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스전
1. 개요
청나라의 군인, 중화민국의 군벌, 정치가. 돤치루이, 펑궈장과 더불어 북양삼걸로 불렸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61년 직예성 정정현에서 태어났다. 1878년 정정진표학병대(正定鎭標學兵隊)를 졸업했으며 섭지초 휘하에 들어가 산해관에 배치되었으며 1885년 천진무비학당을 입학하여 1888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1894년 섭지초를 따라 청일전쟁에 참전, 아산에 상륙했고 평양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귀국 후인 1895년 위안스카이의 신건육군에 들어가 독조영무처회판(督操營務處會辦) 겸 강무당총교습(講武堂總教習), 공정영관대(工程営管帶), 공병덕문당감독(工兵徳文堂監督)을 지내며 위안스카이의 신임을 얻었다.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고 8개국 연합국이 개입하자 서태후의 명령으로 의화단 진압에 참가했으며 진압 이후 황하 제방 수리 작업을 감독했으다. 1902년 북양군정사(北洋軍政司)가 설치되자 총참의에 임명, 군학사정사(軍學司正使), 군정사정사(軍政司正使)를 역임했으며 1903년 위안스카이가 연병처를 설치하여 위안스카이가 연병처회판대신에 임명되었을때 총리연병대신 경친왕 아이신기오로 이쾅 밑에서 쉬스창, 돤치루이, 펑궈장, 육건장, 유영경 등과 함께 연병처에서 일하며 군권을 강화했다.
이어 북양무비군좌익익장(左翼翼長), 독판공소처총판, 북양육군 2진 통제, 6진 통제를 역임했다. 1906년 육군부우시랑(陸軍部右侍郎)을 거쳐 1907년 강북제독 겸 영조사무(鹽漕事務)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북양의 호랑이로 불리며 북양삼걸의 한 사람이 되었다.[1] 위안스카이가 파직된 이후 차오쿤, 펑궈장, 돤즈구이, 장쉰 등과 함께 위안스카이를 예방하며 충성을 맹세했다.
2.2. 신해혁명과 호국전쟁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위안스카이가 복직하자 신해혁명 진압에 나섰다. 혁명군의 기세가 거세 10월 30일 총리대신 대풍이 헌정 실시와 정치범 대사면을 선포한 이후 위안스카이의 명으로 원상촌에 주둔하며 군대의 사무를 맡았다. 이어 위안스카이가 총리대신에 임명된 후 왕스전은 육군대신에 임명되었다.
1912년 중화민국이 건국되어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에 취임한 이후 정치적으로 은퇴하지만 북양삼걸의 일원이라는 명망 때문에 나머지 두 동료에 비하면 끝발이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중화민국에서도 심심치 않게 활약하게 된다. 1914년 육군상장으로 승진, 육해군대원수통솔판사처(陸海軍大元帥統率辦事處) 좌판을 역임했으며 1914년 10월, 진광원, 위안커딩과 함께 육군총장 돤치루이를 견제하고 장교들을 육성하기 위한 모범단주비처(模範團籌備處) 위원을 역임했고 1915년 8월, 돤치루이가 위안스카이에게 찍혀서 육군총장에서 쫓겨나자 신임 육군총장에 임명되었다. 1916년 3월, 쉬스창이 국무총리에서 사퇴하고 돤치루이가 국무총리에 취임한 후에도 잠시 유임되었으나 곧 돤치루이에게 육군총장직을 내주게 되었다. 1916년 6월, 쉬스창, 돤즈구이 등과 함께 호국전쟁으로 퇴진을 강요받다가 요독증이 악화되어 급사한 위안스카이의 임종을 지켰다.
1916년 부총통 리위안훙이 대총통을 계임한 이후 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부원지쟁 중 대총통 리위안훙을 지지하며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반대했으며 1917년 6월, 경기경비총사령(京畿警備總司令), 리징시 내각 하의 육군총장 겸 참모총장이 되었다. 돤치루이 탄핵 이후 펑궈장으로부터 국무총리에 취임하여 내각을 구성하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했고 캉유웨이 등 청나라의 유신들과 함께 장훈복벽에 참여했다. 이후 선통제로부터 장쉰과 함께 이어 내각의정대신(內閣議政大臣) 겸 참모부대신에 임명되었으나 장훈복벽이 진압된 이후 다시 돤치루이 내각에 합류했다.
2.3. 호법전쟁부터 은퇴까지
1917년 8월 17일 돤치루이 내각이 조직된 이후 참모부총장을 지내으며 돤치루이가 량치차오의 민국 재조설을 근거로 구국회 회복을 거부하고 일방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선포하자 이에 반발한 쑨원이 광저우에서 1차 호법운동을 전개, 호법정부를 수립하자 돤치루이가 토벌령을 하달, 호법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돤치루이는 강경히 무력통일 노선을 견지했으나 펑궈장 등 직예군벌은 이에 반대하고 있었고 1917년 11월 14일, 펑궈장의 지시에 따라 범국장와 왕여현이 정전을 주장하고 사천과 호남에서 북양군이 패배하고 차오쿤, 리춘, 왕잔위안, 진광원이 무력토벌 반대를 통전하자 돤치루이는 패전에 책임을 지고 하야했다. 이후 권한대행 첸넝쉰의 뒤를 이어 왕스전이 12대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에 임명되어 남방과의 화의를 도모하였다. 하지만 육군총장 자리는 곧 돤즈구이에게 내주었다.
하지만 물러난 안휘군벌은 순순히 주화론의 득세를 보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돤치루이의 측근 쉬수정이 장회지, 니쓰충, 차오쿤을 선동하여 톈진에서 독군단 회의를 개최, 장쭤린, 옌시산 등에게 토벌령을 내릴 것을 요구하게 하는 한편 봉천의 장쭤린을 끌어들여 관내에 진출하게 했다. 1918년 2월 25일 양위팅이 진황도에서 일본제 무기를 탈취하며 안휘군벌과 봉천군벌의 동맹을 체결했고 3월 6일 장징후이가 입관하여 펑궈장 정부를 압박했다. 이에 질려버린 왕스전은 2월 19일, 병을 핑계로 사직해버렸고 내무총장 첸넝쉰이 2월 20일부로 국무총리 대행이 되었다. 3월 23일, 펑궈장이 돤치루이를 다시 국무총리에 임명하면서 첸넝쉰도 곧 물러나고 3차 돤치루이 내각이 조직된다.
이후 1922년 1차 직봉전쟁 직전 차오쿤, 우페이푸와 장쭤린이 량스이 내각의 퇴진을 놓고 다툴 때 조정자로 나서는 등 안휘군벌, 직예군벌, 봉천군벌로 갈라진 북양군벌 내부의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중재자를 자처했으나 효과를 보진 못했다. 안직전쟁 이후 강소독군 겸 장강순열사 리춘이 자살하자 1920년 12월 3일 소환강 삼성순열사(蘇皖贛三省巡閲使)에 임명되었으며 1922년 덕위장군(徳威將軍)에 임명되었다. 1922년, 리위안훙 총통으로부터 전국재병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2차 직봉전쟁으로 돤치루이 임시 집정정부가 출범한 후 1925년 선후회의 회원 겸 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을 마지막으로 정계에서 은퇴했다. 정계 은퇴 후 조카딸이 산동독판 장쭝창에게 납치되어 강간당하는 비극을 겪었는데 장쭝창은 이 나이가 먹도록 조카딸을 시집보내지 않은 왕스전이 잘못한 것이라고 적반하장으로 비난하는 인성터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2.4. 말년
1926년 4월 12일 돤치루이 임시집정 정부가 무너질 때 경사유지회를 수립하여 치안을 유지하였으며 5월 5일, 중재에 나서 옌후이칭을 국무총리로 임명하게 했으나 옌후이칭이 조각에 실패하면서 6월 22일, 해군총장 두시구이가 국무총리가 되었다. 안국군 정부 수립 후 1927년 9월, 고궁관리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어 국립고궁박물원의 책임자가 되었다. 1928년 장쭤린이 국민당의 2차 북벌을 맞이해 베이징을 철수할 때도 경사치안유지회를 만들어 회장에 취임, 베이징의 치안을 유지하는데 노력했으며 각종 자선사업을 했다.
1930년 7월, 베이핑으로 개칭된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3. 주요 경력
4. 참고문헌
- 군벌, 이건일, 도서출판삼화.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원세개 평전, 허우이제, 지호.
- 네이버 지식백과 왕사진 문서
- 直皖戰爭과 奉天軍閥의 關內進出, 송한용, 중국사연구 28권 28호, 중국사학회
- 제1차 직봉전쟁후 자유주의지식인의 북경정부관 - 호인정부론과 나문간사건을 중심으로, 윤혜영, 동양사학연구 26호, 동양사학회.
5. 관련문서
[1] 돤치루이는 북양의 용, 펑궈장은 북양의 개로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