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종부법
'''奴婢從父法'''
1. 개요
노비종부법(奴婢從父法)이란 조선 시대 태종, 세종, 세조에 의해 각각 실시되었던 노비제도로서 양인(良人) 남자와 천인처첩(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의 신분은 부계를 따라 양인이 되게 한 신분법이다.[1] 세종대와 성종대 이후부터 계속 실시되었던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과는 서로 대립된다.
2. 내용
줄여서 종부법(從父法)이라고도 부른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양인남자와 천인처첩(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부계를 따라 전부 양인이 되게 하는 법을 말한다. 즉, 어머니쪽의 노비 신분을 가진 자가 있어도 그 자식들은 노비로 신분이 세습되지 않고 양인인 아버지의 혈통에 따라 똑같이 양인 신분으로서 살아가게 해주는 법이다. 즉, 종부법을 채택하면 노비 숫자가 차차 줄어드는 반면 종모법을 실시하면 노비 숫자가 크게 늘어나게 된다. 양반 남자가 노비 여자를 덮치는 것이, 양반 마나님이 노비 돌쇠를 덮치는 것보다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부법을 시행하면 단순히 노비의 숫자가 차차 줄어든다고 보기에는 힘든게 천비 즉, 노비 신분인 여성이 자기 자식들을 양인으로 만들려는 마음에 자주 그 남편을 바꾸었는데 문제는 그 때문에 어느 남편의 자식인지 분명히 가려 내기가 매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는 당대 조선시대 유교관념으로는 명분상 분명 반대하기 어려웠을 뿐더러,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럴경우 아비의 신분을 따른다면, 아비가 노비라고 할 경우 그 자식이 반드시 노비가 되도록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천비(노비) 신분인 여성이 낳은 자식의 아버지가 노비인지 양인인지 애매할 때, 그 아비가 노비라고 우겨 그 아이 또한 자신의 노비라 우겨서 그대로 빼앗고자 하는 세가(勢家)들이 당대에 매우 많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은 처첩제 사회고, 여성은 1년에 한번만 아이를 낳을 수 있지만 사내는 첩이 여러 명이면 일년에 그 숫자만큼 자식을 볼 수 있었다.
이는 조선 후기와 조선 전기의 큰 차이점 중 하나가 성리학적 가치관이 피지배계층까지 공유되고, 피지배층에게까지 어느 정도는 지켜져야 한다고 여기느냐라는 차이점에 기인하는데 우선 조선 후기라면 양반이 자기 노비가 결혼도 안 하고 양민 여자를 임신시켰으니 그렇게 낳은 아이도 내 노비다! 라고 떠들고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당장 성리학의 교조화로 인해 양반들 사이에서 별 희한한 걸로 유교적 원칙과 예법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 경쟁하는 와중인데 양민 여자의 자식도 자신의 노비다! 라고 주장하면 자기가 유교적으로 교화해야 할 자기와 가장 가까운 자기 노비 하나 못 다스린 꼴이라고 자인해야 하는 거니 조선 후기 기준으로는 아무리 양반이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주장하기에는 매우 힘들었다. 아니, 애초에 그 이전에 여자의 정절과 신분제를 그토록 중시하던 조선시대에 양민 여자가 남자 노비의 자식을 가졌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주인 집안에서 그 자식이 노비인지를 따지기 전에 여자 쪽 집안에서 임신한 딸을 때려죽이고도 남을 환경이었다(...) 하지만 조선 전기에는 노비가 성리학적 도덕을 안 지키는게 왜 내 책임이냐며 왕 앞에서 그런 식으로 낳은 아이도 자신의 노비로 삼게 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곤 했다.
이런 사실들에 기초해봤을때 단순히 노비종부법이 노비의 숫자를 차차 줄여준다라고 생각하기에는 많은 반론이 있다고 볼 수 있다.
3. 역사
3.1. 조선 이전
고려시대는 원칙적으로 양천교혼(良賤交婚)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논의할 일 자체가 잘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사람 사는 곳이라 알게모르게 양인과 천인이 서로 사고치는 경우가 있었고 이에 대해 초창기에는 그 자식이 천인이 되는 종모법을 따랐다.
법으로 확실히 규정된 것은 10대왕 정종 때로, 《고려사》 〈형법지〉에서는 “정종 5년(1039), 천것은 어머니를 따르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다”고 했다. ‘천것은 어머니를 따른다’란 문장의 한문 표현인 ‘천자수모(賤者隨母)’를 따서, 학계에서는 이 법을 천자수모법이라 부른다. 고려시대의 천자수모법과 조선시대의 종모법은 뉘앙스의 차이가 약간 있긴 하나 본질적으로는 똑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고려왕조는 점차 종모법을 폐지하고 종부법을 따랐다. 이에 따라 고려 후기에는 일반적으로 자식들은 모두 자유인이 되었다. 그러다 원 간섭기 충렬왕 재위시기에 ‘'''일천즉천(一賤則賤: 부모 중 한쪽만 노비여도 그 자손들도 무조건 노비가 되는 법)의 원리'''’를 제창하면서 이후 노비 인구가 '''급증'''하였다.[2]
3.2. 조선 태종의 종부법 시행
고려 말 원 간섭기 시대의 제도를 계승한 조선 또한 개국 이래로 종모법을 실시했다.
그러다 태종 14년(1414년) 6월 예조판서 황희가 “아비가 양인이면 아들도 양인이니 종부법이 옳습니다”라고 개정을 건의했다. 태종 또한 “경의 말이 대단히 옳다. 재상(宰相)의 골육(骨肉)을 종모법에 따라 역사(役使)시키는 것은 심히 미편(未便)하다”라고 찬동했다. 태종이 ‘재상의 골육’을 언급한 것은 의도적이었다. 양반 사대부들의 첩에게서 난 자식들도 혜택을 입는 법이니 양반들에게 나쁘기만 한 법은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후 태종은 직접 윤음을 내려 종모법을 종부법으로 바꿨다.
종부법 개정은 신분제의 획기적인 진전으로서 이후 모친의 신분 때문에 눈물 흘리던 수많은 천인이 구제받은 것은 물론이고 양인의 숫자가 대폭 증가해 국가 재정이 튼튼해졌다. 여종을 소유한 양반 사대부들은 종부법에 큰 불만을 가졌으나 태종의 위세에 눌려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하늘이 백성을 낼 때는 본래 천인이 없었다. 전조(前朝·고려)의 노비법은 양인과 천인이 서로 혼인하면 천한 것을 우선해 어미를 따라 천인으로 삼았으므로 천인의 숫자가 날로 증가하고 양민의 숫자는 날로 감소했다. 영락(永樂) 12년(1414년) 6월28일 이후에는 공사(公私) 여종이 양인(良人)에게 시집가서 낳은 소생은 모두 종부법에 의거해 양인으로 만들라.”(<태종실록> 14년 6월27일 : 처음으로 관청 및 개인의 여종이 양인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식을 양인의 신분을 갖도록하다)
3.3. 조선 세종의 종부법 폐지와 종모법 시행
세종이 즉위한 후 맹사성, 허조 등의 대신들은 “천인 종모법은 또한 한 시대의 좋은 법규입니다”라면서 종모법으로의 환원을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마침내 1432년(세종 14)에 종부법을 폐지하고 종모법(從母法)을 시행하였다.
3.4. 조선 세조의 종부법 시행
이후 7대왕인 세조는 태종의 뜻을 이어 아버지가 폐지했던 종부법을 다시 시행하였다.
하지만 이때 예외규정으로 동서반유품관(東西班流品官)·문무과 출신·생원·성중관(成衆官)·유음자손(有蔭子孫)과 양인 가운데 40세 이상으로 자손이 없는 자의 천첩소생에게만 시행하였고, 당시 만들고 있던 경국대전에는 특수한 신분층의 천첩소생에게 예외로 속신(贖身)을 규정하였으며, '''양녀(良女)로서 노처(奴妻)가 되었을 경우, 그 소생은 종부법을 적용하도록 하였다.''' 이는 아버지가 노인(奴人)이고 어머니가 양인(良人)일 경우 그 자식은 무조건 노비가 된다는 뜻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여러 제한규정들 탓에 세조시대의 종부법은 그 의미와 효과가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세조는 이 종부법마저도 다시 금지하고 고려시대와 같이 '''부모 중 한 쪽 신분이 천인이면 그 소생은 신분뿐만 아니라 역처·상전까지도 무조건 천인계를 따르도록하는 '일천즉천법'으로 노비제를 더욱 퇴보시킨다.''' 그 뒤 이 내용을 『경국대전』에서 법제화하였다. 결국 세조 시대의 노비제는 '''제한적 종부법 → 종모법 → 일천즉천'''으로 결과적으로 크게 퇴보하게 되었다. 세조 노비제에 관해 feat 일천즉천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의 역설 (노비종모법)
이런 제도적인 퇴보 탓인지 그 동안 불법이었던 '''투탁노비(양민이나 천민 가운데 군역이나 조세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권문세족의 종으로 제 발로 들어가는 행위)'''도 세조시기에 재활성화되게 된다.
3.5. 조선 성종의 종부법 폐지와 종모법 시행
이후 성종이 즉위한 후 다시 세조가 시행했던 종부법을 폐지하고 세종대왕의 아름다운 뜻에 따른다는 이유로 종모법과 일천즉천의 원리를 다시금 천명하였다.
특히 세조가 처음 경국대전(병술대전)에 수록했던 종부법 제도를 없애고, 경국대전(을사대전)을 개정할 때 종모법의 규칙을 적용하여 전국에 반포하였다.
이로서 태종, 세조대의 종부법 찬성론자들이 완전히 패배하였고, 이후 경국대전에 수록된 종모법과 일천즉천의 원리는 약 250년간 조선을 지배하였다.
이후 조선은 노비인구가 1가문당 100명, 인구비율로는 10%를 넘지 못하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엄청난 노비 인구의 증가를 향유하였다.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했던 이맹현이 성종 25년(1494년) 자식들에게 상속한 노비 숫자는 757명이었고, 선조 39년(1606년)에 단성(丹城·경남 산청) 지역에서는 64%가 노비였고, 광해군 1년(1609년) 울산 지역에선 47%가 노비였다.
3.6. 조선 영조의 종모법과 개혁
훗날 오랜 시간이 지나 조선의 제21대 왕인 영조는 노비제 폐지를 추진했는데 종모법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다만 이때 시행한 개혁은 노비들의 숫자는 크게 줄였지만 태종, 세조 때와는 달리 양인의 숫자를 늘리지 못했다는 큰 문제점이 있었다.# 연구에 따르면 영조가 종모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시행한 개혁은 이후 양반이 18.7%로 10% 정도 급증했다. 양인은 54.6%로 별로 변화가 없었지만 대신 노비는 26.6%로 10%나 크게 줄었다. 즉, 노비 숫자가 줄어든 만큼 양인의 숫자가 늘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반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부를 축적한 백성들이 공명첩(空名帖·이름을 비워놓은 관직 임명장)을 산다든지, 양반들에게 직첩(職牒·벼슬 임명장)을 산다든지, 향리에게 돈을 주고 호적을 바꾼다든지 하는 방법들을 통해 양반 신분을 살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영조의 종모법을 유지한 노비제 개혁과 시행은 군역, 요역 및 세금의 의무를 지지 않는 지배계급인 양반들의 밥그릇 숫자만 크게 늘림으로써 양인신분의 수를 늘려 나라를 부강하게 했던 태종, 세조 때와는 달리 훗날 국가에 큰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3.7. 양천교혼(良賤交婚)과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奴良妻所生從母從良法)
고려시대 이래 전통적으로 노비의 혼인은 노비끼리의 동색혼(同色婚)만 인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양천교혼(良賤交婚)'''은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은 특이하게도 이 양천교혼이 굉장히 성행한 왕조였다.
흔히들 노비 남성은 양인 여성들과 혼인하는 비율이 낮고 양인 남성들이 노비 여성들과 혼인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생각하는데 조선 초기라면 몰라도 이미 중후기 부터는 그 반대인 '''노취양녀(奴娶良女)'''가 더 성행하였으며, 이에 따라 조선 건국 초부터 국방 정책과 관련해 이 문제가 논란의 대상으로 부상되었다. 양천교혼의 예로는 양인으로서 비부(婢夫)가 되는 경우와 양녀(良女)로서 노처(奴妻)가 되는 두 가지가 있었다.
이후 조선 후기에 들어 신분제가 해이해져 양역인구(良役人口)가 감소하고 사회 생활의 변화에 따라 사회신분보다 경제력이 더 크게 작용함에 따라 양천교혼이 더욱 성행하였다. 특히 '''양녀로서 노처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에 들어와 양역을 담당할 인구가 부족하게 되자, 국가에서는 노비의 신분적 규제를 완화하여 이들의 일부를 제도적으로 양인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 법제화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奴良妻所生從母從良法)'''」이다. 이법은 간단하게 요약하면 '''노와 양녀가 혼인하여 낳은 소생을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양인신분으로 하여(자식의 신분이 어머니의 신분을 따른다는 점에서 '종모법'에 근거한다.) 이들에게 양역을 지울 목적'''으로 실시된 것이었다.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은 율곡 이이(栗谷 李珥)가 선조 때에 처음 그 실시를 주장하였으나, 그 때는 실시되지 못하였다가 그 후 현종 10년(1669)에 송시열(宋時烈)이 이 법의 실시를 강력히 주장하여 처음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 법은 이후 집권세력 사이의 정치적 입장으로 서인(노론)의 집권기간에는 실시되었으나, 남인의 집권기간에는 폐지되는 악순환을 거듭하다가 영조 7년에야 영구히 하나의 법령으로 제도화되었다.
노비의 신분귀속에 있어서 노인 아버지의 신분에 따라 노비로 된 자들이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이 실시된 지 50여 년이 지난 정조년간에 작성된 호구자료에도 기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법이 실제 지방양반들 사이에 제대로 지켜지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일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하여도 영조 이후 '''노와 양녀와의 결혼이 더욱 성행'''했던 것은 역시 '''노비들이 이 법으로 그 소생을 간단히 면천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법의 실시는 조선사회의 엄격한 신분제도를 크게 변질시켜 노비와 양인과의 간격이 그리 명확하지 않을 정도로 변화되어 신분질서의 해이를 초래하였다.
이처럼 이 종모법(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 때문에 자식들을 양인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많은 노인(남자 노비)들이 더 더욱 많은 양인 여성들과 혼인을 하게됨으로서 결과적으로 조선 후기 신분제 붕괴에 크게 기여했음을 볼 때 종부법과 종모법 둘 중 어느쪽이 더 노비 비율을 낮춰주는지는 의미가 없는 논쟁이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둘 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기도 했고 무엇보다 시대에 따라 혼인 풍속 자체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4. 바깥고리
[1] 엄밀히 말해 남자 천인과 여자 양인 간의 자녀도 해당되는 법이다. 다만 이 사례는 조선 초기에는 드물었고 중-후기에 가서야 노취양녀(奴娶良女)가 대세가 됨에따라 그 사례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2] 사실 고려시기에도 노비제 개혁 시도가 있기는 했었다. 원 간섭기 당시 충렬왕과 충선왕의 부자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였고 이 사건 이후 원나라의 야율희일(耶律希逸)과 활리길사(濶里吉思)가 정동행성의 승상으로 내려와 직접 고려를 통치하기 시작했을 때 고려의 상급관리들의 처벌은 반드시 원나라에 보고하도록 하며, 관리수도 줄이고, 노비제도를 원나라의 법식대로 고치도록 했다. 웃기게도 노비제도가 그나마 인간적으로 돌아가던 시기가 이 시기였다. 고려의 권문세족 지배층들은 노비들을 늘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원나라는 오히려 노비를 줄이는 쪽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물론 남송인은 노예로 삼았지만 동족노비화가 아니라 피지배 민족 자체가 모두 노비인 특이한 경우였고, 그 외 노비들은 모두 죄인들이었다.) 하지만 '세조구제'를 내세운 고려 지배층의 격렬한 저항으로 원나라 주도의 노비제 개혁 만큼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간다(...). 그 저항의 레벨도 단순 저항이 아니라, 칸발리크에 직접 로비를 때려박아 다루가치를 갈아치워 버릴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