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적 가해자

 



1. 개요
2. '잠재적 가해자'가 지목되는 기준과 원인
2.1. 심리적 혐오감 및 편견
2.3. 실제로 범죄 피해를 겪어서 생긴 트라우마
3. 순찰을 하는 이유는 잠재적 가해자 때문이다?
4. 포르노 규제론의 관점: 안드레아 드워킨의 이론
5.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이론 및 오독 논란
5.1.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페미니즘 이론
5.2. 오독의 발생
5.3. 사회정의론과 '잠재적 가해자'의 발생
5.4. 그것은 전체주의일 뿐이지
6. 여성혐오, 남성혐오와 엮여 생기는 논란
6.1. 여성혐오와 연계한 잠재적 가해자론
7. 남성에 의한 '남성 잠재적 가해자론'
8. 외부 링크
9. 피해 사례
10. 결론
11. 관련 문서


1. 개요


/ potential offender
잠재적으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인물.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잠재적 가해자로 다루게 된 것이 시작이다.
상대방이나 상대집단을 적으로 돌리는 모독행위의 일종이자 정신병적 증상인 피해망상의 일종이므로, 특정한 사람이 불특정사건의 가해자가 될것이라 의심하고 모함하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삼가야 한다. 미래를 들여다보고 확인하지 않는 한, 어떤 사람이 어떤 범죄를 저지를지는 아무도 모른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등등의 격언들은 사람 마음을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그만큼 예측하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본 주장에서 더 나아가 "인간은 가해자 아니면 피해자이다" 또는 "특정한 성별, 계층은 가해자이다" 등의 의견이 생겼지만 철학적인 해석을 제하고 보면 단순히 양극화와 차별에 지나지 않으니 유의해야 한다.
창작물에도 클리셰로서 남용되는 소재[1]이기도 하며, 일부 단체에서 정치적인 용도로 써먹기도 한다.
대개는 남녀 사이에서 남성을 성범죄 가해자로 지목하는 경향에서 동반되는 논거이다. 물론 여성 흉악범죄자도 분명히 존재하지만[2] 법무부 2020 성범죄 백서를 보면 성범죄자의 99.1%가 남성이며, 대검찰청 범죄분석 통계에서도 전체 성범죄 피해자 중의 96.3%가 여성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인 남성들까지 성범죄자 내지는 성범죄 동조자, 방조자 등으로 다양하게 묶어서 비판하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다. 유의할 점은, '''잠재적 범죄자가 '일반인이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을 다루는 개념인 이상 이미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의 성별 비율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차라리 전체 인구 대비 범죄율을 따지는 게 나을 것이며, 설령 잠재적 범죄자라는 통념이 유의미할 정도의 높은 범죄율을 기록하는 사회라 해도 일반인을 잠재적인 범죄자라고 판단할 과학적 근거는 전무하다.''' 대검 범죄분석 기준 2018년에 인구 10만명당 61.9건의 성폭력범죄가 발생하였고, 2009년부터 2018년까지를 전부 더해도 10만명당 523건 정도이다. 이 범죄가 전부 한 성별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가정을 하여도, 전체 성별에 잠재적 범죄자라는 꼬리표를 붙이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잠재적 가해자 담론은, 그러한 담론을 주장하는 측의 주요 이념이 근본적으로 연대책임정체성 정치, 수직적 집단주의, 진영논리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현대 사회의 '''자기책임의 원리'''와 개인주의 사고관에 정면으로 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2. '잠재적 가해자'가 지목되는 기준과 원인


어떤 사람이나 집단을 잠재적 가해자로 보는 인식이 생기는 원인은 두 종류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인간의 생리적 혐오감이나 편견, 다른 하나는 자신만의 이득을 위해 작정하고 특정 대상을 없애려고 중상모략을 짜는 경우이다. 전자 중의 일부는 후자를 겸하기도 한다.
집단괴롭힘, 강간 등으로 PTSD 등을 앓는 피해자들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존재가 한 것과 비슷한 행동을 보고 이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것도 원인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방어기제가 발동하기 때문이다.
흉악 범죄자의 인권을 신경쓰는 사람도 이런 낙인이 찍히기 쉽다. 국민정서법에 가열된 범죄자 비난 여론은 보통 보편 인권을 잘 신경쓰지 않기 때문이다.

2.1. 심리적 혐오감 및 편견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싫어하는 것에 대해 불신과 혐오, 그리고 편견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생리적으로 인간은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웬만하면 빨리 치워버리고 싶어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무의식적으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이러이러한 못된 짓을 저지른다'고 생각하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참고로 여기까지 가면 100% 혐오로 흘러간다.
이러한 문제 중에 인종차별이 뜨거운 감자이다. 흑인이면 무조건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는 편견 때문에 백인 경찰이 단지 썬팅을 짙게 했다는 이유로 교통법규를 잘 지키던 흑인여성 차량을 불법 검문하다가 그 흑인여성이 검사라는 사실을 알아 역관광 당하게 되는 사례라던가 흑인 10대 소년이 무단횡단 같은 사소한 경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폭행을 하거나 수갑을 채우는 등의 과잉방어를 하는 사례 등으로 증명되고 있다.
생리적 혐오감과 편견에서 비롯된 '잠재적 가해자'를 만드는 이러한 시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해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혐오감을 느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범죄자로 몰 수 있는 정당한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전과자가 재범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여긴다면 전과자를 보고 그런 의식을 가질 수도 있지만, 이 세상에는 전과자보다 비전과자가 훨씬 많이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그들이 꼭 범죄를 저지르리라는 보장도 없다. 쉽게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자기 기분을 나쁘게 했다고 그 사람을 때린 것이 과연 정당한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된다. 만일 정당하다면 맞은 상대편도 똑같이 자기를 때려도 할 말이 없어야 되는데, 도대체 누가 그런 식으로 주고받으며, 주고받고 싶어할까?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을 두고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 같다는 성급한 판단을 내려서도 안 된다. 심지어 자신에게 올 위협을 미리 막으려면 선수방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이런 주장의 경우, '''"저 사람ㆍ집단은 나에게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미리 규제, 제재를 가하면서 짓밟아놔도 상관없다."'''라는 '논리'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성별을 막론하고 자신이 억울한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2.2. 중상모략


대상에게 갖는 혐오감에 상관없이,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거짓을 날조하고 이를 증거로 삼아서 모함을 하는 경우이다. 혐오감에서 비롯된 잠재적 가해자를 만드는 태도에 비해 훨씬 치밀하고 교활하며, '''고의'''이므로 훨씬 악질적이다.
애초에 이런 부류의 행위는 정당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이미 진짜 범죄다.'''

2.3. 실제로 범죄 피해를 겪어서 생긴 트라우마


지속적인 학대, 위축 등으로 발생하는 복합성 트라우마는 가해자의 특정한 조건 (나이, 성별, 인종, 지역 등등 매우 다양하다.)을 엮어 그 대상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될 경우 그대로 굳어져 하나의 인지도식이 될 수 있으며, 확장되어 집단 전체에 대한 극단적인 차별의 시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진짜로 끔찍한 범죄를 겪은 피해자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이러는 경우는 뭐라 비난하기도 어렵다. 이렇게만 보면 "너무 나간 거 아니야?"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이것은 사람에게 있어 엄연한 '''정신적인 상처'''이며(애초에 트라우마 뜻이 이거다.),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수많은 이들이 이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수백 년 동안 노력해 왔음을 생각하자.
잠재적 가해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과잉일반화와 낙인찍기 (Over-generalizing or Labeling)에 빠져 중요한 논리적인 오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쉽사리 의견이 자정되지 않는 이유는, 말 그대로 인지도식이기 때문이다. 인지도식은 고치기 매우 어렵다.

3. 순찰을 하는 이유는 잠재적 가해자 때문이다?


경찰들이 순찰하는 이유는 시민들을 다양한 상황에서 그때그때 돕기 위한 이유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민간 범죄의 예방을 목표로 한다. 또한 우발적인 범죄는 주변 환경(심리적 압박 등)에 의해 쉽게 제어될 수 있기 때문에 순찰이 매우 큰 도움이 된다. 막대한 자금을 들여 순찰에 힘을 쓰는 이유는 순찰을 안 돌 때 생길 수 있는 순간적인 피해가 순찰을 지속적으로 돌 때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이는 순찰 여부에 차이가 생기는 국가들을 비교하는 통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단순히 "잠재적 가해자를 막기 위해 있지 않겠느냐" 라는 의견은 편향된 결과론적 추론이며, 차별만 조장하고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기 힘든 무적논리가 될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대상조차 불분명한 "잠재적 가해자"를 막으려고 법 등으로 강력히 제어하면 여기저기서 인권유린 행위가 발생할 것이다.

4. 포르노 규제론의 관점: 안드레아 드워킨의 이론


안드레아 드워킨(A.Dworkin)은 래디컬 페미니즘의 주요 저서 《포르노그래피: 여자를 소유하는 남자들》 을 저술한 저자이자, '''"모든 남성들은 전부 강간범이다"''' 를 주장하여 큰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급진적 사상가이다. 그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학대의 이면에 포르노 산업의 존재와 포르노의 소비가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믿었고, 포르노를 규제한다면 강간도 줄어들 거라고 믿었으며, 역시 같은 맥락에서 포르노를 즐기는 모든 남성들은 강간범과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안드레아 드워킨에 따르면, (적어도 수도승 같은 금욕주의자가 아닌 한) 포르노를 즐기거나 소지, 배포하는 등의 행동에 조금이라도 공모한 모든 남성들은 권력적 강자로서의 힘의 자유로운 행사를 만끽했다는 죄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여기서 "강간과 무관한 '선량한 남자' 는 없다" 는 잠재적 가해자의 논리는 드워킨의 시각에서도 성립하게 된다. 특히 여성학자 정희진이 주장하듯이, 드워킨의 관점에 좀 더 원칙적으로 입각할 경우에는, 저 '잠재적' 이라는 수식조차 문제의 심각성을 가리는 발화가 된다. 이 주장의 본질은, 포르노의 소비자로서의 절대 다수의 남성들은 (잠재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강간 범죄자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
논리를 포르노 산업에 기댈 경우, 오늘날 "일베메갈" 등식에 대해 어떤 페미니스트들이 분개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많은 남성들이 "적어도 우리끼리는 일베 하는 남자는 무조건 거르는데, 너희들은 어느 여초집단을 가도 메갈리아-워마드 세력을 무조건 지지하지 않느냐" 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반론으로 쓰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페미니스트들이 이 항변에 대해 "우리도 어느 남초집단을 가도 일베에서 하듯이 '야짤 달린다', ' 나눈다' 같은 남성권력의 공모를 발견한다. 너희들이 일베보다 도덕적으로 나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여자들 눈에는 다 똑같이 보인다" 고 대꾸하게 되는 데에는 '''드워킨의 사상이 근거로서 존재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관점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동료 페미니스트인 캐서린 맥키넌 등의 지원을 받으면서 래디컬 페미니즘 분야에 있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잠재적 가해자의 논변으로 확립되었고, 현대에도 성범죄를 다루는 형법학자들이 하나의 접근법으로서 고려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주장의 과격함으로 인하여 당대의 다른 동료 페미니스트들에게조차 극심한 공격을 받기도 했다. 특히 남성들의 성불평등적 성 인지를 근거로 모든 남성들을 싸잡아 '''강간범으로 욕하는 것은 남성혐오적'''(man-hating)이라는 주장들이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조차 전면적으로 제기되었을 정도였다. 남성들이 현실에서 왜곡된 내용의 포르노를 즐기는 건 사실이지만, 그게 어떻게 해서 남성들이 실질적인 의미의 강간범이 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냐는 것. 또한 포르노성노동자 등 이슈에 대해서도 드워킨-맥키넌 류의 주장은 그들과 대립각을 세우는 다른 논변들과 극심하게 충돌하면서 인간 섹슈얼리티의 다양성에 대한 사유를 촉발시켰다. 더 많은 설명은 포르노그래피 문서도 함께 참고해보자.

5.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이론 및 오독 논란



5.1.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페미니즘 이론


현대 페미니즘에 크리스테바[3]가 결정적으로 기여한 바라고 한다면, 근대 언어학 및 정신분석학에서 기표-기의 개념을 차용하여 오늘날 사회의 근저에 자리잡은 여러 개념들과 그것의 상징성 및 기호화 양상이 전적으로 남성중심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은 특정 성별에 기대되는 표면적 행동양식을 기호화 및 이식화 함으로서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성역할의 전형화, 표본화 및 양식화를 굳히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분석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애초에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정치학이나 대중운동의 측면에서 보다는 철학적인 개념으로서 언어학과 정신분석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소위 '''여성성'''으로 회자되는 가치나, 상징성, 기호는 사회 저변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남성성'''으로부터 소외된 것들의 집합체이며 주변적 의미만을 가지기에 그 '''여성성'''에 집착하는 것 부터가 잘못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즉, 페미니즘적인 측면에서 볼 때 '여성'이라는 통상적 정의는 정작 '여성'이 무엇인가와 관련되어 있기 보다는 '남성이 아닌 것'으로 정의되며, 결국 이에 의거한 여성성의 논의는 본질적으로 남성중심의 젠더권력에 여전히 예속되어 있다는 뜻이라고 크리스테바는 본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여성성'이라는 것은 하나의 이방인, 영속적인 주변성으로 개념화 되는 것이며, 그 현실이 결국에는 변화의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즉, '''"상징적 질서 속에서 여성이 갖는 이중적 측면, 한편으로는 사회적 질서의 침묵하는 보증인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질서를 위협하고 전복할 수 있는 잠재적 동력'''"이며, 이러한 맥락에서 '''"크리스테바의 작업은 상징적 질서를 전복하기 위해 주변성과 관련된 부정성과 거부의 속성을 여성에게 부여하려는 시도다.. 그러므로 크리스테바의 언어이론을 지배하고 있는 전복의 윤리학은 그의 페미니즘에도 적용된다."'''[4]
즉, 이 계통의 철학적 페미니즘에서는 여성이 상징적 질서 속에서 폐쇄되고 고정된 심급으로 머물거나, 순응하지 않고, 집단과 체계가 동질적이고 억압적인 페쇄성으로 고착되지 않도록, 언제나 항거하면서 일종의 경계인, 이방인의 역할을 하는 것이 곧 여성해방이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성평등을 위한 투쟁은 여성에 대해서만 요구되는 실천이 아니며, 여성들의 투쟁만으로 사회적 질서가 변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회는 스스로를 구성하기 위해 사회적 강제와 억압을 행사하므로, 문제는 '''이 강제를 부수고 재구성하는 것인데, 이 재구성의 동력은 부정성과 거부를 원리로 하는 기호론적 실천이다'''. 따라서 여성들의 투쟁은 혁명적 투쟁, 계급투쟁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기호론적 실천은 여성 및 모든 억압된 사회층들, 담론, 생산과 재상산관계에서 억압되는 모든 사회층들간의 횡단적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위 문단이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건 당연한 일이다. 일단 위 문단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단어설명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구조주의 철학이 늘 그렇지만 이 담론에 대한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헤겔 철학에서 인식론과 의미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서 개념이란 A = A이다. 고전 논리학에서 "정의란 A를 A이게 만들어주는 어떠한 속성들의 집합"이다. 속성이 주어지고 그 속성에 의해 그것과 그것이 아닌 것이 뒤에 구분된다. 따라서 개념은 도화지 위에 그린 ★이 된다. 고전 논리학이라고 해서 현재 안쓰이는 것은 아니다. 가장 기초학문이라 할 수 있는 수학에서의 정의는 일부 분과의 수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분과에서는 아직도 이 개념의 정의를 사용한다. +나 -, 복소수, 미분 같은 과목을 배울때 정의부터 배우는데 그때 행하는 정의가 바로 이런 부류이다. 수학을 제외하고서 다른 응용학문들은 99%가 이런 정의를 사용한다. 물론 수학입장에서의 응용학문이니까 말하자면 수학을 제외한 모든 이과 학문이라는 의미다.
헤겔 철학에서의 개념은 A = ~(~A)가 된다. A가 아닌 것이 아닌것이라는 이중부정성이 곧 긍정과 동일하며 그들 사이에 선후관계는 부정이 먼저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빛이 없는 노란색 우주안에 사는 생물은 노란색을 인식할 수 없다. 이들이 노란색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우주안에 파란색이건 빨간색이건 어쨋건 노란색이 아닌 아닌 다른 것이 있어야한다. 그래야 노란색과 노란색이 아닌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경계선이 있어야 알 수 있고 경계선만 존재한다면 그 둘의 진정한 속성 따위는 전혀 몰라도 차이만으로도 각각의 개념으로 인식할 수 있다. 개념은 그 사이에 경계선을 그리는데 그 경계선 자체가 진정한 최초의 규정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헤겔철학의 개념은 도화지위에 그린 ☆ 이 된다. 헤겔철학에서 부정이 긍정보다 선행한다. 부정이 곧 긍정이다. 라는 말은 이런 의미로 하는 말이다.
사실 부정과 긍정 중 무엇이 선행한다는 서술 자체도 오해를 부르기 쉽상이다. 이 둘 사이는 시간석 선-후 관념이 적용될 수 없으며 인과적 관계도 설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부정성을 긍정성 앞에 놓은 서술은 이해를 위해 고의적으로 오서술한 개념이다. 이때 초월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즉 규정과 부정은 어느 한군데에 절대 멈춰있을 수 없다. 그 때문에 그 유명한 정반합이라는 헤겔 변증법이 등장한다. 따라서 이중부정성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페미니즘을 원용했다면 당연히 페미니즘이 어떠한 경계선에서 영원히 멈춰있을 수 없다는 개념을 이해해야하는데 현실 페미니즘은 그 이해를 따라가지 못했고 편한데로 해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사실 여기까지 따라오는 와중에 현기증을 느낄수도 있는데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이다. 이 부분은 철학과목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과목이고 학부과목에서도 원서 6장짜리 서술을 한학기동안 수업하며 석사단위에서는 들뢰즈 서술 단 4줄가지고 한학기를 강의한다. 철학과목의 기본단계를 모두 거친 학생들을 데리고도 그런 시간이 걸리는데 위키 설명을 가지고 이해하려는 시도는 아예 버리자. 대충 저렇다. 정도까지만 이해한다면 당신은 상위 2%의 이해력을 가진 학생일 것이다.
약 20~30년전 이론인 포스트 모더니즘을 접목한 사회학에서 에서 흔히 나오는 경계인이나 부정성이나 긍정성 같은 개념을 이해하려면 최소한 헤겔논리학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필요하다. 하지만 이 부분은 정작 철학과목 중에서도 굉장히 난해한 부분이며 1960년대까지는 주류였지만 지금은 주류도 아니라서 철학과임에도 헤겔원서를 공부하거나 대논리학이나 정신현상학 서문등을 공부하는 철학도는 거의없다. 마르크스 주의 철학이 활발히 연구되던 시절에는 그나마 돌아가지만 2010년대 이후 학부과정에서는 최소 수강인원도 못채워서 폐강되기 일쑤이다. 한국 칸트학회 학회장이 직접하는 수업에서도 이런일이 벌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학이나 사회과학 같은 비철학 항목에서 헤겔철학의 기초개념을 배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석사이상이라고 해도 저 위의 개념들을 오독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로인한 오독은 비단 일반인이 아니라 철학의 개념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사회학과 박사-교수 단위에도 널려있는 일이라 다음 문단에서 벌어지는 비극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5.2. 오독의 발생


위와 같은 이론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결코 쉽지 않지만 현대철학 및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중요한 문제제기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철학과 결합 된 분석적 이론들이 늘 그렇듯 심각한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실제 정치운동에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나'''"에 대해서는 답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을 제시하고 고찰하는 사람들의 문제라기 보다, 애초에 기호학적, 언어학적, 철학적 견지에서 차별과 젠더라는 현상을 바라보는 담론을 제시한 것이며, 모든 철학 이론이 그러하듯 그 핵심적 논지를 설명하기 위해 수 많은 은유와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데다가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와 가장 비슷한 사례라면 역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및 그 후계운동의 관계인데,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을 철학적인 관점과 정치적인 관점 양자 모두에서 제시한 바 있다. 이러한 일련의 이론들은 마르크스주의로 알려져 있으며, 그에 영향을 받은 수 많은 이론적 분파들이 나오는데, 이러한 분파 중에서 실제로 정치투쟁과 정치혁명의 이론적 원동력이 된 한 갈래가 마르크스-레닌주의이고, 소련 및 공산권과는 달리 서유럽 역사학계와 철학계를 중심으로 연구되고 논의 된 것들은 마르크스의 소외이론; 통칭 '초기 마르크스 이론'들이다.
마르크스의 소외이론은 하나의 정체로서 노동자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역학관계에 종속되어 있는 한 실제 돈을 어떻게 받고 어떻게 생활하느냐와는 별개의 차원에서 존재론적 소외에 대한 고뇌를 거듭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즉, 철학적 견지에서 존재론의 일종이기에, 예컨대 단순히 노동자 복지를 늘린다든지, 노동자들의 발언권을 확충한다든지 등 기존 체제 질서 내에 종속된 상태를 간과하는 노동자운동 등은 궁극적으로 존재로서 노동자의 해방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착한 자본가도 있다"든지, "자본가들도 노동자 권익에 관심을 갖고 공존할 수 있다"든지 하는 차원의 개인적 도덕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구조로서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상 그에 예속되어야만 하는 존재론적 문제이기 때문에, 결국 자본가도, 노동가도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결국 '''혁명'''이라는 과정은 자본주의 단순히 자본주의를 부수는 것이기 보다는 그것의 극복,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에 중점을 두는 개념정의이다.
이와 유사하게(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범주에 있다면...), 크리스테바의 페미니즘 이론 역시 현상론이나 정치운동으로서 성차별 및 불평등을 접근한다기 보다는 관념철학의 존재론적 측면에서 접근한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그 자체로 객관적 사실이나 특징을 지칭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흡사 언어학에서의 기표-기의의 관계와 같이, 이미 무의식적으로, 정신적으로 중심적 역할을 하는 '남성성'에서 '여성성'이 파생되는 관계이기에 이러한 관계의 핵심을 부수지 못하고 '''사회 내에서 피상적으로 여성복지, 여성권익을 부르짖거나''', '''"남자지만 나는 여성의 권익에도 관심 있다. 나는 '착한 남자'다(바로 위에 서술한 '착한 자본가'와 비교해보자)"''' 라는 식의 운동이나 인식은 결국 그 구조를 타파하지 못한다.
따라서, 여성해방이라는 것은 '남성성'이나 '여성성'같은 구차한 개념들에 종속되기 보다 그 질서로부터 벗어나는 행위 그 자체, 위에 인용 된 토릴 모이의 평처럼, '''"상징적 질서를 전복하기 위해 주변성과 관련된 부정성과 거부의 속성을 여성에게 부여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존재론적 측면에서 젠더권력에 대한 구조적 항거 및 파괴 행위, 그 현존 질서에 대한 아웃사이더가 되어 탈피하는 그 행위ㆍ인식 자체가 하나의 투쟁이자 여성해방운동이라는 뜻이다.
여기까지 읽었으면 눈치 빠른 사람은 대체 어디서 메갈리아의 투쟁론 같은 '''오독'''이 발생했는지 대충 눈치를 깠을 것이다.

5.3. 사회정의론과 '잠재적 가해자'의 발생


1980년대에서 2000년까지 근 20년을 풍미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의 중요한 한 축 답게, '''난해하다'''. 기본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중시하는 '''담론'''과 '''유희와도 같은 철학적 사변'''의 개념을 인지하지 못한 사람은 솔직히 이해하기 매우 어렵고 복잡한 이론인다보니, 보통 사람들이 이러한 계통에 있는 여성학을 읽고 공부하는 경우에는 죽~ 나열된 사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그러다보니 결국 머릿 속에 남는 것은 '''마지막 구절들 뿐이다'''. 즉, 바로 위에 서술된 내용;

"따라서, 여성해방이라는 것은 '남성성'이나 '여성성'같은 구차한 개념들에 종속되기 보다 그 질서로부터 벗어나는 행위 그 자체"

"상징적 질서를 전복하기 위해 주변성과 관련된 부정성과 거부의 속성을 여성에게 부여하려는 시도"

"존재론적 측면에서 젠더권력에 대한 구조적 항거 및 파괴 행위"

"현존 질서에 대한 아웃사이더가 되어 탈피하는 그 행위-인식 자체가 하나의 투쟁이자 여성해방운동"

철학적 개념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이론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오독하는 순간, 이것은 (쉽게 말해서), '''"현존 질서는 죄다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것이니까, 그걸 까고 부수고 거기에 반항하는 그 모든 행동은 다 여성운동이다"'''라는 식으로 읽히게 된다.
즉, 이 맥락에서 '''젠더권력'''이라는 것은 실제로 관료적, 체계적으로 움직이며 여성억압이라는 목적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권력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에 무의식적으로 자리잡은 일족의 철학적 관념이며, 사회 저변에 깔려있는 정신적 억압 및 개념적 종속성의 폭력이다. 그것은 사회정의 개념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원래 '''잠재적 가해자로서의 남성'''이라는 개념은 사회정의론적 측면에서 접근해야 할 개념이다.
예를 들어, '''식민지 현실 아래 조선에서 생활하는 착한 일본인'''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고등학교 윤리 수업 정도에도 나오는 내용이므로 쉽게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적 현실 아래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나쁜 일본인'과 '착한 일본인'의 차이는 없다. 한 나라를 식민지로 전락시키고 착취를 하는 구조 아래에서, 보편적 정의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그 구조 속에 있는 모든 일본인은 결국 그러한 수취, 착취행위의 잠재적 동조자이자 공범자다. 개인의, 개인도덕의 측면에서 조선인을 멸시하지 않고 동등하게 취급해주며 착하게 사는 일본인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대일본제국'이라는 압제적, 제국주의적 권력이 만들어낸 그 구조 속에서는 아무리 개인적 처신이 훌륭한 인격자라고 해도 전체 사회정의의 측면에서 '''까방권을 획득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독립을 주장하는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착한 일본인과 나쁜 일본인을 구별해서 독립투쟁을 해야 할 이유도, 여유도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 도식에서 '일본제국'을 '젠더권력', '제국주의'를 '성차별', '일본인'을 '남성'으로, '조선인'을 '여성'으로 치환하면 '''원래''' "잠재적 가해자로서 남성"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너무 거대한 예인 것 같으니 비교적 작은 예를 들자면, '''대한민국의 학벌구조 하에서 이름 있는 대학을 간 사람들은 문화권력을 소유하게 되며, 본인이 의도하든 아니든간에 학벌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이익을 얻고 피해를 주는 위치에 서게 되며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흥미롭게도 잠재적 가해자론을 악용하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문화권력과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며, 그것을 과시하고 심지어 문화권력과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멸시하기까지 한다.)
사용한 단어 자체가 어폐가 있으나 원래 '잠재적 가해자'라는 개념은 이러한 정치적, 구조적, 철학적 이해의 차원에서 등장한 개념이다. '''물론 이는 거대담론이자 거시적 분석의 문제이며 개별적인 도덕적 판단이나 실천강령에 적용되는 내용은 절대 아니다.''' 실제 독립투쟁에서도 일본인이라고 해서 다 때려죽여야 한다는 식의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드물었고[5], 오늘날에 있어서도 ''''적국' 사람은 다 죽여도 죄가 아니다'''라는 주장은 제네바 협약 위반이며 그 이전에 인도적인 관점에서 국제적 비난을 면치 못 할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복잡한 관념철학으로서 크리스테바 계통 페미니즘 이론과 사회정의론에 입각한 '보편적 가해자'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오독하고, 깊은 고민 없이 바로 투쟁운동에 접목을 시도한 결과가 바로 '남성 잠재적 가해자론'과 같은 사회적 분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구조로부터의 탈피, 파괴가 곧 해방"이라는 구절에 대한 철저한 몰이해로 나온 것이라, "그러니까 모든 남성은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는 가해자로서(사회정의론 오독), 그 구조를 파괴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극적으로 까고 해체하는 나의 활동은 곧 여성해방의 일환이다(페미니즘 오독)"'''라는 그릇된 결론에 도달한 것이 바로 오늘날 메갈리아 및 워마드 같은 부류의 (자칭) 여성운동의 가장 큰 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론의 오독 및 오용의 사례는 사실 한국만의 특이한 케이스는 아니다. 크리스테바 계통의 정신분석학적, 언어학적, 기호학적 '투쟁의 페미니즘'이 등장한 이래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 미국에서도 매우 비슷하게 '''"남성구조로부터의 탈피와 해방 = 남성 조져버려"'''라는 식으로 운동을 했던 페미니즘 계통이 존재했었다. 문제는 남들이 다 거쳐간 길을 이제야 가면서도 뒤쳐졌다는 생각을 못 한다는 것이다.

5.4. 그것은 전체주의일 뿐이지


크리스테바는 미국의 페미니스트 학자들이 자신의 저작을 오독했다고 여기고 있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숨은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 언어구조를 해체하는 것만이 자기 이론의 골자는 아니다. 언어는 또한 역사적 스펙트럼 및 개인의 심리적, 성적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측면도 존재한다. 이러한 포스트-구조주의적 접근을 접한 특정 사회적 집단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 그 자체에 압제적 의도가 숨어있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집단주의적 논리를 개인정체성 위에 두는 행위는 해로운 것이며, 이러한 식으로 성별적,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 그 자체에 정치적함의를 덧씌우는 것은 결국 전체주의일 뿐'''이라고 크리스테바는 얘기하고 있다.

- 정체성의 정치학에 대한 거부, (위키피디아, Julia Kristeva 문서 중 발췌[6]

) -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80년대를 거치면서 서구권에도 소위 '메갈리아와 같은 전투적 페미니즘'에 대한 논란이 이미 한 차례 진행된 바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크리스테바 본인의 언급한 내용이 바로 위에 인용한 대목이다.
즉, 크리스테바 본래의 관심사는 구조적 언어학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무의식의 구조' 에 대한 연구이며, 그러한 '무의식의 구조'가 개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중 하나로 '성차별'의 문제를 바라보았기에 그 특유의 유의미한 페미니즘 이론들이 나왔던 것이다. 따라서 (앞서 설명한 것처럼)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모호한 개념 아래 서로간의 '힘싸움'이라는 형태로 대립을 거듭하는 식의 여성운동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며, 일단 근저에 깔려있는 그 무의식적 구조의 파괴, 타파, 그러한 차원에서 개인의 고찰 등을 얘기하는 측면이 훨씬 크다.
그러나 이는 쉽사리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이론이 아니며, 그 자체를 하나의 정치운동, 투쟁운동의 이론으로 삼는 것은 더더욱 무리다. 결국, 일부 여성운동 집단에서 '''자기들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영어 마저도 사실은 남성들이 정교하게 만들어낸 언어이기 때문에 타파해야 한다''' 라는 무리한 주장들이 나오는 둥 여성운동의 내부에서도 여러가지로 골치아픈 일들이 많이 발생하였으며, 그에 대해 크리스테바는 위에 인용한 것과 같은 평을 내린 것이다. '''즉, 오독이라고.'''
여기서 특히 주의해야 하는 대목은 '''집단주의적 논리를 개인정체성 위에 두는 행위는 해로운 것이며, 이러한 식으로 성별적,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 그 자체에 정치적함의를 덧씌우는 것은 결국 전체주의일 뿐'''이라는 부분이다. 즉, 철학적 측면에서 제시 된 담론을 조심스레 다루지 않고, "집단주의의 논리" - 즉, 집단간 대립의 논리에 그대로 대입하는 태도는 자신의 이론을 오독하고 전체주의를 밀어붙이기 위해 오용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쉽게 말해서, 위에서 설명 된 각종 페미니즘적 개념을 공부하고 습득하며 조심스레 다루지 않고, 그야말로 남자 vs 여자로 진영을 나누어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공격하고 모욕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은 제대로 된 여성해방운동이 아니라 '''그저 전체주의의 일종'''이라는 말이다.
애초에 현대 사회의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용어들 그 자체가 무의식적으로 각인 된 억압의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무의미하고 기만적인 허상같은 것이라, 그에 집착하는 여성운동이나 해방운동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이쪽 계통 페미니즘의 중요한 이론적 틀임을 생각해보면, 그냥 전형적인 패거리싸움에 고급 이론의 개념 몇개 도용해서 가져다 붙인 채로 한 집단 전체를 매도하는 행위가 "여성운동"이라고 하는 것을 보게 되면 크리스테바가 뭐라고 할런지...

6. 여성혐오, 남성혐오와 엮여 생기는 논란


이 단어는 그렇게까지 많이 언급되는 단어는 아니었는데 2016년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특히 여혐과 관련해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7] 워마드메갈리아, 여성시대 등의 여초 커뮤니티 및 해당 살인 사건의 추모 행사에 참여했던 인원 중 일부 측에서 뜬금없이 '''남성들'''은 언젠가 범죄를 일으킬 것이며 이에 대해 자아비판, 자기반성을 해야한다고 내세우면서 갑자기 시끌해졌다. 이들의 논리를 풀어보자면,
"여성보다 '''월등한 근력'''을 가지고 있고 '''성욕'''이 왕성한 대부분의 남성들은 언제든지 주변 여성을 강간하거나 살해할 수 있는 짐승으로 돌변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또한 그 근력을 바탕으로 강간이나 살해에 성공할 확률이 높은 위험분자들이다. 따라서 남성들 스스로가 이를 미리 인지하고 참회하며 여성들 앞에서 고해성사함으로써 자신들이 여성들에게 위협적이지 않음을 온 천하에 인증해보라"는 것인데…
사실, 위와 같은 논쟁이 발생한 이유는 자신의 행동원리를 전투적 페미니즘로 설정한 일부 과격 페미니즘 진영의 "젠더 권력" 개념 및 "사회정의" 개념의 오독 및 오남용에서 출발한다. 실제로 "남성 타도"나 "남성 배격"등의 과격한 목표로 유명한 페미니즘의 사례는 사상적으로는 위에서 언급된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영향을 짙게 받은 운동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운동 양상은 현재의 메갈리아와 같은 집단과 유사했다. 인터넷의 극단적인 페미나치 커뮤니티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주류 여성단체들도 이 잠재적 가해자 논리에 상당히 경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사의 마지막 부분도 참고하자. (기사)

6.1. 여성혐오와 연계한 잠재적 가해자론


현대에 새롭게 대두되는 잠재적 가해자론은, 남성이 강력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나 가해자의 주된 성별(남성)에 입각하여 주장되던 기존의 잠재적 가해자론에서 벗어나, 보다 사회구조적 담론에서의 논리를 전개한다. 기존의 논리가 상당히 범죄학적인 접근을 시도했다면, 새로운 논리는 사회구조 그 자체를 갈등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남성 기득권을 전제하는 페미니즘적 정치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새로운 잠재적 가해자론을 이해하기 위한 조건은, 이것이 기본적으로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의 갈등론적 사회관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 사회는 그 자체로 우위항과 열위항이 존재하며 양자가 제한된 사회적 자원을 놓고 투쟁적 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이다. 성별 갈등을 주제로 할 때, 대립하는 두 항은 제1의 성(남성) 항과 제2의 성(여성) 항으로 나누어지며, 남성이 규범성과 정상성을 획득함으로써 여성을 구조적으로 억압하고 더 많은 자원을 점유한다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가해' 라는 행위는 단순히 여성을 혐오한다거나 물리적, 신체적, 언어적, 심리적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에 국한되지 않으며, 그 이상의 거시담론적 성격을 갖는다. 여성을 남성의 밑에 두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모든 종류의 의식과 행위,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 등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므로, 특정 남성 개인이 단순히 "나는 여자를 존중하니 가해자가 아니야" 라고 부정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개인이 여성을 어떻게 생각하건, 모든 남성은 여성에 대한 가해의 직간접적인 동참자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직 의심할 바 없이 기득권이고 강자의 계급적 지위를 갖는 남성이 여성억압적인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했다는 이유 자체만으로도 오직 남성만이 잠재적 가해자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이 이들 진영의 주장이다.
이러한 여성혐오적 사회구조를 바탕으로 세워진 현대사회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남성의 체계적인 가해를 전제하게 되며, 남성들로서는 이런 구조적 가해 속에서도 손해볼 것이 없어서 방관자로 남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남성들의 여성억압적 구조에 대한 방관 자체가 이미 여성에 대한 간접적 가해가 되며, 그 중 일부 남성들은 강남역 살인사건과 같은 "범죄학적인" 의미에서의 직접적 가해를 하게 될 뿐이다. 이와 같이 다수의 간접적 가해자와 소수의 직접적 가해자로 구성된 남성들은 이미 잠재적 가해자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음을 남성들이 인정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남성들은 "잠재적 가해자 = 잠재적 범죄자" 등식에 집착할 것도 없고 기분나빠할 것도 없다. 또한 이 논리는 여성이 저지르는 남성혐오가 가해행위가 될 수 없는 이유도 제시하는데, 여성은 현대사회에서 우위항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부터 가해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올포트 스케일(Allport's Scale)을 가져와서, 여성혐오는 여아낙태 풍조를 고려하면 이미 대량학살 단계인 5단계에 속하지만 남성혐오는 어디까지나 언어적으로 멸시하는 수준인 1단계에 그칠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여성혐오로 인한 직간접적 피해는 매우 크지만, 남성혐오는 설령 존재한다 해도 그 피해는 '새발의 피' 에 지나지 않으며 개인적인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 논리의 문제점을 언급하자면, 모든 개인으로서의 남성을 "우위항으로서의 남성" 으로 과잉사회화하고 모든 개인으로서의 여성을 "열위항으로서의 여성" 으로 과잉사회화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를 다시 말하면, 위의 논리는 사회구조의 압력에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개인의 영향력과 의지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함으로써 현실을 단순화하지만, 사회구조적 가해에 대한 책임은 정작 미시적인 개인 수준으로 돌려버리고 잘못 비난한다. 이 논리대로라면 세상에 어째서 여성혐오적 구조에 저항하는 남성들이 존재하는지, 여성혐오적 구조를 견고히 하는 여성들이 존재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예컨대 《맨 박스》 의 저자이자 "A Call to Men" 운동을 이끄는 토니 포터(Tony Porter)의 경우, 남성들이 여성억압적 구조에 분명히 저항할 수 있다고 믿으며, 심지어 양성평등 사회는 남성들이 행동할 때에야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많은 심리학자들은 여성들조차 자신을 억압하는 사회구조적 '가해행위' 일체를 긍정하거나 정당화하는 심리적 옹호를 보일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여성 역시 여성혐오적 가해행위에 대한 또 다른 동조와 방관을 저지르는 '가해자' 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즉 새로운 잠재적 가해자론이 제시하는 바 남녀평등에 의해 소실된다고 주장되는 사회적 지위를 남성 모두가 남녀 평등의 가치보다 앞세울 것이라는, 지나치게 일반화된 명제는, 남성 중에서도 인간평등적 가치나 자유주의적 가치를 더 중시한다면 충분히 여성혐오적인 흐름에 대해 '반발' 할 수 있음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이것과 별개로, 성차별적인 사회구조의 영향 아래 주입 혹은 강요된 고정관념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사회구조에 동조하게 된 자들 모두를 '잠재적 가해자'라는 부정적인 단어로 지칭하는 것은 인식의 전환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여성혐오는 남성들 개개인의 잘못이 아닌 사회구조 전반의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해답으로 모든 생물학적 남성 개개인에게 '잠재적 가해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반성을 요구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반증하고 있다. 진짜 가해자는 성차별적인 인식과 고정관념을 강요하는 '''사회구조 그 자체'''이며, 이것을 타파하기 위한 사회 구성원의 노력을 촉구하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해결방안이 될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남성, 여성 할 것 없이 모든 사회 구성원이 해당되는 내용이다.
실질적인 해결책의 부재 또한 위 여성 혐오로 인한 잠재적 가해자론의 문제점 중 하나다. 위 글에서도 나타나지만 결론적으로 이 논리가 내놓는 해결방안은 '모든 남성이 반성할 것'이다. 문제는 이 해결책을 통해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율이 줄어들거나 사회전반에 암암리하게 존재하는, 혹은 인간 무의식 속에 잔류하는 여성혐오를 없앨 수 있다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해당 해결책이 제대로 이행되었는지의 여부를 따질 근거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이 이슈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스트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사회구조 이외에도 개인의 심리내적 측면까지 함께 살펴야 하는 이유이다.
윗글에 나오듯 오히려 서로간의 불신을 키우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며, 오히려 성급한 일반화를 하지 말라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모순되듯이 남자들에게 성급한 일반화를 요구하며, 여성이 피해의식을 느낀다는 감성팔이나 다름없는 억지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런 류의 주장에서 간혹 "혐오의 5단계 이론"이니 뭐니 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미국 심리학자 고든 올포트(Gordon Allport; 1897년 ~ 1967년)가 1954년에 제시한 올포트 척도(Allport's Scale)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척도는 어째서 나치 독일유대인을 그렇게 차별하고 학살했는가를 설명하려다가 나온 것이며, 여기서 언급하는 제5단계의 "대학살" 상황은 국내의 여성혐오 현황에 댈 만한 것이 못 된다. 여혐문화를 제노사이드 단계로 본다면 실제 수백만의 제노사이드로 이어진 반유대주의, 인종주의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인과 관련하여 그 정도의 사회적 차별이 존재했던 극명한 사례가 하나 있는데, 관동 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대학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정도는 돼야 올포트 척도의 제5단계 등급을 매길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발언은 설득력이 없다.
여혐이 극에 달한 ISIL조차도 여성을 성욕처리 도구, 가사노동 기계 취급을 할지언정 제노사이드의 대상으로는 보고 있지 않다. 애초에 한국이 제노사이드 단계에 있었다면, 여성들이 살아남는 것이 다급하기 때문에 저런 주장을 하고 공론화시킬 여력조차도 갖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에는 전반적으로 여성 인권 수준이 낮은데다가 사회적으로 강요된 규칙과 제약도 많았다는 건 사실이었고, 전쟁 중 침략한 민족을 핍박하거나 학살하는 와중에 해당되는 민족 여성들을 강간한 사례 역시 많았지만 전 세계사를 통틀어서도 여성 자체는 학살해야 할 대상 취급당한 적은 없었다.
여성을 대상화한다는 것은 결국 남성이 여성을 존엄한 인격체가 아닌 자손번식의 도구로서, 사물로서 본다는 것으로, 남성으로서는 그런 대상화된 여성을 살해하는, 즉 "자기 물건을 자기 손으로 부수는" 멍청한 짓을 하느니, 가능한 한 많은 여성을 자기 소유로 하여 최대한 씨를 많이 뿌리는 쪽이 더 유리하다. 역사적으로도 전쟁에 패배한 국가의 남성들은 살해당했지만 여성들은 점령국 군인들에게 비참하게 범해지기 일쑤였다. 괜히 시대극에서 "남자들은 다 죽이고, 여자들은 다 첩으로 삼아라!" 드립이 나오는 게 아니다. 즉 차별의 대상이 되는 집단들 중에서 적어도 여성의 경우는 "대학살" 이라는 표현으로는 그다지 설명하기 어렵다. 이런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여성들이 얻을 것은 학살당하는 사람들이 느낄 법한 심리적 공포감밖에 없다.
또한, 아래에 이어질 추가적인 근거와는 관계 없는 여담이지만, 어떤 이들은 "남자 자체에 뭔가 문제가 있다기 보단 원시시대 사냥을 해오는 남성 쪽이 젠더권력을 쥔 것을 시초로 하여 성별이 별로 문제될 것 없는 현대 사회까지 여성차별 혹은 여혐 관련 범죄가 끊이지 않는 것" 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석기시대는 결코 남성우월주의 사회도 아니었으며 힘만 쎄면 전부 다 상관없는 힘만능주의 사회도 아니었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인 이데올로기가 탄생한 것은 바로 청동기 시대 이후의 이야기로, 원시 사회에서는 비교적 성 역할이 공평하였다.[8] 물론, 위의 주장에서 원시사회라는 부분을 초기 문명사회라고 바꾸기만 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image]
[image]
[image]
스누라이프에서는 모든 남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포심에 대해 위와 같은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7. 남성에 의한 '남성 잠재적 가해자론'


주로 남성들이 딸이나 여자형제, 여자친구에게 하는 말들에서 나온다. 성욕을 참지 못하는 남자, 심하게는 성범죄 사건 기사를 보고 남성 스스로가 "남자들은 다 그렇다", "남자는 다 늑대다", "혼자 사는 남자들이… (나이가) 80이라도 그런 유혹 앞에서는 견딜 수도 없어."라고 두둔하거나[9], 야자나 일, 약속 등의 이유로 밤 늦게까지 돌아다니는 여자를 보고 "남자들은 밤에 혼자 돌아다니는 여자를 보면 못 참는다" 라는 말을 하곤 한다.
실제로 성남 어린이집 성폭행 사건 당시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발달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 이라며 미성년 성 착취 범죄를 옹호했으며, 딥페이크 처벌을 논의하는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김오수 법무부 차관 역시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자기 컴퓨터로 그런 짓 많이 한다" 면서 딥페이크 가해 행위를 사회규범 상 정상적인 것처럼 미화했던 적이 있다. # 이런 발언들은 마치 우리 사회에서 '''모든 남성들이 성범죄를 다들 한 번씩은 한다'''는 식으로 싸잡아 일반화하며, 따라서 성범죄 행위를 괜히 문제삼으면 안 된다는 식의 잘못된 생각을 강화한다.
그 의도가 어떤 것이었든 간에, 어릴 때부터 저런 말들을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듣고 자라다보면 여자들은 '모든 남자는 여자만 보면 성관계를 하고 싶어하고 성욕을 참을 줄을 모르는 축생이구나'라고 '''진심으로 믿어버릴''' 수도 있다. 정말 큰 문제다.
일례로 페이스북에서 한창 화제가 되었던 '오빠와 여동생의 카톡' 내용을 본 반응 대부분이 '남자'와 단둘이 있는 것을 걱정하는 반응이다. 왜 여자끼리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남자와 여자가 단 둘이 있으면 문제가 되는가. 즉 우리 사회는 '''남자란 여자에게 '무슨 짓'을 하는 존재'''라고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이었다고 하더라도 남자가 여자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을 수 있고, 남자도 얼마든지 성욕을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본인이 배제해버리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잠재적 가해자로 모는 짓'''이다. 결국 누워서 침 뱉기다. 여러모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평소에는 마초적 온정주의랍시고 여동생이나 여자친구 보고 '남자는 모두 짐승이니 조심해라', '남자는 다 그렇다.', '다른 남자가 해꼬지하면 어떻게 하려고' 같은 식의 말을 하던 그 입으로 메갈리아나 여성단체가 잠재적 가해자 운운할 때 "모든 남자가 그렇지 않거든?"이라고 부들부들하는 것은 말 그대로 이중잣대이기 때문이다.

8. 외부 링크



9. 피해 사례


'''잠재적 가해자를 만드는 시선 때문에 억울한 피해자가 속출한다.'''
  • 학교, 학원, 어린이집, 교회, 지역아동센터, 방과후교실, 청소년센터 등에서 아동과 청소년들을 지도하는 남교사[10]들이 '잠재적 가해자'로 찍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안양 초등생 유괴 살인 사건이나 조두순 사건 등 성인 남성이 여자아이들을 상대로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이슈화될 때마다 학부모들, 특히 딸을 둔 엄마들의 불안감은 무섭게 확산된다.
물론 어린이와 청소년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르는 남교사들의 사례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고, 그들은 마땅히 법의 심판을 받아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들로 인해 현장에서 열심히, 그리고 묵묵히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지도하는 대다수의 선량한 남교사들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매도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멀리 갈것도 없이 1990년 곽재은 유괴 살인 사건, 1997년 박초롱초롱빛나리 유괴 살인 사건[11], 2015년 인천 어린이집 폭행 사건, 2017년 인천 동춘동 초등학생 유괴 살인사건경남 여교사 초등생 의제강간 사건 등의 경우처럼 여성들이 아이들에게 범죄를 저지르는 사례도 실로 적지 않다. 남자든 여자든 어린이와 청소년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아이들을 사랑과 정성을 다해 지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학교 같은 경우 스쿨 미투 등 여러 사건 사고의 여파로 학교 차원에서 남교사의 임용이나 전입을 꺼리고 있으며, 이는 나이가 많거나 교사가 아닌 경우[12]에도 적용된다. 그래서 여학교에서 근무하는 남교사가 줄어들고, 그 자리를 여교사가 채우고 있다.
  • 동성애자와 같은 성 소수자장애인, 특히 정신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이 '잠재적 가해자'로 찍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성 소수자들은 특정 종교에 속하는 단체의 사람들에게 물리적 테러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개신교계 종교 단체 일원들이 김조광수 결혼식장에서 김조광수 부부에게 사회의 윤리를 파괴한다며 오물을 던진 테러 행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중증 우울증 환자나 지적장애 같은 정신장애인의 경우도 예상치 못한 피해를 당할 때 저항하거나 피하기보단 그대로 맞거나 움츠러드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오히려 정말 위험한 사람들은 치료를 거부하다가 사고를 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강남 묻지마 살인사건의 범인 등) 이러한 사람들이 범죄 피해를 당할 때 금치산자라거나 정신병을 이유로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되어서 가해자가 그냥 풀려나거나, 일부 정신장애인들의 범죄 행위로 인해 일단 정신병 판정을 받으면 편견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정신질환자들의 범죄란 누가 언제 할지 예측할 수가 없으니 정신장애인들의 입장에서도 같은 정신질환자가 두렵기도 해서, 다른 소수자들과 달리 함께 뭉쳐 편견에 맞서기도 쉽지 않다.
  • 춘추전국시대에도 방연이나 이사가 자신보다 우월한 손빈이나 한비자를 시기하여 혜왕이나 진시황에게, 앞의 둘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고 모함을 해 죽이거나 죽이려 하였다. 돌고봉상왕의 '잠재적 반란 분자'로 보는 의심 때문에 반역 의혹을 받아 죽었다.
  • 아시카가 사건 당시, 일본 경찰은 주먹구구식 프로파일링 기법을 동원해서 "독신남성은 소아성애자일 가능성이 높다."라는 이유로 무고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웠다. 독신남성들을 모두 잠재적 소아성애자=범죄자로 낙인을 찍은 사건이다. 이 편견대로라면 반대로 기혼남성은 소아성애자가 아니라는 주장인데, 멀리 갈 것도 없이 조두순은 유부남이다.
  • 임대아파트 거주자, 한부모 가정에 대한 차별. 학부모들이 자신의 자녀가 임대 아파트에 사는 친구나 한부모 가정 친구와 어울리지 못하게 막는 경우가 있다. 2017년 어금니 아빠 사건 이후로 이러한 차별은 더더욱 심해져 특히 딸은 엄마가 계시지 않고[13] 아빠나 조부모와만 같이 사는 친구, 오빠가 있는 친구 집에는 가지 못하게 하고 같이 놀지도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불우한 환경으로 인해 비뚤어지는 사례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낙인 효과로 인해 원래 나쁘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정말로 나쁜 길을 걷게 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 이화여대의 어느 여학생이 이화여대 근처 카페를 매일 찾아오는 남자가 수상하다고 낙인을 찍으면서 "변태가 분명하다"라고 페이스북에 사진을 찍어 올리면서 조리돌림을 하고 억울하게 매도를 하는 사건이 있었다. 게다가, 그 남자는 도촬까지 당하면서 초상권 침해와 명예훼손을 당했고 조리돌림까지 당했다. 자세한 것은 이화여자대학교/사건사고 문서를 참고하자.
  •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 이후, 조현병 환자 등 정신질환자에 대한 선제적인 입원 조치를 시행하겠다는 계획이 발표되면서, 정신질환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간주하는 게 아니냐 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인천 동춘동 초등학생 유괴 살인사건의 범인 또한 조현병 환자임을 주장하면서(그러나 결국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정신질환자에 대한 공포는 더욱 커지고 있다. 또한 페미니스트 계열은 남성=잠재적 가해자 등의 논리를 펼치고 있다.[14]
  • 그것이 알고싶다 1077회에서도 다뤄진 부산 배산 여대생 피살사건은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판단하는 사고방식에 근거하여 용의자를 전부 남성으로만 올려놓고 수사를 하다 사건이 미궁에 빠진 케이스로, 이 방송에서는 최면요법과 피습 시뮬레이팅을 통해 가해자가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 이 밖에도 한국인 자체를 잠재적 가해자로 모는 혐한초딩, 반대로 타국인을 잠재적 가해자로 모는 타국 혐오자(특히 혐일초딩/혐중초딩 등.)들의 사례도 있다. 제노포비아 문서 참조.
  • 의사들이 병원 내 CCTV 설치를 반대하는 주장의 근거 중 하나가 '시민들이 의사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여기게 된다'이다. 위의 내용과는 달리 의사 스스로가 그 피해를 당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그러나 시민들의 의사에 대한 신뢰가 매우 낮은데다 이미 일부 의료 사고 및 범죄에서 CCTV 영상이 결정적인 증거가 된 경우가 있어서 의사들의 주장에 대한 반감이 강하다.

10. 결론


이 단어는 '''그 자체로 모순적인 단어'''이며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단어'''라고 봐야 한다. 애초에 '잠재적'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숨은 상태로 존재하는'이라는 의미이다. 게다가 잠재적 가해자라는 단어의 의미를 뜯어보자면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다. '''그 누구도 범죄는 저지를 수 있다!''' 어떤 연령대도, 어떤 성별도, 그 어떤 사람도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잠재적 가해자라는 표현은 단어 자체가 모순적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에게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다. 당장 하던 직업을 때려치우고 취미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으며, 동네에서는 착한 사람으로 알려진 이가 범죄 사실이 알려지기도 한다. 인생은 매 순간이 선택이라고 한다. 선택하지도 않은 것으로 비판받는 것은 누가 보아도 잘못된 것이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잠재적 가해자라는 것은 이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며, 이 사람이 범죄를 하기로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범죄를 '선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으로 이러한 단어가 쓰인다면 더 이상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게 될 것이다.'''

11. 관련 문서



[1] 주로 권선징악 신파극이나 정치선전물에서 자주 쓰이는데, 이런 클리셰을 잘못 써먹어서 오히려 역효과 나는 작품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의 범죄자 미화+국뽕 영화인 자전차왕 엄복동이나 일본의 극우 미디어물들이 바로 대표적인 예시다.[2] 고유정, 인천 동춘동 초등학생 유괴 살인사건, 엄여인 보험 살인사건, 파주 전기톱 토막살인 사건, 박초롱초롱빛나리 유괴 살인 사건, 김선자 연쇄 독살사건 등.[3] 본래는 구조주의 철학자다. 이 사람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글이 사랑에 대한 정의인데 참고로 읽어 보자.#[4] 토릴 모이, "성과 텍스트의 정치학"[5] 독립운동가 신채호의 경우, 한 사람의 일본인이라도 더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민족주의에서 아나키즘으로 돌아선 후에는, 억압받는 일본인들과 연대해서 일본 제국주의를 향해 투쟁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6] 출처[7] 물론 잠재적 범죄라는 말은 강력범죄가 아닌사건에서는 은근히 자주 쓰이고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잠재적 표절'''이었다.[8] 편집 이전 글에서 원시 사회가 여성 우월적인 모습을 가졌다고 언급했지만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원시시대가 모계사회였다는 가설은 주류 인류학자들과 사회학자들 사이에서 폐기된지 오래이다. 정치권력과 재산, 가정 의사 결정권을 모두 여성이 소유한 사례가 매우 희귀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가설이 현 학계에서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실제로 모계사회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모수족도 정치권력은 남성들에게 있다.[9] 심지어 링크의 사건은 가해자의 주변인들로부터 오히려 피해자를 향해 '어떻게 처녀가 술을 떡 되게 그렇게 먹냐고', '어린 애도 아니고 그 시간까지 같이 있을 때는', '그 사람도 원인 제공이야. 싫었으면 가야지'식으로 온갖 탓하는 말이 쏟아졌다. 당연하지만 정상적인 상식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몰상식한 태도에 크게 분노했다.[10] 해당 시설에서 근무하는 사회복무요원, 자원봉사자도 포함한다.[11] 심지어 이 사건의 범인 전현주는 임산부였다!!![12] 교장, 교감, 행정실 직원 등[13] 사별, 이혼으로 인한 별거 포함[14] 페미니스트들은 동춘동 사건이나 부산 사건처럼 여성이 가해자인 사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물론 동춘동 사건은 가해자가 메갈리아 등에서 사용하는 남혐 용어를 사용하는 것까지 알려져 있으니 어떻게든 회피하고 싶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