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

 


1. 개요
2. 사건 상세
2.1. 발단
2.2. 사건의 전개
2.3. 피해자가 당한 일
3. 사건 이후 결말
3.1. 피해자의 사망
3.2. 은폐
3.3. 세상에 공개되다
3.4. 부검 결과와 사망 원인
3.5. 피해자, 가해자 부모의 반응
3.6. 세간의 만행
3.7. 사건의 충격
4. 환경적 요인
5. 범인들의 인적 사항
5.1. 소년 A
5.2. 소년 B
5.3. 소년 C
5.4. 소년 D
5.5. 소년E
5.6. 소년 F
5.7. 기타 공범들
6. 사건의 판결
7. 관련 미디어


1. 개요


女子高生コンクリート詰め殺人事件
(여고생 콘크리트 포장 살인사건)
東京都足立区女子高生監禁リンチ殺人事件
(도쿄도 아다치구 여고생 감금 린치 살인사건)
Murder Of Junko Furuta
(후루타 준코 살인사건)
'''사건번호: 헤이세이 21058''' (平成二一零五八(にいちゼロごはち)[1]
1988년 11월 26일~1989년 1월 5일, 44일간 일본 도쿄도 아다치구 에서 15~18세의 소년들이 주 2회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귀가하던 여고생을 납치해 온갖 가혹행위, 폭행, 성폭행을 저지르고 살해해 공사장 인근의 드럼통에 넣어 콘크리트로 묻어 은폐한 사건이다.
피해자인 후루타 준코(古田順子, 1971년 1월 18일~1989년 1월 4일)는 당시 고등학교 졸업과 취업을 앞두고 있던 17세의 학생이었다. 그녀가 죽은 지도 35년이나 지났지만, 그 잔혹성과 끔찍함 때문에 일본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야기되고 있다.
유사 사례로는 미국실비아 리킨스 살인 사건대만바이샤오옌 사건, 대한민국에선 3년 후에 발생한 주한미군 윤금이씨 살해사건과 20년 후 발생한 성남 지적장애 소녀 살해 암매장 사건, 24년 후에 발생한 용인 10대 엽기 살인사건, 25년 후에 발생한 김해 여고생 살인 사건 등을 들을 수 있다. 유사 사례는 아니지만 비슷한 년도에 발생한 사건은 '''도쿄·사이타마 연쇄 유아납치 살해사건'''이다.

2. 사건 상세



2.1. 발단


1988년 11월 25일 오후 8시 30분경 사이타마현 미사토시, 주범 미야노 히로시(宮野裕史, 소년 A, 18세)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후루타 준코(17세)를 발견한다. A는 공범 미나토 신지(湊 伸治, 소년 C, 15세)에게 "내가 잘 해볼 테니 저 여자를 발로 차."라고 지시했다. 타격을 받은 준코는 무릎이 까지고 도로 옆의 도랑에 자전거와 함께 넘어진다. C는 준코를 발로 찬 뒤 도주했고, A가 나타나 "저 녀석은 유명한 변태다. 나도 저 녀석에게 칼로 협박당했다. 여긴 위험하니 데려다 주겠다."고 말을 걸어 대화를 하면서 천천히 준코의 집 쪽으로 걸어간다.
A는 준코의 집에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어두운 창고 앞에서 갑자기 태도를 바꿔 "난 야쿠자의 간부다.[2] 야쿠자가 너를 사고로 위장해 차로 치어 죽이기로 되어 있다. 얼마 뒤 차도 이리로 오겠지만 내게 몸을 바치면 용서해 준다."며 준코를 호텔[3]로 데려가 강간했다.[4] 그 후 "원래는 야쿠자가 너를 죽이기로 돼 있었지만, 넌 내 여자친구와 닮았으니 살려주고 싶다. 너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윗선과 잘 얘기해볼 테니 그때까지 여기에 있어라."고 말하며 준코를 안심시켰다.
그 직후 A는 납치 당일 자판기 앞에서 행인을 대상으로 퍽치기를 하던 중이었던 동료 오구라 유즈루(小倉 譲, 소년 B, 17세)와 와타나베 야스시(渡邊恭史, 소년 D, 16세)에게 전화를 걸어 '''"여자를 하나 잡아두고 있다. 너희들 같이 먹어버리지 않겠냐?"'''고 불러내어 A-B-D의 순서로 '''4~5차례씩 돌아가며 윤간한''' 뒤 준코를 끌고 근처의 밤거리를 돌아다녔다. 이때 준코는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여 생전 처음으로 술을 마시게 됐다.
도중 차 안에서 A가 준코에게 "C가 너를 좋아한다. 사귀어라."고 명령했지만, 준코는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는 남자를 사귀기 곤란합니다."라고 대답했고, 이에 A는 "니가 감히 나와 우리 가족을 욕해?[5] '''너에게 굴욕을 직감시켜 주마."'''라고 했다. 이후 A와 B가 술을 마시러 자리를 뜨고 C의 집 근처 공원에서 2시간 이상 대기하던 나머지 일행들은 추위를 견디다 실내로 들어가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C의 집이 사건 현장이 된 이유다.

2.2. 사건의 전개


납치 이틀 후인 11월 27일, A는 행인 남성을 폭행하는 중이었다. A는 함께 어울리던 나카무라 테츠오[6](中村 哲夫, 현재 이름 이와이 테츠오(岩井 哲夫), 소년 E, 16~17세)와 이하라 코이치(伊原 孝一, 현재 이름 카키히가시 코이치(垣東 孝一, 소년 F, 15~16세)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겠다.'라고 불러내''' 밤 11시경 일행을 데리고 C의 집에 자고 있던 준코의 앞에 나타난다. A는 겁을 줄 생각으로 감기약각성제인 것처럼 일행들과 나눠 먹으며 약에 취한 듯 행동하고 준코의 다리를 잡아 쓰러뜨렸다. F는 '''쿠션으로 준코의 얼굴을 눌렀으나,''' 준코는 비명을 지르며 저항한다.
이 과정에서 C의 부모가 2번이나 현장에 찾아왔는데, 첫 번째엔 2층의 소음에 잠을 깬 C의 어머니가 방문을 열어 상태를 봤으나 방 조명이 고장나 바닥의 스탠드만 있던 상태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2번째는 준코가 비명을 지를 때 아버지가 "방금 비명소리를 들었다. 너희들 뭐하는 거지?"라고 문 앞까지 찾아왔으나, C가 "상관하지 마!"라고 쏘아붙이자 아버지는 침실로 돌아갔다. 이 사건으로 제대로 열받은 가해자 일행은, 준코의 허벅지와 다리를 중심으로 폭행을 가하고 '''음부에 라이터를 켜 불을 붙이면서 윤간했다.[7] 준코가 비명을 지르지 못하도록 입을 강제로 막기도 했다.''' 준코는 "도망치지 않을 테니 제발 그만 해달라"고 애원했으나, '''폭행은 거의 2시간이나 계속됐다. 이때의 폭행으로 준코는 걷기도 힘들어 할 정도로 몸 상태가 나빠졌다.''' C의 부모가 만류함에도 소년들이 준코를 돌려보내지 않은 원인 중 하나.
[image]
사건이 일어난 C의 자택 2층. 관련 매체 문단에 링크된 첫 번째 다큐멘터리 영상에 나오는 장면의 캡처 사진이다.
납치 후 나흘이 지난 11월 30일, 준코의 부모님이 경찰에 신고할까봐 걱정한 A의 제안으로, 가해자들은 준코에게 집에 "가출했으니 찾지 마. 친구의 집에 있으니 실종 신고는 취소해 줘."란 전화를 먼 지역의 공중전화로 걸도록 강요한다. 5일에 걸쳐 3번 걸게 시키며, "경찰서도 멀고, 저 차는 야쿠자의 차다. 도주를 시도하면 내가 너를 죽이게 할 것이다."라고 협박했고, 전화를 할 때도 옆에서 감시했다. 그리고 그날 C의 어머니와 인사한 준코는 자신을 "사이타마현의 고교생"이라고 소개했고, C의 어머니는 준코에게 "늦었으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준코는 소년들과 2층으로 올라갔고, C는 "오늘밤은 이곳에서 있는다."라고 말하면서 따라 올라갔다.
1주일 뒤인 12월 5일, C의 방을 청소하다가 쓰레기통에서 생리대를 발견한 어머니는 2층으로 찾아가 감시 담당인 소년 D와 함께 있던 준코에게 "왜 집에 돌아가지 않았냐"고 물었지만, 감시당하고 있던 준코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준코를 가출소녀라고 생각하고 이름을 물었지만, 준코는 "사이타마현에 사는 고교 3학년 학생이고, 취직이 결정됐다"는 대답밖에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부모님께서 걱정하실 테니 어서 돌아가라"고 말했다. 같이 있던 D도 "그래,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말해, 식사를 시킨 뒤 준코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분위기가 됐다.
식사 도중 C와 아버지가 돌아와 C에게 "여자친구인가? 내게도 소개해다오."라고 말을 걸었으나 묵살당하고, 준코는 다시 소년들에게 이끌려 2층으로 올라가게 됐다. C의 가족들도 낯선 소녀가 들락날락하는 것을 보고 신경이 곤두서 다음날에 다시 찾아와 "이 집엔 남자가 2명이나 있어. 어떻게 될지 알고 있는 거지?", "여긴 그 야쿠자 같은 것[8]이 있으니 얼른 돌아가렴."이라고 말을 걸었으나, 준코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얼른 돌아가자"며 준코의 가방과 소지품을 들고 1층으로 내려왔지만, 준코는 가해자들이 두려워 2층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준코의 가방에서 나온 집 전화번호를 확인한 뒤, 아들에게 구타당할 것을 염려해 시부모의 집으로 찾아가 준코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C의 어머니가 "댁에 후루타 준코란 딸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준코의 어머니는 "지금은 준코가 집에 없습니다. 누구십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러나 소년 C의 어머니는 주저하다가 '''가짜 이름을 대고 끊어버렸다.''' 준코의 부모는 가짜 이름을 토대로 수사했기에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다시 자택으로 돌아온 C의 어머니는,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준코와 이야기하는 걸 목격한다.

"그럼 돌아가기로 한 거지? 어머니가 걱정하시니 얼른 집에 돌아간다고 전화하거라."

"괜찮아요. 전에도 전화했으니까."

"그럼 그 쪽까지 데려다 줄게."

"혼자서 돌아갈 수 있어요…."

"택시비 가지고 있니? 내줄까?"

"있어요. 괜찮아요."

"그럼 곧장 돌아가렴."

"알겠습니다."

그리고 현관문으로 나서는 준코의 앞엔 C의 형(湊恒治, 미나토 코우지, 1972년 1월생으로 당시 16세, 현재 52세)[9]과 B가 대기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그들은 준코를 근처의 공원으로 데려가 되돌려 보낼지 말지 상의했다.[10] 준코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테니, 제발 집에 가게 해달라"고 애원하지만, 결국 C의 부모가 자는 틈을 타 건물 옆 전봇대를 타고 올라가 C의 방으로 도로 끌려가게 된다. 당시 준코의 상태는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폭행 의심을 불러일으킬 정도였기 때문. C는 어머니가 준코의 집에 전화한 사실을 알게 되고는, '''몇 시간에 걸쳐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이 시점에서 C의 부모는 준코가 집에 돌아갔다고 생각해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소년들은 '''준코를 풀어줄 생각을 완전히 버리게 된다.'''
이때까진 준코의 돈으로 옷을 사서 갈아입히거나 음식을 먹이고 생필품을 사주는 등의 행동을 했다. 그러나 감금이 지속되며 준코가 '''하루 18시간 이상 폭행 및 성적 고문을 당해''' 상처가 심해지면서, 그런 것마저도 사라진다. 납치 1달여 째인 12월 하순까진 컵라면, , 우유, 계란 등을 C의 형이 먹였지만, 그 이후부터는 쇠약해져 고작 하루에 우유 1잔만을 먹을 수 있었다. '''바로 옆방'''에 살던 C의 형은 이후에도 소년들이 없을 때 한 번씩 준코를 도와주기는 했지만, 위에서도 서술되어 있듯이 동생 일행의 폭력에 잡혀 사는지라 사건이 드러나는 시점까지 두려움이 있었는지 경찰에 신고는 끝끝내 하지 않았다.[11]
C의 어머니는 준코가 소년들과 식후 텔레비전을 보거나 같이 패미컴 대전격투게임도 해서, 서로 사이가 좋은 걸로 알고 있었다. "준코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기에, C의 불량한 친구라 생각했다"고 증언했으나, 사실 담배는 '''불량배들의 강요로''' 피운 것이었다. 초반에는 준코가 가해자들의 지시에 잘 따랐고, 11월 말까지는 폭행 및 고문의 강도도 약해서 어느 정도는 잘 견디던 편이긴 했다. 물론 준코가 방 밖으로 나갈 땐 반드시 가해자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12]
12월 7일, 준코는 가해자 소년들이 낮잠을 자고 있을 때 몰래 1층에 내려와 신고하지만, 인기척을 느낀 A에게 들킨다.[13] 강제로 전화가 끊기자 경찰은 역추적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소년들은 '''"장난전화였다"고 무마시킨 뒤''' 전화를 끊었다. 준코는 소년들에게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빌었지만 소용이 없었고, 이것이 준코가 방 밖에서 한 마지막 활동. 그 후 후루타 준코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방 밖으로 나올 수 없었으며,[14] 이때부터 아래에 서술된 가혹행위들이 시작된다.'''
A는 자고 있던 다른 소년들을 깨워 고함 지르며 "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냐"고 물컵을 집어 던지며 쥐 잡듯이 호통쳤다. 신고한 것도 화나는데 A에게 혼나기까지 해서 B, C, D도 격분한다. 특히 준코에게 호감을 가졌던 B는, 이때부터 '''누구보다도 집요하고 혹독하게 준코를 구타하고 고문했다.'''[15][16]

2.3. 피해자가 당한 일


주범 4명과 폭행에 가담한 수십 명의 사람들의 증언에 근거한 것이므로, 전부가 아닌 일부다. 이들이 감춘 것, (많은 일을 저질러서) 망각한 것도 있을 수 있기 때문.
[ 펼치기 · 접기 ] 열람 시 주의. 매우 잔인하고 일반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혹은 상상 그 이상의 잔혹한 행동이나 폭행들이 담겨있다. 잔인한 사진은 없음. 보고 나면 저것들이 사람새낀가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만든다.
* C가 '''"여자를 하나 잡아두고 있으니 헌팅할 필요 없다"'''고 지인에게 공언해 최종적으로 C의 지인 수백 명 가량이 준코의 감금을 알고 있었고, '''40일 사이 500~800여회'''에 달하는 폭행과 강간에 관여했다. 공판 기록에 의히면 이 사이 준코는 소년들에 의해 기절하고 강제로 깨어나고를 '''천 번 '''넘게 반복했다. 감금 초기인 11월 28일에는, 주범들 이외에 같이 어울리던 폭주족의 부하인 불량소녀가 화장이라며 매직펜으로 준코의 얼굴에 수염을 그렸다. 재판과정에서 어느 목격자(방관자)의 증언에 따르면, 나체로 묶인 준코의 주위에 술, 담배가 널려 있어 참혹한 분위기였다고. 그리고 준코가 움직이기도 힘들어진 이후에는 방치하고 자기들끼리 놀러 나갔다.
* 1989년 새해 무렵, 소년들이 놀러 나가 없을 때 C의 형이 준코를 찾아왔다. 준코가 "제발 물을 마시고 싶다"고 말하자, C의 형이 물을 가져다 주었다. 준코는 물을 마시며 도움을 요청했으나, C의 형은 공포에 질린 채 나갔다.
* 범행 초반에는 준코양의 돈을 빼앗아 음식 배달을 시키고 세면도구와 칫솔을 사주면서 '''배려아닌 배려'''를 해주었지만 범행이 길어지면서 폭행을 하였다.
* 준코의 면전에서 "자살로 위장해 목을 매달자", "분쇄기로 갈자", "고기는 다진 게 좋다", "바다에 공구리를 치자"는 식의 말을 주고받았다.
* 12월 5일, 열차 추돌사고[76]가 나자, A는 준코에게 "저 사고에서 너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뉴스를 봤다. 알고 있냐?"고 물었다. 이에 준코가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고, 준코가 "슬프다"고 대답하자 "거짓말이었다"라고 말을 바꾸었다. 이후에도 대답을 계속 번복했다.
* 준코는 매일같이 "풀려나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고, 믿어줄 때까지 뭐든 하겠다"고 가해자들에게 애원했다. 이에 소년들은 알몸으로 춤추고 노래하기, 자위행위, 미친 짓 등을 시켰다. 당시에는 스스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상태였지만, 소년들은 준코를 일으켜 세워 억지로 시켰다. 이로 인해 준코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아 머리카락이 모조리 빠졌다.
* 하루는 준코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자, A는 "돌아가면 엄마한테 뭐라고 이를 거냐"고 묻는다. 준코는 "이르지 않겠다. 지금까지 신주쿠에서 놀다 왔다고 하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소년들은 "신주쿠에서 교복 차림으로 지금까지 그렇게 놀 수 있을 것 같냐"고 하며 더 심하게 준코를 폭행했다. 당시 준코는 여벌옷이 없어서 C가 어린 시절에 입던 옷을 입었다고 한다.
* 준코는 500~800여 회의 강간으로 부검 결과 임신 상태였고,[77] 성기와 항문의 구멍이 합쳐질 정도로 하체가 원형을 유지하지 못했다.
* 12시간 이상, B가 밖에서 끌고 온 대형견의 성기에 준코의 입으로 교접시켰다.
* 준코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C의 집에 있던 운동기구를 모아 만든 220kg 이상의 금속 바벨로 손발과 얼굴의 뼈를 으스러뜨렸다.
* 감금 초기, B와 이름이 같은 과자를 가져와 준코에게 "이것이 뭐냐"고 물었고, 준코가 존칭을 안 쓰면 "B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고, 준코가 존칭을 쓰면 "사물존칭을 쓴다"고 구타하고 불질렀다.
* 빈사 상태의 준코를 꾀병이라고 욕하며, 바닥에 눕히고 1m 이상의 높이에서 20~30kg의 아령을 얼굴에 던졌다.
* 준코의 눈과 얼굴이 너무나 부어올라 코 높이를 넘어 부을 때까지 구타하며, "그 얼굴이 더 좋다"며 웃어댔다. 준코의 얼굴은 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는데, 막바지에는 눈이 심하게 부어서 앞도 잘 못 봤다.
* A는 코이즈미 쿄코의 노래 <누가 뭐래도 아이돌(なんてったってアイドル)>을 틀어 가사의 "예- 이!"에 맞추어 준코의 옆구리를 구타했다. (신음하면 더 맞기에) 준코가 억지로 고통을 참느라 얼굴이 일그러지면, 가해자들은 재미있어했다.[78][79]
* 곪은 상처에서 쉴 틈 없이 쏟아지는 피와 고름을 보고는, 가해자들은 손발을 비닐봉지로 감싸고 구타했다. 이때 준코에게 웃으라고 강요했고, 웃지 않으면 더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이렇듯 약간이라도 저항하면 더 심하게 폭행해, 준코는 저항하지 못하게 됐다. 급기야 준코는 어떠한 언어적, 물리적 폭력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하게 된다.
* 음주와 흡연 경험이 없는 준코에게 자신들이 피다 만 담배를 피우게 하거나, 50~100개비의 궐련을 한 번에 피우게 했고, C의 집에 있는 70도[80]가 넘는 독한 술을 다량 먹였다. 준코가 토하면 그 모습을 즐기면서 '''토사물을 강제로 먹였다.'''
* 준코의 새끼손가락의 손톱과 왼쪽 유두를 펜치로 뜯었다. 준코의 가슴에 바늘을 빼곡하게 꽂거나, 준코의 몸에 담배꽁초를 비벼 끄며 재떨이로 사용하기도 했다.
* 볼과 눈에 촛농으로 양초를 고정하고, 성기와 항문에 달군 백열전구, 쇠꼬챙이, 목검, 쌍절곤, 공업용 가위, 철봉, 담배, 유리병, 페트병, 불꽃놀이 도구, 벌레 등을 넣고 폭행으로 산산조각 냈다. 이는 요실금, 변실금, 심각한 출혈을 야기했다. 괄약근이 늘어나는 건 덤. 공사장에서 훔친 전동드릴을 성기에 넣어 자궁을 가는 짓도 저질렀다.
* '''성기, 손, 발, 정강이, 무릎 등을 성냥이나 라이터로 불질렀다.''' 이 고통에 준코가 소리를 지르면 입과 코를 때리고 다시 불을 질렀다. 상처가 아물 틈 없이 화상을 입으면서, 상처는 곪고 썩어 악취가 났다. 곪은 상처가 터져 쏟아져 나온 진물, 고름, 피가 온 방안에 분수처럼 튀고, 준코는 스스로는 일어서지 못하게 됐으며, 12월 말에는 움직이기도 힘들어졌다. 준코는 침대에 간신히 앉아 소년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청했지만, 소년들은 준코를 밀쳐 버렸다. 그리고 소년들은 그런 준코를 강제로 일으켜 세워서 온갖 학대를 일삼았다. 이때 탈출을 막으려고 손보다 다리에 더 큰 부상을 입혔다. 구출돼 치료받았어도 몇 년은 걷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손의 화상은 비교적 덜해서, 음식을 먹거나 물건을 드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했다.
* 준코를 눕히고 끓는 물을 뿌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즐겼다. 소년들은 이를 '열탕 샤워'나 '열탕 커머셜'이라고 불렀다. 목욕을 시켜준다면서 물고문도 했다.
* 각종 가혹 행위에 준코의 상태가 악화되고 몸에서 악취가 풍기자, A는 C의 부모가 눈치챌까 두려워 준코에게 종이팩에 일을 보게 했다. '''종이팩의 소변을 마시라고 강요했고, 실수한 대변도 억지로 먹였다.''' 이것들은 나중에 준코의 에서 발견된다.
* 크리스마스에 소년들은 준코를 앉히고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며 폭행했다. 준코는 폭행이 끝나고 바닥에 있던 'Merry christmas'라고 쓰여진 종이를 보고 한참을 울었다.
* 사망 1주일 전, 영양실조스트레스로 준코가 배를 감싸며 쓰러져 A에게 "물을 마시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A는 상처에 영양을 준다며 마지못해 우유를 먹였지만, 준코는 토하고 말았다.[81] 그걸 본 소년들은 다같이 준코를 폭행했고, 사과하는 준코의 하복부를 수십 회 구타하고 혹한 속에 상의를 모두 벗긴 뒤 베란다에서 여러 개의 담배를 피우게 했다. 이에 견디지 못한 준코가 구토하자, A는 "따뜻하게 해주겠다"며 준코의 다리에 라이터 기름을 뿌리고 점화했다. 12월 하순부터는, 준코는 힘이 다 빠져 발버둥도 치지 못했다.
* 준코는 처음엔 "살려달라"고 했지만, 감금 말기부터는 매일같이 "죽여달라"고 애원했다. 사망 직전엔 '''스스로 활동을 멈췄다'''. 시신 발견 당시 뇌가 쪼그라들고 녹아 있었다고 한다.
* 드럼통에 준코의 시신을 넣고 꽃다발도 같이 넣었는데, 이는 추모의 의미가 아니라 '''저주받을까봐 그게 싫어서'''였다.

  • 드럼통에 준코의 시신을 넣고 꽃다발도 같이 넣었는데, 이는 추모의 의미가 아니라 저주받을까봐 그게 싫어서였다.||}}}

3. 사건 이후 결말



3.1. 피해자의 사망


피해자 후루타 준코(古田順子) 생전사진
1989년 1월 4일, A는 마작에 크게 실패해 10만 엔[17]에 달하는 빚을 지고 D의 집에서 일행과 합류한다. 12월 20일경부터 준코의 상태가 극히 심각해짐에 따라, 그들은 준코를 처리하기 귀찮은 물건쯤으로 여겨 한동안 찾지 않고, C의 집에 방치해두고 있던 참이었다.
A는 "마작에서 진 것도 다 준코 때문이야"라며, '''"오랜만에 준코를 괴롭히러 가자"고 제안했다.''' 이에 일당은 '''다같이 준코를 폭행한다.''' 이때가 8시. 힘이 다 빠진 준코를 가운데에 세우고 '''얼굴에 촛농을 떨어트리거나 소변을 먹였고, 양 옆에서 1명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1명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머리, 어깨 등을 번갈아가며 구타했다.''' 이때 D는 "딱히 관심 있지는 않았으나 A와 B가 두려워 린치에 가담했다"고 후일 증언했다.[18]
준코가 카세트 플레이어에 머리를 부딪혀 경련을 일으키는 걸 보고 소년 A는 린치 중간에 준코의 죽음을 예감했지만, '''꾀병이랍시고 더 심하게 폭행을 계속하고, 1.74kg의 아령을 복부에 떨어뜨렸다.''' 준코의 반응이 없자, '''피부를 지져보았다.''' 준코는 처음에는 움찔했지만 이내 멈추었다. 소년들은 "죽은 거 아닌가?"란 두려움에 휩싸였으나 곧 "준코는 원래 이렇다"는 C의 말을 듣고 안심한 뒤, 테이프로 준코의 발목을 묶고 10시가 되자 개장한 사우나로 직행했다. '''준코가 자력으로 움직일 수 없으니''' 감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해, 전원 외출한 것이다.[19]
다음 날 C의 형에게 "준코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연락을 받는다. 준코가 감금당한 방은 안에서만 열 수 있기에 바로 옆에 있는 C의 형의 방 베란다에서 상태를 지켜보니, 준코가 이불 위에 쓰러져 있었다. 소년들은 "준코가 죽은 것 같다"며 들어가길 꺼렸다. 그들이 들어갔을 때, 준코의 몸은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이때 그들은 '''온 집안이 흔들릴 정도로 미친 사람처럼 소리내어 웃었다'''. 즐거워서 웃은 게 아니라지만.
공교롭게도, 준코의 기일은 그녀의 생일 13일 전이었다. 또한 준코가 납치된 3일 후가 준코의 어머니의 생일이라, 납치 이전부터 어머니가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를 만들고 있었다. 준코는 효녀였다.

3.2. 은폐


[image]
시신이 있는 드럼통이 발견된 당시의 현장
소년 A는 사망한 준코의 시신을 이불로 싸맨 뒤 여행용 가방에 넣어, 테이프로 말아 근처의 주범이 일했던 타일 공장에서 가져온 '''드럼통에 넣어 콘크리트를 흘려넣고''' 벽돌 등으로 고정했다. 굳이 콘크리트를 넣은 까닭은, 흔히 말하는 공구리 괴담[20]을 사실로 믿어서인 것으로 추정된다. 다큐에 따르면 만화에서 힌트를 얻었다고도 한다. 이때 백주대낮에 당당히 준코를 콘크리트에 매장한 장소는 놀랍게도 아다치구의 주택가가 밀집한 '''소년 A의 집 앞 주차장'''이었고, 들키지 않기 위해선지 드럼통을 빌린 차에 실어 옮겼다고 한다.
드럼통을 숨기기 위해 이를 검은 쓰레기 봉투에 넣은 뒤 테이프로 밀봉했다. 그 뒤 소년 A가 빌려온 왜건을 운전해 드럼통을 아야세시의 강 근처에 버리려 했으나, 소년 B가 "집 근처라 변해서 나올 거 같다"며 무서워했다. 그래서 바다 한가운데인 도쿄만에 버리려 했으나, 결국 멀리까지 가지 못하고 도쿄도 고토구 와카스 14호지 해변 공원 정비 공장 현장의 공터[21]에 버렸다. '''만약 바다에 버렸다면 영영 증거가 없는 미제 사건이 됐을지도 모른다.'''[22]
소년 A는 드라마 <톤보>[23]의 마지막 회를 녹화한 비디오를 찾았다. 준코가 납치된 날, 준코는 드라마의 마지막 회를 보기 위해 아르바이트가 끝나자마자 빨리 귀가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 대해서 준코가 말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를 같이 넣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비디오를 꽃다발과 함께 넣으려고 했지만, "범인을 특정하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는 소년 B의 만류로 그만둔다. 자기들이 살해해놓고 무슨 헛짓거리인가 싶지만, 사람이 죽어 슬퍼서 한 일이 아니었다. 소년 A는 '''"준코가 불쌍하다기보다는, 저주받기 싫어서."'''란 충격적인 이유를 밝혔다.

3.3. 세상에 공개되다


이러한 천인공노할 살인 사건은 가해자들의 시체 유기로 영영 묻히는 듯 했으나, 사건 발생 3개월 뒤인 1989년 3월 29일, 뜻밖의 일로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다.
소년 A는 1988년 11월 8일에 있었던 '''또 다른 19세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간치상절도 등의 혐의'''로 네리마 소년 감별소에서 아야세 경찰서 수사관의 조사를 받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담당 형사가 '''무심코 내뱉은 "너 사람을 죽이면 안 되잖아?" 란 질문에''',[24] 부하들이 이미 사건에 대해 자백했다고 착각한 나머지 사건의 전모를 내뱉은 것이다.[25] '''담당 형사의 말실수란 우연이 없었더라면, 이 사건은 실마리를 풀지 못한 채 영원히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26]
그로 인해 소년 A는 담당 형사에게 사건의 전말을 불기 시작했고, 이런 현실성을 날려먹은 터무니 없는 소리에, 경찰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현장에 다급히 출동해 범인들이 자백한 현장 공터로 향했다. 현장에선 콘크리트 범벅이 된 드럼통 하나가 발견됐으며, 틈새에서 '''썩는 냄새가 진동해''' 즉시 크레인을 동원해 경찰서로 이동시켰다. 원래 드럼통 하나의 무게만 해도 굉장히 무거운데, 여기에 40kg에 달하는 준코의 시체, 이불, 가방, 그리고 엄청난 양의 콘크리트까지 더해져서 전체 무게는 305kg에 달했다.
다음날 오후, 드럼통이 이동된 경찰서 내에서 해체 작업이 시작됐고, 곧 보스턴백에 담겨져 2장의 이불에 싸여진 여자의 시체가 발견되였다. 이미 사후 몇 개월이 지났고, 유기될 당시 온전한 상태로 유기된 것도 아니라, 준코의 시신은 손상과 부패가 매우 심각하게 진행된 상태였다.[27] 당연히 경찰들은 소년 A가 밝힌 사건의 전모가 사실임을 알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공판 당시 이들의 진술을 듣는 재판장은 찬 물을 끼얹은 듯한 분위기였으며, 진술 도중 배심원단이 충격으로 기절하는 등의 소동이 있었다.

3.4. 부검 결과와 사망 원인


상세한 조사 결과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난다. 사인은 구타에 의한 외상성 쇼크와 위의 토사물에 의한 질식사로 추정됐다. 사망 당일, '''2시간에 걸친 폭행'''이 끝나고 준코는 사망했다.
  • 준코의 시신은 손발이 묶인 채였고, 얼굴은 눈의 위치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손상됐으며, 하반신은 얼굴보다 훨씬 더 참담한 상태였다. 온몸의 근육은 폭행과 화상 등으로 흐물흐물하게 녹아 있었고, 고름과 진물이 흘러 범벅이 되어 있었다.
  • 얼굴의 뼈 일부는 으스러져 있었고, 가슴에 빈틈이 없이 바늘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으며,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머리카락도 얼마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 새끼손가락의 손톱이 벗겨져 있었고, 왼쪽 유두는 펜치와 같은 공구로 집혀 손상됐으며, 제대로 붙어있는 치아는 하나도 없었고, 또한 축소되어 녹아 있는 상태였다. 는 피와 고름으로 꽉 막혀 입으로 호흡했을 것이라 추정되며, 고막도 심하게 손상됐기에, 마지막엔 거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28] 너무나 가공할 고통 속에서 입술을 깨물어,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모두 절단되어 있었다.
  • 피하 지방의 두께는 평균치의 100분의 6이 채 되지 않아 극도의 영양실조 상태였다. 원래 53kg이었던 체중은 36kg으로 줄어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준코의 위장에선 지네바퀴벌레, 소변, 그리고 기도와 식도까지 차올라 기도를 막아버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정액 등이 발견됐다. 정액은 도대체 몇 명의 것인지 확인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그 양이 많았으며, 인간의 것이 아닌 정액 반응도 검출됐다. 성기에는 비타민 음료 병 2개가 꽂혀 있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위장, 그러니까 뱃속과 성기와 항문에서 발견된 게 맞다. 준코의 몸 아래쪽에 있는 장기들의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대장에 큰 화상을 입었고, 그 외의 기관들의 상태도 정상이 아니었다.
  • 사망 당시부터 심각하게 손상돼 안면이 심하게 함몰 및 변형되어 있었고, 그 뒤로 시간이 흐르면서 부패까지 해서, 외관만으로는 사인을 비롯한 신원 확인조차 쉽지 않았지만, 손상된 시신에 남아 있던 지문치열을 조합하고 머리카락의 DNA 등을 검사한 결과, 1988년 11월 25일 밤, 아르바이트 후 귀가 도중에 행방불명된, 사이타마현 미사토시 타카스 1번지의 현립 야시오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후루타 준코(17세)임이 확인됐다. 준코가 목숨을 잃은 방에선, 벗겨진 그녀의 아래 속옷이 남아 있었다.

3.5. 피해자, 가해자 부모의 반응


준코의 부모는 당시 준코가 야시오시 시내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 뒤 귀가하지 않아, 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낸 상황이었다. 준코가 무사히 돌아오길 손꼽아 기다렸으며, 일을 쉬어가면서까지 준코의 행방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사건 재판 당시 준코의 아버지 후루타 아키라(古田晃) 씨[29]는 "가는 곳마다, 지인들이나 모르는 사람들이나 죽은 딸의 이야기를 집요하게 캐어 물으면서 물고 늘어지며 괴롭힌다"고 통탄했다. 특히 "지인들은 질문하고 나서 위로라도 해줬지만, 기자들과 그 기자들을 비롯한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것도 없었다"면서 한탄했다.

준코의 장례식은 학교 친구들, 가족, 친척들이 모인 가운데, 4월 2일에 준코의 집에서 엄숙하게 치러졌다. 이 장례식에는 기자들도 많이 참석했다.[30]
묘지는 소년 B의 어머니에 의해 훼손된 후에 다른 곳으로 이장했고, 외부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장례식에서 준코의 친구인 미야시타 카나(宮下佳奈) 학생이 읽은 추도사는 다음과 같다.

'''준 짱, 어서오세요. 이런 식으로 재회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팠죠? 괴로웠죠? 아무것도 모르고 생활했던 자신에게 화가 납니다. 언제나 온화하고 밝았던 준 짱. 문화제 때 모두와 만든 핫피(일본전통축제의상)는 잘 어울렸었죠. 평생 잊지 않을 거예요. 저희는 준 짱의 죽음을 절대 헛되이 하지 않겠습니다. 끔찍한 범죄가 없어진 평화로운 날을 보낼 수 있도록 사회인이 된 저희들도 노력하겠습니다. 또 괴로운 일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갔던 준 짱을 생각하며 힘내겠습니다. 교장선생님이 특별히 졸업장을 들고 와주셨다고 하네요. 이로써 3학년 8반 47명은 전원 졸업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준 짱... 이제 고통도 괴로움도 없어요. 편히 잠드세요. 잘 가, 준 짱. 야시오 고교 3학년 8반 일동.'''

그리고 4월 초에 준코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선, 준코가 돌아오리라고 믿고 보관해 두고 있었던 졸업장을 그녀가 살던 집으로 보내줬다.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고, 관련인들의 진술도 통탄스럽다. "준코가 감금 도중 가장 많이 한 말이 무엇인가"란 질문에 가해자들의 대답은 똑같았다. 바로 '''"나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거예요?"'''란 것이었다고.
사건의 전모, 자신의 딸이 얼마나 처참하고 끔찍하게 죽어갔는지를 알게 된 준코의 어머니는 '''충격을 받고 쓰러져 장시간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준코의 아버지는 장례식 영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 이후에도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웬만해선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기자들이 준코의 신상정보를 전 세계에 알리기 시작하자, 결국 언론사에 직접 찾아가서 "딸의 신상정보를 유출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기까지 했다.
주모자 소년 A의 부모는 '''그나마 그중에서 상식적인 부류였다.''' 자식이 저지른 범죄 행각을 안 A의 부모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 가산을 정리'''해 5천만 엔[31][32]을 준코의 부모에게 건넸지만, 유족들은 거절했다고 한다.[33]
소년 B의 생모 오구라 에츠코는 참으로 '''인간 말종, 그 자식에 그 부모'''란 면모를 대놓고 드러냈다. 아무리 준코의 어머니와 원수지간이라 해도 사건이 밝혀져 자기 자식이 대가를 치른 것에 분노해 '''"이게 다 준코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심지어 준코의 묘를 부숴버리는 충격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B의 부모는 이 사건 이전부터 B의 아버지의 혼외정사로 인해 별거 중이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이혼한다. 소년 B의 아버지는 사과가 아니라 "노코멘트하겠다"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한편 소년 B의 생모는 준코가 죽고 35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조롱이라도 하는 듯 버젓이 이 사건 발생지 인근에 음식점을 차리는 등 행태를 일삼으며, 준코를 원망하고 있다고 한다.
준코가 감금된 장소를 제공한 소년 C의 부모는 "여학생이 2층에 있는 것을 내내 알고 있었으며, 그녀를 내보내기 위해서 그나마 제일 회유하고 노력했지만 '''아들이 두려워'''[34] 어쩌지 못했고, 이미 돌려보냈다고 의심치 않았기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사건이 밝혀지고 증거 확보를 위해 경찰관들이 들이닥쳤을 때는, '''방의 바닥과 커튼, 베란다 벽 등이 모두 새 것으로 바뀌어 있었고, 어머니가 깨끗하게 청소해 버려''' 집안에는 그 어떠한 증거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과연 정말로 몰랐을까?'''

3.6. 세간의 만행


일부 황색언론은 '''준코의 얼굴이나 교복, 수영복, 핫팬츠 차림의 사진 등을 그대로 노출하며 행실이 불량한 아이였다느니, 불량배 패거리의 일원이었다느니 하는 등의 분명하지 않은 사실들을 그대로 기사로 내놓는 추가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기레기들이 쓴 불쏘시개의 내용과 달리 준코의 주변인들과 동급생의 증언에 따르면, 준코는 탑클래스의 성적에 결석도 1년에 두세 번 정도였으며, 아르바이트도 아주 성실히 임하는 등, 불량학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교우 관계도 원만했고, 밝고 명랑하며 누구에게나 웃으며 인사하는 상냥한 성격에 미인이었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준코는 아이돌동경했다고 하며,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곧바로 근처의 가전 판매점에 취직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케이크 만들기가 취미였던 준코는, 얼마 후인 크리스마스에 어머니와 함께 케이크를 만드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모를 공경하는 아이였으며, 아르바이트도 졸업여행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준코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직장에선, 당연히 왜 준코가 오랫동안 출근하지 않는지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기자들은 자극성만을 노리며 본인들의 이득 앞에 사람 목숨이 어쨌든 신경조차 쓰지 않은 보도에 환장한 나머지 근거도 없는 비난이 준코와 그 가족들에게 쏟아졌고,[35] 분노한 아버지는 딸의 실명 보도에 대한 문제점을 강하게 제기했으며, 이후 준코의 가족은 '''아무 죄 없이''' 남의 눈을 피하며 숨어 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진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그녀의 억울함을 알겠습니까?》란 책에선 '''"준코는 언론에게 다시 한 번 살해당했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덧붙여 준코는 범행을 당하기 전 미성년자 성폭행범으로부터 교제를 전제로 한 스토킹을 집요하게 당하고 있었으며,[36] 어디까지나 가설이지만 이 남자가 가해자 일행에게 정보를 주고 준코를 협박했고, 가해자들은 계획적 범행인 것이 탄로날 수 있음이 두려워 이 사실을 누설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범행에 계획성이 있었다고 보일 경우, 형량이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설에 대한 근거로 범인들이 평소 강간에 쓰던 차[37]를 사용하지 않아 준코를 협박할 자신이 있어 보였다는 점, 또한 준코의 집 근처가 인적이 드문 창고 앞이었음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한 점 등이 언급됐다.

3.7. 사건의 충격


이 사건이 일어난 4년 뒤에 일어난 이치카와 4인가족 살인사건의 범인은, 준코 살인사건의 범인들이 징역형을 받은 것을 근거로 "나의 범행은 별 거 아니다"라고 주장했으나, 이치카와 사건은 다수의 사람이 살해됐고 범행 당시 범법자가 형사 미성년자 연령을 이미 벗어나서 얄짤없이 사형당했다.
추가로 이 사건이 진행되는 사이에 '''도쿄, 사이타마 연쇄 유아납치 살해사건'''도 잇달아 발생했다.[38] 쇼와 시대에 극단적인 살인 사건이 총 2번 발생한 셈이며, 이 때문에 무고한 유소녀 4명, 그리고 이 콘크리트 사건에서 여고생 1명, 종합해서 총 '''5명'''이 짧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차이는 이 사건의 범인이 미성년자 소년들이었다면, 옆동네는 20대 남성 청년이 감행했다. 더군다나 이 범인들이나 미야자키나 재판 후에도 반성의 여지가 전혀 없다.
너무 충격적이다 보니, 한국에서도 사건 직후 심해지는 일본의 소년 범죄에 관한 기사에서 이 사건에 대해 언급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미국, 유럽 등의 언론에서도 이 사건을 보도했다.
사실 '''형사의 말실수'''란 우연한 계기로 인해 범인들이 자백을 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지도 못한 채''', 진실을 뒷받침하기 위한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범인들의 주변인은 모두 준코를 목격하거나 정보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방관했고, 심지어 폭행과 강간에 동조하기까지 했다.''' 위에서도 약 100여 명의 사람들이 준코의 상황을 알고 있었으나 '''단 1명도 경찰에 알리지 않았다.''' 단 1명만이라도 경찰에 알렸어도 준코는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 사건은 '''지극히 평범한''' 주택가의 한 집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렇듯 우리 주변에서도 이런 범죄가 일어날 수 있으며, 그것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무시해선 안 된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난 뒤 '''증거도 없이 묻힐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단 한 사람이라도 용기 있게 대처했으면 피해자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논픽션 라이터 후지이 세이지가 사건의 주범들과 공범 그리고 목격자들을 직접 만나 탐문한 걸 바탕으로 엮은 책 《소년의 거리》(개정판: 17세의 살인자)에 따르면 사건 관계자 대부분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여학생을 납치한 것은 알았지만 '''귀찮은 일'''에 엮이기 싫었다",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이 신고하겠지.", "소년들의 보복이 두려웠다", "집에 돌려보냈다는 말이 미심쩍었지만 범인과는 친구였기에 믿었다"라고 말한다. 주범들의 명령에 따라 준코를 강간하고 폭행한 소년들 중 일부도 자신의 죄가 밝혀질 게 두려워 신고하지 않았고, 심지어 자신만 죄책감에 시달리는 게 두려워 친구를 범행에 끌어들인 소년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후지이 세이지는 "준코를 살해한 것은 주범들이지만, 직접 범행에 가담하지 않은 그들 한 명 한 명의 무관심과 약한 마음 역시 확실하게 준코를 살해하는 일에 가담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람에 따라 ''''미성년자가 이런 극도로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만으로 충격적일 수 있다.

4. 환경적 요인


[image]
1990년경 촬영된 아다치구의 방치된 아파트 단지.[39]
현재 사건이 벌어진 동네는 지형이 달라졌고 재개발 되어 백화점 및 신도시가 들어선 주택가가 됐지만, 사건 당시에는 좁고 어두운 골목에 막장 치안으로 유명했다. 70~90년대 도쿄도 아다치구는 정말 도쿄, 아니 깡패의 소굴이었던 과거의 일본 전체에서도 가장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최근에도 끔찍하게 죽은 고양이비둘기가 가끔 발견된다고 한다.
해만 지면 정말 온갖 별의별 불량 청소년들이 무리를 어슬렁거리며 싸움질을 하거나, 오토바이로 밤새 엄청난 소음공해를 일으키면서 거리 기물을 파손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는데, 주민들은 무서워서 이들을 못 본 척하며 다녔고, 비명 소리가 들리든 말든 귀를 막고 신경 쓰지 않았다. 거기다 주민들은 불량 청소년들이 행차하면 엎드려 절을 해야 했고, 최소한 고개를 숙여야 했다. 아다치구 공무원들도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눈치를 봐야 했으니. 그러니까 준코가 납치당하면서 비명을 질렀어도 인근 주민들에게는 그냥 매일 들리는 소음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40]
당연히 주민들은 "순찰 경관을 좀 늘려달라", "분서를 설치해달라"는 민원을 아야세 경찰서에 넣었지만, "인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묵살당했다. 이런 동네에서 살아가려면 불량 청소년 패거리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이는 이 사건을 주변인들이 방관한 데에 큰 이유를 제공했다. 아다치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 동네는 심지어 현재까지도 도쿄에서 가장 소득이 낮으며 치안이 극도로 안 좋은, 여자가 혼자 살기 가장 위험한 동네로 유명하다.[41] 뭐 아다치구가 예나 지금이나 청소년/청년 야쿠자 조직으로 유명하니 말 다했다.
결국 일본 경찰의 방만한 대응은 참혹한 살인사건을 불러왔고 충격적인 사건 이후 인원 부족을 이유로 주민들의 민원을 무시한 아야세 경찰서는 '''어디선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인력과 예산'''으로 순찰 경관을 늘리고 보안등을 추가로 설치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
첨언하자면, 현재 이 동네에서 이 사건을 주민들 앞에서 언급하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다. 이미 수십 년 전 일이고 어지간한 당시 주민들은 사건 이후부터 재개발 등 여러가지 이유로 대부분 다른 곳으로 떠나 새로운 주민들이 자리를 채웠기에 당시 일은 자신과 상관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일인데 타지 사람들이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하기 때문.
한편, 준코가 살았던 미사토시는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준코가 살던 집과 다녔던 고등학교도 현재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애초에 물어보지 않는 것이 예의겠지만, 이 사건에 대해 물어보려면 이쪽으로 가는 것이 더 나을 수도. 물론 이곳 사람들에게도 이 사건은 엄청난 충격과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다.

5. 범인들의 인적 사항


[image]
4명의 중학교 재학 당시의 모습.
위 사진에선 미나토 신지의 이름이 노부하루라고 잘못 기재되어 있다.[42][43]
이들은 일반적인 양아치가 아니었다. 아다치구를 근거지로 하는 청년부 조직 극청회를 결성해 '''폭력단의 행사에도 수시로 들락날락했고, 경찰조차 손을 대지 못할 정도로 온갖 강력 범죄를 수없이 일으키고 다녀,''' 주민들은 해가 지면 밖에 나다니는 걸 극도로 자제할 만큼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A는 엄친아에다 유도 등으로 온몸이 어마어마하게 단련되어 있었고, 소년 시절 카츠시카구와 하치오지 시내 일대의 불량배들을 씨를 말리고 다녔다고 한다.[44] 이런 괴물에게 준코가 붙잡혀갔던 것이다.
이들은 사건 당시 전원 미성년자였기에 소년범이란 점이 참작되어, 중범죄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제2의 인생을 살 기회는 얻기는 했으나, 사건 이후 35년이 지난 지금도 가해자들은 스토킹당하고 있다고 한다. # 신분을 최대한 숨기고 이사를 가도 얼마 못 가서 인근 지역에 정체가 폭로돼 갖은 불이익을 받으며 죗값을 치르고 있지만, 준코가 '''당해왔던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사건 명칭으로 검색하면 범죄를 저지른 4인방의 인적 사항(본명 + 출소 후 개명한 이름, 사진 등)을 한국어판 위키백과에선 '''피해자 준코와 가해자 4인방의 실명, 출소 후 개명한 이름까지''' 문서에 적고 있다. # 일본어판 위키백과 사용자들이 '실명 게재는 일본 법을 위반하는 행위이므로 실명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위키미디어 메타(모든 언어판 위키백과를 총괄하는 사이트)에서 부결됐다. 2ch에서 꾸준히 해당 사건의 스레드가 작성/유지되는 걸 보면 이런 상황은 앞으로 계속될 듯. 이놈들이 저지른 죄가 워낙 흉악해, 만약 이 사건이 사적인 보복이 허용되는 사회였으면 준코의 가족까지 갈 것도 없이 '''같이 살고 있는 마을 주민들에게 죽거나,''' 그게 아니라도 아예 사회의 일원으로 살기를 포기하고 죽은 사람처럼 드러나지 않게 살아야 했을 것이다.
굳이 인터넷으로 검색할 필요 없이 방송에서 잊을 만하면 이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기 때문에, 웬만한 일본인들이라면 이 사건을 잘 알고 있으며, '''가해자들이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전부 알고 있다'''. 아무리 얼굴을 모른다고 해도, 가족들과 피의자의 사진은 이미 퍼질 대로 퍼진지라, 마음만 먹으면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현재 중년 남성이다. 일본이 전 세계적으로 장수 국가인 것을 감안하면, 이들은 이제서야 인생의 반환점을 맞이한 셈. 현재 이 사건을 다룬 매체들을 보면, 전부 피해자인 준코의 얼굴만 그대로 나오고 '''가해자들의 얼굴은 눈이 가려져서 나온다'''. 그래서 "범인들의 얼굴도 공평하게 그대로 나와야 한다"다는 항의가 지속해서 나오고 있다.

5.1. 소년 A


  • 본명: 미야노 히로시(宮野裕史)
  • 현재: 요코야마 히로시(横山裕史)
  • 출생: 1970년 4월 30일 (현재 53세), 카츠시카구
이 사건의 가해자들 중에서도 '''최악의 인간 말종'''으로 평가받는 범인이다.
https://youtu.be/H6fnp0dngug
현재 요코야마(横山)로 을 바꾸었다. 출소와 함께 다른 사람에게 입양되는 형식을 사용.[45]
신체적 특징은 왼손잡이이면서 재판 당시 뇌검사에서 전두엽측 지주막하낭종이 발견됐다.
가해자들 중 최연장자[46]이자 두목격. 범인 소년들의 보스 정도 된다. 할아버지는 군인, 야쿠자 출신의 정치인이었고 고모부 또한 야쿠자 간부였다. 아버지 미야노 히로후미(1941년생, 현재 83세)는 금융업계 사장이었으며, 어머니 미야노 시즈(宮野シーズ, 1941년생, 현재 83세)는 피아노 연주 강사였다고 한다. 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부친이 다른 여자의 집에 거주하면서 간통하는 바람에 이때부터 삐뚤어져 문제 행동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부모를 마구잡이로 구타했고, 온몸에 타박상을 입힌다거나 갈비뼈를 골절시켜 중태에 빠트리는 극악무도한 행위를 저질렀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 펀치 파마를 했고, 히가시 아야세 중학교의 체육 특기생으로 유도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무리를 지어 다니고 목검쌍절곤 같은 무기를 소지했으며, 인근 학교에 쳐들어가 기물파손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사이가 나빠서, 가출해 거리에 주차된 트럭에 무단으로 올라가 잠을 자다가 신고받고 귀가 조치되는 일도 잦았다. 이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와 고모부 빽으로 초등학교 시절 이미 카츠시카구와 인근 하치오지시 일대의 30여 개 초등학교의 또래들 사이, 교직원들 사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고 한다. 무력에 가치를 크게 두는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초등학교 무렵부터 키가 작은 대신 몸집을 키워 싸울 때 날아가지 않도록 밥을 많이 먹고 멸치를 씹어먹으며 뼈를 강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팔 굽혔다 펴기와 복근 운동, 달리기 등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백 개씩 해왔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카츠시카구 지도를 보고 일일이 찾아다니며 다른 학교를 깨러 다니고는 했다고 한다.
중학교 입학 시점 기준 160cm 정도로 작고 왜소했지만, 몸이 단단하고 다부졌기에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선배의 추천으로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유도부에 입문했다. 초기에는 지역 내에서 체급 내 5위에 드는 정도였지만, 실력이 나날이 발전해 출전하는 대회마다 우승과 준우승을 휩쓸 정도였기 때문에, 너무 강한 탓에 질투의 대상이 됐다고 한다. 도쿄도 내의 온갖 유도대회를 석권했고, 중학교 동창들은 "소년 시절부터 몸을 쓰는 일뿐만 아니라 이름을 날리는 쪽으로는 이골이 날 정도로 강했는데, 자타가 공인하는 카츠시카구의 남자들 가운데 무력 최강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라고 증언했다. 중학교시절엔 고등학생 불량배들과 싸움을 하고 다녔을 뿐더러, 학교장 추천으로 사립명문 토카이대학 부속 사립 마츠키 실업고등학교에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했을 정도로 강했다고 하며, 고교 1학년에는 도쿄도 전체에서 2~3학년을 모두 제치고 우승했지만[47], 상위 체급의 유도부 선배들을 미야노 히로시의 부모가 고소할 정도로 심한 집단 괴롭힘을 당했다.[48] 그래서 분풀이의 대상을 찾기 위해 집에 들어와선 자신의 부모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집이나 거리의 기물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밖에 나가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행인이나 불량배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폭행해 금품을 갈취하고 여자를 강간하고 다니는 미치광이가 됐다고 한다. 18세가 되던 해에 문제의 콘크리트 살인 사건으로 체포되기 전까지 무리를 지어 강간하고 다녔던 여성만 기억상으로 90명이 넘었다고 진술했으며, 심지어 준코를 감금해 놓았던 기간에도 '''다른 여성들을 몇 명씩이나 강간하고 다녔다.''' 다만 공갈협박을 했기 때문인지, 실제 신고한 여성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수위가 너무나 심해서 심지어 '''경찰마저 골머리를 썩히면서도 손을 놓고 있었다'''.
고1에 중퇴한 이후 폭주족의 우두머리를 맡기 전에는 집안에서 미치광이처럼 집기를 모조리 때려 부수고, 다른 학교의 복도에 오토바이를 타고 쳐들어가 '''학생들과 교사를 마구잡이로 집어 던지고 주먹 등으로 구타하는 등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감당이 안 되는 폭군이었다.''' 교사들 6명이 몰려와도 떼어놓지 못해 경찰까지 출동을 해서야 겨우 떼어놓았다고 하는데, 정말 경악스러운 것은 경찰의 한심한 대응이었다. '''소년교도소에 보내져야 할 이런 짓을 하고도 소년원 송치 및 보호관찰 정도로 끝났다.''' 물론 할아버지와 고모부의 빽도 있었지만.
게다가 본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도 '''폭주족을 탈퇴한 동료를 찾아가 12시간 가량 집단 린치를 가해서 폭행으로 불구로 만들어 놓는다'''든가, '''지나가던 남성 2명을 다리 밑으로 집어던져 살인미수로 체포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렇다 할 처벌을 받지 않았던 모양. 폭주족의 우두머리로 몸을 담던 시절의 후배 및 동료들에 따르면, '''자신에게 한 번 표적이 된 대상은 상대가 누구든 남녀를 가리지 않고 부하들을 시켜 집요하게 집주소와 동선을 파악시켜 야밤에 폭행으로 고문해 반죽음 상태를 만들거나 납치 혹은 강간을 하곤 했다고.''' 그랬기에 누구나 '''"미야노의 적이 된다면 본 인생은 끝"'''이라고 생각했으며, 이런 식으로 당한 피해자들 가운데 '''강간 피해자만 최소 90명이 넘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그의 집안에 대해 비아냥거려도 뼈도 못 추렸다. 그야말로 좁게는 그 일대, 넓게는 일본 열도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건들면 안 되는 초1급 위험 인물이었던 모양. 그래서인지 사건이 터졌을 때도 "그 녀석이라면 사람을 죽여서 훼손해버리는 것쯤은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것"이란 반응이었다고 한다.
놀랍게도 중학교 때부터 소년 D(와타나베 야스시)의 친누나인 연상의 여자친구와 동거하며, 성인이 되면 결혼하기로 약속한 약혼자 사이였다. 18개월 정도 타일 제조 공장에서 일하다가, 자동차 학교의 합숙장에서 친해지게 된 폭력 써클의 불량배들과 어울리게 돼 그들의 소개로 긴자의 생화상으로 일했다. 하지만 적성에 안 맞았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시너를 불게 되며 더더욱 엄청난 폭군으로 변한다. 고교 중퇴 이후 자신을 동경하는 불량배들을 모아 아다치구를 근거지로 폭력 조직 극동회[49]의 청년부 조직 '극청회'를 결성한다.[50] 강간, 상해, 약취, 강도 등의 강력범죄에 이외에도 부하들을 시켜 일본인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 러시아 등의 서양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돈 등의 금품을 약탈하거나 생화를 말도 안 되는 고가에 강매하는 짓 따위도 꾸준히 해왔던 모양.
2006년 가석방됐고,[51] 그 이후 7년에 걸쳐 사이타마현 카와구치시의 용역 업체 미야우치 해체 공업소(宮内解体工業所)에서 일하고 있다. 거주지는 카와구치시 하스누마 298번지 사카에하이츠 201호(埼玉県川口市蓮沼298 栄ハイツ201). 2013년 보이스피싱 사기 혐의[52]로 체포됐지만 완전 묵비권으로 일관한 탓에 1월 31일,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됐다.
같은 형무소 수감자의 증언에 의하면 아버지뻘인 자신에게도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왔으며 항상 밝고 평안했다고 하며, 보통 강력범죄를 저지른 수감자의 경우는 다른 수감자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경우가 잦았지만 그는 그런 것 없이 복역 기간 동안 잘 지냈다고 한다.[53] 또한 출소 후 이름을 바꾼 뒤에도 킥복싱 체육관을 다니거나 친한 후배와 유흥을 즐기는 등 잔인한 살인사건을 저지른 가해자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반성이나 죄책감 없이 일상생활을 했으며 사기 혐의로 체포되기 전까지 외제차를 타고 고가의 시계를 차며 명품 옷을 입고 다니는 등 예전엔 강간, 폭행, 상해, 강도살인이 주특기였다면, 이제는 사기를 쳐서 무위도식하며 상당히 호의호식하고 희희낙락하면서 살고 있는 모양. 최소한의 후회나 죄책감 같은 게 없음은 확실해 보인다.

5.2. 소년 B


  • 본명: 오구라 유즈루(小倉 譲)
  • 현재: 카미사쿠 조(神作 譲)
  • 출생: 1971년 5월 11일 (현재 52세)
카미사쿠 조(神作 譲)로 개명. 1남 1녀 중 둘째. 소년들 패거리의 부두목.
아버지는 지방 검찰 고위 간부. 190cm에 가까운[54] 우락부락한 체격과 목소리가 특징. 체격이 소년 A와 비슷하거나 웃도는 수준이었다고 하니 말 다 했다. 그 외 신체적 특징은 왼손의 손가락이 6개였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 하키 선수로 활약했지만 부상으로 은퇴했다. 중학교 시절 지인에 따르면, 폭주족의 선배인 고등학생 2명과 싸움이 붙었다고 하는데, "얻어맞으면서도 싸움을 멈출 줄 몰랐다"고 할 정도로 호전적이고 집요한 성격. 폭력적이어서 어디를 가나 싸움을 일으키고 다녔다고 한다.
이 무렵에도 자전거를 타고 가는 여학생을 쫓아가 덮친다든가, 치마와 속옷을 벗기는 등의 짓을 해서 보호관찰 대상이 된 적이 있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왔다가 모친이 '''"걸레 같은 계집"'''이라고 발언한 것을 시작으로 가정폭력을 시작했다고 한다. 너무나 격렬한 폭력에, 어머니가 가정재판소에 몇 번이고 상담했을 정도라고 한다.[55] 다만 이 여자를 동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 사건이 밝혀져 자기 자식이 죄의 대가를 치른 것에 분노하면서 '''"내 아들의 인생이 저 여자 때문에 망했다!"'''라고 , '''심지어 준코의 묘를 부수어 버리는 충격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준코의 어머니와 불구대천의 원수였는데, 이는 어릴 적 B의 어머니가 준코의 어머니에게 수 차례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이다.
공판 당시에는 '''"그래도 놀아줬으면 된 거 아니야?"라고 유족 앞에서 낄낄거리며 웃기까지 했다'''. 범인들의 부 보스 격.[56] 출소한 뒤 이름을 개명하고 중국인 여성과 결혼 후, 일본에선 살아가기 힘들 것이란[57] 생각에 중국으로 건너가려 했으나 이혼하면서 실패했다.[58] 다 큰 성인이 되어서도 한낮에도 "캬", "우우우"하는 괴성을 지르고, 어머니에게는 "두들겨 맞기 싫으면 내 앞에 있지 말라"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던 2004년 5월 또 다시 아다치구에서 자신의 여자를 가로챘다는 이유[59]로, 이소노 타카토시란 사람을 모친의 스낵바에 감금해 납치, 폭행했다가 체포돼, 이미 여고생 살인사건의 형은 만기됐기에 어떠한 가중 처벌 없이 징역 4년이 선고됐다.
피해자 이소노의 증언에 따르면, 가해자는 딱 봐도 190cm는 넘어 보이는 신장에 체격이 거대했으며, 첫눈에 그런 부류의 인간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인상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피해자의 집에도 수시로 시도 때도 없이 갑자기 들어오고, 새벽에 다짜고짜 들어와서 냉장고를 뒤지고 술을 꺼내 그 자리에서 동료들과 밤새도록 술판을 벌인다거나, 여자 이야기나 섹스, 온갖 음담패설을 밤새 내내 늘어놓으면서 과거 이력을 자랑하고 "지갑이 사라졌다"면서 새벽에 찾아와 온 집안을 뒤집어엎은 적도 있다고 한다.
재판 당시 피해 남성은 카미사쿠를 다시 마주치는 것이 두려워 재판 참석을 거부하는 탓에 칸막이를 두고 재판을 진행했다. 이때도 그는 "이 정도는 감금치상이라고 하기도 뭐합니다만"하며 너무나 여유로워 보였다고 한다. 피해자는 감금되어 있는 동안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에 그저 영문도 모르는 채 용서를 빌어야 했고, 살아있는 것이 아닐 만큼 지독하게 오싹했다고 한다. 피해자는 안면을 구타당해 뺨에 손바닥만 한 멍이 시커멓게 들었고, 턱뼈와 앞니가 부서져 피가 철철 쏟아지는 동안에도 구타를 쉬지 않고 계속했다고 한다.
사건 당시 그는 금고 앞에 서서 야쿠자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금속 배트와 칼로 피해자를 위협하면서 "사람을 1명 죽이는 놈과 10명 죽이는 놈은 다를 게 없다. 나는 사람을 마음대로 구워삶는 여유를 배웠다. 검찰은 나의 노리개이니, 무슨 짓을 벌려도 풀려날 것이다. 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알게 해 줄까. 야쿠자를 우습게 알면 어떻게 되는가를 똑똑히 알려준다."라고 협박했고, 평소 콘크리트 살인 사건에 대해 "그때 후배들을 끌어들인 것도 나고, 내가 진짜 주범이다. 여자를 삭발시키고 떼거지로 패면서 강간하면서 비디오를 찍고 했다.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턱관절을 탈구시키고 팔을 분질러 버렸다. 그러면 까무러쳤다. 그땐 너무나 즐거웠다. 하루는 돌아왔는데 몸에 불을 질러도 미동도 없길래, 코에 담배 연기를 피우고 숨을 쉬지 않는 걸 알았다."라고 말하며 웃음 섞어가며 자랑했다고 한다.
정말 이 녀석이 주범임이 사실이면, 진범에 대해 제대로 된 처벌이 내려지지 않았다는 거나 다름없다.[60] 사실 사건 재판 당시에도 소년 A는 "나는 준코의 온몸에서 고름과 진물이 쏟아져 나와 더러워진 이후에는 C의 집에 잘 오지 않았고,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납치하거나 강간했다.[61] 그러나 B와 C 등은 이 시기에도 준코를 지독하게 괴롭혔다."라고 밝히긴 했다. 하지만 부하들은 "우리는 A에게 대항할 수 없었기에 따른 것뿐, 우리도 피해자이다."란 개소리를 했고, 이 말이 통했던 건지 형량이 말도 안 되게 가벼웠다. 애초에 가해자들 중 자기 죄질에 상응하는 형량을 받은 놈은 없다.
주범인 미야노 히로시가 없을 때는 오구라 유즈루가 두목 역할이었다고 한다. 징역형이 4년이었으니까 만기를 채워도 출소했을 터인데, 이후엔 근황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다. 2번이나 감옥에 다녀왔으니 또 가기 싫으면 웬만해선 밖에 안 나오고 조용히 살고 있겠지만, 나갔거나 일을 하더라도 A처럼 죽을 때까지 평생 욕을 바가지로 먹을 건 변함없을 것이다.
그의 현재 사진으로 알려진, 창문을 닦고 있는 사진은 본인이 아니며, 단지 개명 전의 이름인 '오구라 유즈루'의 동명이인이다. 앞서 말했듯 진범은 카미사쿠 조로 개명을 했으며, 지금 나돌고 있는 사진을 보면 왼손에 손가락이 정상적으로 5개이다. 때문에 그의 사진이 마치 범인인 것처럼 쓰이고 있어서 막상 전혀 관계가 없는 동명이인일 뿐인 당사자는 곤혹을 치르고 있다고 한다.

5.3. 소년 C


  • 본명: 미나토 신지(湊 伸治)
  • 출생: 1972년 12월 16일 (현재 51세)
범인들 중 최연소자이다.
그의 큰아버지는 야쿠자 고위 간부였고 부모는 일본 공산당 소속의 진료소 간호사로 근무했으며,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적기)에서 표창을 받기도 하는 등 열성적인 일본 공산당 당원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해당 사건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일본 공산당 및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는 부모의 배경 등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미나토 신지의 부모를 공산당에서 제명한 뒤 "이 사건과 공산당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란 한 문장을 기관지에 싣고, 그 이후로 사건 관련 보도나 자신들의 책임 관련 반성 문제 등은 기관지에서 거의 생략하는 내부통제를 시행해 엄청난 비판을 받게 됐다고 한다. 사건의 전모가 알려지자 당연히 소속에선 짤렸으며, 그의 부모는 무직 신세로 전락. 원래 다른 지역에 살다가, 어릴 적에 아야세시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62]
학창 시절 농구 선수였지만 고교 진학과 동시에 퇴학당한다. 준코를 감금했던 것이 미나토 신지의 자택 2층 방이었다. 범죄가 일어난 해당 주택 방에서 현재까지도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일당들 중 준코를 알고 있던 인물이었으며, 이전부터 끊임없이 준코를 향해 "내가 가질 것이다"라고 얘기해 왔다고 한다. 또한 초기에는 함께 게임을 하거나, 타인이 보면 친해 보인다고 할 정도로 아주 나쁜 취급은 안 했던 것으로 보이며,[63] 준코 또한 B에게 "미나토 군은?"이라고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가 폭행당하기도 했다.
본인도 폭행에 가담한 주제에 준코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불쌍하다고 여겼지만, 점점 그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재미가 있어서 더 심한 학대를 가했다'''는 점에서, 이 인간도 만만치 않은 싸이코패스로 보인다. 감금에 가담했다고 볼 수 있는 형[64]은 동생과 함께 위 사건의 공범으로 기소됐지만, 직접적인 가담이 없었다는 이유로 간략히 그 어떠한 불이익 없이 구속도 되지도 않고 소년보호 처분을 받는 것으로 끝났고, 그 이후의 근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준코가 붙잡혀 있는 걸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구출해내지 않았던 부모 모두 역시 무죄 판결이란 말도 안 되는 결과가 나왔다.
2006년 루마니아인 여성과 결혼해 한때 오사카로 이사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결혼한 상대가 리히텐슈타인 국적이라고도 한다. 1995~1996년경 아야세시 시내의 태국 요리점에서 무에타이 파이터로 데뷔한 것을 시작으로 프로 선수로 뛰었으며[65] 하루 10시간이 훨씬 넘게 훈련하는 등 프로 무에타이 파이터로서도 결코 약한 편이 아니었지만[66], 이 자의 본성이나 행적들이 숨겨지는 것도 아니라 등장할 때부터 야유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2001~2002년경 은퇴.
2007년엔 '''간병인''' 자격을 취득했고, 네야가와의 한 파칭코 가게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그 후로는 근황이 안 알려졌다가, 45살이던 2018년 8월 19일, 사이타마현에서 '''주차 문제로 같은 날 32세의 한 남성을 삼단봉으로 내리치고 또 다른 1명을 흉기로 수 차례 찔러 살인미수로 긴급 체포됐다는 기사가 나왔다'''.
2019년 3월 5일 사이타마현 지방재판소에서 이루어진 재판에 따르면 미나토 신지는 살이 붙은 중년 남성의 모습이었고, "패거나 찌르긴 했어도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항변했다. 처음에는 '칼로 찔렀다는 건 인정하나 삼단봉으로 내리친 사실은 인정할 수 없다'며 매우 불손한 태도로 재판에 임했고, 이윽고는 '칼로 찌른 적도 없다'는 편지를 사전에 재판관에게 보내는 등 범행을 완전 부정. 해당 사건은 야후 재팬 키워드 실시간 1위를 하며 다시 그의 이름을 세간에 오르내리게 하였다.
사건을 목격한 주민들에 따르면 결코 주차 문제 같은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미나토 신지는 이전부터 사람을 기분 나쁘게 노려보면서 고함을 지른다든가, 아침이나 새벽 3시에 아래층의 천장 전등이 뒤흔들릴 정도로 쿵쿵 뛰어 잠을 깨웠고, 그래서 올라가 보면 문을 열어주지 않고 대답도 없어 다시 내려가면 또 다시 괴성을 지르면서 쿵쿵 뛴다든가 이런 짓을 밑도끝도 없이 반복해, 문 앞에서 만나 따지려고 했지만 "들려?"라고 말하며 지나가 버린다든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도널드 트럼프 이야기를 꺼내며 말을 걸어온다든가, 차 안의 짐을 빼고 있는 사람을 차 문을 쾅 닫아버리는 등 이웃들을 온갖 방식을 동원해 집요하게 괴롭혀왔다고 한다. 피해자는 격렬하게 덤벼대는 미나토의 목을 감아 제압하려고 했지만, 이때 미나토가 소지하고 있던 칼을 꺼내 '''난도질'''한 것. 주민들이 몰려들자 달아났으나 곧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해당 사건의 공판을 보러 간 사람의 말에 따르면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고 한다. #

5.4. 소년 D


  • 본명: 와타나베 야스시(渡邊 恭史)
  • 출생: 1971년 12월 18일 (현재 52세)
중학교 1학년 때 이지메를 당했지만, 친누나가 소년 A와 교제를 시작하게 된 것을 계기로 A와 친해지면서 이지메가 거짓말처럼 멈췄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잭나이프쌍절곤을 소지하고 다닌다거나, 학교 수업 중에 돌멩이를 던져 창문을 부순다든가, 남의 오토바이도난하는 등의 문제 행동이 보였다고. 다른 놈들과 달리 유일하게 반성하는 척이나마 했으며, 실제 준코를 강간하는 일에는 적극 동참했지만 그 외에 폭행을 당하는 동안엔 소년 C의 형의 방에서 게임했다고 한다. 히키코모리로 살아가고 있다고 알려진 한편 용접공, 공조 장치 설치 등의 일을 전전하고 있다는 제보도 있다. 종합해보면 어떻게든 먹고 살려고 이거저거 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코하마 카나자와구에서 누나(기혼)의 집에 얹혀사는 듯. 정황상 D의 누나는 A의 범행으로 인해 A와의 약혼은 포기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가담 정도는 상대적으로 적고, 늦었으나 그래도 가장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기에 다른 놈들보다는 사람 취급은 받는다. 소년 D의 경우에는 폭행을 할 때를 제외하면 준코를 불쌍한 눈으로 쳐다봤다고 한다. 하지만 준코를 도와주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는 소년 A, B, C에 비해 소년 D의 힘이 많이 약해서 만약 준코를 도와주었다가 보복당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67] 형무소 내에서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 사건에 가담한 일이 알려져 심한 폭행을 당해 눈과 다리에 장애가 생겼다고 한다.
주범 A와 연인 관계였던 와타나베 야스시의 친누나는 남동생을 대신해 유가족들을 찾아가서 정식으로 사과하고 준코의 묘소를 찾으려고 했지만, 유가족들의 거절로 무산됐다고 한다. B의 모친이 준코의 무덤을 찾아가 부순 적이 있어서, 준코의 가족들은 무덤의 위치를 비공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악인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듯, C(미나토 신지)가 살인미수 사건을 일으킨 지 불과 며칠 후인 2018년 8월 24일 '''살인미수를 저질러 또 체포됐다'''.

5.5. 소년E


  • 본명: 나카무라 테츠오(中村 哲夫) → 이와이 테츠오(岩井 哲夫)
  • 출생: 1971년 (현재 53세)
주범 A의 협박에 의해, 준코의 납치 초반 강간에 가담한 공범. 범행 가담에 거부하다가 주범들에게 폭행당했다. 중년이 된 현재는 고향의 술집에서 '''당시 사건을 우스갯소리처럼 떠들고 다닌다고 한다'''.

5.6. 소년 F


  • 본명: 이하라 코이치(伊原 孝一) → 카키히가시 코이치(垣東 孝一)
  • 출생: 1972년 (현재 52세)
소년E와 함께 소년C의 방으로 불려와 강간에 가담. 사건 후 소년원에 보내졌다. 이후 성인이 되어 결혼해 2명의 딸을 낳아 사이타마현 우라와시에 거주했으나, 반복되는 문제 행동으로 우라와시에서 쫓겨나 현재는 사이타마현 이루마시, 또는 도쿄도 히노시로 이사간 것으로 밝혀졌다.

5.7. 기타 공범들


확실하게 공모한 것이 확인된 공범으로는 남성 17명, 여성 1명이 있다. 위의 6인 이외에 타케우치 쿠니, 아이다 코이치, 츠즈키 히로시, 카도 아키라, 하기와라 카츠히코, 무라카미 아키히로, 나무 류스케, 이시카와 아카네 등 대부분 극청회 소속이었다. 이들은 실제 살인학대에 적극 가담하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어이없게도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최초 준코를 강간하는 일에만 참여하는 줄 알고 불려왔다가 엮이게 됐다. 공범 중 망보기 역할이었던 소년의 인터뷰에 따르면 '탈출시킬 기회도 있었고, 아주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들이 무서워서 하지 못했다'[68]라고 한다. 이들은 자신들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을 폭행하고 온갖 폭언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A 일행은 '사람을 샌드백처럼 장소 가리지 않고 어떻게 저 정도로 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어마무시하게 구타하고, 상대가 아무리 울면서 용서를 빌거나 기절해도 폭행을 계속했다고 한다. 준코가 "나 이제 어떻게 돼요?"라고 묻자, 공범 소년은 그들이 무서웠기 때문에 "명령받아서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주범들은 부하들이 약간이라도 명령을 듣고 머뭇거리는 내색을 보이거나 준코를 적극적으로 폭행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 2층에서 베란다 밖으로 집어 던지거나, 준코가 보는 앞에서 린치를 가하는 등,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위협했다고. 때문에 도저히 대항은커녕 신고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공범자들은 준코가 어떻게 당했었는지 알게 된 후에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6. 사건의 판결


이 사건의 심각성이나 기타 죄책을 감안해도, 일본 사법부의 판단은 엔자이와 직접적으로 유사하진 않더라도 일종의 병폐고 소년범이라고 해도 과도한 선처를 한 점을 보아 어이가 없는 수준의 솜방망이 처벌이라고 볼 수 있다.
설사 사형이나 이에 준한 극형이 나올 성질의 범행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문서 하단에 나와 있는 법원의 양형 이유 등을 살펴보면, 일단 도쿄 지방검찰청은 소년 A부터 D까지 총 4인을 "상호 공모에 의한 미필적 고의에 따른 살인, 외설 목적의 유괴, 약취, 감금, 강간, 사체유기 등의 각 죄로 피고인들이 가정 형편에 있어서 불우하게 성장했음을 감안해도 일본 소년범죄 사상 보기 드문 중대하고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이런 행위를 할 수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매우 잔악하고 무자비하게 피해자에게 고통을 안겨 사회적인 물의를 빚은 점을 참작해야 한다"면서, 피고인 A를 주범으로 공소 사건의 발단을 만든 배후라며 무기징역을, 피고인 B를 "피고인 A의 최측근으로서, 피고인 A의 버금가는 지위로 하여금 공소 사건을 주동해, 종국에는 공소 사실에 기재된 범행을 자행하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며 징역 13년을, 피고인 C와 D는 준코에 대한 일련의 범행에는 가담했지만 피고인 A와 B의 주동 하에서 소극적으로 응한 점을 참작해 각 부정기형으로 징역 장기 10년, 단기 5년의 형을 법원에 구형했다.[69]
그러나 1심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피해자를 위 사건 공소 사실의 범죄로 인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에 이르렀다는 검찰의 주장은 인정되고, 그 범죄의 심각성 또한 반인륜적이여서 형사 책임은 무겁지만, 아직까지 미성숙한 미성년자들에 의한 집단 범죄의 특수성을 고려했을 때 극단적인 사태에 놓인 상황에서 정상적인 사리 판단을 하지 못해 불행한 측면에 빠졌음을 감안해야 하고, 수감 생활 도중 반성문을 제출한 것을 보아 교정의 필요성이 인정된다"며 소년 A 기준 검찰 구형 무기징역이 낮춰져 법원 선고가 가중 감경돼 징역 17년이 나왔다.[70] 심지어 어처구니없게도 돈을 받고 범인들을 변호해 주겠다고 자청하는 변호사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2심 도쿄 고등법원에 이르러 "피고인들이 반성하고 이후의 소년범으로서 교정 등의 갱생 필요성을 감안해도 유족이 엄벌주의로 처벌하기를 탄원하고 있고, 해당 사건의 죄책이 사회적 통념에 비춰보아 매우 흉악하고 중하다"면서 1심에서의 양형이 가중돼, 가중된 게 최종형인 소년 A 징역 20년, 소년 B 장기 10년 단기 5년, 소년 C 장기 9년 단기 5년, 소년 D 장기 7년 단기 5년의 징역형이 확정되었다. 이외에도 재판 기록에 따르면 실제로는 이 소년들 이외에도 가담한 100여 명의 가해자가 더 있지만, 그들은 직접적으로 사건에 가담하지 않은 점을 고려해 대부분 약식절차로 처분돼 가볍게 처벌받는 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동생의 범행을 방관, 방치했다고 볼 수 있는 소년 C의 형[71]도 이 사건의 주(主) 피고인 4인의 공모범으로 살인 및 사체유기와 강간 혐의로서 불구속 기소됐지만, 소년보호처분을 받는 것으로 끝. 이들은 일본에서 소년법이 없었다면 무조건 사형이 나왔을 죄를 지은 자들이다.[72]
당시 기록에 의하면 법정에서도 그들은 가식적으로 '''"준코를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가 죽는다는 생각조차 할 여지가 없었다."''' 고 말했다. 더 가관인 것이 소년 A는 '''"준코는 단지 운이 없어서 바보같이 잡혔던 것뿐이다."'''라고 말하고, 전혀 반성조차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나가면선 또 자신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에게 '''적반하장으로 "억울한 사람을 이렇게 끌어들이고 부끄럽지도 않냐"고 하고는 욕설까지 퍼부었다!''' 더군다나, 그는 눈물을 흘리기는 했으나 그것은 피해자에게 저지른 짓에 대한 반성의 눈물이 아니라, '''"병신같이 잡혀버린 내 자신이 불쌍해서"''' 흘린 눈물이었다고 한다.
이 모양 이 꼬라지에 분노한 준코의 부모는 피고인 측의 면회 신청 및 성묘를 절대 거절하고, 그 비통한 심정을 재판소에 토로했다. 준코의 아버지는 재판 증언 당시 '''"피고인에 대한 원 판결의 과형은 너무 가볍다"'''고 했다. 죄값을 제대로 치른 편인 주범 A도 준코의 부모 입장에선 죽일 놈인데, 심지어 주범 A를 제외하고선 미성년자라 해도 가벼운 형벌을 받았다.
다만 소년법의 적용뿐만 아니라 사형 판결을 내리는 일본 사법부의 관행에 비춰보았을 때, 판사들이 사형 판결까지 나올 성질의 것이 아니라 판단했다는 말도 있긴 하다. 다수를 살해하거나 유괴살인 혹은 살인 전과가 있는 상황에서의 추가적인 살인은 사형 선고가 원칙이지만, 그 외의 살인에 대해선 가급적이면 사형 선고를 회피하거나 주범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 일본 사법부의 관행이었기에, 20년 이상 선고가 불가능한 소년법의 적용과 더불어 주범 A에게만 엄한 판결이 나온 것이란 분석이다. 현재도 별 차이는 없어서 간혹 나오는 사형 집행 기사를 보면, 사형수 대부분이 2명 이상의 사람을 죽이거나 살인 재범, 유괴살인 등을 저지른 범죄자들이다.
현재 소년 A를 포함한 4명은 출소했지만 대부분 사회에 적응을 못하고 있으며,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다고도 한다. 게다가 35년이 지나 중년이 된 현재까지도 인간 말종급 강력범죄를 저질러 다시 교도소로 들어가기도 했다. 소년 D는 당시 준코가 폭행당한 뒤 자신에게 "나는 언제 집에 갈 수 있어?"라고 물었다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고 눈시울을 붉히며 반성하는 태도라도 보이며 참회한다는 말을 했다.[73] 허나 진심으로 반성한 것이라 해도 '''이미 늦었다'''. 그는 긴 학대 기간을 범행에 동조했고, 결국 준코는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7. 관련 미디어


  • 1989년에 방송된 다큐멘터리: #
초반에 소년 A의 어머니가 기자의 질문에 당황하며 도망치는 모습이 보인다. 이 당시 소년 A의 부모는 47세였다고 하니, 소년 A의 현재 나이와 비슷한 셈.
  • 1995년의 비디오 다큐멘터리(부제: 망가진 17세들 ~壊れたセブンティーンたち~): 1, 2, 3, 4, 5, 6, 7
이 다큐멘터리는 이 사건을 준코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 아래의 영화보다 더 일찍 나왔고, 시대도 1989년 그대로 재현했기 때문에 더 사실감이 있다. 재연 영상도 있으므로 일본어를 잘 모르더라도 보면 사건의 이해에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현재는 저작권 침해 신고를 받아 볼 수가 없다. 유튜브에서 중간에 중요한 부분만 잘라놓은 영상을 볼 수는 있다.
2003년 출판된 논픽션 《17세, 악의 이력서》를 바탕으로 2004년에 제작된 영화. 제작사에 수많은 협박 전화 등이 와서 개봉이 미뤄졌으며, 당사는 '희망이 없는 청소년들의 미래를 그린 의도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유감'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협박 전화, 누가 한 걸까.
이 영화는 이 사건을 범인 소년들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 자세한 건 영화 참조.
  • 진 현대엽기전
영화보다도 더한 막장. 하지만 작가가 서문에 "이런 사건이 있었음에도 묻히고 있는 데다, 이런 일을 세상에 알려서 다시는 같은 사건이 벌어지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기 위해 본 작품을 그렸다"고 쓰여 있다. 작가의 전작들에 비해 작가의 고어 묘사나 성적 묘사가 절제되어 있고, 다큐나 현장 추적 같은 느낌의 상황 설명을 위한 나레이션이 많으며, 초점이 가해자들의 잔인함과 비인간적인 행동을 담담하게 묘사해 독자 입장에선 비교적으로 냉정하게 비판할 수 있게 하도록 한 시도로 보이나, 사건 내용의 변형[74]이나 생략도 많고, 여체가 중점적으로 묘사되는 등 일반적 성년 만화나 료나물로 대변되는 특정 기호를 위한 오락적 요소도 여전히 상당히 많이 남아 있어, 다큐멘터리 만화란 건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작가 본인은 '다른 사람들이 이런 잔인한 사건을 다룰 수 없으니 나라도 작품을 통해 세간에 알려서 이런 일이 다시는 없게 해야겠다'는 의도였다고 주장하나,[75] 작가가 작가라서 그런지 "이런 끔찍한 사건까지 만화로 그려서 팔아먹으려고 하냐, 미친 놈." 정도의 의견도 있다. 또한 앞서 언급됐듯이 작가의 말에 비하면 세간의 눈은 아직도 준코를 주시하고 있기도 하다. 의도는 좋았다일지 모르나 그 의도대로의 결과를 낳진 못한 작품.
  • 천사의 나이프
초반에서 주인공에게 학살당하는 고교생 그룹의 살인 사건이 이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 IWGP 시리즈 2권 <소년 계수기> 中 '물 속의 눈동자' 편
치하야 여고생 감금 사건이란, 이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사건이 등장한다. 성폭행 후 성기에 불을 붙여서 화상을 입히거나 하는 등, 비슷한 부분이 많다.
  • 소년탐정 김전일 시즌 2의 에피소드 중 하나인 켄모치 경부의 살인의 중심 소재인 3년 전의 사건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여기 나온 피해자들 역시도 실제 사건의 가해자들 못지않은 흉악범들이다. 다만 청소년들도 보는 만화이다 보니, 해당 작품 내에서의 3년 전 사건의 수위는 실제 사건에 비교하면 시시해 보일 정도로 순화됐다. 물론 그 피해자인 토가미 마리나도 몹쓸 꼴을 당했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지옥 탐방을 다룬 이시이 데루오 감독의 1999년작 고어 영화. 이 영화에서 이 사건의 범인들은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을 일으킨 옴진리교 교주 아사하라 쇼코와 함께 지옥에서 최고의 벌을 받으면서 말 그대로 장기자랑인(人)수 분해를 당한다. 이 사건에 대한 감독의 격렬한 분노가 드러나는 장면.
  • 17세.(17歳。)
후지이 세이지가 글을 쓰고 카마타 요지가 그림을 그린 합작. 부제는 '여고생 감금 살인 사건'.
모티브는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 사건이지만, 후지이 세이지가 여러 청소년 범죄에 대해 취재한 것을 바탕으로 재해석됐다. 청소년 범죄는 어째서 일어나는가, 왜 아무도 피해자를 구하지 못했는가, 법과 사회의 문제점, 어떻게 하면 같은 범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까 등에 대해서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 Crónica de una muerte anunciada(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인데, 여기선 주인공이 살해당할 것을 알고도 그대로 방관한 마을 사람들 나온다. 어찌 보면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 사건과 비슷한 상황. 방관한 이유도 '농담인 줄 알았다.' 등의 변명 비슷하다. 주인공이 죽기 직전에 주인공에게 경고하기 위해 주인공을 찾아다닌 의대생이 있긴 했지만.
지금도 유튜브에 한국어, 영어, 일본어로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을 검색하면 수많은 영상들이 쏟아져 나온다. 디바제시카토요미스테리에서 이 사건에 대해 다룬 적이 있고, 밑에 나오는 비디오 다큐멘터리 영화 후기까지 올라와 있다.

[1] 피해자의 사망일은 쇼와 64년이지만, 사건이 발각된 건 헤이세이 원년이다.[2] 실제로 소년 A는 극동회란 야쿠자 조직의 청년부 조직 극청회의 우두머리였다.[3] 키타아야세역에서 가까운 WINGS란 러브호텔. 현재도 예전 그대로 영업 중.[4] 다큐멘터리에선 A가 준코의 머리에 을 붙이는데, 실제론 껌을 씹고 있지는 않았다.[5] 이 사건이 있기 며칠 전 준코는 미야노 일가의 만행에 대해 '지 할아버지와 고모부 잘 팔아먹는다'라고 비아냥거렸는데, 이를 극청회 회원이 엿들었고 A에게 고자질했다.[6] 범행 가담을 거부하다 주범 소년들에게 폭행을 당함.[7] 작열통은 인간의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가장 심한 고통이다. 실제 불고문을 당한 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 미군의 증언: "구타도, 물고문도, 칼로 혀를 찌르는 고문도 다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불은 어머니의 머리를 달리는 버스 바퀴 밑으로 집어넣어서라도 벗어나고 싶을 만큼,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이렇게 정상적인 성인 남성도 견디기 매우 어려운 불고문을 어린 여학생이던 준코가, 그것도 생식기 부위에 수없이 당해 왔다는 것이다.[8] 미야노 히로시를 지칭[9] C와는 동갑이다. 터울이 11개월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 평소 가해자 소년들의 폭력에 잡혀 살고 있었다.[10] C의 형은 최대한 돌려보내는 쪽으로 얘기해보았지만 결국 준코는 풀려나지 못했다.[11] 아무리 동갑내기 형이라 해도 동생인 C가 자기 어머니마저 폭행하는 패륜 경력자였고, 형제가 있는 가정 중에선 동생보다 약한 게 많으면 형이라 해도 동생한테 얄짤없이 잡혀사는 경우가 많다. 이 사건의 C의 형인 미나토 코우지 또한 마찬가지다.[12] 다큐멘터리에서도 초반엔 준코와 가해자들이 게임하며 함께 웃는 장면이 나온다.[13] 집 밖으로 탈출하면 되지만, "도망치면 야쿠자에게 살해당할 것"이란 A의 협박이 떠올라 전화기로 향한 모양. 실제로 A는 "이때 준코가 짐을 싸놓고 옷도 교복으로 갈아입었다"고 말했다.[14] 그들은 준코가 내년에 졸업한다는 말을 듣고 1989년 졸업 무렵엔 풀어줄 계획이었다지만 설사 그럴 계획이었다고 해도 준코가 자신들의 이름과 소굴을 안 이상 돌려보내긴 처음부터 어려웠을 것이다.[15] 사실 신고가 없었어도, 준코는 계속 감금돼 폭행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준코가 밖으로 나가는 순간, 소년들이 체포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16] 소년 B의 행위는''' 가장 가혹하였는데, 준코에게 한 포즈를 계속하게 하고 자신이 외출하고 돌아온 뒤 자세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져있으면, 폭행을 하였다, 그리고 폭행과 강간을 할 때 턱을 탈구시키고 관절을 부러뜨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이와 같은 B의 만행은 C의 집에 있는 비디오테이프에 남아있었다.'''[17] 현재 가치의 한화 환산시 약 100만 원.[18] 또한 이들은 초를 살 때 오구라 양갱을 사서 준코에게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고, 준코가 양갱의 이름을 말하면 "오구라(B)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며 폭행, 준코가 존칭을 쓰면 "사물존칭을 쓴다"며 구타하였다.[19] 그리고 잔혹한 소년들의 폭행이 끝난 후 끝내 준코는 차가운 시체로 타살당하였다.[20] 생사람이나 사람의 시체 등을 굳기 전의 콘크리트 안에 넣어 굳혀 버리는 행위[21] 현재는 일반 빌딩이 세워져 있는 도로가 됐다.[22] 준코가 살았던 사이타마현과 소년들이 살던 아다치구 지역은 바다에 접해 있지 않기 때문에, 바다로 나가려면 도쿄도의 도심이나 치바현을 가로질러 나가야 한다. 그런데 일본 여행을 가본 사람들은 다들 알겠지만, 이 지역엔 도쿄 등 대도시들이 밀집해 있는 데다 유동 인구도 상당히 많아서, 대놓고 바다에 드럼통을 버리면 들킬 게 뻔하다. 그래서 그냥 근처 벌판에 버려놓고 갔을 것이란 의견도 있다.[23] 나가부치 츠요시가 주연, OST를 맡고 TBS테레비에서 방영했던 야쿠자 드라마. 일본판 야인시대를 생각하면 될 거 같다.[24] 소년 A는 당시 강간치상절도 혐의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있었다. 담당 형사가 '''말실수'''를 한 것.[25] 이전에 B와 C 등 부하들이 여성을 납치 및 강간치상을 저질러 소년원에 들어가 있었는데 A는 이들이 진상을 불었다고 착각했다.[26] 해당 사건에 대한 방송을 한 적이 있는 K짱은 이 부분에서 “'''소녀의 영혼이 잠시 경찰에게 씌여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메시지를 전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고 평하기도 했다. 실제로도 정말 그런 소리가 나올 정도의 어찌 보면 터무니없으면서도 극적인 전개였다.[27] 대부분의 시신 유기 사건의 경우 몇 년이 지나서 백골 상태로 발견돼 신원 확인에 며칠씩 걸리거나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은데, 준코의 시신은 그나마 일찍 발견돼서 바로 다음날 신원이 확인됐다.[28] 다큐에서도 마지막에는 준코가 소년들의 말을 잘 듣지 못한다.[29] 강직한 성격인지라 주민들이 야쿠자들이 거리를 활보할 때 최소한 고개를 숙이는 것과 달리 고개를 숙이는 것조차 하지 않았으며, 이는 비극의 씨앗이 되고야 만다. 게다가 준코의 비아냥거림 또한 비극의 씨앗이 됐으니.[30] 유튜브에서 보면 오열하는 여학생들의 앞에 전통 의상을 입은 남자가 보이는데, 일본신토식 장례에서 망자의 명복을 비는 사람이다. 그리고 준코의 친구가 추도사를 읽을 때 집 안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조용히 추도사를 듣고 있는 사람이 아버지이고, 그 옆에서 망연자실한 채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는 사람이 어머니이다.[31] 현재 가치로 따지면 우리 돈 5억에 맞먹으며 당시가 약 30년 전인 것을 고려하면 엄청난 액수다. A의 아버지 미야노 히로후미가 금융업을 해 재산이 대단했다고 한다.[32] 다만 시기가 버블경제 시절이어서 이정도는 쉽게 버는 사람들도 많긴 했다.[33] 돈 5억을 받으면 자칫 법적으로 '합의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합의금 성격이라, 정말로 법적인 처벌을 원한다면 안 받는 게 당연한 것. 실제로 이런 상황에서 멋모르고 가해자 측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가 재판 과정에서 참작돼 처벌을 피하는 경우도 은근 많다.[34] 위에서 나왔듯, 소년 C는 자신의 어머니가 준코의 집에 전화한 사실을 알게 되자 '''자기 엄마를 4시간 동안 구타'''한 패륜아이다.[35] 당시 준코의 아버지에 따르면, 범행 내용이 너무 끔찍해 아내에게 딸이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히 알리지 않으려고 했으나, 기레기들은 쉴 새 없이 직접 찾아와 사건에 대한 내용이 담긴 칼럼 등을 보내며 의견을 물었다. 결국 사건의 내용을 준코의 어머니가 전부 알게 되고 말았고, 누가 옆에 있어주지 않으면 자살해버릴 것 같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졌다고 한다.[36] 준코는 남자친구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학생들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서, 납치된 후에 처음부터 많은 것에 호기심을 가졌다고 한다.[37] 소년들은 이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도 지나가는 여성을 강제로 차에 태워 강간하거나 소지품을 절도하는 등의 범죄를 '''90건'''이 넘게 저질러왔다고 한다.[38] 정황상 날짜별로 따지면 유아납치 살해사건 쪽이 먼저 발생한 사건이다.[39]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많은 낡은 아파트들이 재개발 지역으로 정해져 주민들을 다른데로 이주시키는 건 그 당시 일본에서 흔했다.[40] 당시 일본의 가옥은 내진설계를 위해 법적으로 목조 가옥으로 지어야 해서 방음이 안 됐다. 소년 C의 2층집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아파트 단지도 아닌 수십 채의 주택이 따닥따닥 붙어 있는 초밀집된 주택가였다.[41] 아다치구에서 2019년 500여 점에 달하는 인간과 동물의 백골이 주택 민가에서 발견됐고, 90년대 최악의 소년 범죄라 불리는 사카키바라 사건의 범인이 거주 중인 것으로 드러났다.[42] 신지는 음독, 노부하루는 훈독이다.[43] 거기다 와타나베 야스시의 얼굴은 아예 미나토 신지의 사진을 잘못 올려놨다. 와타나베 야스시의 진짜 얼굴은 아래 항목에 링크된 다큐멘터리에 나온다. 또한 미나토와 와타나베는 12월생이므로 사건 당시 각각 15, 16살이다.[44] 그는 이때에 대해 "난폭함과 무력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도 심각한 불량배였고, 이들보다 더 심각한 범행들을 한도 끝도 없이 저지르고 다녔다.[45] 대한민국과 달리, 일본은 법원의 허가를 받으면 성씨를 변경할 수 있다. 성씨를 바꾸는 것은 일본에서도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해당 집안의 명시적인 동의가 있어야 다른 성으로 바꿀 수 있다.[46] 재판 당시 "1년만 늦게 저질렀어도 너는 사형이었다"란 말에 "그랬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나라에서 이런 짓을 하려면 미성년 시절 말고는 기회가 없다"''', '''"준코는 운이 나빠서 붙잡힌 것 뿐이다. 하필이면 나 같은 놈의 먹이가 됐으니"'''란 망언을 했다.[47] 도쿄도 전체를 통틀어서 동체급에선 최강이었다는 의미. 이와 같은 경우가 흔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드문 것도 아니다.[48] 45kg의 바벨을 1분 동안 머리 위로 40회 들어 올리도록 하거나, 살충제 스프레이 캔에 라이터를 대고 화염방사기처럼 흩뿌리는 등, 도를 넘는 것이었다고 한다.[49] 신주쿠 카부키초를 근거지로 하는 야쿠자 조직. 재일교포가 회장이라 한국 뉴스에도 가끔 나온다. 현 구성원 약 450명[50] 애초에 일하던 꽃가게가 극동회 간부의 가게[51] 어머니 미야노 시즈는 2006년까지 이사를 가지 않고 그 곳에서 그대로 살다가, 아들이 석방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찾아올 것이 무서웠는지, 주소도 철저히 비밀로 부치고 이사를 가버렸다. 사건 이후 신흥 사이비 종교에 열광하고 있다고 한다.[52] 파칭코 필승법으로 사기를 쳤다고 한다.[53] 반면에 일당들 중 가장 힘이 약했던 와타나베 야스시는 형무소에서 폭행을 당해 신체에 장애가 생겼다.[54] 신문 기사에는 180cm로 표기되었다. 현재 일본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이 170.6cm인걸 감안하면 꽤나 큰 키이다.[55] 당시 일본의 불량 청소년 중에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지독한 가정폭력을 일삼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56] 심지어 본인도 납치에 가담했고, 심지어 그들 중 부 보스였지만 준코에게 호감을 가졌기도 했다.[57] 하지만 이미 1999년부터 2001~2002년까지 컴퓨터 관련 업체에 채용된 적이 있다. 2004년 재범 당시 이곳 직원들에 따르면 출소 이후에도 똑같이 깡패같이 살았던 모양이고, 실제 야쿠자 사무실에도 드나들었다고 한다.[58] 당시 그 중국인 여성의 부모가 그를 꺼림칙하게 여겨 결혼을 결사반대했는데, 중국 공항까지 흉기를 들고 쫓아가서 그녀의 부모를 위협하는 난동을 일으켜 당시 중국 공안 당국에 체포되기까지 했다. 이들의 범죄가 해외까지도 이미 알려진 셈이다. 하지만 별다른 조치나 처벌은 취해지지 않은 모양.[59] 사실은 자신의 애인과는 어떠한 관계도 없었다.[60] 혹시 아버지가 검찰 고위 간부라서 아버지의 빽을 이용한....? [61] 사건이 진행중이던 12월경 히로시가 "납치한지 이젠 한 달은 된 거 같은데, 온몸이 피투성이에 피고름 때문에 썩은 냄새가 나서 먹을 수도 없게 되었으니 그만 돌려보내자고 말하였다. 하지만 신고할 수도 있으니 위험하다고 말한 B 때문에 준코는 집에 갈 수 없게되었다.[62] 준코도 마찬가지로 원래 다른 곳에서 살다가 미사토시 타카스 내의 현립 주택단지에 이사를 온 것이라고 한다. 준코와 주범들 중 처음부터 이 곳에 살던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63] 초반에 소년 C와 준코가 밖에 나갔다가 집으로 들어올 때, 소년 C의 아버지는 준코가 소년 C의 여자친구인 줄 알았다고 한다.[64] 소년 C의 형이 준코를 도와주기 위해 준코가 감금되어 있는 방을 찾아갈 때마다 준코는 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겁에 질린 채 그냥 가버렸다.[65] 사건 당시에도 그의 방에는 온갖 트레이닝 기구와 권투 훈련용 용품들이 널려 있었다고 한다.[66] 국내에는 어째서인지 전적이 변변치 않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일본 기사를 뒤져보면 45전을 싸우는 동안 패배가 9번뿐이었다고 한다.[67] 그러나 반대가 되거나 역전의 상황마냥 힘이 강하면 준코를 동정하는 여지는 있어도 가담한 폭행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준코를 동생 일행이 없는 동안에 그나마 챙겨줬던 C의 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4명의 소년 중에서도 가장 말랐고 목소리도 작았다고 한다. 그리고 교사에게 심한 체벌을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68] 의외로 간단했다. 소년들은 밤늦게까지 놀다가 늦잠을 자기 일쑤였는데, 그 틈을 타서 몰래 준코를 밖으로 내보내고 망을 보는 것이었다.[69] 이 사건이 일본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초기 무렵에 검찰은 위 소년 4인을 소년부에 송치했다가 소년부 판사의 역송치 결정으로 일반 형사재판을 진행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70] 소년 B: 징역 장기 10년, 단기 5년 / 소년 C: 징역 4년 / 소년 D: 징역 장기 3년. 사실 징역 17년도 당시 일본에선 소년 범죄 역사상 최대 형량이 구형된 것이었다.[71] 평소 동생 일행의 폭력에 잡혀 살고 있었다.[72] 다만 "이런 극단적인 일화 때문에 소년법을 폐지하는 건 무리"란 게 일단은 일반적인 주장이다.[73] 하지만 이후 살인미수를 저질러 체포된다.[74] 일단 준코의 이름이 다르게 나오고, 준코가 소년들에게 엄청 많이 저항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리고 납치 첫날부터 만화에서 나오는 대로 저렇게 심한 폭력을 가하진 않았다. 특히 준코가 신고할 당시, 소년 A에게 들키기 직전에 경찰서에선 이미 전화를 받은 뒤였다.[75] 완전히 사회적 비난을 피하기 위한 개소리인 게, 당연히 모방범죄를 막으려면 사건을 알리지 않는 게 답이다. 이 사건을 널리 알려서 모방범죄를 어떤 원리로 막는다는 말인가? 오히려 모방범죄를 만들 뿐이다. 이 사건에도 그랬지만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보도를 서슴지 않아 피해자들에게까지 상당한 2차 피해를 입히며, 또라이들의 정신세계에 어마어마할 정도로 폭발적이고 변태적이고 저질적인 호기심과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