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간 스토이코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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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구 유고슬라비아 SFR)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20년까지 광저우 푸리 감독을 맡았다.
별명으로는 ''''유고의 희망봉'''', ''''발칸의 마라도나''''가 있다. 드리블 능력이 굉장히 뛰어나며 국제 대회때마다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의 No.10을 담당했다. 그러나 한창을 달릴 시기에 무릎 부상으로 인해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했고 변방인 일본 무대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 활약했다.
다혈질적인 성격으로도 유명하다. J리그 7시즌간 퇴장을 13번 당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1981-82 시즌 고향팀인 라드니츠키 니슈에서 데뷔했다. 데뷔 시즌에는 1경기 출장에 그쳤으나 두번째 시즌부터는 서서히 주전 자리를 확보하며 1985-86 시즌까지 총 70경기에 출전해 8골을 기록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어 메이저 대회를 경험한 적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선수였던 스토이코비치는 1986년 FK 츠르베나 즈베즈다로 이적하며 잠재력을 폭발시킬 기회를 잡는다. 스토이코비치는 1990년까지 총 4시즌을 뛰었고 120경기에 나서 54골을 기록했다. 이 기간동안 그는 1988, 1989년 유고슬라비아 리그 MVP, 유고슬라비아 올해의 축구선수를 2년 연속 수상하는 등 자국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았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1990-91 시즌을 앞두고 팀을 떠났기 때문에 유러피언컵을 좀 더 늦게 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1990-91 시즌을 앞두고 스토이코비치는 프랑스의 강호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로 이적한다. 당시 마르세유는 언론 부호 구단주 베르나르 타피의 과감한 투자 아래 국내외를 막론하고 스타 플레이어들을 영입하는 팀이었고, 스토이코비치는 그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첫 시즌 스토이코비치는 무릎 부상에 시달렸고 리그에서 11경기에만 모습을 드러냈다. 마르세유는 이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 진출했는데, 하필이면 그 상대가 친정팀인 츠르베나 즈베즈다였다. 스토이코비치는 그 경기 교체 선수로 대기하다 연장 후반 교체 투입되었으나 경기 결과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친정팀이 승부차기로 우승하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크리스 워들, 아베디 펠레와 같은 공격진들 사이에서 스토이코비치는 주전 자리를 따내지 못했고 1991-92 시즌 중반 이탈리아의 엘라스 베로나로 반시즌 임대된다. 1992-93 시즌에도 스토이코비치의 입지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이 시즌 마르세유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올라 AC 밀란을 격파하며 빅 이어를 들어올렸으나, 정작 스토이코비치는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1993-94 시즌 중반, 스토이코비치는 마르세유를 떠난다.
스토이코비치의 행선지는 놀랍게도 변방 리그로 취급되던 J리그의 나고야 그램퍼스였다. 상대적으로 심적 부담감이 덜한 리그에서 스토이코비치는 좋은 활약을 펼쳤고 1995년에는 리그 MVP를 수상하는 등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스토이코비치는 기타 일본에 온 스타 플레이어들과 다르게 1, 2년이 아닌 무려 7시즌을 일본에서 보냈고, 2001년 현역 은퇴를 선언할 때까지 리그에서 183경기 출장 57득점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렇게 오래 일본에서 선수로 뛴 것은 당시 고향인 유고슬라비아의 내전 때문으로 골 세레머니로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공습을 항의하기도 했었다. 결국 유럽에서의 선수 생활을 포기하고 일본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하기에 이르게 된다.[1]
2.2.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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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2001년까지 84경기에 나서 15골을 기록했다. 메이저 대회로는 UEFA 유로 1984,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1998년 프랑스 월드컵, UEFA 유로 2000에 출전했다.
1983년 프랑스를 상대로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가졌으며 어린 나이임에도 UEFA 유로 1984에 출전해 미셸 플라티니가 이끄는 프랑스를 상대로 PK골을 성공시키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팀이 3전 3패를 기록하는 바람에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유로 대회 탈락 이후에는 올림픽 팀에 합류해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유고슬라비아가 동메달을 따는데 기여했다. 1988 서울 올림픽에도 출전한 바 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주전 선수로 맹활약하며 팀을 8강으로 이끌었다. 특히 16강 스페인을 상대로 멀티골을 넣는 원맨쇼를 보였다. 그러나 8강 아르헨티나 전에서는 맹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데얀 사비세비치가 득점찬스를 번번히 무산시켰고, 승부차기에서 실축하면서 팀이 패배하는데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2]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주장으로 출전했고 조별리그 독일전에서 동점골을 넣는 등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팀은 16강에서 탈락. UEFA 유로 2000에도 주장으로 출전했으나 큰 활약은 없었고 2년 전 월드컵에서 만났던 네덜란드와 8강에서 다시 조우했으나 1-6으로 탈탈 털리기만 했다.
3. 감독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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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이후 축구협회 회장,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회장 등을 역임하다가 2008년 친정팀인 나고야 그램퍼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부임 첫 시즌 몇몇 팬들은 그가 처음 감독직을 수행하는 것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으나 첫 시즌 3위를 기록하며 팀을 AFC 챔피언스 리그로 이끌었다. 2010년에는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면서 J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2013년을 끝으로 스토이코비치는 팀을 떠났고 잠깐의 공백기를 거친 뒤 2015년 8월, 광저우 푸리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같은 연고지의 광저우 헝다와는 달리 광저우 푸리가 그다지 돈을 쓰는 구단이 아님에도 2016년에는 6위, 2017년에는 5위를 마크했다.
나고야 감독 시절 클리어된 공을 테크니컬 에이리어에서 골로 차넣어 화제가 된 바 있다. 득점(?) 후 퇴장은 덤.(#)
2019년 시즌을 12위로 저조하게 마쳐 시즌이 끝난 후인 2020년 1월 경질되었다. 마지막해는 죽을 쑤었지만 적은 팀재정으로 항상 중상위권을 기록했기 때문에 중국에서 떠날 때 많은 팬들이 전송을 왔다. 후임은 지오바니 판브롱크호르스트.
2021년 2월, 자신의 조국인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월 23일 첫 발표가 났고, 3월 초 정식 취임을 한다고 한다. 자신의 감독 커리어 첫 국가대표팀 감독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