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인동(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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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동. 숭인1동, 숭인2동으로 행정동이 나뉘어져 있고 종로구의 동쪽 끝에 위치한 동이다. 조선 초에는 숭신방(崇信坊)과 인창방(仁昌坊)에 속한 지역이었다. 지명은 이 두 방리에서 첫 글자를 따서 만들었다. 1914년에는 숭신면의 영미동 · 미전동 · 신설동 · 남교 일부와 인창면의 남교 · 장거리 · 동묘동을 통합하여 숭인동이라고 하였고, 1936년 숭인정으로 바뀌었다. 1943년 동대문구에 편입되었고, 1946년 다시 숭인동으로 바뀌었다. 그 후 1975년 종로구 관할이 되었다.
서쪽에는 창신동, 동쪽에는 동대문구 신설동, 북쪽은 성북구 보문동, 남쪽은 중구 황학동이 있다. 옆동네인 창신동과 더불어 종로구의 대표적인 산동네 지역이고[9] 봉제공장 또한 상당히 많은 동네인데 창신동에 비해 인지도와 지명도는 떨어지는 편이다.
2. 역사
숭인동 동명은 조선 초부터 있던 한성부 숭신방과 인창방의 첫 글자를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숭인동은 태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5년(1396) 4월 1일 한성부 5부 방명의 표지를 세울 때 한성부 동부의 12개 방 가운데 성 밖에 숭신방과 인창방을 두면서부터 시작되며, 영조 27년(1751)에 간행된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동부 숭신방(성 밖)의 숭신방계와 인창방(성 밖)의 인창방계였다. 고종 4년(1867)에 간행된 육전조례에 의하면 동부 숭신방(성 밖)의 숭신동계와 인창방(성 밖)의 인창동계로 기록되어 있었고, 1895년 윤5월 1일 칙령 제98호로 숭인동은 한성부 동서(東署) 성 밖 숭신방 동문외계의 영미동 · 미전동 · 신설동 · 남교, 성 밖 인창방 동문외계의 남교 · 장거리 · 동묘동 일대가 되었다.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에 의해 한성부 동서에서 경성부 동부로 바뀌었고,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개편된 동부 영미동 · 미전동 · 장거리 · 신설계 · 동묘동과 남교 일부 지역이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따라 새로 통합되면서 숭인동으로 칭하였다. 같은 해 9월 27일 경성부조례 제8호로 동부출장소의 관할에 속하고 이듬해 6월 1일에는 동부출장소의 폐지로 경성부 직할이 되었다.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로 경성부 관할구역이 확장되고 경기도고시 제32호로 동 명칭이 개정될 때 경성부 숭인정이 되고,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한 구제도(區制度) 실시로 동대문구가 신설되면서 경성부 동대문구 숭인정이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서울시헌장과 미군정법령 제106호에 의해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숭인동이 되었으며, 1975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7816호로 관할구역이 변경되면서 종로구 숭인동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남쪽 일대는 창신동과 같이 무허가 판잣집이 난립했으나, 복개공사 후 상가지역으로 바뀌었다. 서울동묘(東廟:보물 142)는 1599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602년 준공되었다. 서울특별시에 건립된 3개의 관왕묘(關王廟) 중 가장 웅장하고 거대한 동묘에는 1883년에 세운 북묘(北廟)와 1902년에 세운 서묘(西廟)가 1913년 이전해 와, 매년 경칩과 상강에 합사(合祀)했다가 1978년부터 동묘가 공원화되면서 제사도 폐지되었다. 동묘의 북쪽에는 조선 초에 여인들만 모여서 거래하는 채소시장이 섰는데 장거리(場巨里)라고 하였다. 72번지 일대에는 싸전이 많이 모여 있어 싸전골이라고 불렸다
17번지에는 보문사보다 43년 후에 세워져 새절승방이라고 부르는 청룡사(靑龍寺)가 있다. 922년(고려 태조 5)에 도선국사의 유언에 따라 왕명(王命)으로 창건하고 한양의 외청룡(外靑龍) 산등성이에 지었다고 하여 청룡사라고 하였다. 청룡사 내에는 영조가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를 추모하기 위하여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서울유형문화재 5)라는 글씨를 써서 세운 비가 있다.
2.1. 정순왕후 송씨
조선 6대 국왕 단종의 왕비. 단종이 유배된 후 출가했는데 출가해서 들어간 절이 바로 옆동네인 창신동에 위치한 청룡사라는 절이다. 단종이 죽은 후엔 무척이나 슬퍼해 매양 앞 산에 올라가 영월을 바라보며 통곡했다고 하는데 통곡한 장소가 숭인동 동망산 동망봉(동쪽을 바라보는 봉우리)이며 현재 숭인근린공원에 위치해 있다. 2008년부터 숭인근린공원에서 정순왕후 추모문화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3. 주요 시설
3.1. 명소
산동네지역이고 노후화 된 곳이 많다보니 대표적인 관광명소라고 할만한 곳은 없다. 그나마 동묘역 부근에 위치한 동묘 벼룩시장이 많이 알려진 편이다.
3.1.1. 숭인1동
- 숭인근린공원: 종로구 동망산길 150. 동망산공원이라고도 한다. 면적 4만 2,943㎡로서 주민들이 휴식과 산책, 가벼운 운동을 할 수 있는 공원이다. 공원 안에는 정자와 체력단련시설, 관리사무소, 화장실 등이 있다. 이곳에서 정순왕후 송씨 추모문화제가 열린다.
- 정업원 구기(淨業院 舊基): 종로구 동망산길 65.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호.
- 동망봉(東望峰)터: 종로구 동망산길 150일대.
- 우산각골: 종로구 동망산길 12일대.
- 청룡사(靑龍寺) : 종로구 동망산길 65.
3.1.2. 숭인2동
- 여인채소시장(女人菜蔬市場)터: 숭인2동 242번지.
- 우시장(牛市場)터: 숭인제2동사무소가 있는 일대.
- 시외버스터미널 터: 숭인2동 200-1번지.
- 동묘(東廟): 숭인2동 238-2 보물 제142호. 임진왜란 당시 구원군을 보낸 명나라 만력제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한양 주변에 만들었던 관우의 사당이다. 총 4개가 있었다고 전하지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건 여기가 유일. 그리고 관우는 삼국지에 나오는 그 관우다. 중국에서는 민간에 널리 신으로 모셔지기 때문.
- 동묘 벼룩시장: 서울 동묘(東廟) 앞에 약 600여 개의 좌판이 모여 이룬 시장이다. 조선 시대부터 시작된 옛 장터 자리로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가 궁궐에서 쫓겨나 생활이 곤궁해지자 여인들이 채소를 파는 시장을 만들어 정순왕후를 도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때문에 한때는 이곳에서 행상과 노점을 하는 여인네들이 많아 여인시장이라고도 불리었고, 장거리(場巨里)라고도 하였다.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상인들이 모이며 상권이 형성됐다. 1983년 6월 장한평에 고미술품 집단 상가가 조성되면서 많은 점포가 그곳으로 옮겨가자, 이 자리에 중고품 만물상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 취급하는 상품은 골동품을 비롯하여 중고 가구, 가전제품, 시계, 보석, 피아노, 카메라 및 각종 기계, 고서(古書), 레코드 판, 공구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점포 수만도 1천여 개에 달한다. 특히 2003년~2005년 추진된 청계천 복원 공사로 장사할 터를 잃은 황학동 벼룩시장 상인들이 몰리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2013년 MBC 무한도전 자유로 가요제 때 정형돈과 지드래곤이 함께 의상을 산다는 이유로 방문한 곳이다.
3.2. 교육
3.2.1. 학교
2015년 8월전까지는 숭신초등학교가 있었으나 인구감소, 동묘 벼룩시장같은 주변지역 문제로 인해 성동구 하왕십리동으로 이전하였다. 숭신초등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서울다솜관광고등학교가 생겼다. 그외에도 몇몇 직업전문학교들이 있다.
- 서울다솜관광고등학교
- 종로산업정보학교
- 꿈틀학교
- 서울직업전문학교
- 진형중·고등학교
- 서울장신대학교
3.3. 주거
3.3.1. 아파트
3.3.2. 오피스텔
- 롯데건설 숭인 롯데캐슬 천지인 - 2004년 9월 입주.
4. 교통
4.1. 지하철
서울 지하철 6호선 창신역과 동묘앞역이 있다.
4.2. 버스
4.2.1. 직행
4.2.2. 간선
4.2.3. 지선
4.2.4. 광역
4.2.5. 공항
4.2.6. 마을
[1] 숭인1동 : 3000059, 숭인2동 : 3000060[2] 숭인1동 : 11통 66반, 숭인2동 : 16통 80반[3] 숭인1동 : 0.23㎢, 숭인2동 : 0.35㎢[4] 숭인1동 : 6,081명, 숭인2동 : 9,717명[5] 2021년 1월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통계[6] 숭인1동 : 26,426.09명/㎢, 숭인2동 : 27,688.57명/㎢[7] 지봉로 86 (숭인동 55-2)[8] 종로65길 10 (숭인동 178-167)[9] 숭인1동 지역이 산동네이고 숭인2동은 대부분 평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