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 가즈미

 

'''사이토 가즈미의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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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프로야구 투수 트리플 크라운'''
우에하라 코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9년)

'''사이토 가즈미'''
(소프트뱅크 호크스, 2006년)

마에다 켄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010년)

'''2003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 상'''
우에하라 고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사이토 가즈미'''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이가와 케이
(한신 타이거스)

카와카미 겐신
(주니치 드래곤즈)
'''2006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 상'''
스기우치 도시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사이토 가즈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다르빗슈 유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color=#373a3c> '''2003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 나인'''
제레미 파웰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사이토 가즈미'''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이와쿠마 히사시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color=#373a3c> '''2006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 나인'''
스기우치 도시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사이토 가즈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다르빗슈 유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2003, 2006 퍼시픽 리그 최다승'''


'''2003, 2006 퍼시픽 리그 최우수 평균자책점'''


'''2003, 2005, 2006 퍼시픽 리그 최고 승률'''


'''2006 퍼시픽 최다 탈삼진'''


'''사이토 가즈미
(斉藤 和巳 / Kazumi Saito)
'''
'''생년월일'''
1977년 11월 30일 (46세)
'''출신지'''
[image] 교토부 [image] 교토시 미나미구
'''국적'''
[image] 일본
'''포지션'''
선발투수
'''투타'''
우투우타
'''신체조건'''
192cm / 97kg
'''프로입단'''
1995년 드래프트 1순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지명
'''소속팀'''
[image] '''후쿠오카 다이에 - 소프트뱅크 호크스 (1995~2013)'''
'''수상 / 기록'''
'''Triple Crown (2006)
2x NPB All-Star (2003, 2006)
2x Eiji Sawamura Award (2003, 2006)
2x Best Nine Award (2003, 2006)'''
2x Most Valuable Battery (2003, 2006)
2x PL wins leader (2003, 2006)
2x PL ERA leader (2003, 2006)
2x PL strikout leader (2006)
1. 개요
2. 학창시절
3. 프로시절
3.1. 초반
3.2. 각성
3.3. 몰락
4. 플레이 스타일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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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6년 투수 5관왕을 달성하며 전성기를 달리던 사이토 가즈미에게 커리어 하락의 시작점이 된 플레이오프 최종전 완투패. 당시 사이토 카즈미는 고질적인 어깨부상 때문에 6일 로테이션을 칼같이 지켰지만, 포스트시즌의 특성상 4일 휴식 후 등판을 했고, 결국 남은건 끝내기 패배와 망가질때로 망가진 어깨뿐이었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전 야구선수.
포지션은 투수였으며, 고질적인 어깨 부상으로 제대로 뛴 기간은 몇 년 밖에 되지 않지만, 전성기 짧은 기간동안 '''헤이세이 시대 유일한 투수 5관왕''' 달성, 2번의 사와무라 상 수상 등 사이토 가즈미가 남긴 성적은 마쓰자카 다이스케, 다르빗슈 유, 이와쿠마 히사시 등 특급 에이스들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다.

2. 학창시절


2살 위의 형이 야구를 하고 있어서 야구를 시작했다. 어린 시절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팬이었으며 동경하던 선수는 나카하타 키요시였다. 소학교, 중학교 시절에는 주로 포수로 활약했고,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투수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무명인 미나미교토 고등학교에 진학해 2학년 가을부터 에이스로 활약했고 당시 하위권에서 머무르던 다이에 호크스의 눈에 들어 다이에 호크스의 1순위 지명을 받았다.사진

3. 프로시절



3.1. 초반


그러나 1996년 프로 입단 1년차 때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발목을 잡던 어깨 부상'''으로 1군에 올라오지 못했다. 1997년에는 시즌 막판에 드디어 1군에 등판했으나 여기서도 난타당하면서 1경기 출장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1998년에도 '''어깨 부상'''으로 1경기 출장에 그쳤다. 덤으로 '''어깨 수술까지 하면서''' 사이토의 투수 생명이 끝났다고 판단한 다이에 호크스 구단 측에서는 고등학교 시절 좋은 타자이기도 했던 사이토에게 타자로의 전향을 권유하기도 했다. 좌익수로 출전도 시켜봤으나 본인이 투수 아니면 은퇴하겠다고 하면서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재활 후인 1999년에도 1경기만 등판하면서 망한 유망주가 되는가 싶었으나, 2000년 6월 24일 홈경기에서 프로 첫 승리 투수가 되었다. 2년전 어깨 수술로 같은 병실을 쓰던 고쿠보 히로키가 결승타점을 올려 같이 수훈선수 인터뷰를 한건 덤. 그리고 프로 첫 승리투수와 함께 이 경기에서 '1이닝 4탈삼진'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이 첫 승리를 바탕으로 후반기에는 그동안의 시즌에 비하여 무난히 등판하여 5승 2패 4.13을 기록했다. 왕정치 감독이 얼마나 기다렸는지 이 시즌 후에 내년 시즌에 에이스가 될 것이라고 대놓고 인터뷰에서 말했을 정도. 그러나 저 말이 무색하게 '''또 어깨 부상이 발생'''하여 1시즌을 거의 날려먹었다. 그래도 2002년 후반에 복귀하여 좋은 모습을 보여줬고 2003년에는 무사히 개막전에 선발 등판했다.

3.2. 각성


2003년 당시 최고 기록이던 선발 16연승과 함께 근 20년만의 20승을 달성하면서 승률상, 방어율상, 베스트나인을 수상했으며, 사와무라상까지 수상했다.[1][2] 그리고 이 기세를 몰아 2004년 개막전에서도 승리를 차지했으나, '''또 어깨 문제로 인한''' 컨디션 난조로 부진에 빠졌다. 10승을 달성하긴 했으나, 방어율이 6점대까지 치솟는 등 사이토 본인으로서는 최악의 풀타임 시즌을 보냈다.
2005년에도 '''어깨 통증'''으로 개막전 선발 등판이 무산되면서 불안감이 조성되었으나, 그 이후에 뛰어난 모습을 보여줘 자신의 두번째 선발 14연승을 달성 14연승을 여러 번 달성한 첫 선발투수가 되었다. 다만 오릭스전에서 대량실점을 하면서 방어율이 치솟은건 흠이라면 흠. 그러나 16승 1패 2.92의 기록을 보여주면서 승률왕을 또다시 차지했다. 이 활약을 바탕으로 소프트뱅크에서 거액을 제시했다.
2006년도에는 선수 회장에 취임했으며, 이중키킹 금지로 인해 투구폼을 바꿔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요미우리전 27타자 완봉승[3], 교류전에서 6구단 상대 전승 등 뛰어난 활약을 보여줬고 시즌 내내 마쓰자카와 치열한 경쟁을 벌인 끝에 이닝 1위, 다승왕, 방어율왕, 승률왕, 최다 완봉상을 차지했다.[4] 덕택에 에가와 스구루 이후에 끊겼던 5관왕 기록을 세웠으며, 사와무라상 2회째 수상 등 개인 기록면에선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퍼시픽리그에서 투수 4관왕은 1990년 노모 히데오(긴테쓰)에 이어 역대 5번째이고 양대리그를 통틀어 11번째 대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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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팀은 파리그 플레이오프 제 2스테이지에서 닛폰햄에게 통한의 완투패를 당하며 탈락하고 말았다. 끝내기 안타를 맞으면서 당시 사이토가 보여줬던 모습은[5] 많은 야구팬들 사이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사이토 본인이 나중에 언급하길 왕정치 감독이 암 수술로 인해 빠지면서 왕감독을 위해 우승하겠다고 했으나, 그걸 지키지 못해 슬퍼서 울었다고... 이 일화는 BEMANI 시리즈의 악곡 Second Heaven모티브가 되기도 했다.당시 영상
참고로 이 2003~2006년 동안 기록은 '''64승 16패(승률 .800!, 시즌 평균 16승 4패...)'''에 사와무라상 2회 수상...[6]

3.3. 몰락


2007년에도 2006년의 활약을 바탕으로 개막전에 선발 등판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깨의 문제가 생기면서''' 빠지는 경기가 많았고 후에 1군에 올라오긴 했으나 7일 간격 등판 100구 한정을 걸었고 6승 3패 2.74에 그쳤다. 후에 본인이 언급하길 이때 공을 던지고 나면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했을 정도니... 그리고 이 시즌 후에 '''사이토의 1군 등판 기록은 없다.'''[7]
2008년에는 '''어깨 건판 복원 수술''', 2009년은 '''재활'''로 날렸고, 2010년 '''또 어깨 수술'''... 다르빗슈 유도 사이토가 없어서 재미가 없었다는 뉘앙스의 인터뷰를 했으며 소프트뱅크에선 본인들이 플레이오프에서 돌린 것도 있고 돌아와서 좋은 공을 던질 거라는 기대감에 재활군 코치로 보직을 변경시켜 재활에만 집중시키기도 했다. 당시 소프트뱅크 소속이던 김무영의 증언에 의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재활을 피나게 했다고...[8] 2011년에도 2012년에도 '''재활'''을 했다. 2012년에는 배팅볼 투수를 할 정도로 회복되었고 2013년에는 드디어 100구를 던질 수 있는 몸이 되었으나... 구속이 예전같지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1군에서 뛸 급의 구속도 나오지 않자 바로 은퇴해버렸다.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2020년 부터는 유튜브 채널을 열고 야구 관련 이야기를 다루는 영상들을 올리며 활동하고 있다.
[image]
은퇴 기자회견.

4. 플레이 스타일


피칭집 모음
최고 152km/h, 평균 144km/h의 패스트볼과 최고 146km/h에 이르는 고속 스플리터를 던지는 우완 파워피쳐였다. 보조무기로 사용하는 커브와 슬라이더도 수준급으로 스플리터의 구속이 증가함에 따라 첫 번째 사와무라 상을 수상했던 2003년에 비해 2006년의 스플리터 구사 비율이 꽤 높아졌다.
이중키킹 금지로 2006년부터는 이중키킹에서 중간에 잠깐 멈칫하는 동작으로 바뀌었는데, 그 디셉션도 타자를 힘들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였다.
통산 승률이 8할대에 육박했던 [9] 속칭 '''지지 않는 에이스'''였다. 다만 포스트시즌의 승률은 별로 좋지 않은 편이다.

5. 기타


  • 자신의 기록이 어떻든 팀이 이기면 그걸로 좋다는 취지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 여기까지 보면, 메이저리그의 대표적인 유리몸 에이스인 크리스 카펜터와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다.
  • 야구 내적으로는 재활도 열심히 하는 선수였고, 선수 회장까지 역임했을 정도로 선수들에게 신임을 얻은 선수였지만, 외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듯 보인다. 전 부인과 이혼할 당시 가정폭력불륜 의혹으로 시끄러웠으며, 이후 재혼 상대인 스잔느[10]와 2015년 3월 이혼하면서 또 다시 불륜 의혹에 시달리고 있다. 다만 워낙 카더라가 많은 상황이라서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출처를 분명히 하라고 서두에 적혀있다.
  • 등번호 66번을 은퇴할 때까지 달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부인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부득이하게 당시에 입고 있던 유니폼을 입고 왔으며, 후에 천국에서 보고있는 그 사람이 자기를 못 알아볼까봐 못 바꿨다고.
  • 일부 한국 언론에서는 사이토 가즈미가 2003년에 귀화한 한국계 일본인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또한 히야마 신지로, 모리모토 히초리, 김무영 등 재일 야구인들도 2013년 박동희 기자의 취재 당시 사이토 가즈미가 '한국계 일본인'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러나 사이토 가즈미 본인이 스스로 한국계라고 밝힌 적이 없고 일본 관보에 사이토 가즈미가 2003년에 귀화했다는 기록도 없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11]

  • 소프트뱅크 부동의 주전 포수였던 조지마 겐지보다는 백업 포수였던 동갑내기 마토바 나오키와 호흡을 맞추는 경우가 많았다.[12]
[1] 당시 이가와 게이와 함께 공동수상.[2] 쿠도 키미야스가 FA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이래 마땅한 에이스감이 없었던 다이에는 사이토의 포텐 폭발, 영건 좌완 와다 츠요시스기우치 토시야, 그리고 특급 유망주였던 아라카키 나기사 등이 가세하여 호화 선발진을 구축하게 되었고 일본시리즈에서도 호시노 센이치 감독의 한신 타이거즈를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물리친다.[3] 상대타선을 단 1안타로 막았으며 1루주자를 견제사로 아웃시켰다. 다만 요미우리는 이날 클린업 전원 결장시켰다.[4] 이 해 방어율 1.75로 방어율 1점대를 기록했는데 옆동네에서도 히로시마 도요 카프구로다 히로키가 1.85로 1점대 방어율왕을 기록해 1969년의 에나츠 유타카(세리그, 한신), '''키타루 마사아키'''(파리그, 롯데) 이래 약 40년만의 양대리그 1점대 방어율왕이 나왔다. 그리고 양대리그 1점대 방어율왕은 이후 09년, 11-12년, 17년에도 나왔다. 여담으로 퍼시픽리그에선 이후 2014년까지 '''무려 9년 연속으로 1점대 방어율왕'''이 나왔다. 2015년에 오타니 쇼헤이가 2.24로 방어율왕을 타면서 10년 연속에는 실패했다.[5] 바로 위의 사진이다. 덕아웃에 갈 때까지도 엄청나게 울었다고.[6] '03년 20승 3패, '04년 10승 7패, '05년 16승 1패, '06년 18승 5패[7] 사실 로테이션 관리로 어찌어찌 버티던 선수를 플레이오프에서 무리하게 당겨서 써서 당연한 결과일지도... 그 이유였는지 구단에서 사이토의 재활훈련을 많이 도와주기도 했다.[8] 다만 2010년에 수잔느와의 열애설이 뜨면서 까이기도 했다. 참고로 사이토는 아래에도 언급되겠지만 당시 이혼남...[9] 7할7푼5리.[10] 일본의 그라비아 아이돌 출신 탤런트 겸 가수다.[11] 2019년 8월 19일에 2ch의 한 유저가 일본 관보에 도쿄 미나토구에 거주하고 있는 쇼와 52년(1977년) 11월 30일 태생의 최화사(崔和巳)가 2019년 6월 19일에 귀화했다는 내용이 기재되었다며, 이를 근거로 사이토 가즈미가 2019년에 귀화했다고 주장했지만,# 해당 내용이 기재된 관보 사이트를 링크하거나 관보 캡처 사진을 첨부한 게시글이 아닌데다, 제도권 언론에서 관련 내용이 보도된 적도 없기 때문에 신빙성은 떨어진다.[12] 가즈미의 말에 의하면 마토바와 배터리를 짠건 자기가 결정한게 아니고 마토바와 배터리를 짠 경기에서 성적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실제로 2006년에는 마토바와 같이 최우수 배터리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다만 2003년에는 조지마 겐지와 최우수 배터리 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조지마와 배터리를 짰을 때의 성적도 좋았던 것을 생각하면 단순히 성적 때문에 마토바와 배터리를 짰다기보다는 마토바와 배터리를 짜는 걸 더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