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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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역사
4. 폐지
5. 역사적 의의
6. 기타
7.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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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보처 산하 국립영상제작소에서 1945년 8월부터 1994년 12월까지 제작한 극장 상영용 기록영화. 전국의 모든 극장에서 강제 상영해야 했다. 필름은 1주에 한 번씩 바뀌었으며, 제작 중단 이전까지 총 2040회가 상영되었다.

2. 상세


당시 텔레비전은 물론 라디오의 보급률도 상당히 낮았고, 이 상황에서 뉴스를 전한다는 것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TV가 없는 사람들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대한뉴스처럼 국가에서 기록영화를 제작하는 것은 나치 독일 같은 군국주의 국가에서 가장 활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서구권에서는 위와 같은 이유로 기록영화를 많이 만들어 상영했고, 초창기 TV 뉴스의 형태가 제대로 정립이 안 되었을 시절이었기에 그나마 인프라가 잘 만들어져 있는 기록영화를 가져다가 방송국에서 틀어주곤 했었다. 물론 방송국이 직접 기자를 고용해서 취재하는 것보다는 싸게 먹혀서 그렇기도 했다.
나치 독일의 '독일 주간 뉴스'(Die deutsche Wochenschau)가 유명하며, 미국은 할리우드의 인프라를 이용해 많은 기록영화를 찍어냈다. 네덜란드에서도 '폴리혼 주르날'(Polygoon Journaal)이라는 이름으로 1919년부터 1987년까지 상영한 바 있으며[1] 쿠바에서도 쿠바영화예술산업연구소 주도로 'Noticiero ICAIC Latinoamericano'를 1959년부터 1990년까지 제작했다.[2] 대만에서도 대한뉴스와 비슷한 시기에 중화민국신문(中華民國新聞)이라는 뉴스 영화를 제작했다.
앞서 말한 독일 주간 뉴스가 추축국 일원이었던 일본 제국에도 영향을 주었고, 그로 인해 1940년부터 일본도 국정 기록 영화를 제작해 상영하기 시작하는데, 그게 '일본 뉴스'(日本ニュース)다. 보러가기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한 차례 개편을 거쳐 1952년까지 나왔고, 이후에 아사히신문과 제휴해서 아사히 뉴스로 명칭을 바꿨다가, 1976년에 제휴 관계가 끝나자 다시 일본 뉴스로 복귀했고 1992년까지 계속 제작되었다. 1990년대 초반 NHK BS-1에서 가끔 영상 실록 비스무리하게 시간 때우기 용도로 틀어주는 경우가 있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일본 뉴스 이외에도 다양한 뉴스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1997년까지 제작된 요미우리 국제뉴스와 1992년까지 제작된 마이니치 뉴스가 대표적이고, 토에이도 아사히 신문과 손을 잡고 뉴스 영화를 제작한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TV가 대중화된 시기가 1960년대이고, 리포팅 형식의 뉴스 프로그램이 완전히 정착된 게 1970년대임을 감안하면 꽤나 오래 제작된 셈이다.

3. 역사


조선총독부 시절에는 일본 내지 정부가 제작한 뉴스 영화를 틀어주었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 하에서 '조선시보'란 이름으로 제작하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대한전진보'란 이름이 되었다. 6.25 전쟁 이후 1953년부터 '대한뉴-스'라는 타이틀을 달고 제작되기 시작했다. 공식 기록으로는 이 이름이 쓰인 1953년을 대한뉴스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1955년 외래어 표기법 개정으로 인해 이름을 \''''대한늬우스''''로 바꾸는데, 약 5년밖에 사용되지 않았음에도 그 쌈마이함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이름이기도 하다.[3] 이후 1960년대부터 '대한뉴우스'라는 이름으로 제작되다 1980년대 이후 '대한뉴스'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1980년 3월 '카메라 순보'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3개월만에 원 이름으로 환원되었다.
1973년부터 영화의 컬러화 시대에 따라 컬러 상영을 순차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여 1977년 8월(1145호)부터는 컬러로 완전히 전환하였다. 참고로 최초의 컬러뉴스는 1973년 11월 17일 958호로, 호남고속도로남해고속도로의 개통 소식을 다루고 있었다. #
일부는 애니메이션으로 이루어진 대한뉴스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서울 올림픽 즈음에는 호돌이가 나와 공익광고를 하는 대한뉴스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당시 대한뉴스 중 일부분은 공익광고협의회에 제작한 공익광고가 들어간 것도 있었다.
해외 소식도 대한뉴스를 통해 많이 보도되었다. 프라하의 봄, 월남패망, JFK 피격 사건, 베를린 대치, 장개석 사망, 베트남 쿠데타, 미국 유인로켓 발사 성공, 아폴로 11호, 도쿄 찌르기 사건, 동독 반소봉기 등. 1958년도 뉴스의 국외 소식에서 "유니버살 영화사 제공"이라는 자막이 나오는데, 영상을 자체적으로 촬영할 사정이 안 되다보니 유니버설 픽처스제작한 뉴스 영화를 수입한 것.
제작을 정부가 주도하다 보니 이승만, 박정희 정권 시절이나 전두환 정권의 땡전뉴스 시절에는 독재 정부 선전수단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제작 주체가 주체다 보니 군사 독재 시대에는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5.18 민주화운동 이후 이런 골때리는 뉴스가 제작되기도 했다. 안정만이 살길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을 불순분자들이 조장한 폭동으로 날조했고, 활기 되찾은 광주는 그 '폭동'이 끝난 후 광주의 평화로운 모습을 연출한 영상이다.

4. 폐지



1994년 8월부터 영화진흥법안 확정에 따라 문화영화와 같이 폐지가 결정되어 그 해 12월 말 공식적으로 종영되었다. 독재 선전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비난 여론은 물론, 국립영화촬영소의 쇠락과 함께 현대적인 지상파 TV 뉴스라는 대체재가 확고히 자리를 잡은 지 오래되어 더 이상 대한뉴스를 제작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1970년대부터 TV가 각 가정에 널리 보급되어 지상파 TV 뉴스도 1970년대 후반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컬러 방송도 1980년 12월 이루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꽤 늦은 시기까지 존속한 것은 맞다.
TV 뉴스의 보급이 이루어지며 대한뉴스는 신속성도 없고, 논조는 정권 친화적이어서 대중적으로 거부감이 많았으며, 분량도 10분 안팎으로 적었기 때문에 시대에 뒤떨어진 대한뉴스는 자연스럽게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당시 KBS와 MBC의 논조도 친정권 성향을 보였기는 했지만, 이 당시 메인 뉴스는 물론 주말에 방영하는 뉴스도 대한뉴스보다는 분량이 많아 더 많은 소식을 다룰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1980년대 중후반 이후 방송사에서 뉴스 자료를 전량 보존하기 시작하여, 그나마 대한뉴스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었던 역사 기록이라는 장점도 사라졌다.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대한뉴스에서 다루지 않은 이유도 이미 TV 방송사가 크게 다루고 있어서 대한뉴스가 이를 제작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폐지 이후 국정 홍보 기능은 1995년 3월 케이블 방송 출범에 따라 국민방송으로 이관되었다. 사실상 KTV 뉴스가 대한뉴스의 정신적 후신인 셈이다. 2018년 6월 18일부터 이름도 아예 '대한뉴스'로 바꾸었다.

5. 역사적 의의


TV방송이 1956년도에 시작되었고 TV뉴스도 1956년부터 편성되오기는 했지만 필름과 비디오 테이프의 가격이 비싸다보니 1950~1960년대의 경우 일부 프로그램이나 뉴스 필름을 제외하면 남아있는 것이 없고, 1970년대와 80년대에도 방송사에서 테이프를 돌려쓰기 관행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당대의 시대상을 엿볼수있는 TV프로그램들이 정상적으로 보존되지 못했다. 하지만 대한뉴스는 정부 산하 기관이다 보니 자료를 꾸준히 보존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시대상을 쉽게 알기 위해서는 사실상 대한뉴스밖에 길이 없는 셈이었다. 디지털화도 이미 2000년대를 거쳐 모두 완료되었기 때문에 역사가 오래된 방송사[4] 입장에서도 찾기 어려운 1950년대~1970년대 뉴스 자료를 찾는 것 보다는 그냥 대한뉴스 자료를 빌려서 쓰는 게 더 빠르고 편하다. 특히 1990년대에 개국해서 상대적으로 방송 자료가 부족한 SBS, YTN의 경우는 어쩔 수 없이 대한뉴스를 쓸 수밖에 없으며, 한 때 YTN에서 방영한 '오늘의 역사-역사 속 오늘'에서도 대한뉴스 자료를 사용했다.
은근히 밀덕후들을 즐겁게 해주는 장면이 많다. 이런 거나 이런 거. '1435호-기습도발 방어' 영상에서 공군의 An-2가 대항군 장비로 등장하고, '제 1253호-수도권 민방위 훈련'에서는 특전사 병력이 잉그램 기관권총과 CAR-15로 묶여 불리는 단축형 AR15계열 총기를 사용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파월 당시 한국으로 밀반입된 미제 군수품의 일부였던 CAR15들의 경우에는, 4공화국시절부터 경호실과 경호실의 통제를 받는 일부 경호부대에만 보급되었으며 1980년대 초 K1기관단총의 보급으로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철도 동호인들도 여기서 옛날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수인선 협궤열차 시절이나 1호선 개통 뉴스 등. 철도박물관 얘기도 나오며 중앙선, 태백선, 영동선 전철화 준공, 경북선 개통 등 철도 관련 유물들도 찾아볼 수 있다.

6. 기타


  • 유튜브 알고리즘에 가끔씩 등장한다. 영상을 보다보면 보수 성향 지지자들이 과거, 특히 박정희 시절을 그리워하는 댓글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 맹관영, 강찬선[5], 박종세, 김승한#, 강영숙#[6] 등 당대 내로라 하는 아나운서들이 대한뉴스를 거쳐갔다.
  • 대한뉴스의 일부, 특히 1호부터 21호까지의 분량은 현존하지 않고 있다. 이 분량은 한국전쟁 당시 제작된 것인데 전쟁의 혼란 탓인지 정부에서도 원본의 필름을 제대로 보관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국가기록원에서도 이 원본 필름을 수소문해서 찾고 있다.
  • 배경 음악으로는 주로 미국의 행진곡들을 사용하는데, 존 필립 수자가 작곡한 High School Cadets March[7], The Stars and Stripes Forever[8], The Washington Post March[9], Nobles of the Mystic Shrine[10], 에드윈 F. 골드만이 작곡한 Bugles and Drums[11]등이 있다. 6공 이후 방영분에서는 CUSCO의 음악이 자주 나온다. 참조
2009년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홍보하기 위해 일부 극장에서 '2009 대한늬우스'를 상영했다. 개그콘서트 대화가 필요해 멤버들이 출연했다. 여러가지 최신 마케팅 기법이 범람하는 마당에 굳이 대한늬우스라는 이름까지 걸고 극장에서 상영할 이유가 있느냐는 비판[12]은 물론, 여성 비하 발언도 등장하면서 논란이 되었다.

7. 관련 링크


과거 WMP 포맷을 사용했기에 인터넷 익스플로러만 재생 가능했다가 나중에 어도비 플래시로 바꿨다. 미공개 뉴스들도 볼 수 있다.
KTV에서 직접 업로드한다. 2016년부터 업로드되고 있으며 각 잡고 원본 필름을 고품질로 디지털 리마스터링 한 덕분에 품질이 매우 좋다. 하지만 모든 뉴스가 올라와있지는 않아서 일부 영상은 위 e-영상역사관 사이트에서 봐야 하며, 최규하 대통령 사임 영상 같이 필름 상태가 원래부터 엉망인 영상은 어쩔 수 없다. 참고로 16:9 비율을 맞추기 위해 하단부가 잘려 업로드 되었으므로, 원본 영상을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e-영상역사관에서 열람해야 한다.

[1] 네덜란드에서 TV가 대중화된 것이 1960년대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꽤 오랜 시기동안 존속한 셈이다.[2]쿠바 혁명부터 소련 해체까지 제작한 셈. 특이하게도 쿠바에서 컬러 방송이 시작된 1976년 이후에도 꾸준히 흑백으로 제작되었다. 2009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3] 이 당시 외래어 표기법은 원어 발음을 살린답시고 오토바이를 '오오토바이', 도쿄를 '토오꾜오', 뉴욕을 '뉴우요오크'(...)로 적던 시절이다. 일본어로 번역된 외국 서적을 중역하거나, 그대로 가져와서 번역하는 일이 많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일본식 표기를 그대로 가져오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1990년대 이전에 출간된 서적이나 당대의 광고 문구를 보면 일본식 외래어 표기를 쉽게 볼 수 있다.[4] KBS나 MBC, 그리고 동양방송의 자료를 가지고 있는 JTBC[5]외교부 장관인 강경화 장관의 부친이다.[6] 1970년대 우량아 선발대회 진행 아나운서로도 유명하다.[7] 대한뉴스 제 960호-고등학교 안보 실기대회[8] 대한뉴스 제 1245호-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내한, 대한뉴스 제 1350호-싸우는 작은 매(F-16), 대한뉴스 제 1463호-로날드 레이건 미 합중국 대통령 각하 내외분 공식방한[9] 대한뉴스 제 1463호-로날드 레이건 미 합중국 대통령 각하 내외분 공식방한[10] 대한뉴스 제 631호-북괴 대남간첩 사건 발표, 대한뉴스 제 340호-박의장 미국으로 향발[11] 대한뉴스 제 263호-과도내각구성, 대한뉴스 제 314호-5.16[12] 2009년은 뉴트로가 주류이던 시절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