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후시

 


太宰府市 / Dazaifu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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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宰府市
(だざいふし)
다자이후시 / Dazaifu City

[image]
'''시기(市旗)'''
'''국가'''
일본
'''지방'''
큐슈
'''도도부현'''
후쿠오카
'''면적'''
29.60km²
'''인구'''
72,282명[1]
'''상징'''
'''시화'''
매화(ウメ)
'''시목'''
녹나무(クスノキ)
홈페이지

다자이후시 홍보영상
1. 개요
2. 상세
3. 역사
4. 매체에서


1. 개요


후쿠오카현의 중부에 위치한 시이다. 명칭의 유래는 시의 이름 그대로 과거 이곳에 설치되었던 다자이후(大宰府).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2. 상세


후쿠오카시에서 동남쪽으로 약16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당연하게도 후쿠오카시의 위성도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위성도시 치고는 그 인지도가 상당한데, 일본 3대 덴만구 중 하나인 '''다자이후덴만구(太宰府天満宮)'''[2]규슈국립박물관(九州国立博物館)[3]이 소재하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4] 이 외에도 크고 작은 사적이 많이 있어, 그 덕분에 연 관광객이 수백만에 달하는 관광도시가 되었다. 다만, 보통 외지인이 다자이후시에 방문할 경우는 다자이후시만을 목적으로 방문하는 경우는 드물고 후쿠오카시 관광에 한나절~하루 짜리 코스로 끼워서 방문하는 편이다. 어차피 도시 자체가 그리 크지도 않고 후쿠오카시와 가까워서 왕복도 편리하다.
철도 교통은 JR 큐슈가고시마 본선서일본 철도텐진오무타선, 다자이후선[5]이 이 도시를 지난다. 이 중 주로 이용되는 것은 다자이후시의 중심부와 관광지로의 접근성이 좋은 다자이후선.
버스 교통은 서일본 철도 버스에서 운영하고 있다. 하카타 버스 터미널[6]을 출발해서 후쿠오카 공항 국제선 터미널에서 한번 정차하고, 이후 도시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다자이후 시청 등을 거쳐 다자이후역까지 간다. 시간은 40분에서 1시간 정도 소요되고 요금은 하카타 버스 터미널에서 타면 600엔, 후쿠오카 공항 국제선 터미널에서 타면 500엔이다. 물론 버스 내부에 정차벨이 있어서 중간에 하차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하카타 버스 터미널행 막차시간이 이른 편이다. 평일 기준 '''오후 5시 20분'''에 다자이후역을 출발하는 버스가 마지막이다. 참고로 하카타↔다자이후 버스는 일본어→영어→한국어 순으로 안내방송을 한다. 시내 교통인 커뮤니티버스 및 서포트카 마호로바호(まほろば号)를 서일본철도(커뮤니티버스)와 다자이후 택시(서포트카[7])에서 공동으로 운행한다. 전 구간 요금은 100엔(버스)/ 150엔(유노다니-湯の谷 방면 서포트카[8])/ 200엔(렌가야-連歌屋 방면 서포트카[9])이다. 커뮤니티버스의 경우 산큐패스 사용 가능[10].
시를 상징하는 꽃은 매화인데, 그래서인지 매화나 매실을 사용한 음식이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특히 유명한 것은 우메가에모찌(梅ヶ枝餅)라고 불리는 모찌 경단. 그 외에도 매실주(梅酒)나 매실소금라멘(梅塩ラーメン) 등도 이 지역의 특산품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시 마스코트(유루캬라)도 '치우메짱'(千梅ちゃん)이라는 여자아이 캐릭터다. 나라현의 '렌게짱'(센토 군의 여친)과 사이가 좋으며, 이병헌을 좋아한다는 설정이다.
한국의 충청남도 부여군과 자매 결연을 맺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3. 역사


660년에 백제가 멸망했을 때 일본의 덴지 덴노는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2만 7천 명에 이르는 군사를 한반도로 파병했지만,이들은 백강 어귀에서 당의 수군 7천(+신라의 육상지원병)에게 개발살나고 수장된다. 덴지 덴노는 이후 신라와 당이 일본으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11] 백제 유민들을 동원해 일본 각지에 고(구)려식 산성(고식산성)이라 불리는 성들을 축조했고, 외부로부터의 침략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적에게 노출될 수 있는 규슈 일대를 총괄하는 쓰쿠시도독부(筑紫都督府)를 설치했다. 이것이 다자이후의 유래다.[12]
다자이후는 일본어 음독이고, 훈독으로는 오호미코토모치노 쓰카사인데[13] 쓰쿠시 즉 지금의 규슈 지역의 군사적 방위를 책임지는 '''서부지방군사령부''' 역할을 맡고 있었다. 서일본 일대에 설치된 사이카이도(西海道) 소속 9개 구니와 3개 섬[14]의 인사 및 감사 등의 역할을 모두 다자이후가 맡고 있었고, 신라나 당과의 관계가 정상화되고 군사적인 역할이 줄어들고 나서도 외교적으로 오히려 중시되어서 하카타 연안에 고료칸(鴻臚館)을 설치하고 다자이후의 감독 아래 외국 사신의 접대 및 상인의 관리 업무가 이루어졌다.[15]
고대 일본에서는 기나이의 조정과 함께 수도에 준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교토에 비하면 격이 떨어졌다. 나라 시대740년에 후지와라노 히로츠구(藤原廣繼)라는 인물이 다자이후의 쇼니로 좌천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을 정도. 쇼니는 차관직이고 다자이후의 장관은 다자이노소치(大宰帥)라고 불렀는데, 도고쿠처럼 친왕임국(親王任國)[16]으로 종3위 정부 고관 및 친왕이 임명되는 자리였지만 이들은 관직만 맡아놓고 실제부임지에는 가지를 않아서[17] 곤노소치(權帥)가 있기는 했지만 조정 대신이 다자이후의 곤노소치가 되는 경우 실무권한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우대신[18]이었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좌대신 후지와라노 도키히라와의 정쟁에 밀려 다자이곤노소치로 부임해오게 된 것은 좌천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그야말로 정리해고나 다름없는 조치였던 것. 자연스럽게 다자이후의 실권은 차관직인 쇼니(少貳)가 맡게 되었다.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난 때는 비슷한 시기에 서쪽에서 반란을 일으킨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반란에 의해 불타기도 했다. 남북조 시대에서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러 활약한 슈고 다이묘 쇼니(少弐) 씨는 후지와라를 혼세(本姓)로 하는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인물 무토 스케요리(武藤資賴)[19]가 다자이쇼니를 지냈다는 데서 유래한 것. 가마쿠라 막부 타도 이후 고다이고 덴노의 황자였던 가네요시 친왕(懷良親王)이 정서장군으로써 다자이후에 파견되었고, 이곳에서 기쿠치 씨에게 옹립되어 남조를 지지하며 북조에 맞섰다가 1359년에 지쿠고 강 전투에서 쇼니 씨가 이끄는 북조측 군사에 패해 다자이후가 쇼니 씨에게 넘어갔다.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20]를 보내 규슈 단다이(九州探題)로써 다자이후를 지배하게 했다. 센고쿠 시대에는 오우치 씨가 지배했다고.
고대 이래로 규슈 지역의 정치 중심지이자 경제,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지만 남북조 시대에 이어 센고쿠 시대를 거치면서 기능이 약화되었고, 근현대에 들어서는 인근의 항구도시 후쿠오카가 큐슈 일대 최대의 도시가 되었고 다자이후는 후쿠오카 외곽의 소도시가 되었다.

4. 매체에서


징기스칸 4 게임에 따르면 일본의 4대 도시이다. 나머지는 교토부,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이와테 현 히라이즈미 정이 그것이다. 일본의 AI는 여기를 통해 고려로 원정을 하고[21] 대륙의 중국과 반도의 고려는 여기로 원정을 하니 가마쿠라 막부/무로마치 막부를 할 경우에는 여기를 사수해야 한다. 말이 없어서 기병을 못 만드는 고려 입장에서는 여기를 점령 하고 말이 있는 위치까지 증축을 하면서 마을을 만들어 징병할 인구를 늘리고 금과 군량을 공급 하면 일본 무사를 양성할 수 있으니 초반에 점령 하고 점령한 이후에는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지켜내야 할 도시다. 국왕이 여기에 있을 경우 스기와라 미치자네의 천만궁 이벤트로 정치 수치가 오르고 PK 한정으로 군주의 꿈에서 히미코가 나와 대륙의 전쟁을 끌날 수 있는 자라고 칭송 하고 자신의 힘을 국왕에게 주면서 다자이후의 공예 수치를 올려 준다.
한국 국사책 한반도 인근 지도에서는 일본이 규슈 일부만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따금 규슈에 다자이후가 표시되어있는 경우도 있다.
에스노 사카에의 만화 빅 오더에서 세계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간 '대파괴' 사건으로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일본이 독자적인 통치 능력을 상실한 채 유엔 잠정 통치기구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배경설정이 있는데, 그 유엔 잠정 통치기구의 규슈 지부가 바로 다자이후 정청이다.
일본의 만화가 니노미야 히카루가 다자이후 출신이라고 한다.

[1] 추계인구, 2017년 5월 1일 기준[2] 나머지 2개는 야마구치현 호후시의 호후덴만구, 교토부의 기타노덴만구이다[3]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입장료가 비싼데 일본의 관광지는 거의 대부분 한국보다 비싸다. 3층은 특별전시관으로 보통 성인 1600엔, 4층은 문화교류전 성인 440엔정도로 관람이 가능하며 둘 다 같이 관림시 약간 할인혜택이있다. 3층 전시내용은 기간별로 매번 바뀌므로 미리 홈페이지에서 관람 내용이나 휴관일등의 체크는 필수[4] 특히 다자이후 덴만구는 학문의 신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숭배하고 있다고 하여 큰 시험을 앞 둔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의 방문이 잦다.[5] 텐진오무타선의 지선[6] 1층 11번 승강장에 정차한다. 반대로 하카타 버스 터미널로 올 때는 2층 승강장에 정차한다.[7] 봉고차이다.[8] 월/수/금 운헹[9] 화/목/토 운행[10] 투어리스트 패스 확인 요망[11] 이원복 교수가 그린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는 백강 전투 이후 덴지 덴노가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책에 대해서 반발하는 신하들에게 닥치라고 찍어누르면서 "'''지금 언제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쳐들어올지도 모르는데, 국가안보가 위협받는 판에 호족들이 자기 권리만 찾고 있을 때냐? 이런 위협적인 시국일수록 덴노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야지!'''"라고 버럭하는 장면을 넣어, 덴지 덴노가 백강 전투 이후 신라-당나라 연합군이 일본 본토로 쳐들어올 수도 있는 위협적인 상황을 내세워 황권 강화에 써먹은 것처럼 그리고 있다.[12] 다자이후 정청 터 바로 위에 조선식 산성의 하나인 오노 성(大野城)이 위치하고 있다.[13] 이 오호미코토모치(大宰)의 미코토모치(宰)의 경우 중앙에서 특별히 파견하는 관리직을 가리키는 용어였는데, 임나일본부설의 여러 학설 가운데 부(府)의 일본어식 훈독 또한 미코토모치라는 점에 주목해 임나일본부의 정체가 실은 가야에 외교적 목적을 띠고 파견된 일회성 사신이 아니었나 하는 주장도 존재한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겨우 일회성으로 한 번 보내고 끝일 사신에게 백제에서 임나 지역에 설치한 군령과 성주를 야마토에 복속시키게 한다는 지나치게 막중한 임무를 주는 것이 부자연스럽다는 지적도 존재한다.[14] 쓰시마, 이키, 그리고 다네가시마.[15] 신라발해의 사신들에게 으레 다자이후를 거쳐서 오도록 명령하거나 다자이후에서 사신을 그냥 돌려보내는 대목이 자주 보인다.[16] 고대 일본에서 도고쿠의 카즈사(上總), 고즈케(上野), 히타치(常陸)의 경우는 해당 구니(國)의 지방관인 카미(守)를 다른 관리가 아니라 덴노의 친아들 즉 친왕으로 임명했다.[17] 이는 도고쿠의 친왕임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타이라노 마사카도 항목 참조.[18] 한국으로 치면 우의정급. 이는 좌대신(좌의정)도 마찬가지다.[19] 원래는 헤이케의 다이라노 토모모리를 섬겼던 무장인데 이치노타니 전투 이후에 겐지에 투항했다.[20] 고려 말의 정몽주왜구 근절을 요청하기 위해 직접 일본으로 와서 만났던 사람이기도 하다. 현재 다자이후 시에 남아있는 간제온지(觀世音寺) 절이 바로 당시 일본으로 건너온 정몽주가 처소로써 머물렀던 곳으로, 정몽주 본인이 간제온지의 경치를 두고 읊었던 한시도 남아 있다.[21] 일본 원판 한정. 정발판에서 일본은 원정을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