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판 베토벤/생애
1. 개요
베토벤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
베토벤은 음악뿐만 아니라 생애 자체도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대상이자 연구대상이다. 베토벤의 사후 그의 생애를 다룬 평전과 논문이 엄청나게 많이 출판되었으며 이런 베토벤 연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로맹 롤랑처럼 아예 그의 일생을 모티브로 대하소설[1] 로 승화시킨 작가까지 있을 정도이며 당연히 그를 직접 다루거나 연관된 영화나 소설도 많다. 이처럼 그의 삶이 많은 관심을 받는 것은 단지 위대한 음악가라는 이유뿐만 아니라 다이나믹하고 극적인 측면을 많이 가지고 있는 그의 인생 자체가 세인들에게는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베토벤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가다보니 베토벤이 태어나기 수백년 전에 살았던 그의 조상들과 그의 형제 및 일찍 죽은 누이들(베토벤의 부친 항목 참조), 후손들, 그의 지인들까지 모조리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가 잠시라도 머물렀던 곳은 거의 모두 기념관/박물관 등의 관광명소가 되어 있다.[2] 또한 그가 생전에 남겼던 유품이나 악보, 편지, 노트 등은 경매장에서 높은 관심속에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보통 그의 생애를 본인의 음악양식과 결부지어 초기/중기/후기(또는 1기/2기/3기)로 분류하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다.
- 전기 - 그의 본 시절부터 모차르트, 하이든의 영향이 다소 느껴지는 빈 전기 시기까지.
- 중기 - 두 선배작곡가의 영향을 벗어나 본격적인 독창적 작법을 수립했던 1810년대 후반기까지.[3]
- 후기 - 청력을 완전히 잃은 후 작법상의 독자성을 넘어 자신만의 명상적이고 심원한 음악세계를 구축했던 생애 마지막 시기.
1.1. 전기
1770년 12월 17일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다.[4] 할아버지 루트비히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독일로 이주하여 본 궁정의 악장을 지냈다. 아버지인 요한도 자신의 아버지를 따라 음악의 길을 걸어서 궁정 가수가 되었지만 잦은 폭음으로 결국 목소리가 상해 버렸다. 요한은 심한 알코올중독자였으며 심지어 베토벤이 연주회 등에서 벌어온 돈도 술값으로 탕진했을 정도. 술버릇도 고약해서 평이 그리 좋지 않았다. 반면 할아버지는 건실한 사람이었으며 어린 손자 베토벤을 귀여워해줬지만 베토벤이 4살때인 1774년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요한은 어린 베토벤의 재능을 알아챈 후 레오폴트 모차르트처럼 아들을 이용해 돈과 명성을 얻을 속셈으로 어린 베토벤에게 가혹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피아노를 연습시킨 것으로도 악명이 높다. 다만 실제로 요한이 베토벤을 혹독하게 가르쳤는지 여부는 현재 논란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래 베토벤의 부친 항목 참조.
다만 어떻게 음악을 가르쳤는지 여부와는 별도로 요한이 자기 아들을 모차르트처럼 천재로 포장해서 한몫 벌어보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아들을 팔아 유명세를 타는 것을 부러워했던 요한은 자기 아들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처럼 신동으로 만들어 돈을 벌려고 했다. 1778년 3월 베토벤의 첫 대중 공연회 포스터에서 요한은 아들이 6살이라고 주장했는데 당시 루트비히의 실제 나이는 8살(정확하게는 7살 3개월)이었다. 이렇게 아들을 천재로 만들어보려고 나이를 2살이나 줄이기까지 했지만[5] 당시 베토벤은 대중들에게 모차르트만큼 강한 임팩트를 주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신동으로 부각되지는 못했다.
그래도 재능은 인정받아서 11살 때 평생의 은인이 된 궁정음악가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를 만나 본격적으로 음악의 기초를 배웠고 교회 오르가니스트를 맡고 있던 네페를 따라 무급 오르간 보조주자로 일하게 된다. 그가 13살 경에 처음으로 출판한 작품인 드레슬러 행진곡에 의한 9개의 변주곡(WoO 63)에는 네페의 영향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후 베토벤은 1784년에 본 궁정의 정식 교회 오르가니스트가 되었고 1789년에는 궁정 교향악단에서 비올라 주자 겸 부지휘자가 되었는데, 그는 이 교향악단에서 모차르트의 새 오페라 작품을 비롯하여 당시 궁정에서 연주하던 다양한 오페라를 접하면서 자신의 음악세계를 넓힐 수 있었다.
1786년에는 친구이자 당시 의대생이었던 프란츠 베겔러의 소개로 귀족가문인 브로우닝 집안(von Breuning)과 인연을 맺었고 이 집안 아이들의 피아노 선생이 되었다. 브로우닝 집안의 소개로 베토벤은 수준있는 여러 사람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고 이들은 그에게 많은 중요한 도움을 주었는데, 특히 이 중에는 그의 평생 친구이자 후원자가 되었던 페르디난트 폰 발트슈타인 백작도 있었다.[6][7]
1787년에는 본의 대주교(이자 선제후)인 막시밀리안 프란츠의 후원으로 당시 유럽 음악의 중심지인 빈으로 여행을 갈 수 있었다. 이때 평소 존경하던 모차르트도 만났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최근에는 모짜르트와 베토벤이 만난적이 없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모차르트가 베토벤을 만나 그의 천재성에 감탄했다는 일화는 모차르트의 전기작가인 오토 얀(Otto Jhan)의 일방적인 주장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1787년 당시 모차르트는 오페라 "돈 조반니"의 작곡에 전념하고 있어서 관계자 외에는 거의 사람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무명의 음악가 베토벤을 굳이 만나 주었을지는 의문. 게다가 1787년 베토벤의 1차 빈 여행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에 현재는 두 사람의 만남을 부정하는 견해가 우세하다.[8] 그리고 그 해, 어머니가 41세로 세상을 떠났다.[9]
1789년에는 알코올중독으로 생활력을 상실한 아버지 대신 가장의 지위를 얻어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 아버지가 받는 월급의 반을 받아 가족의 수입으로 삼았다.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가장이 된 루트비히였지만 당시 음악의 본고장 빈에서 음악가로서 성공하고 싶다는 꿈을 포기하지 못했던 그는 1792년 고향의 귀족들과 절친들의 도움으로 막시밀리안 선제후에게 일정기간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이 후원금으로 부친의 장례식을 치른 직후에 꿈에도 그리던 빈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또 빈에서 저명한 음악가인 하이든에게 배울 수 있도록 주선도 받았다.[10]
빈에서 베토벤은 계획한 대로 요제프 하이든의 문하에 들어가서 가르침을 받았지만 베토벤은 하이든의 지도방식에 불만을 가졌으며 하이든은 하이든대로 이전 스승 밑에서 했던 숙제를 똑같이 제출했다가 들키는 등의 뻘짓을 한 베토벤을 되먹지 못한 녀석으로 취급했다고 한다. 구체적인 베토벤과 하이든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래에 따로 항목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그는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의 잔치나 모임에서 연주를 하면서 생계를 꾸려갔는데 그의 뛰어난 즉흥연주능력은 귀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선제후의 장학금 지급기간이 끝났지만 곧 리히노프스키 공작과 같은 든든한 후원자도 얻었기 때문에 생계에 곤란함을 느끼지 않았다. 1795년에는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2번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등의 레파토리로 정식 공연에 데뷔한 후 본격적으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후원으로 프라하, 드레스덴, 베를린으로 연주여행을 하면서 유럽 각지에도 점차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11] 1800년에는 1번 교향곡과 6곡의 현악 4중주곡을 발표해서 성공을 거두면서 피아니스트뿐만 아니라 작곡가로서도 인정을 받았다.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아직 모차르트와 하이든이라는 선배 대작곡가들의 영향하에 있었으나 이미 중기 이후의 그의 빛나는 음악적 성과의 서광도 충분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베토벤은 이때부터 귀가 점점 들리지 않게 되는, 음악가로선 치명적이라 할 만한 문제[12] 를 안게 된다.
베토벤은 이 귓병 때문에 유서를 쓸 정도로 고통스러워 했다. 그럴 만도 한 게 음악가에게 청각장애라는 질병은 사실상 사형선고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친구들 기록을 보면 표정이 너무나도 어두워졌고 말수가 적어졌으며 사람 만나기를 꺼리며 엄청나게 괴로워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하일리겐슈타트로 가서 쓴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는 베토벤 사후에 발견되었으나 유서를 썼다고는 해도 자살을 기도하지는 않은 듯하다.[13] 그러나 유서를 쓴 후 자신에게 주어진 음악적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고 새롭게 결의한 베토벤은 그 후로 걸작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1802년에는 2번 교향곡을, 이듬해에는 오라토리오 "감람산의 예수 그리스도"를 작곡했다. "감람산의 예수 그리스도"에서는 사망을 눈앞에 두고 고뇌하는 예수의 모습이 귀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고뇌하던 베토벤의 절절한 모습과 묘하게 중첩되어 있다.[14]
1.2. 중기
에로이카 변주곡(op. 35)과 2번 교향곡(op. 36) 이후 베토벤은 선배작곡가의 그늘에서 본격적으로 벗어나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1804년은 베토벤의 음악인생에서 매우 기념비적인 해인데, 바로 자신의 3대 교향곡 중 첫 번째 작품인 3번 교향곡 "영웅"과 피아노 소나타 분야의 한 획을 그은 발트슈타인 소나타(Waldstein Sonata, op. 53) 가 작곡된 것이다. 이 영웅 교향곡에서 베토벤은 앞선 두 교향곡에 남아있던 요제프 하이든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자신만의 음악세계 구축에 성공했다. 기존 교향곡 작곡가들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장대한 전개부를 가진 1악장과 장송 행진곡을 도입한 2악장은 당대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실험이었으며 이 실험은 음악사에서 역대급으로 불릴만한 성취를 거두었다. 원래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고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을 달았다가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자 격분한 베토벤이 "보나파르트"라고 적은 표지를 갈갈이 찢고 "에로이카"(영웅)로 고쳤다[15] 는 이야기가 있다.
영웅 교향곡부터 약 10년간 베토벤은 절정의 물 오른 창작열을 발산해 많은 걸작을 탄생하게 했다. 영웅교향곡을 작곡한 이듬해인 1805년에는 오페라 "피델리오"를 작곡했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16] 그 후 괴테의 시에 기초한 시극 "에그몬트", 5번 교향곡 "운명", 6번 교향곡 "전원"과 피아노 협주곡 4번과 제5번 "황제", 바이올린 협주곡 등 다양한 작품이 탄생했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음악의 심오함은 공교롭게도 그의 청력 상실과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이 있다. 즉, 베토벤이 청력이 악화된 이후로 사람들과 만나 사교를 즐기는 대신 독서와 사색을 즐겼으며 이것이 그의 음악적 깊이를 갖추는데 큰 구실을 했다는 것. 실제로 베토벤은 당시에 청력상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호메로스, 셰익스피어 등 대문호들의 작품에 빠져 들었고 칸트와 인도 철학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당대의 대시인이었던 괴테나 쉴러의 작품도 열독하였다. 대음악가 답게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승화시킨 것.
베토벤은 이전 작곡가들과는 달리 귀족들에게 후원받았지만 그 귀족들에게 예속되지는 않았고 유럽 각국의 출판사들이 앞다투어 베토벤의 여러 작품의 악보를 인쇄해 판매한 덕에 베토벤은 그럭저럭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베토벤은 소위 ''''불멸의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고 하는데, 이 편지의 주인공인 '불멸의 연인'이 누구인지는 지금도 논란 중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불멸의 연인 문서를 참고.
1815년 이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은 정세가 안정되었다. 정세가 안정되자 빈 청중의 음악상 유행도 바뀌어서 그 전보다 가볍고 경쾌한 음악이 애호되었다. 베토벤의 음악상 스타일은 이런 추세와는 거리가 있었던 탓에 창작 활동이 잠시 주춤하게 되었으나 그의 음악은 더 원숙해지고 깊은 경지로 들어가게 된다.
40대 이후 베토벤은 갈수록 옷차림이나 외모에도 신경을 쓰지 않아, 심지어 거리의 노숙자와 분간되지 않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자제력도 갈수록 상실하여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된 걸 길거리에서 소리를 마구 지르면서 풀거나[17] 종종 집에서 그냥 찬물을 얼굴에 퍼붓곤 바깥으로 나오는 통에 사람들을 멍하게 해 미치광이 취급을 받곤 했다.[18] 한번은 경찰관에 의해 노숙자로 오인받아 체포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자칭 베토벤이라는 노숙자 영감을 미치광이 취급하던 경찰관은 뒤늦게 달려온 경찰서장이 그 사람이 진짜 베토벤이라고 확인하자 데꿀멍했고 베토벤은 경찰서장에게 이렇게 훈계했다고 한다. '''"베토벤도 못 알아보는 녀석들더러 도둑은 어떻게 알아보라고 거기 세워 놓았소?"'''
한편 베토벤은 작곡가·음악가를 대상으로 한 저작권에 대해 신경 썼던 선구자였으며 당시 작곡가들이 귀족들의 후원금으로 생활하는 방식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19] 제 아무리 귀족들이 돈을 많이 줘도 자신의 음악작업에 간섭하면 가차없이 쓴소리를 퍼부었고 부모를 잘 만난 덕에 호의호식하는 왕족이나 귀족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신분해방을 주창했던 프랑스 혁명을 동경했으며 프랑스 혁명의 전파자로 숭배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가 되자 그 배신감으로 나폴레옹을 기리기 위해 작곡한 "영웅 교향곡(No.3))의 표지를 찢어버리기도 했다. 이후 베토벤은 나폴레옹의 친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빅토리아 전투에서 영국의 웰링턴 공작에게 패배하자, 베토벤은 웰링턴의 전공을 축하하는 "웰링턴의 승리"라는 곡을 만들 정도로 나폴레옹을 증오하였다.[20]
베토벤의 저런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굉장히 유명한 일화가 바로 1812년 당시 작가로서 유럽에서 세계에서 가장 알아주던 괴테와 만난 이야기이리라.[21] 베토벤은 평소 괴테의 글을 좋아했고 괴테도 베토벤의 명성을 잘 알던 터라 둘은 무려 21살 차이에도 즐겁게 대화했지만… 얼마 뒤 거리에서 오스트리아 황족 일행 혹은 어떤 귀족이 나타나자 괴테는 모자를 벗고 물러서서 고개를 숙였는데 베토벤은 '''모자를 쓴 채로 고개를 뻣뻣이 들고'''[22] "황족이 뭐 잘났어?" 라는 투로 황족 일행 사이를 거리낌없이 지나갔다. 괴테가 나중에 그에 대해 뭐라고 지적하자 실망한 듯이 "당신과 나는 안 맞나 보군요…"라고 말한 후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베토벤 연구가 알렉산더 윌록 세이어에 의하면. 괴테도 나중에 그 일화를 회고하면서 베토벤과 자신은 맞지 않는다고 지인들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즉, 위 일화는 '''사실에 가깝다.'''[23] 괴테는 생전 "귀족들은 주어진 유산들로 인해 현실에 안주하지만,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은 자는 노력하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잠재성을 발현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당시 유럽사회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공화정과 인간 평등 사상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괴테가 이러한 귀족과 비 귀족의 차이를 분명하게 언급했다는 점에서, 은연 중 귀족의 신분에 대해 열망했던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귀족의 특권의식에 크게 반발했던 베토벤은 이러한 점에서 괴테와 자신이 맞지않다 말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애니메이션 감독이면서 클래식 매니아로서 책도 여럿 쓴 신동헌 감독에 의하면 돈에 유달리 매달리던 음악가로 단연 베토벤을 꼽았지만 베토벤이 돈에 매인 수전노는 결코 아니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알코올 의존증으로 죽어가면서 집안을 맡을 당시 가난에 시달리던 시절도 있었고 귀가 들리지 않으면서 모처럼 안정되던 음악단 지휘자도 그만 두었고 막강한 후원자였던 리히노프스키 공작과도 결별하면서 생활고를 겪었기 때문에 저작권을 지키는데 힘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돈에 관련된 일화로, 유서를 쓴 곳으로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안정을 취할 당시 그 지역 작은 시골 악단이 베토벤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지역을 상징하는 음악을 하나 만들고 싶은데 그 유명한 베토벤 선생이 오신 걸 듣고 찾아왔다는 것. 다만 워낙에 시골이고 본격 연주보다는 마을 사람들과 농부들의 여흥을 위해 연주하는 수준인지라 작곡료로 줄 돈이 조금밖에 없었다. 하지만 베토벤은 이런 작은 마을에 음악단이 있다는 것 자체부터가 대단하다면서 내 어찌 이런 요청을 거부하겠느냐고 헐값에 작곡을 해줬다는 일화가 있다. 이처럼 그는 태생적으로 돈에 얽매인 사람이 아니었다. 참고로 이 때 베토벤이 작곡한 곡은 묻혔지만 하일리겐슈타트 지역 악단에게는 대음악가가 작곡한 곡으로 길이 남았고 그 악보와 관련 기록은 하일리겐슈타트에 있는 베토벤 관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반면 베토벤은 작곡이나 연주를 의뢰하는 귀족들에겐 거액을 불렀다. 그것조차도 많이 준다고 거들먹거리는 귀족들을 보며 코웃음치기 일쑤였다.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베토벤이 개무시하자 감히 후작인 나를 우습게 보느냐며 화를 낸 어느 귀족에게 차가운 눈으로 한 마디 던졌던 적도 있다. '''"세상에는 당신 같은 후작은 얼마든지 있으나 베토벤은 이 세상에 나 하나뿐이오."''' 그리고 그 귀족을 무시하고 바깥으로 그냥 나가버렸다.
이렇게 귀족들을 디스한 에피소드로 유명한 베토벤이지만 실제 베토벤의 귀족들에 대한 태도는 이중적인 측면이 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을 루트비히 '''폰'''(von) 베토벤으로 불렀는데[24] 그는 이런 칭호를 굳이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1.3. 말년의 베토벤
말년으로 갈수록 베토벤의 생활은 점점 피폐해졌는데 가장 큰 원인은 조카 칼의 문제였다. 독신으로 살아가면서 자식이 없던[25] 베토벤은 1815년에 사망한 동생 카스파르 판 베토벤의 아들인 칼 판 베토벤의 친권을 놓고 카스파르의 부인 요안나와 소송전까지 벌인 끝에 어렵게 칼의 친권 획득에 성공하지만 칼을 제대로 양육하지 않아 죽을 때까지 칼과 갈등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고.
한편 사생활과 별도로 그의 음악은 점점 깊고 심원해졌으며 대위법적인 성향이 강해지게 된다. 여태까지 보기 힘들었던 복잡한 구조와 큰 규모를 가진 대작들이 잇따라 창작되었다.[26] 이 시기 그의 후기 교향악을 대표하는 "장엄미사(Missa Solemness)"와 9번 교향곡 "합창"이 작곡되었으며 피아노 분야에서도 소나타 29~32번, 디아벨리 변주곡과 같은 큰 규모의 작품들이 작곡되었다. 이들은 각 음악장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걸작들이다.
합창 교향곡의 초연은 1824년 5월 7일 빈에서 있었다. 그런데 당시 관객들은 '''두개의 포디움과 두명의 지휘자'''라는 괴상한 무대를 보아야 했는데, 이는 합창 교향곡의 지휘를 반드시 직접 해야겠다는 베토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서였다. 난감해진 극장 측은 결국 빌헬름 움라우프를 보조 지휘자로 무대에 올렸고, 악단원들은 두 명의 지휘를 동시에 보며 연주해 나갔다고 한다. 마지막 4악장까지 끝난 후 베토벤은 청중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해 우두커니 서 있었고, 알토 가수 웅거가 베토벤를 부축해 돌려세워서 청중의 엄청난 환호를 보게 하자 비로소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웅거는 고음 파트가 너무 어려워 베토벤에게 수정을 요청했다가 눈물 쏙 빠지게 혼이 났던 적이 있는 가수였다.
생애 막판에는 교향곡보다 더 위대한 음악으로 찬사받으며 베토벤판 백조의 노래라고 할 수 있는 후기 현악 4중주곡이 대거 작곡되었다. 많은 사람은 이 후기 현악 4중주곡을 "현악 4중주의 성서", "인류가 도달한 가장 위대한 음악의 경지"라고 부르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더불어 이 시기엔 돈도 제법 벌었다. 한 번 연주로 엄청난 거액을 받은 것도 이 시절 일이지만 이 와중에도 몸 속에 파고드는 고통 때문인지 베토벤은 종교에 대하여 매우 탐탁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일기장에 교회에 가서 헛소리로 울며불며 기도하느니 작곡하면서 남은 시간을 지내겠다고 쓴 걸 보면,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면서도 음악이라는 이름으로 그걸 극복하려 한 모양.
당시 빈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작곡가 조아키노 로시니가 말년의 베토벤이 기거하던 하숙집에서 그를 만났는데, 베토벤은 세빌리아의 이발사같은 좋은 곡을 많이 작곡하라는 덕담을 했다.[27] 후에 로시니는 자기처럼 별볼일 없는 작곡가는 가슴에 훈장을 달고 유복한 생활을 하는데 이 위대한 음악가는 어떻게 저렇게 궁핍할 수 있느냐며 가슴 아파했다. 또 후에 로시니는 베토벤을 위해 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실제로 후원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은 없다.[28]
베토벤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많은 작품을 구상했을 만큼 음악에 열중했다. 영국 필하모니아 협회가 청탁한 교향곡을 일부 작곡하던 중이었고[29] 이 밖에도 레퀴엠과 괴테의 파우스트의 오페라화도 구상되던 중이었다고 하나 모든 구상은 베토벤의 사망으로 결국 구상으로만 남고 말았다. 제자이던 모셀레스의 증언에 의하면 죽기 며칠 전까지도 음악을 구상했다고 한다. 심지어 배에 물이 차오르면서 혼수 상태가 되는 와중에도, 정신이 돌아오면 쓴웃음을 지으며 "괜찮아… 머리에 물이 차서 아무것도 생각지 못하는 것보단 낫지……"라고 애써 담담히 말했었다고 한다… 당시 베토벤은 이름이 알려졌고 경제적으로 부족할 게 없던터라 빈에서 내로라하는 유명한 의사가 진단하고 배에서 물을 4번이나 뽑아내며[30] 당시 첨단 치료를 받았음에도 몸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죽음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서 슈베르트가 베토벤을 방문했다. 슈베르트는 베토벤과 2km도 안되는 거리에 살고 있었지만 소심한 성격 때문에 이 대작곡가를 만날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지인들의 주선으로 죽기 직전에야 어렵게 만나게 된 것이다. 베토벤은 슈베르트로부터 받은 악보를 보고 크게 감탄했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슈베르트에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으라고 했는데,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쇠약해진 모습을 보고 괴로운 나머지 방을 뛰쳐 나가서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31]"슈베르트 자네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자네는 분명 세상을 빛낼 훌륭한 음악가가 될 것이네. 부디 용기를 잃지 말게."
1827년 3월 24일 베토벤은 병자성사를 받고 혼수상태에 빠졌으며 26일 친구, 지인, 제자, 비서 앞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유언은 '''"유감인 걸, 너무 늦었어.(Schade, zu spät.)"'''이다. 이것은 임종을 지킨 안젤름 휘텐브렌너의 증언이다. 죽기 전에 쇼트 음악출판사의 출판업자에게서 베토벤이 즐겨 마시던 라인 와인 12병이 선물로 수송선에 실렸다는 소식을 전해주자 품 안에 있던 베토벤이 허공을 향해 주먹을 쥐고 탄식하며 한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을 끝으로 베토벤은 혼수상태에 빠졌고, 결국 와인은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도착했다. 휘텐브렌너는 베토벤이 '박수를 치시게, 여러분, 희곡은 끝났다오(Plaudite, amici, comedia finita est)'는 말은 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이게 좀 더 간지나는지 자주 인용되기는 하지만.
29일에 빈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는데 무려 2만 명이나 되는 시민이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전한다. 베토벤의 운구하는데 여러 음악가가 선발돼 참여했는데 그중에는 프란츠 슈베르트도 있었다. 슈베르트의 친구들이 쓴 기록을 보면 슈베르트는 그날 그야말로 종일 울면서 말도 못할 정도로 슬퍼했다고 한다.[32] 동생 요한은 베토벤이 죽기전에 그를 불러서 사과하자 이를 받아들여 형을 용서하여 화해했으나, 군중들에게 맞아죽을까 두려워서 나타나지 못했다. 조카 칼은 삼촌의 부고소식을 듣고 급히 빈으로 출발했으나 당시의 교통사정 때문에 베토벤의 장례식이 3일 지난 후에야 빈에 도착한다.[33]
여튼 유서에 의하여 베토벤의 그렇게 많지 않은 재산이 칼에게 상속되었다. 자세한 것은 조카 칼 문서 참조.
[1] 로맹 롤랑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대하소설 "장 크리스토프"[2] 베토벤 덕분에 어린시절 그의 스승이었던 크리스티안 고틀로브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 1748-1798)의 음악도 발굴되어 종종 연주되고 있다. 네페의 피아노 소나타 A장조 물론 음악적인 가치보다는 주로 베토벤 연구를 위해 발굴되고 있는 상황.[3] 특히 이 시기는 폭발적인 창작열과 격정적인 음악 스타일 때문에 영웅시기(Heroic Age)라고 부르기도 한다.[4] 정확한 생일은 기록이 없지만, 유아 세례를 1770년 12월 17일에 받은 기록이 있으므로 그 시기에 태어난 것으로 흔히 추정된다. 하지만 당시 관례가 태어난 다음날 세례를 받는 경우가 많아서 세례 전날인 12월 16일을 생일로 보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5] 이 덕분에 베토벤은 한동안 자기 나이를 실제보다 2살 적은 것으로 잘못 생각했다.[6] 보너스로 브로우닝가의 장녀랑 연애도 했다. 자세한 것은 베토벤의 여인들 문서 참조.[7] 발트슈타인 백작은 본래 빈 출신으로 소년 베토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으며 베토벤이 빈으로 진출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유명한 발트슈타인 소나타(Op. 53)는 바로 이 발트슈타인 백작에게 헌정된 작품이다.[8] 베토벤은 훗날 지인과의 대화에서 모차르트의 피아노 연주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표한 바가 있다. 일생 모차르트를 경애했던 베토벤이지만 피아노 연주자로서 레가토 방식을 중시했던 그이기에 짧고 명료하게 끊어치는 모차르트와는 지향점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베토벤이 최소한 모차르트의 연주 모습을 지켜봤다는 뜻이므로 청강생 자격으로 몇 번 수업을 들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9] 하필 이 해에는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1719~1787)도 사망했다.[10] 이 장학금은 일종의 유학비로서 일정기간 후 본으로 돌아온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베토벤은 일단 빈으로 떠난 후 다시는 본으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다행히 대인배이자 계몽군주였던 막시밀리안 선제후는 베토벤의 성공을 바라면서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11] 이 음악여행에는 리히노스프키 공작도 같이 동행했다. 리히노프스키 공작은 모짜르트 생전의 연주여행에도 동행한 적이 있다.[12] 베토벤은 이걸 철저하게 숨겼기에 이 질병을 다룬 기록이 없지만, 1799년과 1800년 몇몇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처음 느낀 건 20대 중반에서 후반인 1796년에서 1798년쯤부터 귀울림이 들리더니만 차츰 귀가 들리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를 진료한 의사는 찬 바람에 몸을 노출시키며 무리한 산책을 한 것이 원인이라고 추정했다고. 친구들을 믿고 이야기하니 절대로 비밀을 지켜달라고 신신당부했으며 영원히는 아니라도 내가 살아 있을 때만이라도 비밀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나중에 베토벤이 소리가 아예 안 들리면서 굳이 비밀을 지킬 필요도 없었지만 친구들은 이 약속을 묵묵하게 지켜 줘서 베토벤이 죽고서야 그 편지들을 공개했다.[13] 참고로 당시 지내던 하일리겐슈타트에 있던 집도 현재까지 하일리겐슈타트 베토벤 박물관으로 남아 그의 유품과 당시 쓰던 물건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다.[14] 이 '감람산의 예수 그리스도'는 작곡과 초연은 1803년에 이루어졌지만 악보 출판은 8년 후인 1811년에 초고를 많이 수정한 형태로 이루어졌다.[15] 부제 격으로 붙은 글이 "이 곡은 한 사람의 영웅을 대상으로 한 추억을 기리고자 쓰여졌습니다"...[16] 흥행실패는 이 오페라의 작품성과는 무관하게 창작에서 공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17] 알렉산더 윌록 세이어의 베토벤 연구 기록을 보면, 당시 빈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헝클어진 머리와 매서운 눈매를 한 사람이 홀로 마구 소리를 지르면 "아... 베토벤이구나!"라면서 아무렇지 않게 여기기도 했다고 썼다![18] 독일의 유명한 작곡가 카를 프리드리히 첼터도 자신의 친구 괴테한테 보내는 편지에서 베토벤을 미치광이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을 정도다.[19] 유력자의 후원을 받지 않고 자수성가를 시도한 작곡가의 시초는 바로 모차르트. 다만 이 분은 경제관념이 없어서 번 돈을 잘 간수하지 못하고 모조리 날려먹었다.[20] 웰링턴은 이 곡을 듣고는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대작곡가가 자기 이름이 붙은 곡을 썼으니 당연히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곡 자체도 특이하게 드럼과 큰북으로 전장의 머스킷과 대포의 사격음을 재현했는데 의외로 잘 구현된 편이니 한 번 쯤 들어볼 법 하다.[21] 괴테도 침략자 격이었던 나폴레옹에게서 시대정신을 발견했다고 썼으나 나폴레옹이 황제로서 즉위한 후 돌아섰다.[22] 심지어 상대가 인사했는데도 손가락을 턱에 대면서 대충 예의를 표했다고도 한다.[23] 이 일화는 말을 옮긴 사람에 따라서 조금씩 뉘앙스가 다른데 괴테가 머리를 숙인 모습을 보고 베토벤이 괴테도 속물이라고 비웃는 식으로 말을 옮기고 다녀 괴테가 불쾌하게 생각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괴테가 황족에게 예를 표하려고 할 때 베토벤이 '황족은 세상에 수백 명이 있는데 괴테와 베토벤은 단 둘밖에 없으니 저쪽이 비키도록 놔두라'고 했다는 버전도 있다.[24] von은 독일에서 귀족 계급에게만 붙이는 칭호다. van은 독일어의 von과 의미가 유사하기는 하지만 네덜란드어에서는 귀족에게 붙이는 칭호가 아니라 from이나 of 정도 의미의, 그냥 출신을 나타내는 칭호일 뿐이다. Beethoven이 Beet(사탕무)+hoven(밭)이라는 뜻이므로 풀이하자면 그의 이름은 '사탕무 밭에서 온 루트비히'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독일어를 썼던 몇몇 귀족들은 von=van으로 알고 베토벤을 귀족 취급하기도 했다고 한다.[25] 정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자세한 것은 아래 '베토벤이 남긴 화제' 문단을 참고.[26] 물론 큰 규모의 작품만 썼던 것은 아니고 피아노 소품이나 가곡집, 관현악을 위한 서곡 등의 작품도 썼다. 아도르노는 베토벤 후기 작품들을 말년의 양식이라고 부르며 그의 음악 분석에서 심도있게 다루었다.[27] 엄밀하게 말하면 그냥 덕담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가시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로시니 문서에 나와 있다. 한편 베토벤은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인기 때문에 자신의 연주회는 흥행에 실패한 사례가 있었는데, 로시니의 작품이 훌륭해서 인기를 얻는 것이라며 순순히 인정했다.[28] 아마 로시니는 후줄근한 옷차림에 하숙집에 얹혀 사는 베토벤을 보고 측은함을 느꼈을텐데, 사실 이때 베토벤은 돈이 없어서 가난했던게 아니라 그냥 돈 쓰거나 꾸미는데 관심이 없어서 가난하게 보였을 뿐이다. 그는 생애 후반기에 작곡료와 이런저런 후원으로 나름 큰 돈을 벌었으며, 덕분에 베토벤 재산의 상속자인 조카 칼은 한동안 운신하기 충분한 재산을 물려받았다.[29] 이 일부의 스케치가 지금도 남아 10번 교향곡으로 추정된다.[30] 당시에는 이런 시술법이 굉장히 위험하며 값이 꽤 비쌌다.[31] 그런데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해 '''다음해'''에 슈베르트도 마치 베토벤을 따라가듯이 매독 혹은 식중독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베토벤의 곁에 매장된다. 슈베르트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그는 유언까지 베토벤을 언급할 정도로 엄청나게 존경했다.[32] 또 베토벤의 시신부검을 하면서 시신을 해부할때 슈베르트가 옆에서 지켜보기도 했다.[33] 생전에는 삼촌한테 시달려서 애증의 관계였지만 그래도 칼은 삼촌의 묘지에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