이 출판한 마오쩌둥의 어록 선집. 당시 국방부장이었던 린뱌오가 마오쩌둥의 강연과 저술 중에서 일부 구절을 주제별로 뽑아서 수록한 소책자이다. 린뱌오가 서문을 썼고, 전체가 13장으로 되어 있으며, 간결하고 힘 있는 문장이 특징이다.
그러나 1971년 린뱌오는 마오를 암살하려는 쿠데타 음모를 꾸몄다가 실패했고, 소련으로 망명하다가 추락 사고로 사망하였다. 그때부터 이 어록의 영향력은 감소하였는데, 그중 린뱌오가 쓴 서문페이지도 모두 찢어버리라는 명령이 나왔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모택동 어록 등에는 실제 이 시기 이후의 발언도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재출간되면서 가필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여러 차례 출간되었으니 개정도 있을 법. 2013년에 중국 공산당은 이 책의 개정판 출간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다른 어록 문서와 다르게 어록을 모은 선집이자 실존하는 책 제목이기에 '마오쩌둥/어록'이라는 식으로 하위 문서 표시를 하지 않는다.
공산당에서 출판한 이 '빨간책'인 공식적인 마오쩌둥 어록 이외에도 개인이나 출판사에서 만든 다양한 버전의 마오쩌둥 어록이 존재한다.
2. 영향
2.1. 중국
중국에서 이 책이 불러일으킨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이른바 '''중화인민공화국판 정관정요.''' 일단 마오쩌둥은 많은 글을 남겼으나, 홍위병들은 이것을 다 읽을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경구집 또는 표어집 식으로 뽑아 놓았기 때문에 청소년들은 이를 순식간에 읽을 수 있었고, 명문장만 뽑아놓은 만큼 감정적으로도 영향을 쉽게 받았다. 이 책의 문장을 근거로 하여 바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다. 더군다나 책 자체는 당차원에서 찍어내는것이기에 매우 싼값에 풀렸고 무료로 나눠주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의 광풍과 함께 청소년들이나 당원들, 노동자 농민들에게 필독서로 자리매김하여 몇억부에 달하는 부수가 판매되었으며, 마오쩌둥이 저작권을 주장했다면 당시 중국의 싼 물가를 감안해도 수백억원을 챙겼을 것이라는 얘기는 나올 정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중반까지의 중국에서는 웬만한 학생들이나 사회인들은 모주석 어록 한 권씩은 가지고 다니거나 가지고 있는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여하튼 이 책의 영향력이 대단한 덕택에 마오이즘의 성서라고 보는 경우도 있지만 마오이즘의 성서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마오쩌둥 어록이 아니라 마오쩌둥 선집이다.(마오쩌둥 선집은 번역본이 한국에 출간되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핵심사상이 담겨 있는 글을 "노삼편"이라고 하며, <인민을 위해 일하자(为人民服务)> <우공이산(愚公移山)>, <닥터 노먼 베순을 추모하며(纪念白求恩)>이다.
1976년 마오쩌둥 사망 후부터 책의 영향력은 현저하게 감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초반까지는 윗동네처럼 마오쩌둥의 어록을 인용하여 자신의 문장을 뒷받침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덩샤오핑의 부하이자 개혁파로서 천안문 사태의 시발점이 된 후야오방조차도 항상 마오쩌둥을 인용하여 자신의 개혁정책을 합리화했다. 그러나 당 차원에서는 더 이상 출판되지 않게 되었다. 다만 현재도 중국 공항에 가면 기념품으로 파는게 있다. 중영대역 문고라서 이해하기도 쉽다.
2.2. 해외
서구에서도 번역 출판 되면서 영향을 미쳐서 68혁명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 책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폴란드어, 체코어, 일본어 등등 여러가지 언어로 번역되어 팔려나갔다. 실제로 성경 다음으로 동시대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이라고 한다. 스마트폰의 어플로도 만들어져 스마트폰으로도 쉽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말 그대로 혁명의 수출.
일본어판은 일본 공산당에서 갈려나간 일공좌파[1] 들이 번역했고, 60년대 당시 성경처럼 이것을 끼고 다녔다고 한다. 영화 박치기에 보면 모주석 어록에 대해 설명하는 좌파 교사도 등장한다.
2.3. 한국어판
범우사에서 출판된 '모택동 선집'(총4부)이 원문의 번역을 담고 있으며, '마오쩌둥어록'이란 이름으로 팔리고 있는 책은 평과 예시를 덧붙여 편집한 것으로서 원문의 비중은 매우 낮다.
북한은 1950년대 중반부터 독자적인 길을 걸었으므로, 1960년대 출간된 마오쩌둥의 저서가 나올 수 없다.
그렇지만 중국 내의 조선족들이 한국어로 번역한 모주석어록 조선어판이 존재한다. 이 책은 연변의 고서점이나 도서관에서 구하거나 읽을수있다. 간혹 국내의 고서적 거래에도 매물이 뜨기도 한다. 지금은 더 이상 발간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3. 왜곡 사례
마오쩌둥의 말을 앞뒤 잘라서 만든 "인간의 목숨은 깃털보다 가볍다"를 가지고 중공군 인해전술의 이념이라고 주장하는데, 전형적인 앞뒤 자르기 왜곡이다. 이 말의 원래 출전은 사마천의 글인 보임안서(報任安書)[2] 다.
마오쩌둥은 항일 전쟁 당시 쓴 "위인민복무(为人民服务)"에서 사마천의 이 글을 인용하여 '''"인간은 모두 죽는다. 인간의 죽음은 태산보다 무거울 수도, 깃털보다 가벼울 수도 있다. 인민을 위해 죽는다면, 이는 태산보다도 무거운 죽음이다(人固有一死,或重于泰山,或轻于鸿毛。为人民利益而死,就比泰山还重)"'''과 같은 말을 한 것이다. 마오쩌둥은 항일전에 나선 전사들의 살신성인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사마천의 글을 인용한 것이지, 사회주의는 개나 줘버리고 인명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라고 한 것이 아니다.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는다.(人固有一死)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或重于泰山)
어떤 죽음은 깃털보다 가볍다.(或輕于鴻毛)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用之所趨異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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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글 '보임안서'에서.
4. 판본
1964년에 최초의 1판 1집은 수집품으로서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대만에서도 출판되었다.'''#
오리지널 판본은 더 이상 당 차원에서는 찍어내지 않지만, 그 뒤로도 개인들이 어록을 정리한 다양한 판본의 유사 '마오쩌둥 어록'이 존재한다. 중국답게 유사한 판본이 꽤 많은 것으로 보인다.
워낙 많은 부수가 출판되어서 현재도 중국의 헌책방에 가면 홍위병의 손때묻은 빨간 비닐커버와 갱지에 인쇄된 헌책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영어판 PDF도 인터넷에 돌아다니며 한국에서 공개적으로 열람해도 법적인 문제는 없다.
5. 어록의 일부
- 작은 불씨가 온 들판을 태울 수 있다. (星星之火,可以燎原)
- 모든 반동파들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 (一切反动派都是纸老虎)
- 이것은 단지 일만리 대장정을 완주하는 첫 걸음일 뿐이다. (这只是万里长征走完了第一步)
- 남이 나를 범하지 않으면 나도 남을 범하지 않는다. 만약 남이 나를 범하면 나도 반드시 남을 범한다. (人不犯我,我不犯人;人若犯我,我必犯人。)[5]
- 스스로 노동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해결하라. (自己动手丰衣足食)
- 인민을 위하여 일을 하라. (为人民服务)
- 인민, 인민이야말로 역사의 발전을 촉진하는 결정적인 힘이다. (人民,只有人民才是推动历史发展的决定力量)
- 마오쩌둥의 말이긴 하지만 마오어록에 나와있는 말이 아니다.
[1] 마오쩌둥 노선을 따르는 분파.[2] 한서 62권 사마천전[3] 실제 중국의 최고지도자는 중화인민공화국 주석도, 중국 공산당 총서기도 아닌 (중국 인민해방군 통제권을 가진)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다. 일반적으로 국가주석이 총서기와 중앙군사위 주석을 모두 겸임하기에 느끼지 못할 뿐이다. 덩샤오핑은 국가주석이나 총서기 경험 한 번 없이 이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만으로 10년 넘게 중국을 통치했고, 후진타오 집권 초기에는 장쩌민이 상하이방의 안전 보장을 요구하며 이 자리를 넘기지 않아 후진타오는 통치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후진타오가 중앙군사위 주석이 된 이후로는 국가주석과 공산당 총서기, 중앙군사위 주석 모두 한 사람이 겸직하는 자리로 굳어졌고, 시진핑은 이 세 직위를 한 번에 물려받았다.[4] 당장 한국만해도 군의 통수권은 대통령이 가지며, 내각책임제 국가의 경우 총리나 국방장관이 통수권을 가진다.[5] 중국 외교정책의 근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평소에는 (형식상) 타국 내정에 관여하지 않으며 외국과 거리를 두지만 외국이 중국의 이권에 피해를 준다(고 자의적으로 판단하)면 철저히 보복한다. 2010년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분쟁으로 중일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센카쿠 근해에서 중국 어선 선장이 체포되자 대일(對日) 희토류 수출금지를 때린 것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