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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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8 베이징 올림픽의 야구 종목으로 대한민국 대표팀이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여자 핸드볼의 금메달 이후 16년 만의 단체 구기 종목 금메달을 따냈다.'''[1]
2. 경기장
중국에는 프로야구리그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식 규격의 야구장 건설이 부담스러웠고 베이징에 위치한 우커숭원화티위중신(五棵松文化体育中心)의 공터에 조립식 야구장을 건설했다. 메인 경기장을 포함해 총 3개의 경기장이 건설 되었으며 이후 중국야구리그의 베이징 타이거즈의 홈구장으로 사용하려 했으나 결승전이 열린 메인 스타디움을 비롯한 모든 야구 경기장은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몇달도 안가 철거되어서 야구팬들에게 아쉬움을 안겨주었다.
한편 우커송 구장의 베이스는 한국야구회관빌딩 지하 1층의 아카이브 센터에서 보관 중이다. 계획대로라면 2019년에 개장할 한국 야구의 전당 및 야구박물관에 전시될 예정.## [2]
한때 한국에선 KBO가 올림픽 금메달의 영광을 함께한 이 구장의 베이스라도 소장하겠다고 중국 당국과 협상했지만 국가재산이라고 하면서 중국측이 완강히 거부해서 결국 불발되었다고 알려져있지만, 실제로는 공식적인 협상을 통해 2009년에 중국국가체육총국으로부터 2루 베이스를 기부받은 것이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건설 지원을 해주었으며, 크기는 센터 122m, 좌우 98m로 고척 스카이돔의 넓이(센터 122m, 좌우 99m)와 거의 같다.
3. 지역 예선 및 본선 진출 국가
지역 예선 결과
3.1. 2006 IBAF 베이징 올림픽 아메리카 예선
2006년 8월 25일부터 9월 7일까지 열린 예선전. 미국과 쿠바가 본선에 진출했고, 멕시코와 캐나다가 최종 예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3.2. 2007 오세아니아야구선수권대회
2007년 2월 8일부터 2월 11일까지 열릴뻔 했던 대회. 호주와 뉴질랜드 2개국이 최종예선을 놓고 대결을 펼치려 했으나 뉴질랜드가 기권을 선언하며 호주가 자동 진출하게 되었다.
3.3. 2007 유럽야구선수권대회
2007년 9월 7일부터 16일까지 개최되었다.
3.4. 2007 아시아야구선수권
3전 3승을 기록한 일본이 본선으로 직행했고, 대한민국과 중화 타이베이가 최종 예선에 진출했다. 이 대회로 인해 김경문 감독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졌고 선수 차출과 관련되어서 잡음이 일어나자 김경문 감독은 "이럴 거면 대표팀 감독 안한다!"는 배수진을 치기도 했다.
3.5. 2007 IBAF 베이징 올림픽 아프리카 예선
원래 올림픽 아프리카 예선은 아프리칸 게임이 대체했으나 2007년 올아프리카 게임의 개최국인 알제리에는 야구, 소프트볼, 필드하키가 제외됨에 따라 별도의 올림픽 예선을 치뤘다.
3.6. 2008 베이징 올림픽 최종 예선
4. 참가국
각 대표팀 로스터
5. 중계
TV중계는 예선전에는 낮에 열린 중국전을 제외하고는 3사가 돌아가면서 중계했으며, 준결승 이후부터는 3사가 동시중계했다. 시청률의 승자는 허구연의 MBC.
네이버에서는 문자중계에 유명 야구인사들을 초빙하여 문자중계에 해설을 맡겼다. 김인식 한화 감독, 이만수 SK 코치, 서용빈 LG 코치, SK 박재홍 선수, 김동수 히어로즈 선수, 송재우 해설위원, 최훈 작가 등.
6. 예선 풀리그
6.1. 예선라운드 순위
한국은 전승을 거두면서 결선리그에 진출했다. 매 경기 아슬아슬한 승부와 수비실책으로 인해 야구 팬들의 눈에는 이번 대표팀의 성적을 비관적으로 보는 견해가 많았으나, 의외로 SBS 특별 해설위원으로 위촉된 김성근 감독은 전승에 금메달을 예상했다.
7. 결선 토너먼트
8. 결승전 - 쿠바 2 : 3 대한민국
9. 최종 성적
불과 1년 전 만해도 선수 선발 과정에서의 잡음과 아시아 예선에서의 탈락하며 삿포로 참사 시즌 2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다. 그리고 조별 예선에서 중국 등 약체들에게 쩔쩔 매는 모습을 보이며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Nine starting players. Nine games. Nine wins. Perfect."'''
"9명의 선발 선수. 9번의 경기. 9번의 승리. 완벽하다."
MLB.com 소속 기자 마크 뉴먼#
하지만 이대호, 김태균, 정근우로 대표되는 82라인과 이승엽, 정대현등 국제대회의 강자들, 그리고 김현수, 류현진, 김광현, 이종욱, 강민호등 리그를 대표하는 신인급 선수들의 맹활약을 펼치며 남자 구기종목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10. 베이징 올림픽 이후
- 베이징 올림픽 2년 후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다시 한번 금메달을 따면서 우울했던 도하 아시안게임에서의 치욕 또한 저 멀리로 잊혀졌다. 그리고 2009 WBC 준우승과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2013 WBC에서 충격적인 타이중 참사가 있었지만, 그래도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 간신히 금메달을 따 체면치례를 하고 프리미어 12에서 일본을 기적적으로 꺾고 초대 우승을 차지하는 등 한국 야구의 황금기를 연 대회이기도 하다.
- 2008년부터 현재까지 마지막 올림픽 야구에서 최초로 금메달을 딴 날을 기념하며 KBO는 올림픽 우승일인 8월 23일을 야구의 날로 지정했다. 그리고 매해 사인회 등 각종 행사를 열고 있다.
- 2005년 메이저리거의 올림픽 차출을 요구하는 IOC와 거부하는 MLB와의 알력 다툼으로 인해 야구종목이 올림픽에서 퇴출되어 베이징 올림픽을 끝으로 당분간 올림픽에서 야구를 볼수없게 되었다. 일단 IBAF에서는 여자 소프트볼의 올림픽 재입성을 노리는 국제 소프트볼 연맹(ISF)와 손을 잡고 세계야구소프트볼 총연맹(WBSC)를 창설했다. 그리고 남자 야구와 여자 소프트볼을 하나의 종목으로 묶어 양성 평등을 강조하면서 올림픽 복귀를 노리고 있다.[10] 다만 소프트볼이 야구보다 듣보잡이라는 게 문제. 거기에 야구·소프트볼의 경쟁상대인 크리켓도 올림픽 재입성을 노리고 있었으며 새로 들어가려면 이전 종목이 빠져야 하기에 쉽지 않을 전망이었다. 그래도 2013년에 2020년 올림픽 개최지가 일본 도쿄로 결정됨에 따라 개최국 일본의 입김에 따라 야구가 부활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섞인 보도가 2014년에 나오기도 했다.#
- 그러다가 올림픽에 돈만 많이 들어간다고 개최국들이 줄어드는 상황에 갑질만 하던 IOC가 부랴부랴 올림픽 어젠다 2020라는 개혁안을 발표했는데, 개최지에서 정식 종목을 직접 추가하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다. 일본의 로비가 통한 셈. 야구가 영구적으로 올림픽에 복귀하는 건 아니더라도, 2020년 올림픽을 비롯하여 야구가 인기 있는 국가에서 치러지는 대회에서는 경기가 정식 종목으로서 치러질 수 있게 되었고, 예상대로 2020에는 집어넣었다. 그래서, 2028 LA 올림픽에서도 야구를 볼 수 있을 전망이지만 2024 파리 올림픽에선 제외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 이때 활약했던 한국야구 선수들 중 류현진, 김현수, 이대호, 오승환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에 성공했다. 윤석민도 해외진출을 하였지만 마이너리그에서 매우 부진해 지명할당을 당하고, 스프링캠프에서도 불러주지 않는 등 안습한 상태를 겪다가 국내로 복귀했다. 김광현도 진출을 도모했지만 처참한 몸값과 계약조건을 제시받으며 무산되었으나 2019년 12월 18일 포스팅 끝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계약에 성공한다.
- 이외에 강민호[11] , 권혁, 윤석민, 이용규, 이택근, 정근우 등이 FA 대박을 치기도 했다.
- 4강전과 3, 4위전에서 실책을 저지른 G.G.사토는 이 올림픽 이후로 팀에서 찍혀서 몇 년 못가 팀에서 방출당했고, 12구단 모두의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바람에 1년 동안 팀을 못 구해서 이탈리아 야구리그까지 갔다가 2013년에 겨우 치바 롯데 마린즈로 복귀하는 데 성공했다.
- 이때 꼼수를 부리다 망신당한 일본은 2012년과 2015년에 다시 실수를 했다.
- 2019년에 김경문호가 11년 만에 부활했다.
11. 대한민국 대표팀 선전 의의
리그에서 젊은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계속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도 있었지만, 이제 대한민국 야구계 스스로 자신들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생겨났다. 이는 다음해 열린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도 좋은 성적으로 연결되었고, '''대한민국에 야구 붐이 더욱더 일어나는 계기로서 작용'''되었다. 유소년 야구도 대폭 증가하게 되었는데, 초·중·고·대 선수들은 2006년 6,400명에서 2015년 16,000명으로 늘어났다. 팀은 282팀에서 455팀으로 173개팀이나 늘었다.베이징올림픽 당시에는 집에서 TV로 경기를 봤다. 그때는 '''2002한일월드컵 이후라 야구가 침체돼 있었다.''' 어떻게 하면 야구를 살리느냐를 놓고 고민했을 때다. 동네엔 온통 축구만 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베이징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들이 선전을 하자 금방 분위기가 바뀌었다.'''[12]
야구경기를 하는 날이면 온 동네가 떠들썩했다. 동네 주차장에서도 아이들이 야구를 했다. 좋은 기회다 싶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작은 아이가 동네 클럽에서 축구를 했다. 축구하는 학부모들에게 '내가 야구를 가르쳐도 되겠나'라고 물어봤는데 모두 좋다고 했다. (중략) 잘 하는 아이들은 리틀 야구 보냈다. 이후 야구붐이 일어났고, 동네에 축구 클럽이 없어졌다. 2009, 2010년 학교 운동장에는 거의 대부분 야구를 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이후 침체되어 있던 야구계가 다시금 재도약하게 되었고, SK 와이번스와 두산 베어스를 필두로 여성 관중들의 대거 유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며[13]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관심도가 올라가면서 자금의 유입 규모가 커졌고 이는 야구계 인프라 산업 활성화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는데 2008년의 선전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
당시 프로야구와 대등한 싸움을 하던 K리그에도 타격이 있었는데, 축구기자간의 대담에서도 이때의 충격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
참고로 이때 처음 야구본 사람을 일컬어 베이징 뉴비라 부르며 에드먼턴 키즈 이후 베이징 키즈가 생기면서 다시 전성기를 열었다.
반대로 씁쓸한 일이 있는데 이 당시 한국야구대표팀 단장이 바로 하일성이었다. 2016년 자살로 삶을 끝내던 그가 살아 생전, 묘비명을 올림픽 야구단장 하일성이라고 적어달라고 강조했던 걸 보면 그도 이 올림픽 금메달이 가장 인생에서 좋았던 일로 생각한 모양이지만 결승전 이후 대표팀 선수들과 웃으며 사진찍은 게 하일성을 기억할 때 씁쓸하게 남게 되었다.
[1] 남자 구기 종목 중에선 최초.[2] 해당 기사에서는 고척 스카이돔에 들어설 한국야구박물관에 기증한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건설될 예정인 KBO 명예의 전당이 건설 되면 그곳에 전시될 계획이라고 한다.[A] A B 예선에 필요한 경비 1억이 모자라 영국은 최종 예선 출전을 포기했고 대신 4위를 기록했던 독일이 참가했다.[3] 2000.[4] 1992, 1996, 2004.[5] 1996, 2000.[6] 1996.[7] 2004[8] 2000.[9] 1992.[10] 극소수이긴 하지만 엄연히 여자 야구 선수와 남자 소프트볼 선수도 있다. 일본에서는 아예 여자프로야구도 있을 정도이다.[11] 그것도 FA대박을 2번씩이나 치면서 진갑용과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ㄷㄷ[12] 대한민국 축구가 메달을 딴것이 2012년 런던대회에서였다. 그러니깐, 2008년 까지만 해도 당시 야구계는 암흑기였고 축구는 2002 한일 월드컵과 2006년 독일 월드컵 선전으로 축구의 인기가 좀 더 많았다.[13] 더구나 이 두 팀은 한국시리즈에서의 맞대결을 통해 주가도 높았던 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