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세 요시히사
1. 소개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활약한 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뛰었던 좌완투수.
느린 구속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투구폼을 앞세워[1] 타자들을 요리하는 능력과 빼어난 제구력을 자랑하면서 어린 나이에 롯데의 에이스로 부상했었다. 하지만 통일구 시대로 인한 투고타저의 와중에도 피홈런이 급증하면서 급격히 몰락한 선수.
2. 프로 입단 전
명문 요코하마 고등학교[2] 를 다녔으며 1년 후배인 와쿠이 히데아키와 함께 마운드를 지켰다. 고3이던 2003년 봄 고시엔(센바츠)대회 결승으로 팀을 이끌었으나 에이스 투수 니시무라 겐타로(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활약한 히로시마 코료 고등학교[3] 에게 막히며 우승에는 실패했다. 같은 해 여름, 가나가와현 예선 결승에서 패하는 바람에 고시엔 본선은 진출하지 못했다. 드래프트에서 롯데의 6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3. 치바 롯데 마린즈 시절
입단 3년차인 2006년 5월 17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와의 경기에서 1군 첫 등판, 첫 선발, 첫 승리를 기록했다. 13경기에서 모두 선발 등판하여 5승을 거두었고 선발 로테이션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2007년에 기량이 만개하며 16승 1패, 방어율 1.81, 올스타전 출전, 최우수 방어율 타이틀 획득과 최우수투수(승률1위)상 수상 등 기분 좋은 한해를 보냈다. 그러나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게 패배하며 2007년 일본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다. 규정이닝 달성 투수 중 다케다 마사루(닛폰햄,17개)에 이어 2번째로 볼넷을 적게 내준 투수(27개)였다. 방어율 1점대와 승률 9할대를 기록하며 정규시즌을 마친 건 1959년 난카이 호크스의 스기우라 타다시 이후 처음이었다.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 승선해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 선발 등판해 4회 중간까지 2실점 허용 및 노디시젼을 기록했지만 팀은 승리했다.
2008년은 등번호를 60번에서 17번으로 변경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에서 캐나다와의 경기에서 선발 등판해 7이닝 2피안타 무실점 10탈삼진의 빼어난 투구를 선보였다.
2009년은 7연승 포함 정규시즌 최종 11승을 기록했으며 팀내 다승1위였다. 이 해의 활약을 인정받아 연봉 1억엔에 도달했다.
2010년은 개막전 투수로 처음 등판해 요코하마고교 1년 후배인 세이부의 와쿠이 히데아키와 맞대결해 5회까지 노히트로 막았으나 7회에 홈런 두 발을 맞고 3안타 2실점 1-2 완투패를 기록했다. 이 날 다르빗슈 유(니혼햄), 이와쿠마 히사시(라쿠텐)도 개막전 선발 투수로 등판했으나 나루세와 함께 모두 완투패를 기록했으며 이는 50년만에 처음으로 나온 기록이었다. 2010시즌 최종성적은 13승(팀내 1위),11패, 203.2 이닝, 7완투, 4번의 무4구경기, 192 탈삼진, WHIP 1.02의 좋은 성적을 남겼다. 그러나 이해 피홈런이 29개로 급증했다. 팀은 2005년 이후 5년만의 2010년 일본시리즈 제패에 성공했으며 정규시즌 3위팀이 우승한 것은 처음이라 언론에서는 사상 최대의 하극상으로 이를 기렸다.
2011년은 팀 전력의 하향세에도 불구하고 6완투를 기록하며 10승을 거뒀고, 2012년에는 12승을 기록하며 4년연속 두자리 승수를 기록했다. 다만 이 시기에 극도로 반발력이 낮은 통일구가 도입되며 엄청난 투고타저가 닥쳤음에도 피홈런이 여전히 많았고, 2013년은 공인구 반발력의 상승으로 더욱 맞아나간데다가 부상까지 당하며 4년 연속 두자리 승수 및 6년연속 규정투구 도달 기록이 중단되었다. 2014년에는 1살 연하의 여성과 결혼 그리고 FA 선언을 했다.
4.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시대
롯데 시절과 같은 등번호(17)를 착용한다. 그러나 2015년 FA 첫 시즌부터 부진에 빠지며 선발진에서 밀려나며 간간히 불펜 패전조로나 나왔고, 결국 3년의 계약기간 동안 6승 11패에 그쳤다. 투수친화 구장인 치바 마린 스타디움에서도 장타를 얻어맞던 투수가 그라운드 규모가 작은 메이지진구 구장에 갔으니 더욱 폭발했다는 평가. 2018년 10월 2일 결국 야쿠르트 구단으로부터 방출당했다. 본인은 계속 현역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원 소속팀 롯데에서는 세대교체를 준비하는 팀이라서 별로 받아주고 싶지는 않다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는 똑같이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으로 팀을 옮겼다가 방출당한 오마츠 쇼이츠, 니시오카 츠요시도 마찬가지.[4]
2018년 12월에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는다고 한다. 아무 소식이 없는 오마츠나 니시오카보다는 나은 상황. [5]
5. 오릭스 버팔로즈 시절
2019년 2월 4일 오릭스 버팔로즈 입단이 확정되었다. 통산 100승을 달성할 최후의 기회.
그런데 입단하자마자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한동안 뛰지 못하다가 5월 4일 소프트뱅크 상대로 처음으로 선발등판한다.
결국 몇경기 못던지고 6월을 마지막으로 1군에 복귀하지 못한채 오릭스에서도 1시즌만에 전력외 통지를 받았다.
이후 독립리그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의 토치기 골든 브레이브스에 플레잉코치로 입단하며 NPB 현역생활은 사실상 마무리하게 되었다. 토치기는 무라타 슈이치나 니시오카 츠요시가 뛰었던 팀이다.
6. 특징
공을 최대한 숨기면서 투구 동작을 시작하고 쓰리쿼터의 변칙적인 투구폼을 이용해 타자의 타이밍을 뺏었다. 속구 외에도 체인지업, 슬라이더, 커브를 구사한다. 커브 구사에 자신이 없어 봉인하고 있었지만 2010년 투수코치로 부임한 니시모토 다카시로부터 "완벽하게 컨터롤 할 수 없어도 좋다. 변화도 크고 사용할 수 있다"는 조언을 받아 다시 던지기 시작했다. 위에서 언급한 마네키네코 투구폼은 와다 츠요시와 스기우치 토시야의 투구폼을 참고한 폼이라고 말하고 있다.
입단 후 체중이 증가한 사유로는 요코하마 고등학교 시절의 훈련이 너무 고되고 힘들어서 먹어도 먹어도 살이 찌긴 커녕 빠졌다고 하며 1년 후배인 와쿠이 히데아키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