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사성

 


'''성명'''
맹사성(孟思誠)
'''본관'''
신창 맹씨
'''출생'''
1360년 8월 28일 고려 양광도 온양
'''사망'''
1438년 10월 22일 조선 한양
'''자'''
자명(自明)
'''호'''
고불(古佛)[1]·동포(東浦)
'''시호'''
문정(文貞)
1. 소개
2. 생애
3. 만년 좌의정
4. 예술가적 재능
5. 야사
6. 대중매체에서
7. 관련 문서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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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여말선초문신.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 본관은 지금의 신창역이 있는 지역인 신창(新昌), 출생은 충청도 온양(溫陽).[2]
조선 초의 황희 정승과 함께 세종 시기는 물론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명재상이자 청백리의 상징으로 통하며 우의정, 좌의정까지 올랐다.
하지만 역대 영의정 최장기 재임자인 황희에 밀려 은근히 이 사실이 묻히는 데다 맹사성 본인도 영의정은 되지 못했다. 다만 영의정 문서에 나오듯이 영의정은 최고위직이지만 명예직적인 성격이 컸고 실질적인 권한은 오히려 좌의정과 우의정이 더 많았다. 게다가 이상하게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노비종부법을 찬성한 황희와 반대로 허조와 손잡고 노비종모법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킨 흑역사가 있다. 더 심한 건 황희랑 짜고 사건을 조작한 일.
태종실록, 고려사, 팔도지리지, 신창경제육전 편찬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한 맹사성은 긴 관직 생활 동안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해 덕망이 높았다. 사람됨이 소탈하고 엄하지 않아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을 갖추고 대문 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역시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나이가 들어 하직을 간청했으나 세종의 거부로 1435년까지 재직하게 되었고 그 해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으나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맹사성에게 자문했다 한다. 맹사성이 세상을 떠나던 날 세종이 모든 국정을 중단한 채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문상했다고 한다. 사실 86세까지 부려먹히고 88세에 세상을 떠난 황희 때문에 부각되지 않았을뿐 맹사성도 78세에 죽었으니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장수한 편이다.
태종이 맹사성을 종친 세력 강화 용도로 이용해 먹은 적이 있는데 태종의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에 걸려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난 적이 있다. 이 사건에 아들인 맹귀미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자세한 것은 조대림 사건 참조.

2. 생애


맹사성의 조부인 맹유(孟裕)는 고려 말기의 고위 관리로, 최영과 친구 사이였다. 두문동 72현[3] 중 하나로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개경 두문동에 칩거하였다. 맹유의 아들이자 맹사성의 아버지인 맹희도(孟希道) 역시 세상에 나오지 않고 충청도 한산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맹희도의 절친이 바로 그 정몽주였다. 맹사성의 아내는 최영의 손녀였으며, 슬하에 아들 둘을 두었다.
조부가 고려 말미 고위 관직에 있었고, 조부의 친구이자 아내의 할아버지가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싸우다 죽임을 당하였으며, 아버지의 친구 역시 조선 개국에 반대하다 왕가에 의해 죽음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계가 맹사성의 재능을 특별히 여겨 연좌시키지 않고 중용하였다.
조선 개국 직후 관직에 올랐으며, 세종 때 좌의정에 올랐다. 말년에는 온양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1438년 사망하였다.

3. 만년 좌의정


사실 원래 삼정승 가운데 좌의정, 우의정이 실권자이고 영의정은 그냥 조정의 영수같은 명예직 비슷한 느낌이라[4] 조선조에 실세 영의정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오히려 맹사성이 워낙에 뛰어나서 그 자리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좌의정은 이조, 호조, 예조를 관할하는 직책으로 황희처럼 받을 것 좀 받고, 재산도 축적하기가 용이한 자리였다. 워낙에 청백리였기에 인사와 재무와 교육을 담당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반면에 황희의 경우 이, 호, 예, 병, 형, 공의 모든 관직을 태종 때 두루두루 맡았다. 한 마디로 두루두루 국정 전반에 관해서 넓게 알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영의정의 임무가 실권은 없는 대신에 각조간의 조율을 맡는것이 관직의 임무이다. 그래서 과단성 있고 국정 전반에 밝은 황희가 영의정을 계속 맡았고, 청백리면서 자기주장만 강권하지 않고 적당히 물러설 수 있는 맹사성을 실무자로서 좌의정에 제수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또한 맹사성 개인의 성격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맹사성은 황희에 비해 관리들이나 정국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박력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실제 황희는 강직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추진하는 인물이었는데 맹사성은 자신의 의견을 내더라도 분명하게 개진하기보다는 우회적으로 신중하게 의견을 내는 스타일이었다. 실록에서도 맹사성의 단점으로 '''너무 우유부단해서 강직한 결단력을 내리는 능력이 부족했다'''고 적고 있는데 좋게 말하면 부드러운 성품의 호인이었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물러터진(!) 사람이었다는 소리. 그래서 실록에서도 이 점을 크게 까고 있다. 세종 16년 8월 7일자 실록을 보면 판이조 맹사성은 너무 착하고 우유부단하며 판서 신개는 "예예"하기만 해 도승지 안숭선이 전선(銓選)을 도맡았다고 서술하고 있다.[5] 게다가 남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했다. 대표적인 예가 황희의 사위가 살인을 저질렀을 때 사위의 죄를 묻으려고 했던 황희의 부탁을 받고 같이 이 사안을 묻으려다가 '''세종에게 걸려서''' 파직크리를 먹고 망신을 당했던 일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맹사성의 이런 면모는 황희와의 투톱 체제에서 좋게 작용했는데, 맹사성의 이런 성품이 황희나 허조 같은 강직한 대신들의 단호함이나 날카로움을 완화시키고 대신들간의 논쟁을 중재, 진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황희와 맹사성은 일종의 상호보완 관계였던 셈. 그리고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면모답게 섬세함이 요구되는 일처리에서 강점을 발휘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황희에 가려서 영의정이 못된 것이 아니고 그 자리에 그 인물인 것이다. 예를 들어 축구에서 프란츠 베켄바워게르트 뮐러를 바꿀 수가 없는 것처럼 황희는 영의정의 일을 잘 하는 인물이고 맹사성은 좌의정의 일을 잘 하는 인물인 것이다. 워낙에 그 분야에 출중했기 때문에 자리변동이 없었던 것이다. 더불어 둘다 죽을 때까지 혹사당하고 과로사했다. 특히 황희가 86세까지 영의정 노릇을 한 것은 아마 우리나라 최장수 총리(?)와 최장기 총리일 듯.

4. 예술가적 재능


우리 고유 음악인 향악에 조예가 남달라 조선 초기 우리 음악의 기초를 닦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마침 박연, 류사눌 등 당시 관리들 중에는 음악에 능한 사람이 꽤 있었기에 이들과의 협업으로 조선의 예악이 수월하게 정비될 수 있었다. 박연이 악기를 제작할 때에도 그가 도왔다.
맹사성과 관련된 기록 가운데에서도 그가 음악에 능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들이 많다. 태종 11년(1411) 판충주목사로 임명될 예정이었을 때 예조에서는 훌륭한 지방관은 많아도 음악에 능한 사람은 찾기 힘들다면서, 맹사성이 거의 선왕의 음악을 회복할 수 있을 정도로 솜씨가 뛰어나기에 삼기 아깝다는 의견을 낸다. 엄청난 칭찬이다.

(…) 예조에서 아뢰었다.

"관습 도감 제조(慣習都監提調) 맹사성(孟思誠)은 음률에 정(精)하여 거의 선왕(先王)의 음악을 회복할 수 있는데, 근일에 판충주(判忠州)를 제수하였습니다. 신 등은 생각건대 한 고을의 정무(政務)는 사람마다 능한 이가 많지마는 선왕의 음악은 사람마다 능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청컨대, 맹사성을 머물게 하여서 정악(正樂)을 가르치소서."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윤12월 7일 계해 1번째기사

그 이듬해에도 영의정을 지내던 하륜이 비슷한 지적을 하며 역시 맹사성의 음악 솜씨를 높이 평가한다.

맹사성(孟思誠)을 풍해도 도관찰사(豐海道都觀察使)로, 마천목(馬天牧)을 전라도 병마 도절제사(全羅道兵馬都節制使)로 삼았다. 영의정 하륜(河崙)이 상언(上言)하였다.

"본국의 악보(樂譜)가 다 폐결(廢缺)되어 오직 맹사성만이 악보에 밝아서 오음(五音)을 잘 어울리게 합니다. 지금 감사의 임명을 받아 장차 풍해도로 가게 되었는데, 원컨대, 머물러서 악공(樂工)을 가르치게 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교대되기를 기다려서 바야흐로 악곡을 가르치도록 허락하겠다."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5월 3일 병술 3번째기사

세종대왕의 즉위년에 열린 잔치에서는 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음악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맹사성의 이름이 튀어나온다. 말 나온 김에 음악 전문가인 맹사성이 관련 서무를 맡아 보게 한 것.

박신이 또 아뢰기를,

"중국의 부로(父老)들은 모두 《명칭가곡(名稱歌曲)》을 부르고 궁중의 사람들도 또한 이 곡을 부르더이다."

하니, 상왕이 말하기를,

"지신사(知申事)가 이 일을 관장하여, 공인(工人)과 기생(妓生)으로 하여금 익히게 하고, 중국 사신에게 아뢰게 할 것이며, 맹 판서(孟判書)가 평소에 음률(音律)을 아니, 곡조(曲調)가 《진작(眞勺)》에 합하는 것을 뽑아라."

고 하였다.

이 밖에도 세종이 음악에 연관된 일을 논의할 때면 맹사성과 상의하는 일이 잦았다. 음악에 정통한 재상으로 모두에게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퉁소를 잘 불었다고 하며 평소에 집에서도 퉁소를 즐겨 불어서 맹사성을 찾아온 사람들이 집 밖에서 퉁소 소리를 듣고 맹사성이 집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야사가 전해질 정도. 실록의 졸기에도 '음률에 능해 스스로 악기를 만들 줄도 알았다'고 기록된 것을 보면 야사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 전기의 시조인 '강호사시가'를 만든 사람이기도 한데 송순과 비슷하게 자연 속에서 자연을 즐기는 자연관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맹사성은 당시 임금을 찬양하면서 지은 것이고 송순은 한정가로 불렀다는 것.[6]

5. 야사


청백리인데다 소탈한 그는 야사에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백성들이 친근하게 여겼던 사람이라는 증거.

  • 맹사성의 할아버지인 맹유가 자신의 며느리가 해를 삼키는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절에 들어가 공부하던 자식인 맹희도에게 '부친위독'이라는 급전을 띄워 집으로 불러들인 후 며느리와 동침케 하여 태어난 게 맹사성이었다고 한다.
  • 어느 날 최영이 낮잠을 자고 있는데, 용 한마리가 집앞 배나무를 타고 승천하고 있는 꿈을 꾸었다. 놀라 깨어 밖으로 나가 보니 어린 맹사성이 배나무에 올라 배를 따고 있었다고 한다. 최영이 꾸짖는 척 하며 동태를 살피니 보통 아이들처럼 울거나 도망치지 않고 예의를 갖추어 잘못을 고하는 모습에서 범상치 않음을 보고 손녀사위로 삼았다. 이후 최영이 그 집을 맹사성에게 물려주었는데, 준 집이 지금 충남 아산에 있는 맹씨행단(孟氏杏壇)이다.
  •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7]로 했고, 바깥 출입을 할 때에는 타기를 즐겨,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처럼 지혜로우면서도 청렴결백한 맹사성의 성품은 요즘 사람들에게 더욱 귀감이 되고 있다.[8]
  • 황소를 타고 수수한 차림으로 다녔다는 일화도 유명. 고향인 온양에 내려갈 일이 있었던 맹사성에게 한 현감이[9] 잘 보이기 위해 그가 지나갈 길을 닦고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맹사성은 나타나지 않고 웬 소를 탄 노인이 길을 떡하니 지나갔다. 어이가 없어진 현감이 하인들을 시켜 그 노인을 잡아오려 했지만 노인은 하인들에게 "온양 사는 맹꼬부리가[10] 제 소 타고 제 갈 길 가는데 어찌 바쁜 사람을 붙잡는가?"라고 허허 웃으며 받아치고는 제 갈 길을 갔다. 한참 지난 다음에서야 부랴부랴 맹사성을 따라가던 하인들에게서 보고를 받고서야 그 노인이 맹사성이었다는 것을 안 현감이 사죄하기 위해 달려가다가 인수를 연못에 빠뜨려 버려서 그 연못을 '인침연(印沈淵: 도장 빠진 연못)'이라고 했다는 일화도 유명한 이야기.[11]
  • 맹사성은 틈틈이 휴가를 얻어 고양 온양으로 종종 놀러가 낚시로 소일하곤 했다. 어느날 비가 내려 시냇가의 물이 좀 불었는데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였다. 그런데 건너편의 한 젊은 선비가 대뜸 낚시 중인 맹사성을 불러 선비가 옷을 걷고 체통없이 건널 순 없으니 업어달라는 게 아닌가. 건방진 선비의 요구에도 맹사성은 군말없이 건너가 선비를 업어다주었다. 그런데 맹사성이 쓴 삿갓이 얼굴에 비벼지자 신경질이 난 선비가 삿갓을 들어 내동댕이 쳤다. 그러자 지체높으신 분들이나 쓰는 옥관자가 고스란히 드러났고 선비는 그제서야 이분이 맹사성 대감임을 깨닫고 부리나케 뛰어내려 신발이 젖는 것도 모르고 도망쳤다. 또는 얌전히 잘 건넌 후 "노인장은 어디 사는 뉘시오"라는 질문에 위에처럼 온양사는 맹고불이라 답하자 역시 놀라서 물에 쫄딱 젖어 도망쳤다는 버전도 있다.
  • 야사에선 벼슬자리 구하러 가던 선비와 벌인 언어유희(지금 시각으로 보면 그야말로 '야자타임'겸 '통신체'...)인 '공당문답'으로 유명하다.
맹사성이 길을 가다 정자에서 쉬는데, 거기에 어떤 젊은 선비가 먼저 와 있었다. 맹사성의 검소한 옷차림을 보고 정체를 알아채지 못한 젊은이가 그를 놀릴 양으로 "우리 '공당놀이'란 걸 해 볼까요? 댁은 말 끝에 '~공'이라고 하고 나는 말 끝에 '~당'이라고 하는 거요"라고 제안했다. [12] 그리하여...
"그대는 어딜 가는공?" / "한양에 간당."
"한양엔 왜 가는공?" / "벼슬자리 구하러 간당."("과거를 보아 맹 꼬부리/맹 정승을 뵈러 간당"이라는 식으로 나오기도 한다.)
"한양가서 벼슬자리 줄 사람 있는공?" / "없당."
"그럼 벼슬자린 어떻게 얻으려고 하는공?" / "나도 모른당."
"그럼 내가 벼슬 하나 주면 어떤공?" / (폭소하며) "바라지도 않는당."(혹은 "가당찮은 소리 맙시당.")
그 후 시간이 지나 맹사성이 신참 관리들의 하례를 받게 되었는데, 마침 그 자리에 예전에 자신을 놀리던 그 젊은이도 있었다. 이에 장난기가 동해 장난을 걸었다.
"자네, 나를 알아보겠는공?" / (고개 들고는 깜짝 놀라) "아, 알아보겠당."
"그래, 지금 기분이 어떠한공?" / "주, 죽고만 싶당."("죽여주사이당.", "그저 죽어지어당." 등의 버전도 있다. 맹꽁이 서당에선 '''"죽어지당! 죽어지당!"'''(...))
이후 맹사성은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그 선비를 잘 보살펴 뒤를 봐 주었다고 하공...
그런데, 맹사성은 그렇다 쳐도 저 와중에서 공당놀이로 다시 화답한 선비도 좀 짱이지 않은공.[13] 조선시대 야사 중에는 이런 식으로 '소박한 차림으로 있던 당대 권력자를 미관말직이나 과거 보러 가는 젊은이가 몰라보고 놀려먹는데, 나중에 궐에서 젊은이를 다시 만난 권력자가 거꾸로 놀려먹는다'는 이야기들이 좀 있는데, 젊은이가 이때 대응을 잘 해내면 권력자가 '허허 이 친구 보통내기가 아니구먼' 하면서 지난날의 무례도 탓하지 않고 잘 보살펴준다는 결말을 맺곤 한다.
'''맹사성이 먼저 공당문답을 제안했다는 바리에이션'''도 있는데 이 버전은 공당문답의 상대 젊은이가 웬 싸이코가 찝적대냐는 식으로 속으로 생각하다가 나중에 맹사성의 은혜를 입은 뒤 공당문답의 인물이 맹사성임을 알자 대경실색한다는 내용이다.

6. 대중매체에서


창작물에 출연한 사례로는 드라마 용의 눈물대왕 세종이 있다. 용의 눈물은 태조 왕건에서 박영규로 잘 알려진 배우 임혁주가, 대왕 세종은 안대용이 각각 배역을 맡았다. 두 작품 모두 잘 알려진 것과 비슷하게 온화하고 청렴한 성품으로 묘사하고 있다. 용의 눈물에서는 왕권파의 인물로 그려지며 청렴한 모습으로 그려진 것은 맞지만 강직한 캐릭터로 묘사되기 때문에 쓴소리를 많이 하고 소리도 많이 친다. 후반에는 이화와 함께 민무질 형제를 벌해야 된다는 대사가 절반이다. 양녕과 함께 사신단에 포함돼서 명나라로 가던 도중 이지성이 민무질 형제를 옹호하자 발끈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대왕세종에도 온화하고 청렴한 성품으로 나오지만, 용의 눈물의 모습에 비해서는 능글맞고 말 속에 뼈가 있는 면모가 좀 더 강하다. 첫 등장부터 피리를 불며 소를 타고 입궐하는데,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긴 허조가 한 소리 하자 맹사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 녀석(타고 온 황소)을 빈청(조정의 회의실)에 끌고 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게. 저 녀석이 있는 짐승 우리가 빈청과 다를 게 뭔가? 시끄럽지,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지.'
2016년 사극 장영실에서는 김병기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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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허리가 굽어 '맹꼬불'이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이를 한자로 음차한 것.[2]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 실제로 맹사성 고택이 있으며 2015년 기준 가장 오래된 민간 가옥이다. 원래는 최영 장군의 집(1330년 최영의 부친인 최원직이 지었다고 함)이었으나 위화도 회군 이후 비어있던 집에 맹사성 일가가 전란을 피해 내려와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택, 사당, 구괴정, 맹사성이 심었다는 은행나무단을 망라하여 맹씨행단이라 부른다. 현재도 마을은 신창 맹씨 집성촌이며 인근의 수철리와 휴대리에도 집성촌이 있다.[3]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끝까지 출사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고려의 유신 72인이다. 두문동 태학생 72인이라고도 한다. 사자성어 두문불출의 유래이기도 하다.[4] 중국에서도 가장 높은 삼사(태사, 태부, 태보), 삼공(사도, 사마, 사공) 등은 전부 명예직이다.[5] 요즘식으로 말하면 행정안전부 장관과 인사처장이 너무 유약해서 대통령 비서실장이 인사를 전횡하는 상황이라 생각하면 된다.[6] 이 시절에는 임금에 대한 찬양시를 짓는게 딱히 이상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맹사성이 임금에 아부하느라 지은 시가 아니라 그냥 유교적 덕목이었다는 것.[7] 조정에서 봉급으로 주던 쌀.[8] 황희는 의외로 비리 문제를 많이 터뜨린 편이다.[9] 버전에 따라서는 아예 그 일대의 수령들이 죄다 모여서 진을 치고 있다고도 한다. 맹꽁이 서당의 경우는 두 명으로 묘사했다. 지명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경우에는 진위(현재의 평택시 진위면) 현감, 양성(현재의 안성시 양성면) 현감 등으로 언급된다.[10] 그의 호, 고불을 살짝 비틀어서 등이 꼬부라졌다는 뜻의 언어유희를 구사[11] 침인연이라고 불리는 판본도 있으며 참고로 조선시대에 이렇게 공인(公印)을 잃어버리는건 익직이라 하여 파면을 면치 못하는 중죄에 속했다.[12] 사실 심오할듯 심오하지 않은 의미가 담겨있는데, 의문형 어미인 '-고'가 변하여 된 공公과 종결형 어미인 '-다'가 변하여 된 당堂이 서로 '-ng' 으로 운자韻字가 맞추어져 한시漢詩적 율격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짜 중요한 부분은, 노인인 맹사성이 '-고'의 성격으로 묻는데 청년인 선비는 '-다'의 성격으로 답하게 되어 장유의 구분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선비는 이것을 노리고 놀려 먹을 양으로 '공당문답'을 제안했던 것.[13] 실제 선비가 곧바로 공당놀이로 대답하자 맹사성이 크게 감탄했다는 버전의 이야기도 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