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사이타마 연쇄 유아납치 살해사건
連続幼女誘拐殺人事件
1. 개요
명칭 '''경찰청 광역 중요지정 제117호 사건'''(警察庁広域重要指定第117号事件).
1988년(쇼와 63년) 8월 22일부터 이듬해 1989년(헤이세이 원년) 6월 11일까지 걸쳐 도쿄도 특별구(고토구) 및 북서부[1] ~ 사이타마현 남서부[2] 에서 미야자키 츠토무라는 26세 인쇄공이 일면식도 없던 연약한 어린 소녀 4명을 잇따라 연속적으로 납치하여 살해한 뒤 옷을 벗겨 시체에 성폭행을 한 후 인근 지역에 유기한 사건이다. 이 중 2명의 아동은 공통적으로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살해당했다. 이후 무사시노시에서 한 소녀를 성폭행하려다가 결국 범행이 드러나며 피의자로 체포, 기소된 그는 형사재판에서 일관되게 무죄를 주장하나 1심, 항소심, 상고심을 거쳐 사형을 확정받는다.
2. 피해자
3. 사건 전개
- 1988. 08. 22. - 사이타마현 이루마시에서 4살의 소녀 콘노 마리를 납치하고 도쿄도 하치오지시 신타마변전소 이츠카이치쵸(현재 아키루노시)에 있는 숲으로 끌고 가서 오후 6시경에 살해하고, 다음날 비디오 대여점에서 비디오 카메라를 빌려 사후경직으로 인해 굳은 사체에 외설행위를 하면서 이를 카메라로 촬영하였다. 이후 사체의 일부분을 절단해 벽장 안에 보관했고 남은 신체 부위는 화장하거나 숲에 유기했다. 이러한 행위를 한 까닭에 대해 처음 간이감정 문진기록에서 그는 "아무래도 2차원보다는 3차원이 좋았다"고 설명했지만 1차 감정에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고, 최후 피고인 질문에서는 ''갑자기 어린 시절이 그리워졌다"'며 오락가락했다.
- 1988. 10. 03.[3] - 사이타마현 한노(飯能)시의 초등학교에서 놀고 있는 1학년 학생 요시자와 마사미를 유혹하여 납치한 후, 역시 마리를 죽인 장소 이츠카이치쵸 숲까지 끌고 가 오후 5시경에 살해하고 옷을 벗겨 곧바로 시체에 외설행위를 하였다. 이 때 진술에 의하면 마사미가 숨이 완전히 끊어지기 전 경련을 일으켰다고 하며, 동기에 대한 공술조서에선 "뭐라 이루 말할 수 없는 스릴이 있었다"고 했다가 1차 감정에서는 역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 1988. 12. 09. - 사이타마현 카와고에시에서 4살 소녀 난바 에리카를 납치하여 끌고 가는 도중에 에리카가 울음을 터뜨리자, 차 주변에 난방을 가동해 따뜻하게 하면서 "목욕할 시간"이라고 말하며 에리카의 옷을 벗겨 나체 상태로 만든 후 성폭행했다. 에리카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홧김에 고의적으로 에리카의 몸 위에 올라가 압박하여 오후 7시경에 살해한 뒤, 사체를 유린한 동영상 촬영 후 마리와 마사미가 죽었던 숲에 유기했다. 살해당한 장소에서 시신과 옷이 모두 발견되었고, 이후 15일에 부검한 결과 살해되기 직전 에리카는 대소변을 지렸다고 한다.
- 1988. 12. 20. - 사망한 에리카의 부모의 집에 엽서가 도착. 내용은 "에리카, 추위, 기침, 목, 휴식, 죽음" 등 소녀의 살해 당시의 정황을 연상시키는 단어들이 잡지에서 잘라낸 활자로 적혀있었다. 부모가 "딸의 사체라도 찾아 다행"이라고 말한 걸 TV에서 본 그는 다른 소녀들의 사체도 부모에게 보내려고 계획하나, 전날 살해한 2번째 희생자인 마사미의 사체는 부모가 유일하게 회수에 실패한다.
- 1989. 02. 06. - 사망한 마리의 집에 골판지 상자가 배달되었는데, 마리의 것으로 보이는 뼛조각, 치아, 문서가 발견되었고,[4] 문서에는 "마리의 뼈, 불태움, 감정, 증명"이라고 적혀있었다. 훗날 10일에 이마다 유코라는 가명으로 아사히신문 도쿄 본사에 "아이를 유산해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내용의 범행 성명을 보내며 수사에 혼란을 주려고 했고 그 다음 11일 날 가짜 범행 성명을 마리의 집에 발송했다고 한다.
- 1989. 03. 11. - 마리를 죽인 가짜 범행 성명을 마찬가지로 마사미의 집에 발송했다.
- 1989. 03. 29. - 옆 동네에서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의 피해자인 후루타 준코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사이타마현, 아니 일본 전체가 충격에 빠졌고, 경찰의 관심도 이쪽으로 옮겨가게 되면서 미야자키 츠토무가 잡힐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 한편, 미야자키 츠토무도 이 사건이 알려지고 나서 2개월 간 잠적했다.
- 1989. 06. 06. - 도쿄도 고토구 아리아케 테니스 공원 근처에서 5세의 소녀 노모토 아야코를 납치하여 시노노메 공원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 차를 세워 차내에서 살해했다. 진술에 의하면 아야코를 유혹해서 친절하게 껌을 하나 건넸는데 아야코가 미야자키의 손이 이상하다고 여기자 홧김에 목을 졸랐다고 했으며, 사체를 유린하는 장면을 비디오로 촬영. 이후 아야코의 시체 일부를 잘라 직접 구워 먹고 피를 비닐 주머니에 담아 마신 후 처참히 훼손된 사체를 미야자와 호수 공동묘지 화장실에 유기했다. 참고로 당시 아야코가 살해된 부근에 조립식 창고가 있었다고 하고, 훗날 11일에 무참히 칼질당한 아야코의 사체가 공동묘지 화장실에서 발견된다. 참고로 이 장소는 사건 발생 이후 철거되어 위령비가 건립되었다고 한다.
4. 사건 결말
미야자키의 정신나간 범죄 행위는, 1989년 7월 23일 도쿄도 하치오지시에서 막을 내렸는데 또 다른 소녀를 유혹하면서 성기에 카메라렌즈를 넣으려는 성폭행을 저지르려다가 소녀의 보호자가 목격했고, 곧 그녀의 아버지에게 제압당해 현행범으로 붙잡히면서 종결되었다.[5]
경찰 조사에서 미야자키는 과거에 저지른 모든 범죄 행위를 자백했다. 그가 범행을 자백한 지 하루만인 8월 10일 마지막 희생자인 아야코의 '''머리'''가 발견되었으며, 9월 2일 검사가 기소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후 미야자키가 시신을 묻은 장소를 안내함에 따라 9월 6일 첫번째 희생자 마리의 '''손발'''이, 9월 13일 회수에 실패한 마사미의 '''사체'''가 뒤늦게 발견된다.[6] 그리고 조사 결과 그는 소녀를 살해할 때마다, 집에 짚인형을 두고 방을 어둡게 한 후 머리에 머리띠를 두르고 양초를 여러 개 켜고 검은 옷을 입은 채로 손을 위 아래로 휘저으며, 죽은 할아버지에 대한 부활의식을 벌였다고 한다. 그의 집에서는 5,763개의 비디오 테이프가 있었으며, 그 안에 호러 영화와 로리 상업지 몇 편이 있었던 것이 밝혀지자 언론이 대대적으로 '''오타쿠=잠재적 가해자'''란 등식을 사용해 비난받았다.
당초 범행 일체를 자백했던 미야자키는 공판이 시작되자 "또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다중인격의 경우 정신이상자이므로 형사책임을 물을 수 없고, 여기에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을 자주 벌인 점 등이 고려되어 그가 진짜 다중인격인지의 여부가 재판의 가장 중요한 변수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1990년 3월 30일 도쿄지방법원에서 시작된 심리는 판결까지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 중 절반은 2차례에 걸친 미야자키의 정신 감정에 소모되었다.
1차 감정결과 '극단적인 인격적 편향(즉, 인격장애)'으로 정신장애는 아니며 완전한 책임 능력이 인정되었으나 2차 감정의 경우 '다중인격'과 '조현병'[7] 으로 책임 능력이 일부 부정되었다. 이 경우 심신미약으로 분류되어 사형 선고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법원은 1차 감정 결과를 수용했고 1997년 4월 4건의 아동 유괴살인 혐의를 적용, 사형을 선고했다. 이에 변호인 측은 재감정을 청구했지만 기각되었다. 10회에 걸친 피고인 질문을 실시한 끝에 2001년 6월 28일 도쿄고등법원은 미야자키의 항소를 기각하고 사형을 선고, 이에 같은 해 7월 10일 상고를 하지만 2006년 1월 17일 최고재판소 역시 상고를 기각, 변호인 측이 판결 정정을 요청하였으나 2월 1일 기각하며 사형 판결을 최종 확정하였다. 이후 2년 뒤인 2008년 6월 17일 예상대로 검찰청 사형 집행 명령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간수장에게 마지막 남긴 말은 '''"아직 못 본 비디오가 있는데 말이지."'''였다고 한다.[8]
재판 도중인 1994년에는 미야자키의 아버지가 '''아들의 죄를 책임지겠다는 이유로 강가에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럼에도 가관인건 이 작자는 죄책감보다는 도리어 '''"아버지가 그렇게 되어 속이 시원합니다"'''라고 발언했다. 또한 재판 내내 '''"깨지 않는 꿈 속에서 했던 느낌", "쥐인간이 나왔다"'''는 말을 했고, 자신이 발언하지 않을 때는 그림을 그리는 등, 재판에 관심도 주지 않는 불량한 태도를 보였다.[9]
5. 반응
피해자들은 당시 오후 시간대에 한가롭게 놀고 있던 중에 변을 당했다. 어린 딸이 귀가 시간이 되어도 귀가하지 않아, 부모들이 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했다. 부모들은 딸들이 무사히 돌아오길 손꼽아 기다렸으며, 동영상에서 보았듯이 마사미의 모친은 기자들에게도 "딸이 무사하길 부탁드린다"고 울면서 애원을 할 정도였다.
사건 이후 장례식은 가족, 친척들이 모인 가운데 각각의 집 혹은 장례식장에서 엄숙하게 치러졌다.
이 사건이 과거 일본에서 수차례 벌어진 아동 성범죄, 살인 사건 이상으로 부각된 가장 큰 이유는 피살자가 무려 4명, 네크로필리아라는 충격적인 범행동기, 언론에다 자신을 잡아보라는 도전장을 보내고 피해자의 부모에게 딸의 신체 일부를 보내는 제정신이 아닌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사건 후 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안 부모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픔에 잠기고, 인생도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심지어 에리카의 아버지를 비롯한 피해자들의 부모 일부는 '''"그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평할 정도다. 일본 경찰은 미야자키 츠토무 사건에 이례적으로 프로파일링을 수사기법에 동원하여 프로파일이 일본에서 쓰인 최초의 사건이 되었다.
6. 만행의 최후와 후폭풍
사건 후 일본 언론들 사이에선 '자기방(房)족'[10] 문제가 폭넓게 제기되기도 했으며, 범인이 오타쿠인 탓에 사건 이후 만화, 애니 등 서브컬처에 대한 인식이 나빠졌고, 경찰은 코믹마켓 행사장을 급습하여 진행을 방해하기 시작했으며 지방에선 공권력이 나서서 만화 내용까지 간섭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코미케 측은 단속이 적은 도쿄 시내로 들어가 사실상 행사를 음성적으로 치르기도 했다. 다만 1990년대 이후 기성 세대들도 점차 코미케를 좋은 눈으로 보면서 이제는 옛일이 되었다.[11]
한 아나운서가 코믹 마켓 입장대기줄을 향해 "이곳에 수많은 미야자키 츠토무가 있습니다"라며 그를 비판하는 내용을 방송했다는 도시전설이 퍼졌을 정도. 그 전에도 로리콘을 역겹게 보는 시선은 많았지만, 이 시기는 돌팔매질 당할 수준이었다. 당시 언론 보도가 대단히 비판적인 것은 사실이고 이런 방송이 있었다는 소문도 돌고 있지만 일본의 오덕들도 '''이런 방송이 실제로 있었다'''는 증거를 찾지 못해 현재까지도 도시전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당시 TBS 테레비의 인기 아나운서 쇼오지 노리코가 코믹마켓을 취재하면서 "이곳에 10만 명이나 되는 미야자키 츠토무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가이낙스 창설 멤버인 오카다 토시오가 쓴 "마지메나 이야기" 1998년 글에 실렸고, 동일한 이야기가 2003년 신죠샤에서 나온 <미야자키 츠토무 사건>이라는 책에도 동일하게 기재되었으므로 단순히 도시전설이라고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일방적인 주장·경험담이며 무엇보다도 증거가 없다. 다만 1988년에는 아카이빙된 영상자료를 VHS로 복사구매하려면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터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방송사 관계자라면 녹화 테이프를 확인하여 단번에 알아낼 수 있겠지만,[12][13] 결국은 악마의 증명. 부재를 증명할 수는 없으니...
이 과정에서 미야자키의 신상이 유포되어 두 여동생은 직장에서 해고당하거나 파혼당했으며, 사건에 분노한 사람들로부터 편지와 전화로 폭언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직계가족도 아닌 친가, 외가 친척들에게까지 사건의 여파가 미쳐 직장을 그만두는 처지에 몰리거나 이혼하는 등 '''가문 2개가 통째로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다.''' 심지어 앞에 언급한 아버지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하면서 큰 후폭풍이 불었고, 이후 집안은 피해자들에게 보상하기 위해 상당한 규모였던 집도 팔았고, 많았던 재산도 처분했기에,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았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이런 범죄 가해자의 가족과 친인척에 대한 괴롭힘이 상당히 심각해서, 2000년대 들어서도 관련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아키하바라 무차별 살상사건의 범인의 동생이 자살한 사례, 사세보 여고생 살인사건의 가해자 아버지가 자살한 사례가 특히 유명하다.
심지어 미야자키와 이름이 같을 뿐이거나[14] 외모가 좀 닮은 게 다인 사람들마저 그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도 피해를 보았고, 전국의 오덕들과 독신 남성들이 괴물 취급을 받았다. '''흉악범 신상 공개를 신중하게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 때문이다. 대중의 복수심은 충족시킬지 몰라도 부작용으로 애꿎은 피해자가 엄청나게 발생한다.''' 심지어 효과도 별로 없다. 이름과 얼굴이 공개된다고 해서 이미 인생 종친 중범죄자들이 범죄를 안 저지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츠토무 이전에는 일본의 오타쿠라는 존재는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존재긴 했지만 세간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존재는 아니었다. 그런 존재가 언론에 소개되지 않다 이 사건 덕분에 가장 최초로 소개되었다. 이로인해 일본의 오타쿠들이 따가운 시선에서 벗어나기에는 근 20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렸으나, 사실 지금도 좋은 이미지는 못 된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동일연도에 '''4명의 범인들이 무고한 여고생 1명을 살인하는 사건이 터진 것.''' 그래서 일본은 1989년 쇼와 덴노의 사망으로 헤이세이 시대가 열리자마자 충격적인 2개의 사건과 마주하면서도 무죄한 인명이 총 5명이 살해당하는 극단적인 사건이 발생한 셈이다. 미야자키나 콘크리트 사건 주범인 소년들이나, 공통적으로 법정에서 전혀 반성의 기미조차 안 보이는 등 '''그야말로 사이코패스가 따로 없었다.'''[15]
[1] 하치오지시. 정황상 하치오지시는 아동 2명이 살해된 지역이며, 용의자가 거주중인 지역과 인접한 곳이다.[2] 이루마시, 한노시, 카와고에시[3] 참고로 중간에 1988 서울 올림픽이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개최. 즉 마리가 살해당한 지 1개월 반에서 2개월째 되는 날이다. 이때까지 잠적했다가 올림픽 폐막 이후 바로 이 날짜에 사건이 발생했다.[4] 당시 마리를 살해한 후 그녀의 시신을 회수한 다음 화장하고 남은 것이었다.[5] 만일 보호자가 목격하지 않았다면 그 소녀는 4명의 소녀들처럼 처참하게 살해당했을 것이다.[6] 그 전에 주요 단서를 제공했던 '''옷과 신발, 그리고 현관 열쇠'''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당시 옷에 묻은 것이 혈흔이라는 말이 있었으나 아니라고 한다.[7] 일본 정신건강학회 용어로는 통합실조증[8] 사형수 전문 인터뷰어인 저널리스트 오즈카 노타카의 발언.[9] 덤으로 구치소에서 그린 그림을 보면 알몸상태로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남자라든지, 한 남자가 죽마 같은 것을 타고 있고 옆에는 얼굴없는 간호사가 썩소를 짓는다든지 하는 그림이라,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상당히 소름이 끼칠 정도다.[10] 요즘으로 치면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에 해당된다.[11] 출처: <망가 vs 만화> - 손상익 저. 초록배매직스. 2000. p53.[12] 유사 사례로는 왜 그리스는 새벽에 축구해요가 있다. 이쪽도 목격자는 파다하게 많지만 증거가 없어서 도시전설 취급을 받다가, 당사자가 인정하는 듯 했으나 다시 한 번 부정하면서 진실은 저 너머에 상태가 되었다. 이쪽도 사실 방송관계자가 녹화 테이프만 공개해도 확실히 밝혀질 일인데...[13] 일본의 경우 과거 방송자료의 아카이빙이 한국보다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100% 아카이빙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니 결국 이러한 환상의 에피소드는 존재하기 마련.[14] 대한민국에서도 유영철이나 정남규 같은 흉악범죄인이 언론에 공개되면 그 범죄인과 같은 이름을 쓰는 사람들이 피해를 보아 개명신청이 급증한다. 이유는 다르지만 미국인들 역시 9.11 테러 이후로 9월 11일에 태어난 사람들이 법적으로 생일 변경을 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이 많았다.[15] 날짜상으로는 콘크리트 사건은 마리와 마사미가 사망한 이후 11월에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