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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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俊鎬
1889년 8월 29일 ~ 1950년 9월 28일
일제강점기의 기업가이자 교육가. 호남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갑부였으며, 금융인이자 간척사업가로서도 명성을 남겼지만, 사업 과정에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친일행적의 그림자도 있는 인물. 호는 무송(撫松)이다. 본관은 성주(星州).
1889년 8월 29일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학계리[1]#에서 만석꾼 현기봉[2] 의 아들로 태어났다.
담양의 창평영학숙(昌平英學塾)에서 송진우, 김성수, 김병로와 함께 수학하였고, 그 후 일본에 유학을 가서 메이지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메이지대학에서 함께 공부한 동문으로는 허헌, 김병로, 이인, 조만식, 조소앙, 송진우 등을 들 수 있다.
1917년 귀국하여 1919년 7월 주식회사 호남은행의 발기인이 되어 은행 창립에 힘썼다. 1920년 8월 호남은행을 설립하고 전무취체역에 취임했다.
이 무렵 김성수에 의해 주식회사 동아일보가 설립되자 이 신문사의 감사에 취임했다. 1924년 4월 전라남도 평의원에 올랐으며 1925년 호남은행의 대표가 되었다. 1926년 5월 전라남도 도시제사(道是製絲) 주식회사 이사, 같은 달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 감사에 취임하였다.
1921년 1월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 감사가 되었다. 1925년에는 전라남도 간부였던 고원훈과 토의하여 1926년에 전남육영회(全南育英會)를 조직하였다. 1926년 유지들과 협력하여 여자고등보통학교 설립기성회를 조직하자 대표위원으로 추대되었고 1927년 5월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재의 전남여고) 설립에 참여하였다. 그 외에도 현재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광주의학전문학교’를 세울 때는 거액을 내놓는 등, 많은 교육 사업을 실행하였다.
김성수, 송진우와 함께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에 참여하는 등 민족주의적 계몽 운동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1930년 중추원 참의가 되면서 민족주의 운동과는 결별하게 되었다.
1939년에는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기 위한 민족경제 부흥’이라는 기치 아래 전남 영암 서해안 간척사업을 기획하였다. 결국 일제에게서 공사권을 따내고 동양척식회사와 신탁은행에게서 자금을 조달받아 1943년 4월부터 영암 서호간척지 공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1944년 5월 서호면 성재리에서 양장리에 이르는 약 1.6킬로미터에 이르는 제방공사를 완성시켰다.
이때 일궈낸 간척지의 규모는 약 270만 평에 달했다.[3] 간척사업으로 세운 학파농장에서 약 5천 명이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을 만큼 많은 고용을 창출하였다. 당시는 일제말로서 거의 모든 조선백성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무려 5천 명의 밥줄을 해결해준 것. 또한 공사 기간에는 전남 지역에 일시적으로 큰 돈이 돌았으며, 완공 후에는 굳이 '''만주로 가지 않아도''' 사람들이 고향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어 지역민들의 인심을 크게 얻게 되었다.[4]
그 외에도 송정리~담양 간의 조철선(朝鐵線), 광주~여수 간의 남철선(南鐵線) 철도를 유치하였다. 또한 다년간 광주번영회장에 재직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후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시국강연반에 참여하였다. 이때 전남 지역을 돌면서 전쟁 지원을 역설하였다.
1938년 조선총독부 산하에 설치된 시국대책조사위원회에도 조사위원으로 임명되어 참여했다. 1941년에는 윤치호의 흥아보국단에 준비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참가했고, 중추원 고문과 참의들이 결성한 시국강연반 소속으로 태평양 전쟁 말기까지 징병제 홍보와 학병 지원 권유 등에 가담했다. 조선임전보국단에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광복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도산 안창호를 따랐던 평안도 정치인들과[5] 김성수 등의 구명활동으로 불구속 수사를 받았으며,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결국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게 되었다. 또 그는 해방될 때까지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내세워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 후 한국 전쟁 때 광주에 들이닥친 북한군에게 붙잡혀[6] 1950년 9월 28일 장남 현영익과 함께 처형되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반민족행위자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현준호가 조선인을 위해 결코 나쁜 일을 한 게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현준호의 호남은행이 일본인 직원을 채용하지 않고 일본인에게 융자를 해주지 않아 동일은행에 강제 합병 당한 적도 있다는 것. 그는 또 조선에 와서 부를 축적한 일본인들은 그 돈을 일본으로 가져갈 것이 아니라 조선에 재투자하여 조선인들로부터 반감을 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부산과 시모노세키간을 오가는 선편에서 조선인들에게 도항증명서를 발급받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역시 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이므로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친일활동은 일제강점기때 악화 되었던 한국 경제를 살리기 위한 의도였다 한다. 그 외 인촌 김성수와 마찬가지로 민족자본가로서 독립운동을 몰래 후원했다고도 한다.
일제강점 말기에 서호간척사업으로 수많은 농민들의 생계를 해결해준 것도 그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소작꾼들과 노무자들의 노임지급 요구에도 성실히 응해 품삯을 두둑히 챙겨주었다고도 한다. 빈민구제활동을 활발히 했다는 증거도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일제의 군국주의에 협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농민들에게서 인심을 잃지 않았다. 6.25 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잡혀서 '''죽기 직전까지도''' 그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있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고 한다.[7]
현대그룹 회장 현정은의 할아버지로도 유명하다. 아래는 가족관계의 자세한 목록.
玄俊鎬
1889년 8월 29일 ~ 1950년 9월 28일
1. 개요
일제강점기의 기업가이자 교육가. 호남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갑부였으며, 금융인이자 간척사업가로서도 명성을 남겼지만, 사업 과정에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친일행적의 그림자도 있는 인물. 호는 무송(撫松)이다. 본관은 성주(星州).
2. 생애
2.1. 초년 시절
1889년 8월 29일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학계리[1]#에서 만석꾼 현기봉[2] 의 아들로 태어났다.
담양의 창평영학숙(昌平英學塾)에서 송진우, 김성수, 김병로와 함께 수학하였고, 그 후 일본에 유학을 가서 메이지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메이지대학에서 함께 공부한 동문으로는 허헌, 김병로, 이인, 조만식, 조소앙, 송진우 등을 들 수 있다.
2.2. 기업가, 교육사업가로서의 활동
1917년 귀국하여 1919년 7월 주식회사 호남은행의 발기인이 되어 은행 창립에 힘썼다. 1920년 8월 호남은행을 설립하고 전무취체역에 취임했다.
이 무렵 김성수에 의해 주식회사 동아일보가 설립되자 이 신문사의 감사에 취임했다. 1924년 4월 전라남도 평의원에 올랐으며 1925년 호남은행의 대표가 되었다. 1926년 5월 전라남도 도시제사(道是製絲) 주식회사 이사, 같은 달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 감사에 취임하였다.
1921년 1월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 감사가 되었다. 1925년에는 전라남도 간부였던 고원훈과 토의하여 1926년에 전남육영회(全南育英會)를 조직하였다. 1926년 유지들과 협력하여 여자고등보통학교 설립기성회를 조직하자 대표위원으로 추대되었고 1927년 5월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재의 전남여고) 설립에 참여하였다. 그 외에도 현재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광주의학전문학교’를 세울 때는 거액을 내놓는 등, 많은 교육 사업을 실행하였다.
김성수, 송진우와 함께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에 참여하는 등 민족주의적 계몽 운동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1930년 중추원 참의가 되면서 민족주의 운동과는 결별하게 되었다.
1939년에는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기 위한 민족경제 부흥’이라는 기치 아래 전남 영암 서해안 간척사업을 기획하였다. 결국 일제에게서 공사권을 따내고 동양척식회사와 신탁은행에게서 자금을 조달받아 1943년 4월부터 영암 서호간척지 공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1944년 5월 서호면 성재리에서 양장리에 이르는 약 1.6킬로미터에 이르는 제방공사를 완성시켰다.
이때 일궈낸 간척지의 규모는 약 270만 평에 달했다.[3] 간척사업으로 세운 학파농장에서 약 5천 명이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을 만큼 많은 고용을 창출하였다. 당시는 일제말로서 거의 모든 조선백성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무려 5천 명의 밥줄을 해결해준 것. 또한 공사 기간에는 전남 지역에 일시적으로 큰 돈이 돌았으며, 완공 후에는 굳이 '''만주로 가지 않아도''' 사람들이 고향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어 지역민들의 인심을 크게 얻게 되었다.[4]
그 외에도 송정리~담양 간의 조철선(朝鐵線), 광주~여수 간의 남철선(南鐵線) 철도를 유치하였다. 또한 다년간 광주번영회장에 재직하였다.
2.3. 친일행적과 최후
중일전쟁 발발 후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시국강연반에 참여하였다. 이때 전남 지역을 돌면서 전쟁 지원을 역설하였다.
1938년 조선총독부 산하에 설치된 시국대책조사위원회에도 조사위원으로 임명되어 참여했다. 1941년에는 윤치호의 흥아보국단에 준비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참가했고, 중추원 고문과 참의들이 결성한 시국강연반 소속으로 태평양 전쟁 말기까지 징병제 홍보와 학병 지원 권유 등에 가담했다. 조선임전보국단에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광복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도산 안창호를 따랐던 평안도 정치인들과[5] 김성수 등의 구명활동으로 불구속 수사를 받았으며,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결국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게 되었다. 또 그는 해방될 때까지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내세워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 후 한국 전쟁 때 광주에 들이닥친 북한군에게 붙잡혀[6] 1950년 9월 28일 장남 현영익과 함께 처형되었다.
3. 평가
2002년 발표된 친일반민족행위자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현준호가 조선인을 위해 결코 나쁜 일을 한 게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현준호의 호남은행이 일본인 직원을 채용하지 않고 일본인에게 융자를 해주지 않아 동일은행에 강제 합병 당한 적도 있다는 것. 그는 또 조선에 와서 부를 축적한 일본인들은 그 돈을 일본으로 가져갈 것이 아니라 조선에 재투자하여 조선인들로부터 반감을 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부산과 시모노세키간을 오가는 선편에서 조선인들에게 도항증명서를 발급받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역시 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이므로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친일활동은 일제강점기때 악화 되었던 한국 경제를 살리기 위한 의도였다 한다. 그 외 인촌 김성수와 마찬가지로 민족자본가로서 독립운동을 몰래 후원했다고도 한다.
일제강점 말기에 서호간척사업으로 수많은 농민들의 생계를 해결해준 것도 그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소작꾼들과 노무자들의 노임지급 요구에도 성실히 응해 품삯을 두둑히 챙겨주었다고도 한다. 빈민구제활동을 활발히 했다는 증거도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일제의 군국주의에 협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농민들에게서 인심을 잃지 않았다. 6.25 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잡혀서 '''죽기 직전까지도''' 그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있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고 한다.[7]
4. 가족 관계
현대그룹 회장 현정은의 할아버지로도 유명하다. 아래는 가족관계의 자세한 목록.
- 아버지: 현기봉(玄基奉), 어머니: 곽순경(郭順卿)
[1] 성주 현씨 집성촌이다.[2] 玄基奉. 중추원의 참의를 지내는 등 일제에 적극 협력한 지역 유지로, 그의 집안 성주 현씨는 호남 지방에서 유명한 거부 가문이었다.[3] 오늘날 읍이나 면은 대개 80만평 ~ 300만평 정도 되는 크기이다. 즉 읍면 수준의 넓이를 방조제를 쌓고 물을 메워 전부 논밭으로 바꾼 것.[4] 훗날 경제개발시절 돈벌이에 급급한 몇몇 향토 기업인들이 광주 O적 하는 식으로 비난을 받았지만, 현 씨의 경우는 오히려 현준호 '''"선생"'''이라 존칭을 붙여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5] 해방 전 도산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었으며, 일본 경찰 측에서 '''20명 이상 한 자리에 모일 수 없도록''' 규제하는걸 이용해, 오히려 열흘 동안 징역살이로 몸이 약해진 안 선생을 극진히 대접한 적 있다.[6] 얼마든지 피난을 갈 수 있었으나 전처 김희정의 제사를 치러주고 노모 곽순경까지 챙기려다가 피난 갈 타이밍을 놓쳤다고 한다.[7] 6.25 때 현준호와 같이 징역을 살았던 西중학교(훗날 광주일고) 교사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군이 철수하기 전 무작위로 사람을 호출해 처형했는데, 현 씨의 경우 눈치가 빠른 수감자 한 사람이 팔을 붙잡고 못일어나게 말렸다고 한다. 북한 군인이 재차 호명하자, 웃으면서 "전날 좋은 꿈을 꾸었으니 별일 없을 것"이라 말하며 나가 끝내 행방불명되고 말았다는 것.[8] 국회 의사과장 역임. 한국전쟁 때 광주에서 피난을 빨리 못 가는 바람에 아버지 현준호와 함께 북한군에 붙잡혔다. 결국 1950년 9월 28일 아버지와 함께 처형되었다. 현영익의 큰 아들이 현양래 현우실업 대표이다.[9] 한국전쟁 때 국군 중위로 제주도에서 근무하고 있다가 전방부대에 차출됐다.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혀 억류돼있다가 스스로 돌에 부딪혀 자살했다.[10] 1927년 生. 1950년에 현준호와 그의 장남, 차남이 죽은 후 현준호 가문의 실질적 장자가 되었으며, 현대상선 회장을 지냈다. 전남방직 창업주 김용주의 딸 김문희(현재 학교법인 용문학원 이사장)과 결혼하여, 현정은을 낳았다. 현정은은 1976년 정몽헌과 결혼하였는데, 2003년 정몽헌의 자살 이후 현대그룹 회장이 되었다. 현영원의 아내 김문희에게는 스물 세 살 아래의 유명한 남동생이 있다.[11] 고우건업 대표[12]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 교수(1946~1984)인 소은 박홍규(1919~1994)와 혼인했다.[13] 전처 김희정이 1932년 7월 26일에 죽은 후, 후처로 들어왔다. 현준호의 자식들 가운데 대부분은 전처 김희정의 소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