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 It Be
- 동명의 곡: Let It Be(노래)
- 동명의 다큐멘터리 영화: Let It Be(영화)
- 개그콘서트의 코너: 렛잇비(개그콘서트)
- 리플레이스먼츠의 음반: Let It Be(리플레이스먼츠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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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지막으로 발표된''' 비틀즈의 스튜디오 앨범. 마지막으로 제작된 앨범은 Abbey Road이지만, 어른의 사정으로 이 앨범의 발매가 1년 이상 밀렸기 때문에 비틀즈 명의로 발표된 최후의 앨범이 되었다. 영국에는 1970년 5월 8일, 미국에는 열흘 뒤인 1970년 5월 18일에 발매되었다. 폴 매카트니의 서면 인터뷰로 인한 비틀즈 해체 보도가 1970년 4월 10일이었으므로 해체 이후에 발매된 앨범이라 볼 수 있다.
비틀즈의 아쉬운 마지막 음반으로 평가받는다. 먼저 발매된 Abbey Road는 해체를 예감한 멤버들이 마지막 의기투합으로 뭉친 만큼 밴드의 일시적 화합으로 엄청난 시너지와 함께 높은 퀄리티를 보였으나 밴드가 해체될지 활동을 이어갈지 여부도 애매했던 어중간한 시기에 제작된 Let It Be는 멤버들 간 불화가 극대화된 시점에서 서로를 불신하는 상황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페퍼 상사와 Magical Mystery Tour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프로젝트를 주도한 쪽은 폴이었는데, 이 때문에 존과 조지[2] 는 폴의 독주가 심해진다며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게다가 최종 프로듀서로 낙점된 필 스펙터의 오버더빙은 기존 팬들에게 호불호를 주었고 이런 상황 속에서 비틀즈의 마지막 작품으로서는 다소 실망스러운 결과물이 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비틀즈 음반 치고’ 아쉽다는 얘기이고,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 342위에 랭크되는 등 음악적 완성도는 어느 정도 인정 받는 편이라 할 수 있다.
2. 제작 과정
멤버들의 갈등이 심해진 1968년 후반, 폴 매카트니는 밴드의 와해를 막아보기 위해 '초기의 로큰롤 음악 시절로 돌아가 투어를 재개해보자'라는 취지에서 앨범 '겟 백(Get Back)' 및 앨범 제작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안하게 된다. 이듬해 1969년 초 추운 겨울날 비틀즈가 모인 곳은 녹음스튜디오가 아닌 런던 근교의 영화 촬영장인 트위크넘 스튜디오였다. 녹음과정을 촬영하기 위해서 좁은 녹음실 안에 촬영기재를 설치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촬영 스튜디오는 커다란 창고나 다름 아닌 공간이었고 그 매서운 겨울 공기가 아니더라도 비틀즈는 이미 아주 차갑게 냉각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트위크넘에서의 촬영은 멤버들의 말다툼 끝에 중단되었다. 기타 연주를 놓고 실랑이를 벌인 폴과 조지의 다툼 역시 이 트위크넘에서 벌어진 일이다. 사실 폴과 조지의 실랑이보다도 존과 조지의 싸움이 더 심각했다고 하다. 결국 모든 프로젝트가 무산될 처지에 놓였다. 폴 매카트니는 고착상태에 빠진 프로젝트를 되살리기 위해 멤버들을 다시 불러모았다. 성난 멤버들, 특히 조지를 달래기 위해 녹음은 새로 개장한 애플 스튜디오로 옮겨 진행하기로 했고 새로운 세션 멤버를 추가하면 스튜디오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질 것이라는 판단 아래 빌리 프레스톤을 앨범 세션으로 초대했다. 멤버들이 새로운 세션인 빌리 프레스톤에게 친화적인 태도를 보여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반드는데 나름대로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촬영은 재개되었지만 영화는 텔레비젼용 다큐멘터리로 변경 되었다가 다시 극장용 영화로 바뀌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재개된 프로젝트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3년만에 재개하는 비틀즈의 공연이었다. 당시 멤버 네 명 모두 무대에 대한 향수와 뮤지션으로서 라이브에 대한 욕구를 느끼고 있었지만 3년간 무대에 서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투어를 중단했던 1966년과는 업계 환경이 너무 많이 변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선뜻 나서질 못하던 상황이었다. 논의 끝에 대중적인 콘서트가 아닌 역사적인 명소에서 무관객 공연을 하고 이를 필름에 담기로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멀리 나가야 한다는 귀차니즘 때문에 무산되었다. 결국 역사적인 명소가 아니라 애플 스튜디오에서 매우 가까운, 애플 스튜디오의 옥상으로 결정이 났다. [4]
영화 촬영 계획에 따라 겨울 바람이 매섭게 치던 1969년 1월 30일,[5] 앨범의 몇 곡을 애플사옥 옥상에서 예고도 없이 뜬금포로 공연했다. 곧 경찰의 공연 중지 명령이 내려졌고, 마지막 곡으로 "Get Back"을 연주했다. 이 옥상 공연은 비틀즈의 마지막 공연이 되었고, 런던 시내의 소수 운 좋은 사람들만 현장을 함께할 수 있었다. 이 공연을 시작으로 비틀즈는 이후 1년간 수많은 마지막 일들을 했다. 마지막 녹음, 마지막 사진 촬영 등등.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Get Back' 프로젝트는 옥상 공연과 함께 종결되었지만 앨범 작업은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비틀즈 멤버들은 결과물에 만족하지 않았고 두 번이나 앨범용 마스터를 만들었지만 모두 OK사인을 받지 못했고 트랙 순서 조정과 곡 분위기에 대해서도 멤버들 사이에 말이 많았다. 발매는 2번이나 취소되었고, 실제로 3번의 발매 계획들을 보면 곡 순서와 수록곡이 조정되어 있다. 대표적인 예로, 첫번째와 두번째 계획에는 폴 매카트니가 만든 "Teddy Boy"가 수록되어 있지만 마지막 계획에서는 제외되었다. 또한 두 번째까지는 계획에 없던 "Across the Universe", "I Me Mine"은 마지막 계획에 포함되었다. 이렇게 계획의 진전이 지지부진해지면서 'Get Back' 프로젝트의 완성은 점점 귀찮은 짐처럼 여겨지게 된다. 이 녹음들이 발매가 될 수 있을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영화 제작도 계속해서 늦춰졌다.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 계속 되자 폴은 멤버들에게 그해 여름 새로운 앨범의 제작을 제안했다. 이번에는 영화나 콘서트 같은 번거로운 것들을 고려하지 않았고 방향도 지금껏 해오던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프로듀싱도 비틀즈와 늘 함께 해오던 조지 마틴이 맡기로 했다. 이렇게 완성된 Abbey Road는 'Get Back' 세션과 비슷한 때 작곡된 것들이고 녹음한 시기도 큰 차이가 없었지만, 비교가 어려울 정도의 완성도를 자랑한다. 오히려 녹음이 늦게 시작되어 마지막 음반으로 계획하고 있던 Abbey Road가 먼저 발매될 지경이었고 'Get Back'의 완성 여부는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이처럼 'Get Back'의 완성을 둘러싼 충돌은 이전의 프로듀서이던 조지 마틴 대신 필 스펙터가 앨범의 프로듀싱을 맡게 되면서 두드러지게 된 것인데[6] , 대부분의 곡에 코러스와 오케스트레이션을 추가하면서 곡의 분위기는 웅장해졌으나[7] 오버더빙과 멀티레이어 레코딩을 배제하고 '날 것'과 같은 밴드의 초창기 사운드를 재현하려던 프로젝트의 본래 취지와는 정반대가 된 음악들이 되었다. 이러한 완성물을 듣고 폴 매카트니는 앨범의 발매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반면 존 레논은 "그는 최악으로 녹음된 짐들을 받았지만 거기서 뭔가를 만들어냈다. 내가 들었을 때는 나쁘지 않았다"라고 필 스펙터를 두둔했다. 실제로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은 비틀즈 해체 이후 솔로 커리어 초기에 필 스펙터를 프로듀서로 기용하기도 했다.
결국 'I Me Mine' 녹음 이후 모든 멤버들이 각자의 갈길을 가고 있던 1970년, 비틀즈 멤버 네 명 사이에 파여진 감정의 골은 깊어만 가고 있었고 솔로활동과 사생활의 비중은 더욱 높아지고 있었다. 폴 매카트니가 자신의 솔로 앨범 McCartney 발매 보도자료를 통해 비틀즈 활동을 지속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고[8] 다음 날인 4월 10일, 언론을 통해 비틀즈의 해체 사실이 공식적으로 보도되었다. 비틀즈의 13번째 앨범은 이름이 'Let It Be'로 바뀌어 비틀즈가 해체된 이후인 5월 8일에야 발매되었다.
'''이로써 비틀즈의 여정은 막을 내렸다.'''
3. 50주년 기념반?
2020년 피터 잭슨 감독이 제작한 Let It Be 새 다큐멘터리 영화 "비틀즈: 겟 백"이 공개되는 9월 4일, 영화 사운드트랙 형태로 Get Back 세션의 녹음들이 발매될 예정이다.
이전의 페퍼상사, 화이트 앨범, 애비 로드와 마찬가지로 새로 리믹스한 음원을 공개할 것인지 앤솔로지와 같이 단순 세션 레코딩을 공개하는 형태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다. 일단 이전의 리믹스 작업을 해오던 자일스 마틴은 트위터 프로필에 '필 스펙터의 아들이 아님'을 띄워놓았다. Let It Be는 아버지 조지 마틴이 프로듀싱에 관여한 작품이 아니므로 이전 50주년 기념반과 같이 자일스 마틴의 리믹스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있다.
결국 새 다큐멘터리 영화 "비틀즈: 겟 백" 자체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해 개봉이 1년 이상 연기되면서, Let It Be 관련 음원을 담은 음반이 50주년에 맞춰 공개되지는 않았다. 아마 2021년 영화 개봉에 맞추어 발매될 가능성이 크다.
4. 수록 곡
- Dig a Pony - 미국에 발매된 Let It Be 앨범에선 이 곡의 제목이 'I Dig a Pony'로 잘못 기재되었다. 1969년 1월 30일 옥상공연 버전인데, 도입부와 마지막의 "All I want is"부분을 필 스펙터가 잘라버렸다. 페퍼상사의 수록곡인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의 조 카커 커버 버전과 살짝 유사하다.
- Across The Universe - 세계 자연보호 기금을 위해 녹음된 자선 앨범 No One's Gonna Change Our World에 먼저 실렸다.[9] 존 레논의 사상관이 뚜렷하게 반영된 작품으로,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라는 후렴구에서 재혼 문제와 비틀즈 해체 문제 등으로 혼란스럽던 때 그의 태도를 알 수 있다. 2007년, 사운드트랙에 전부 비틀즈 음악을 쓴 영화의 제목이 되기도 했으며, 2008년 2월에 NASA에서 전파 형태로 진짜 우주 건너편(북극성)을 향해 쏘아올리기도 했다. 처음 녹음본과 가사가 한 부분이 다르다(처음 녹음본 shades of life → 발매된 음반 shades of earth).
참고로, 이 앨범 버전은 오리지널 녹음보다 5% 느리게 조정한 것이다. 반대로 자선 앨범 버전은 5% 빠르게 조정되었다. 오리지널 스피드는 Let It Be... Naked에서 들을 수 있다.
- I Me Mine - 조지 해리슨의 곡으로, 인도에서의 '자아 찾기'가 반영되었다고 한다. 또한 물질 세계에 대한 개개인의 욕망을 비판한다. 비틀즈 멤버가 비틀즈의 이름으로 마지막으로 녹음한 두 곡 중 한 곡이다.(존 레논은 참여하지 않았다.) 원래는 1분 35초 정도의 짧은 노래였지만 필 스펙터가 편집 과정에서 절을 하나 더 만들고 오케스트레이션을 덧붙여 완성지은 곡이다.
- Let It Be - 해당 문서 참조.
- Maggie Mae - 리버풀 민요이며, Rubber Soul 이후 비틀즈 음악 중 유일한 비자작곡. 비틀즈 멤버가 비틀즈의 이름으로 녹음한 최후의 두 곡 중 한 곡이다.(존 레논은 빠졌다.) 네 멤버가 모두 녹음에 참여한 마지막 곡은 Abbey Road 앨범의 I Want You(She's So Heavy).
- I've Got a Feeling - 존 레논의 미완성곡 'Everybody Had a Hard Year'과 폴 매카트니의 미완성곡 'I've Got a Feeling' 이 두 곡을 합친 곡. 1969년 1월 30일 옥상공연 버전인데, 두 개의 녹음분 중 첫번째 녹음분이다. 참고로 이 곡을 리허설할 당시 폴이 조지의 기타연주를 비판하자 화가 난 조지가 비틀즈를 잠시 탈퇴하기도 하였다.[12] 결국 조지는
앨범 녹음까지만 참여하는 전제조건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훗날 조지는 오노 요코가 4인조 밴드 비틀즈라고 말할 때 아니 3인조야(폴 매카트니는 비틀즈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 또는 자신은 더 이상 비틀즈의 멤버가 되기를 거부한다는 의미)라고 말했을 정도다.
- One After 909 - 첫 녹음은 1963년에 했지만 조지 마틴이 이 곡을 맘에 들어하지 않아 그 시절 앨범에 수록도, 싱글로 발매되지 않았다가 이제서야 앨범에 수록하게 되었다. Anthology 1에 수록된 1963년 녹음본과 이 앨범에 수록된 트랙을 비교하며 들어보면 비틀즈 멤버들의 연주 스타일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이 때 조지 해리슨은 악보없이 즉흥적으로 코드를 잡고 연주했다고 한다. 역시 1969년 1월 30일 있었던 옥상공연 버전이다. 연주가 끝난 뒤 폴이 Danny Boy(아 목동아)의 도입부를 부르는 게 잠깐 나온다. 1963년에 녹음된 곡이라서 그런지 Anthology 3가 아닌 Anthology 1에 실렸으며 거기서 1963년 오리지널 녹음본을 들을 수 있다.
- The Long and Winding Road - 문서 참조.
- For You Blue
- Get Back - 처음에는 앨범 이름으로 사용하고 A면과 B면 마지막에 두 번 수록하려고 했던 곡이지만 수정을 거치면서 앨범 이름도 바뀌고 앨범 마지막 트랙으로 한 번만 수록됐다. 게다가 싱글 버전과는 달리 뒷 부분이 잘려나갔다. 대신 앞 부분에는 스튜디오에서의 멘트가, 뒷 부분에는 옥상공연에서의 멘트가 들어가 있다.
5. 참여자
- 존 레논 - 리드 보컬, 배킹 보컬, 리듬 기타, 리드 기타, 랩 스틸 기타, 어쿠스틱 기타, 6현 베이스 기타, 휘파람
- 폴 매카트니 - 리드 보컬, 배킹 보컬, 베이스 기타, 어쿠스틱 기타, 피아노, 하몬드 오르간, 일렉트릭 피아노, 마라카스
- 조지 해리슨 - 리드 보컬, 배킹 보컬, 리드 기타, 리듬 기타, 어쿠스틱 기타, 탐부라, 6현 일렉트릭 기타
- 링고 스타 - 드럼, 퍼커션
- 빌리 프레스턴 - 일렉트릭 피아노, 하몬드 오르간
- 조지 마틴 - 셰이커
- 린다 매카트니 - 배킹 보컬
6. Let It Be... Naked
[image]
Let It Be... Naked 문서 참조.
7. 메이킹 과정 영화
Let It Be(영화) 문서 참조.
[1] 녹음 자체는 Abbey Road보다 빨랐는데 필 스펙터와 폴 매카트니의 갈등 때문에 발매가 1년이나 늦어졌다. 그래서 비틀즈의 (사실상)마지막 앨범은 이 앨범이 아니라 Abbey Road이다.[2] 특히 조지의 반발이 심했다. 'Two of Us' 녹음 도중 폴 매카트니가 기타 연주 스타일을 바꿔달라고 주문하자, '밴드의 기타리스트는 나인데, 왜 네가 간섭을 하냐?'며 대놓고 맞받아쳤다.[3] Clayton Hickman이 네거티브 필름을 복원했다 #[4] 역사적 명소에서 무관객 공연을 펼친다는 최초의 아이디어는 훗날 핑크 플로이드에 의해 Echoes를 폼페이에서 선보이며 실현된다.#[5] 아직 Abbey Road는 녹음 조차도 안 들어간 시기[6] 애당초 발매 예정이던 "Get Back"의 프로듀서는 글린 존스(Glyn Johns)였다.[7] 필 스펙터가 얼마나 의욕이 과했는지 오케스트라가 연주 거부를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고, 링고 스타도 필 스펙터 보고 진정하라고까지 했다.[8] 밴드 멤버들에게 탈퇴 의사를 먼저 밝힌 쪽은 존이었으나, 앨범과 영화 홍보에 차질이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폴 매카트니와 앨런 클라인이 공식 발표는 자제할 것을 설득하였다. 어찌 보면 공식적 탈퇴 발표 선방(...)을 빼앗긴 셈이라 존 레논은 폴 매카트니의 인터뷰에 상당히 분개했다.[9] 이 버전은 Past Masters에도 실렸다.[10] 원곡이 8분 40초, The Jam은 15분 5초.[11] 발매 취소된 Get Back에서는 4분 20초.[12] 당시 폴 매카트니는 자신이 작곡한대로 연주하기를 요구했고 조지 해리슨은 자신도 엄연한 기타리스트이니 자신이 연주할 부분은 직접 편곡하여 연주하겠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