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판 베토벤/인간관계

 



1. 개요
2. 목록
2.1. 부모 요한과 마리아
2.2. 동생들
2.2.1. 첫째 동생 카스파
2.2.2. 둘째 동생 요한
2.3. 조카 카를 판 베토벤
2.4. 스승 크리스티안 고틀롭 네페
2.5. 스승 하이든
2.6. 첫 번째 후원자 리히노프스키 공작
2.7. 두 번째 후원자 루돌프 대공
2.9. 제자들
2.10. 말년의 비서 안톤 쉰들러


1. 개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인간 관계를 정리한 문서.

2. 목록



2.1. 부모 요한과 마리아


[image]
베토벤의 아버지 요한 판 베토벤과 어머니 마리아 판 베토벤
요한 판 베토벤(Johann van Beethoven, 1739 또는 1740~1792)은 위대한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아버지라는 엄청난 명예를 갖고 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영 좋지 않다. 현재에도 베토벤의 아버지라고 하면 바로 '주정뱅이에다 무능하고 폭력적인 가장'의 이미지가 떠오를 정도. 최소한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으며 후술하는 것처럼 주정뱅이에다 폭력적이었다는 평가도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요한은 현재 벨기에 영토에 있는 메켈렌(Mechelen) 태생으로 어릴 때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으며 특히 뛰어난 노래솜씨를 갖고 있어서 성악가로 유명세를 탔다. 이런 재능은 자신의 아버지(즉 베토벤의 할아버지)으로부터 그대로 물려받은 것인데, 아버지 루트비히 판 베토벤(맏손자와 이름이 똑같다.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역시 뛰어난 성악가였으며 콜로뉴의 대주교이자 선제후(Archbishop of Cologne) 왕실의 각광받는 궁정악장(Kapellmeister)이었다. 바로 이 콜로뉴 선제후의 왕궁이 본(Bonn)에 있었기 때문에 베토벤 가문은 대를 이어 본에 살게 된다. 요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21살의 어린 나이에 본 왕궁의 궁정악장이 되었다.
이처럼 요한은 촉망받는 성악가이자 음악가였으나 술과 모난 성격 때문에 그의 인생에 먹구름이 끼게 된다. 그는 결혼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아버지(베토벤의 할아버지)가 1774년에 사망한 후에는 알코올 의존증이 더 심해졌고, 결국 술 때문에 건강이 나빠져 목을 망쳐서 40살경 부터는 가수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게다가 술버릇도 고약해서 자주 사람들과 싸우면서 사고를 쳤기 때문에 인간관계 측면에서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술을 먹고 자주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당연히 아내랑 자식들과도 사이가 굉장히 좋지 못했다. 특히 그가 맏아들 루트비히에게 학대 수준으로 음악을 가르치려 했던 것은 유명하다. 당시 유럽에서는 신동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이 큰 이슈가 되고 있었는데, 요한은 루트비히가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아들을 모차르트처럼 신동으로 포장해서 돈과 명성을 얻을 속셈으로 루트비히를 그야말로 완전 쥐잡듯이 엄격하고 가혹하게 피아노를 연습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 받은 충격 때문에 베토벤이 괴팍하고 비뚤어진 성격을 갖게 되었다는 분석이 있을 정도.
하지만 요한이 아들에게 강압적으로 피아노연습을 시킨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이런 주장들은 모두 소문에 의존한 것들로서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이미 5살경부터 오르간 주자이자 아버지의 친구였던 토비아스 파이퍼(Tobias Friedrich Pfeiffer)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친척으로부터는 현악기 다루는 법을 배우는 등 일찌감치 여러 사람에게 음악을 배웠다. 또 당시에 아이들과 자주 어울려 놀면서 골목대장 노릇도 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1] 아버지의 강압적인 교육 이야기는 완전 거짓말은 아닐지라도 상당히 과장된 측면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음악을 어떻게 가르쳤건 그가 아들의 재능을 이용해서 돈벌이를 시도했던 것은 사실이다(생애 부분 참조).
사실 요한이 술만 마시고 자식을 팔아서 돈벌이나 하려는 비루한 속물이라는 평가는 지나친 측면이 있다. 그는 놀랍게도 죽을 때까지 본의 궁정악장직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선제후가 그를 해고하지 않은 것을 보면 비록 술을 많이 마시고 술버릇으로 사람들과 다투어서 문제가 많았지만 정상적으로 직업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부인이 사망하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집안에 월급을 가져다 주었고 그 덕분에 베토벤 가족은 풍족하지는 못해도 크게 쪼들리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즉, 요한은 괴팍한 성격과 술버릇 때문에 종종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제외하면 정상적인 직업인/가장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다만 장남 루트비히가 성장해서 피아노교습/연주회/후원금 등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고 1787년 부인이 사망한 후부터는 이에 대한 충격이 커서 진짜로 집안일을 완전히 팽개치고 술만 퍼마셔 댔다. 그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는 바로 이 말년의 흑역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데, 오죽하면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막시밀리안 프란츠 대주교(이자 선제후)가 '그간 요한이 세금(주세)을 무척 많이 내줘서 참 고마웠는데 아쉽게 됐네.'라고 농담을 했을 정도. 졸지에 소년가장으로 집안을 꾸려나가야 했던 루트비히는 1789년 선제후에게 아버지가 가족을 전혀 돌보지 않고 술값으로 월급을 탕진한다며 요한의 월급 절반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청했고, 이 요청이 받아들여지면서 술값의 일부를 생활비에 보탤 수 있게 되었다.
요한은 맏아들 루트비히가 1792년 청운의 꿈을 품고 빈으로 떠난 직후에 사망한다. 루트비히도 요한의 장례식에 참석은 했으나 삼형제 모두 아버지 때문에 심한 고생을 했기 때문에 별로 슬퍼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베토벤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동생들한테 폭력을 휘둘렀고 조카 칼을 강압적으로 대하여 동생들과 조카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고 결혼도 하지 않으며 생애 말년에는 술에 쩔어 살았다. 아버지를 그토록 미워했지만 결국 본인도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
베토벤의 모친 마리아 막달레나 판 베토벤(결혼 전 이름은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 Maria Magdalena Keverich, 1746–1787)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마리아의 아버지는 트리어의 선제후의 집사이자 요리사로 꽤 유복하게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리아는 자신보다 6살 많은 촉망받는 성악가 요한 판 베토벤이 여행중일 때 처음 만났으며 1767년 그녀의 나이 21살때 그와 결혼했다. 이후 요한과 마리아 부부는 7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 4명은 영아 사망률이 높은 시대라 일찍 죽고 3명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 남았다.
1. 루트비히 마리아 판 베토벤 (Ludwig Maria van Beethoven, 1769년, 며칠만에 사망)
2. 루트비히 판 베토벤('''The Beethoven''')
3. 카스파 판 베토벤(1774 – 1815).
4. 요한 판 베토벤(1776 – 1848).
5. 안나 마리아 판 베토벤(Anna Maria Franziska van Beethoven, 1778, 며칠만에 사망)
6. 프란츠 게오르그 판 베토벤(Franz Georg van Beethoven, 1781, 3살에 사망).
7. 마리아 마가렛 요제파 판 베토벤(Maria Margarete Josepha van Beethoven, 1786, 이듬해 사망)
그녀는 전형적인 현모양처 스타일의 여성으로 남편의 알코올 중독과 가정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이를 참고 묵묵하게 남편과 자식들을 뒷바라지 했기에 베토벤가 3형제의 유일한 안식처이기도 했다. 하지만 1786년 7번째 아이를 출산한 이후에 결핵에 걸려 투병생활을 했으며 결국 이듬해 맏아들 루트비히가 선제후의 배려로 빈 여행을 하는 도중에 사망했다. 이때 베토벤과 형제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으며, 남편 요한도 아내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아 아내와 사별한 이후로는 집안일을 아예 손놓고 술에만 빠져들어 알코올중독이 더 심해진다. 루트비히는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에 대해서는 상당히 애틋한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2.2. 동생들



2.2.1. 첫째 동생 카스파


베토벤의 첫 번째 동생이자 아래 언급할 칼 판 베토벤의 아버지 카스파 판 베토벤(Kaspar van Beethoven, 1774~1815)은 원래 형을 따라 음악가가 되려고 피아노를 배웠다. 형이 빈으로 떠난지 2년 뒤인 1794년에 카스파도 형을 따라 빈에 와서 음악활동을 한다. 베토벤은 카스파가 빈에 정착할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도와주었고 카스파는 피아노 교습으로 돈을 좀 벌었다.
하지만 형만한 재능을 갖지 못했던 카스파는 피아니스트로도 작곡가로도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결국 음악의 길을 접고 1800년 경에 빈 재무국의 직원으로 취직한다. 한편 베토벤은 작곡에 전념하기 위해 카스파를 비서로 삼아서 악보 출판이나 연주회 섭외 등을 맡겼다. 그런데 카스파는 돈 욕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형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형이 출판을 꺼렸던 초기 작품이나 습작을 허락없이 출판사에 팔아먹다가 형과 사이가 벌어졌으며 형이 지정한 출판사를 배제하고 멋대로 다른 출판사에 악보를 팔아먹었다가 들켜서 얻어맞기도 했다.[2]
무엇보다 카스파는 요한처럼 결정적으로 결혼 때문에 형과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버리는데, 1806년 평판이 좋지 않았던 요한나 라이스(Johanna Reiß,1786~1869)라는 여자와 결혼하려고 했던 것이다. 형은 이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으나 문제는 결혼 이야기가 오갈 당시 이미 요한나는 카스파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는 것. 속도위반에 걸려 있던 카스파와 요한나는 루트비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결혼할 수밖에 없었으며 얼마 후에 베토벤의 후반기 인생을 지배한(?) 칼이 태어났다.[3]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요한나의 아버지가 부유한 포도주 제조업자였기 때문에 요한나는 결혼하면서 꽤 많은 지참금부동산을 가져왔으며[4] 카스파는 이 돈과 부동산에서 나오는 임대수입으로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카스파는 1812년 결핵에 걸렸으며 이듬해부터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재무국 일도 그만뒀다.[5] 게다가 아내 요한나의 낭비벽과[6] 카스파 본인의 치료비로 인해 살림은 빚더미에 앉게 되어 치료비와 생활비를 형 루트비히로부터 원조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카스파는 결핵이 악화되어 결국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카스파가 죽기 2년 전에 형 루트비히를 아들 칼의 후견인으로 삼겠다는 문서에 서명했고 죽기 직전에는 삼촌과 친모가 같이 칼을 잘 보살펴달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칼 판 베토벤 항목에 나와 있다시피 이 유언은 오히려 칼을 둘러싼 삼촌과 친모의 처절한 양육권 싸움의 시발점이 되어 버린다.

2.2.2. 둘째 동생 요한


[image]
요한 판 베토벤(1776-1848)
베토벤의 두번째 아우인 요한(본명은 니콜라스 요한 판 베토벤, Nicolas Johann van Beethoven)은 20살 전후에 돈벌이를 찾아 형이 있던 빈으로 왔다. 여기서 제약법을 배워 약국의 조수로 들어간 후 얼마 후 린츠(Lintz)에 있는 약국을 사서 독립했으나 장사가 안돼서 빚만 졌다. 그런데 이 시기에 나폴레옹 전쟁이 발발했고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영국의 철강[7]이 들어오지 못하자 창문틀이나 자기 집에 있던 쇠붙이를 팔아 적자를 메꿨다. 이후 나폴레옹 군대가 주둔하면서 린츠에 부상병동이 세워졌고 그는 이 부상병동에 약을 팔아서 상당히 많은 돈을 벌었다.[8] 그는 이때 번 돈으로 꽤 많은 부동산을 사들였으며 1848년에 74살로 죽을 때까지 약국을 운영하면서 평생 돈 걱정 없이 살았다.
그런데 돈은 벌었지만 그에 걸맞는 교양이나 인성을 갖추지 못한 요한은 적군에게 약을 팔다가 엄청 욕먹은 것을 비롯해서 이래저래 평판이 좋지 않았다. 비뚤어진 얼굴에 음흉한 표정으로 그려진 그의 초상화만 봐도 당시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졸부였는데, 이런 속물적인 태도는 형에게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한때 생활이 어려워진 루트비히가 요한에게 도와 달라고 했더니 요한은 '형도 돈버는 능력 좀 기르세요'라는 식으로 비웃는 투의 거절편지를 쓰면서 편지 말미에는 '땅의 소유자 요한 판 베토벤'이라고 거들먹거리는 칭호까지 붙여서 보냈다. 이를 읽고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루트비히가 보낸 답장은 '네 돈은 필요 없다. 네 충고는 더욱 필요 없다. 두뇌의 소유자 루트비히 판 베토벤.'(...)[9]
무엇보다 카스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요한도 결혼문제로 형과 사이가 더욱 나빠졌다. 요한은 1812년 자신의 하녀였던 테레제 오베르마이어(Therese Obermeyer)와 결혼하려고 했는데, 베토벤은 근본도 없는 천한 여자가 '베토벤'이라는 성을 갖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이 결혼에 결사 반대했다. 물론 요한은 형이 결혼까지 상관하지 말라며 무시했다. 그러자 베토벤은 동생이 결혼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휴양차 머무르고 있었던 테플리츠를 급히 떠나 린츠까지 찾아와 결혼을 뜯어말렸다.[10] 요한의 집에서 둘은 격렬하게 언쟁하다가 급기야는 베토벤이 자신의 말을 듣지않는 요한을 때리는 바람에 주먹싸움까지 벌이게 되었으며 테레제가 신고해 경찰이 출동하여 뜯어말리는 소동까지 빚어졌다. 분을 삭이지 못한 형 베토벤은 결국 경찰에 의해 요한의 집에서 쫓겨나 빈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끝내 요한은 테레제와 결혼을 강행하였고, 이 일로 형제간에는 평생 앙금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카스파 못지 않게 요한도 이 결혼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는데, 요한의 아내 테레제는 아이도 갖지 못했을 뿐만[11] 아니라 성격이 드세서 평생 남편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요한도 아내 테레제를 싫어하였으나 그나마 이혼은 하지 않았다. 이래저래 베토벤가의 3형제들은 모두 행복한 결혼생활과는 인연이 없었던 셈.
게다가 요한은 형과 티격태격하면서도 자신이 대작곡가 베토벤의 아우라는 점을 사업에 자주 써먹었고 가끔 형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형의 악보를 챙겨서 멋대로 처분하는 짓도 저질렀다. 당연히 베토벤과 베토벤의 주변 사람들은 이런 요한의 속물근성을 거세게 비난했으며 그의 평판은 점점 떨어지다 못해 나중에는 베토벤의 제자와 지인들의 분노가 무서워 형의 장례식 참석조차 포기해야 하는 수준까지 내려갔다. 요한이 만약 참석을 강행했다면 진짜 뭇매를 맞았을 지 모를 정도로 당시 분위기가 험악했다.
다만 요한은 평생 형을 싫어하고 으르렁댔으면서도 의절까지는 하지 않았으며 베토벤이 조카 칼의 양육권을 획득한 후에는 종종 요한의 별장에서 칼과 함께 지내기도 했다. 특히 루트비히가 죽기 얼마 전에는 동생 요한과 만나서 오래된 앙금을 털고 화해했다고도 한다. 지인들이 인정을 안해줘서 문제였지.
한편 카스파나 요한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과 루트비히와의 불편한 관계는 베토벤의 자칭 비서였던 쉰들러가 과장/왜곡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쉰들러가 베토벤 일가에게 푸대접 받은 원한으로 조카 칼과 베토벤의 동생들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증언했다는 것. 후술하는 쉰들러라는 인간의 수준을 보면 이게 결코 과언이 아니다.

2.3. 조카 카를 판 베토벤


[image]
카를 판 베토벤[12]
카를 판 베토벤(Karl van Beethoven,1806-58) 베토벤의 인생 후반기에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베토벤은 1815년 자신의 첫째 동생인 카스파 판 베토벤이 결핵으로 41세에 사망하자 카스파의 아들이자 자신의 유일한 조카인 카를에 대한 친권과 양육권을 획득하는데 전력을 다하게 된다. 그 이유는 첫째, 베토벤 본인이 결혼을 하지 않아서 자식이 없었으며 카스파가 죽었을 당시 둘째 동생인 요한마저 자식이 없는 상태였다. 결국 베토벤 가문을 이어갈 유일한 후손은 카스파의 아들 카를 판 베토벤 한 사람밖에 없었던 것. 둘째 이유는 베토벤은 카스파의 아내이자 칼의 엄마였던 요한나 판 베토벤을 거의 창녀 수준으로 멸시했으며 칼이 그녀 밑에서 자라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편지에서 자주 요한나를 사악한 여자로 비난하면서 밤의 여왕(모짜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 나오는 배역을 빗댄)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13]
물론 베토벤의 생각이 다소 극단적이긴 했지만 이게 과언만은 아닌 게, 실제로 요한나는 바람둥이라는 평판이 자자했으며 자기 남편이 살아 있을 때부터 몰래 다른 남자들을 만나고 다녔기 때문에 카를이 카스파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이 파다했을 정도로 평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 요한나는 아들의 양육권을 놓고 법정 다툼을 하는 와중에도 종 주조업자와 눈이 맞아 사생아 딸을 낳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베토벤이 보기엔 당연히 요한나가 베토벤 가문의 유일한 후손을 제대로 키울 능력도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베토벤은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카를을 보호하기 위해 요한나를 상대로 카를의 양육권을 찾는데 주력하게 된다. 당연히 요한나는 반발하였고 결국 베토벤과 요한나는 카를의 양육권을 두고 치열한 소송전을 벌이게 되는데, 베토벤의 카를에 대한 집착은 점점 심해져서 거의 편집증 수준에 이르게 된다.
소송[14]은 카를이 대략 10대 초반일 때부터 시작해서 거의 4년이나 끌었으며 이 때 카를은 어머니의 부정한 행동에 대한 증언을 강요받고 몇 시간씩 법정 관리들의 질문에 대답을 해야 했다. 어린 카를이 얼마나 충격이 컸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결국 어렵게 양육권을 획득한 베토벤은 카를이 어머니 요한나를 만나는 것을 전면금지했다.[15] 그러나 괴팍하고 고집불통이며 신경질적인 삼촌 베토벤은 카를에게 부정한 엄마 이상으로 견디기 힘든 존재였다. 특히 자식을 키워본 적이 없었던 베토벤은 제대로 양육하겠다고 조카를 친모로부터 무작정 뺏어왔지만 막상 제대로 가르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양아들인 카를의 입장에서 본다면 양부 베토벤은 권위주의적이고 툭하면 화를 내는 데다 대화가 아니라 명령으로 자식을 가르치려고 하는 빵점짜리 아빠였다.[16] 이때문에 삼촌의 집착을 견디지 못한 카를은 자주 엄마를 만나러 갔으며, 이에 분노한 베토벤은 경찰을 동원해서 카를을 요한나의 집에서 강제로 데려오기도 했다. 이러니 카를과 요한나와 관계가 평생 좋지못했다.
베토벤은 카를이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장차 자신처럼 뛰어난 음악가가 되길 바랬다. 하지만 카를은 삼촌이 없는 돈을 쪼개서 보낸 사립학교에서 적응을 못하고 번번이 문제를 일으켜 퇴학을 당했으며[17], 음악에 대한 대한 흥미나 재능이 전혀 없었다. 특히 카를은 삼촌이 적성에 맞지 않은 음악을 강요하는 것이 싫었고 이에 대한 부담을 크게 느껴 1824년 빈의 공업전문대학에 떠밀리듯 입학하자마자 자퇴하고 군대를 가겠다고 선언했다. 당연히 베토벤은 결사적으로 반대했고, 두 사람은 2년간 이 문제를 놓고 다투다 점점 격해져서 관계가 파탄나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우울증까지 걸린 카를이 권총 자살을 시도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다행히 총알이 빗나가서 카를은 찰과상 밖에 입지 않았으나[18] 이로 인해 베토벤은 충격을 받았고 카를도 한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이후 잠시 베토벤 곁에서 조용히 지내던 카를은 베토벤의 생애 마지막 해인 1827년 결국 군 입대를 강행하고[19] 보헤미아의 이글라우(Iglau)로 떠나버린다. 이미 중병에 걸려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했던 베토벤은 말릴 힘도 없어 크게 상심하였으며[20] 카를이 떠난 후 약 두달 후에 사망하고 만다.[21] 군대에 있던 카를은 베토벤의 사망 소식을 들은 즉시 빈을 향해 떠났지만 빈과 이글라우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22] 장례식을 치룬지 3일 후에야 빈에 도착했다.
삼촌은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카를 앞으로 남겼고[23] 아직 나이가 어렸던 카를은 앞서 양육권 소송 당시 자기 엄마(요한나)의 변호인이자 그녀의 친척이었던 야콥 호셰바(Jakob Hotschevar)가 그의 후견인이 되었다. 다행히 호셰바는 신사적인 사람으로 카를과 카를의 재산을 잘 돌봐줬다고 한다.
이후 카를 판 베토벤은 5년간 군대에 있다가 제대 직후 어머니 요한나와 같이 살다가 카롤리네 나스케(Caroline Naske)라는 여인과 결혼하였다. 둘은 1남 4녀를 낳았는데 원수같긴 했어도 삼촌이 그리웠는지 자신의 독자에게 루트비히라는 이름을 붙였다. 칼 판 베토벤은 52살에 간암으로 죽었으며 아내 카롤리네는 이후 33년이나 더 살았다.
카를의 아들 루트비히(1839~1916)는 나중에 자신이 베토벤의 직계 후손으로 사칭하면서[24] 자신의 큰할아버지 루트비히의 작품으로 위조한 악보 등을 여러 곳에서 팔아먹는 추태를 저질렀다. 후에 진상이 밝혀지자 대차게 욕을 처먹었고, 미국으로 도망치듯 이민해서 거기서도 똑같은 짓을 저질렀지만 당시 미국에서는 미국 대통령이었던 링컨이 "베토벤이 누구야?"라고 물어볼 정도로 베토벤이 유명하지 않았던 탓에 큰 돈은 벌지 못했다고 한다.[25]
그렇다고 그가 사기만 치고 다녔던 것은 아니고, 미국 이주 후 철도 회사(Michigan Central Railroad Co.)에 근무면서 나름 성실하게 살다가 피아니스트인 마리아 니체(Maria Nitshe)와 결혼하여 아들 카를 율리우스(Karl Julius Beethoven)를 두었다. 이 카를 율리우스가 1917년 47살로 자식 없이 사망하면서 베토벤의 가계는 여기서 끝난다.[26]
카를의 엄마 요한나는 83세까지 장수했으며 심지어 아들 카를보다도 10년이나 더 오래 살았다! 베토벤 사망 후 그녀에 대한 관심이 급격하게 줄어든 탓에 말년이 어땠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베토벤의 사망 이후에도 딱히 재혼을 하거나 정착하지는 못하고 불우하게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카를의 이부(異父) 여동생이자 요한나의 사생아인 루도비카 요한나(Ludovika Johanna)는 대략 성인이 될 때까지 요한나와 함께 살았던 것 같지만 이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미국의 베토벤 연구가 메이너드 솔로몬(Maynard Solomon, 1930~ )은 베토벤이 요한나를 멸시한 이유가 일종의 애증 때문이라는 가설을 제기한 적이 있다. 즉, 카스파가 사망하고 나서 베토벤이 요한나에게 들이댔으나 요한나가 거절하자 복수심에 조카 카를을 빼앗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소문은 베토벤 당시에도 있었으며 한술 더 떠서 카를이 사실은 베토벤의 조카가 아니라 요한나와 베토벤의 친아들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물론 이런 풍문들은 딱히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베토벤이 카를에게 너무 집착했던 탓에 나온 이야기들로, 솔로몬의 가설도 이런 풍문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영화 '불멸의 연인'도 이 풍문들을 낭만적으로 각색해서 만든 것이다.
이 가설은 소문 이상의 증거가 전혀 없는데다 요한나가 죽을 때까지 베토벤에 대한 증오심을 버리지 않고 그에 대해 일절 이야기하지 않았던 점, 베토벤이 기본적으로 음악적 소양이 없는 여자들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감안했을 때 현실성이 별로 없다. 게다가 2016년에는 솔로몬 본인도 이 가설을 포기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니 영화 불멸의 연인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그냥 재미로 보자.

2.4. 스승 크리스티안 고틀롭 네페


[image]
크리스티안 고틀롭 네페
크리스티안 고틀롭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 1748-1798)는 고전파시기의 음악가이자 어린 시절의 베토벤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네페가 베토벤의 진정한 은인이었다는 말은 결코 과언이 아닌데, 베토벤의 음악적 잠재력을 본격적으로 깨워주고 음악가라는 인생의 방향을 정해준 사람이 바로 네페였기 때문이다. 네페는 한동안 작곡가라는 본업은 거의 잊혀지고 단지 베토벤의 스승으로만 알려졌는데, 후에 역사적인 대작곡가가 된 자신의 제자 덕분에 그의 음악들도 다시 발굴되고 있으며 베토벤을 테마로 한 연주회 등에서 그의 곡이 종종 레퍼토리에 오르기도 한다.
네페는 독일 켐니츠(Chemnitz) 출신으로 초기의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20세 무렵에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들과 마찬가지로 졸업 후에 진로를 음악으로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음악 지망생 네페는 당시 유명한 오페라 작곡가이자 드레스덴의 세일러 음악극장(Seyler theatrical company) 감독이었던 요한 힐러(Johann Adam Hiller, 1728-1804)에게 음악을 배웠으며, 1776년에는 힐러에 이어 세일러 음악극장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오페라 작곡가이자 연출자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취임한지 3년만에 세일러 극장은 경영 악화로 문을 닫았고 이에 네페는 한동안 프리랜서 작곡가로 활동하다가 1781년경에 본의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취직하게 된다. 네페는 본에 오기 전까지는 오페라 작곡가로 나름 알려졌으며 특히 1780년에 초연된 징슈필[27] <아델하이트 폰 벨타임(Adelheit von Veltheim)>은 네페가 죽은지 한참 지난 뒤에도 종종 공연이 되었을 정도로 유명했다(아쉽게도 현재는 거의 공연되지 않는다). 하지만 본에서 오르가니스트가 된 후에는 직업이 직업인지라 더 이상 오페라를 쓰지 않았으며 주로 건반음악이나 실내악곡, 협주곡 등의 기악곡을 작곡하였다.[28]
본에 온 네페는 동료 음악가인 요한 판 베토벤의 맏아들 루트비히가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갖고 있는 것을 간파하고 루트비히를 보조 오르가니스트로 채용한 후 본격적으로 피아노와 음악을 가르쳤다. 루트비히 역시 괴팍한 아버지와 달리 자상하고 자신에게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네페를 굉장히 좋아했다. 네페는 특히 베토벤이 작곡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작곡의 기초를 세심하게 가르쳐 주었는데, 이 시기에 씌어진 베토벤의 작품들, 예를 들어 드레슬러의 행진곡 주제에 의한 변주곡(WoO 63, 1782), 3곡의 피아노 소나타(일명 선제후 소나타, WoO 47 1-3, 1783), 피아노 협주곡(일명 0번 협주곡, WoO 4, 1784) 등을 들어보면 네페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베토벤을 가르칠 때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을 비롯한 바흐의 건반음악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대위법의 매력을 알려줬으며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나 신동 분야의 선배인 모차르트의 작품도 소개해 주었다. 이 시기 베토벤이 작곡한 오르간을 위한 푸가(WoO 31)를 들어보면 거의 바흐의 작품처럼 느껴진다. 후에 베토벤이 대위법을 바탕으로 숱한 명작을 만들어낸 밑바탕에는 네페의 가르침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네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베토벤을 합창음악이나 오페라 등의 음악공연에 자주 데려갔으며 사춘기를 벗어난 베토벤이 본의 궁정음악가(수석 비올라주자 및 부지휘자)로 취직할 수 있도록 힘써주기도 했다.
베토벤은 더 넓은 세계에서 음악인생을 펼치기 위해 1792년에 빈으로 떠났으며 이후 스승과 다시는 재회하지 못했다. 하지만 베토벤은 일생동안 네페를 은인이자 스승으로 존경했다. 베토벤은 빈으로 떠난 이듬해(1793) 네페에게 쓴 편지에 '제가 음악가로 성공한다면 그 몫의 상당부분은 선생님에게 있습니다'라고 감사를 표시했으며, 이후에도 네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스승' 또는 '은인'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베토벤이 빈으로 떠난 직후 나폴레옹 전쟁이 본격화되었고 1794년에 결국 빈도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한다. 특히 이 시기에 네페는 음악활동을 하지 못하고 점령군인 프랑스군에 의해 강제적으로 빈 지역의 행정을 관리하는 공무원으로 임명된다.[29] 네페는 음악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빈을 떠나 데사우(Dessau)에 있는 작은 극장의 지휘자로 부임하게 되는데, 데사우로 간지 2년만인 1798년 부인과 함께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고 만다.
1787년 한 음악잡지(Cramer's Magazin der Musik)에 네페가 소년음악가 베토벤에 대해 기고한 글이 남아 있는데, 여기서 그는 베토벤의 재능이 모차르트에 뒤지지 않으며 장차 제 2의 모차르트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이 예언은 정확히 들어맞았지만 정작 네페 본인은 그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지켜보지 못하고 50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2.5. 스승 하이든


하이든은 1790년 말 경에 런던으로 음악여행을 가던 당시 본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베토벤은 그 때 이 위대한 음악가를 처음 만났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후 하이든은 베토벤이 작곡한 두 곡의 칸타타(WoO.87,WoO.88)[30]의 악보를 받아본 후 베토벤을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을 승낙한다.
1792년 11월 10일에 빈에 도착한 베토벤은 몇달 전 7월에 런던에서 돌아와서 빈에 머무르고 있던 하이든의 제자로 들어간다. 그동안 동네 음악가들에게만 배우다가 모처럼 당대의 거장에게 배우게 된 베토벤의 기쁨과 희망은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실제로 가르침을 받게 되자 하이든에 대한 기대는 점차 실망으로 바뀌게 되었다. 하이든은 분명 작곡가로는 1급이었지만 스승으로서는 의문부호가 한두개가 아니었던 것이다. 느긋한 성격 탓인지 2차 런던 여행에 대한 준비에 치중했던 탓인지 알 수는 없지만 여튼 하이든은 기대했던 만큼 베토벤을 열성적으로 가르쳐주지 않았다. 언젠가 베토벤이 작성한 악보를 하이든이 고친 후에 돌려주었는데, 다른 음악가인 요한 밥티스트 셴크(Johann Baptist Schenk, 1753~1836)는 이 수정된 악보를 보고 하이든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많은 오류와 잘못을 지적해 주었다. 이 사건을 통해 베토벤은 자신의 교육에 별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 하이든에게 크게 실망했다. 이 외에도 하이든은 베토벤이 작곡한 몇 곡에 대해 악평을 하거나 출판을 반대하여 베토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베토벤 자신이 매우 마음에 들어했던 C단조의 피아노 3중주를 하이든은 신예 작곡가의 작품 치고는 너무 길고 복잡하다고 지적했다.[31]
결국 베토벤은 자신과 너무 성향이 다른 하이든에게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1년여만에 하이든의 휘하를 떠나면서 사제관계를 청산한다. 베토벤은 후에 "하이든에게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로 크게 실망했었다. 물론 이 말은 하이든이 배울게 없는 시시한 음악가라는 뜻이 절대 아니라, 단지 자신을 제대로 지도해주지 않은 하이든에 대한 섭섭함을 표현한 것이다. 여하튼 하이든과 결별한 베토벤은 전술한 요한 셴크를 비롯 음악이론가 요한 알브레히츠베르거(Johann Georg Albrechtsberger, 1736~1809)에게 이론과 작곡법을 배우고 빈의 궁정악장이었던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에게 이탈리아 음악양식과 오페라 및 성악곡 작법을 배웠다.
한편 베토벤의 작품 가운데 빈에서 처음으로 출판된 피아노 3중주 3곡(op.1-1,2,3)의 출판 때 하이든은 표지에 '하이든의 제자 베토벤'이라는 내용을 삽입하라는 제안을 한 적이 있는데, 베토벤은 이 제안을 가차없이 일축해 버렸다. 하이든이 이런 제안을 한 것은 베토벤을 낮게 평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이든이 베토벤을 위해서였지만[32] 자존감의 사나이 베토벤은 애초에 하이든의 제자 같은 타이틀로 출세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한 하이든은 자신의 2차 런던 여행 때 베토벤에게 제자이자 비서격으로 동행하자고 제안했지만 그 전에 베토벤이 사제관계가 끝나버리는 바람에 이 제안도 성사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그냥 파국으로 끝나버린 것은 아니었다. 베토벤은 하이든과 헤어진 이후에도 다른 스승들의 가르침과 독학을 병행하면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곡수법을 익혔으며, 그로 인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음악양식을 수립하기 전까지 그의 초기음악에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베토벤의 초기 교향곡이나 피아노 소나타, 현악 4중주 등을 분석해보면 하이든의 작곡 방식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어 수제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 비록 스승으로서 하이든은 기대에 못미쳤지만 작곡가로서는 당시에 하이든(과 모차르트)에게 필적할만한 롤모델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794년 하이든이 2차 런던 여행을 떠나 있는 동안 베토벤은 자신의 첫 피아노 소나타 3곡(op. 2-1,2,3)을 작곡하여 하이든에게 헌정하였으며 이듬해 8월에 하이든이 빈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리히노브스키 공작 저택의 연주회에 참석한 하이든에게 자신의 연주로 이 곡을 들려주었다. 베토벤은 이 소나타를 통해 자신의 발전된 모습을 스승에게 과시하고 싶어 했던 것이며 하이든은 대인배답게 이 소나타에서 드러난 베토벤의 재능과 열정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특히 베토벤을 만날 당시 하이든은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대음악가였으며 유럽 각지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유명세를 감당하기도 벅찰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베토벤처럼 자존심 강하고 다루기 까다로운 후배 음악가의 비위를 일일이 맞춰줄 이유는 없었다. 따라서 하이든은 그냥 베토벤에게 중요한 것만 알려주고 세세한 음악공부 같은 것은 스스로 하면서 자신의 제자라는 후광을 입고 운신의 폭을 넓히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반면 베토벤은 하이든의 제자로 출세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자신의 음악적 잠재력을 깨워줄 열의가 넘치는 스승을 원했다. 결국 두 사람의 이런 생각 차이가 사제관계의 결렬을 가져온 것.
하이든은 1809년에 사망했으므로, 베토벤이 자신을 딛고 본격적인 대작곡가의 반열에 오를 때까지도 생존해 있었다. 그가 1804년 발표된 베토벤의 영웅교향곡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한데 이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아쉬울 따름.[33]
일각에서는 하이든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인 60번 C장조를 베토벤이 엘리제를 위하여에서 살짝 오마주한것같다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하이든 60번에서 나오는 일부 동기가 엘리제를 위하여에 아주 조금 오마주처럼 들어가 있다는것이다. 물론 이는 베토벤이 직접 밝힌게 아니기 때문에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2.6. 첫 번째 후원자 리히노프스키 공작


[image]
리히노프스키 공작
베토벤은 모차르트와 더불어 교회나 귀족 등의 유력자들에게 전속하지 않고 프리랜서로 활동한 작곡가로 알려져 있는데, 스스로 큰 돈을 벌었던 모차르트와 달리 베토벤은 후원자들의 후원에 대한 의존도가 꽤 높은 편이었다.[34] 하지만 베토벤은 후원자들에게 예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음악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선배 작곡가들과는 확실히 구별된다.
애초에 베토벤이 빈으로 음악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 것도 본의 선제후가 후원금을 준 덕분이었다. 빈에 온 베토벤은 초기에 연주회와 피아노 교습 등으로 돈을 벌었는데, 막강한 후원자를 만나게 된 이후로 본격적으로 작곡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 빈 초기 시절에 베토벤에게 가장 중요한 후원자이자 비창 소나타의 피헌정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 바로 카를 리히노프스키 공작(Karl Alois Lichnowsky the Prince, 1761-1814)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황실의 인척으로 빈에서 태어나서 주로 빈에서 활동했으나 그의 영지는 당시 프러시아 영토(현재는 체코의 Hradec nad Moravici 영역)에 속해 있었고 그래서 프러시아 공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원래 대학에서는 법률관련 공부를 했으나 음악에 꽤 조예가 깊어서 바흐의 악보를 수집하기도 했고 전문가 수준으로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나름 연주와 작곡에도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빈에서는 같은 프리메이슨이었던 모차르트와 친교를 맺기도 했다.[35]
리히노스프키 공작은 빈의 사교모임에서 연주자로 초청된 젊은 음악가 베토벤을 종종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1796년 베를린으로 연주여행을 떠나는 베토벤과 동행하면서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게 된다. 이후 베토벤의 가능성을 눈여겨보았던 공작은 1800년경부터 적극적으로 베토벤의 후원자를 자처하면서 자신의 빈 저택 내에 베토벤의 숙소를 제공하고 그가 제대로 된 직장을 얻을 때까지 연 600 플로린의 후원금을 지급하기로 했다.[36] 베토벤은 베토벤대로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후원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비창 소나타를 비롯, 제 2번 교향곡(op.36)과 피아노 3중주 3곡(op. 1), 피아노 소나타 12번(op. 26) 등의 중요한 작품들을 헌정하였다. 또한 베토벤은 이 시기에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리히노프스키 공작에 대해 '나의 가장 절친이자 최고의 후원자'라고 표현하고 있을 정도로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 후원관계는 6년간 별 탈 없이 계속되다가 정말 어이없는 사건으로 인해 급작스럽게 종결되고 만다.
1806년 여름 리히노프스키 공작은 베토벤을 자신의 영지에 초청했다, 그런데 하필 같은 시기에 프랑스군과 장교들이 그의 영지를 방문했다. 공작은 프랑스군과 장교들을 접대하는 차원에서 베토벤에게 즉흥 연주를 요청했는데 당시 나폴레옹에게 극도의 반감을 갖고 있던 베토벤은 이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린다. 이에 감정이 상한 리히노프스키공작은 거절한것은 지나치다며 연주를 해달라고 베토벤을 나무랐는데 오히려 베토벤이 지지않고 이를 맞받아치면서 큰 언쟁으로 불거졌다. 싸움은 점점 격해졌고, 급기야 이성을 잃은 베토벤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갑자기 의자를 집어들고 공작에게 달려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같이 이 자리에 있던 오퍼스도르프(Franz von Oppersdorff the Count, 1778 - 1818) 백작과 주변 사람들이 베토벤을 뜯어말리고 그를 내보내면서 그나마 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싸움이 벌어진 다음날 베토벤은 짐을 싸서 그대로 공작의 영지를 떠나버렸으며 앞서 싸움을 말렸던 오퍼스도르프 백작의 영지로 숙소를 옮겼다.[37] 이 싸움의 충격이 컸던지 리히노프스키 공작은 베토벤과 의절해버리고 평생 베토벤을 미워했으며 두 사람의 관계는 1814년 리히노프스키 공작이 사망할 때까지도 화해하지 못한 채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이 사건은 베토벤의 성격이 가진 문제점을 제대로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이다. 이런 싸움을 두고 잘잘못을 논하는게 큰 의미는 없겠지만 현재는 대체적으로 베토벤이 너무 과했다는 주장이 대세이다. 이 당시 베토벤은 야심작이었던 오페라 '레오노레'가 흥행에 실패한데다 동생 카스파의 결혼 문제로 카스파와 크게 다툼을 벌이고 있었고 나중에는 카스파가 형과의 교류를 거부하는 수준까지 왔다. 게다가 공을 들였던 요제피네 폰 부룬스비크와의 연애관계도 사실상 끝장나버렸고, 그것도 모자라서 귓병은 계속 악화돼서 필담이 아니면 대화를 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리히노프스키 공작이 베토벤을 자신의 영지로 초대한 것은 이처럼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에 처한 베토벤에게 휴식과 위로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남다른 자의식의 소유자였던 베토벤은 공작의 이런 깍듯한 호의에도 불구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공작의 정중한 요청을 일절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것이다. 이는 공작을 제대로 화나게 만들어서 공작이 베토벤을 크게 질책하였고 이로 인한 갈등을 원인제공자인 베토벤이 폭력을 행사하고 사과도 하지 않으면서 결국 파국을 야기한 것이다.
게다가 베토벤은 공작의 저택을 떠나면서 자신이 머물던 방에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쓴 편지를 놓아두었는데 그 편지의 내용이 말그대로 적반하장인데 '''"이 세상에 당신같은 귀족은 수없이 많지만 베토벤은 오직 나 한사람 뿐이오!"'''라는, 오늘날 유명해진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화해는 커녕 이런 모욕적인 편지를 남겨놓고 갔으니 공작이 더더욱 노발대발한 것은 당연지사.
인간적인 면을 차치하고라도 이 싸움은 베토벤 입장에서 결코 현명한 처신이었다고 볼 수 없는데,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든든한 후원을 스스로 걷어 차버리는 바람에 한동안 경제적으로 상당히 쪼들려야 했다. 후술하는 것처럼 다른 후원자들이 나타난 후에야 간신히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7. 두 번째 후원자 루돌프 대공


[image]
루돌프 대공
루돌프 대공이자 추기경이자 대주교(Rudolph Johann Joseph Rainier, Archduke of Austria, Cardinal and Archbishop of Olomouc 1788 – 1831)는 칭호만 봐도 알겠지만 보통 귀족이 아니라 황제 가문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전임 황제 레오폴트 2세의 막내아들이었고 당시 황제 프란츠 2세의 동생이었다. 그 유명한 비운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바로 루돌프대공과 프란츠 2세의 고모였다. 형이 제위에 오른 후 원래 군대에서 경력을 쌓으려고 하였으나 몸이 약하고 뇌전증 증세가 있어서 성직자가 되었다. 그는 병약했지만 대신 음악적인 능력이 매우 뛰어나서 전문 연주자 수준의 피아노 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작곡 능력도 출중했다. 당시 빈의 음악 출판업자 안톤 디아벨리가 기획한 음악가 동맹 변주곡 모음집에 작곡가의 일원으로 참여했을 정도(디아벨리 변주곡 문서 참조)였으며 현재에도 루돌프 대공이 작곡한 곡들이 드물게나마 연주되고 있다. 그리고 그에게 피아노와 작곡을 가르친 스승이 다름아닌 베토벤.
루돌프 대공은 15세(1803년)부터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배웠는데 이 때부터 그는 열성적인 베토벤의 지지자가 되었다. 대공은 귀족들에게 격식을 갖추지 않고 무례한 태도를 보였던 베토벤을 나무라기는 커녕 오히려 '진정한 예술가의 모습'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베토벤 역시 대인배 루돌프 대공을 좋아했는데, 두 사람이 주고받은 서신을 보면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공이 자신보다 18살 많은 베토벤을 거의 큰 형처럼 격의없이 대하고 있으며 베토벤 역시 대공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허물없이 털어놓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베토벤은 1806년 리히노프스키공작과 급작스럽게 결별한 후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때 베토벤에게 나폴레옹 제국의 괴뢰 왕국이었던 베스트팔렌 왕국의 왕이자 나폴레옹의 동생이었던 제롬 보나파르트가 베토벤에게 궁정악장 자리를 제시했다. 베토벤은 나폴레옹을 몹시 싫어했고 심지어 바로 그 이유로 후원자까지 잃어버린 상황이었지만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그는 제롬이 제시한 고액의 연봉에 마음이 흔들렸다. 이 시기 베토벤은 빈을 떠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면서 자신을 아끼고 있던 지인들을 긴장시켰다.
결국 당시 베토벤의 절친이었던 안나 마리 에르되디 백작부인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부자 귀족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후원자들을 물색하였고, 그 결과 롭코비츠 보헤미아 공작(Prince Lobkowitz), 킨스키 공작(Prince Kinsk) , 그리고 바로 '''루돌프 대공''' 이 세 사람이 후원자로 나섰다. 이들은 베토벤이 빈에 계속 머무른다는 조건으로 1809년부터 무기한으로 연 4,000 플로린의 연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킨스키 공작은 후원 약속을 하자마자 군대에 복귀했고, 그 몇달만에 낙마사고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또 롭코비츠 공작은 2년 정도 후원금을 내다가 재정 악화를 이유로 지원을 중단해 버렸다. 결국 약속한 4000 플로린은 루돌프 대공 혼자의 몫이 되었는데, 그는 아낌없이 이 돈을 지원해 주었다.
이 4000 플로린은 후원 약속을 할 당시만 해도 꽤 큰 돈이었지만 오스트리아 정부가 프랑스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돈을 마구 찍어내는 바람에 인플레이션이 심해졌고, 심지어 1810년대 후반에는 처음 후원 약속을 했던 시기에 비해 오스트리아 화폐의 가치가 5분의 1까지 떨어졌다. 그런데 진정한 대인배였던 루돌프 대공은 이런 점까지 감안해서 인플레가 심할 때에는 베토벤에게 4000 플로린보다 훨씬 많은 돈을 지원해 주었으며 그 덕분에 베토벤은 최소한 생활비 걱정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한편으로 루돌프 대공은 베토벤의 재정적 후원자일 뿐만 아니라 신변의 보호자이기도 했다. 당시 빈의 유명인사였던 베토벤은 좋지못한 성격 때문에 자주 싸움을 벌이고 종교적/정치적으로 위험한 발언을 자주 해서 물의를 일으키고 오스트리아 당국을 긴장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한동안 오스트리아 정부에서는 그를 위험인물로 분류하여 감시하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특별한 처벌이나 제재를 받지 않은 이유는 바로 루돌프 대공이라는 후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베토벤은 이와 같은 루돌프 대공의 세심한 배려와 지원에 크게 감사했으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대공'이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피아노 3중주 7번(op. 97)을 비롯 피아노 협주곡 4번(op. 58)과 5번(op. 73), 피아노 소나타 26번 '고별'(op. 81a), 29번 함머클라비어(op. 106), 바이올린 소나타 10번(op. 96) 장엄미사(op. 123), 대 푸가(op. 133) 등의 무시무시한 명작들을 그에게 헌정하였다. 특히 고별소나타는 루돌프 대공과의 우정이 직접적인 작곡동기가 된 작품으로, 나폴레옹 전쟁 시절 피난을 떠나는 대공과 이별하는 슬픔이 작곡의 바탕이 되었다.
이처럼 루돌프 대공은 베토벤의 평생지기이자 후원자였으며 베토벤이 사망하자 대단히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몸이 약했던 루돌프 대공은 베토벤이 사망한지 4년 후인 1831년에 43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2.8. 베토벤의 여인들


훌륭한 작곡가가 되면서 그의 연애사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너무 길어져서 따로 문서를 만들어 서술한다.

2.9. 제자들


베토벤은 생전에 많은 귀족들과 부유한 상공인의 자식들을 가르쳤으며 전술한 루돌프 대공이나 베토벤과 사귀었던 여성들도 공식적으로는 모두 베토벤의 제자였다. 또한 슈베르트브람스처럼 직접 가르침을 받지 않았더라도 그에게 큰 영향을 받은 음악가들이 많다. 여기서는 그에게 '''직접 '''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가운데 음악적으로 업적을 남긴 음악가들만 언급한다.
후술되는 베토벤의 제자들은 공통적으로 훌륭한 피아니스트였으며 작곡 측면에서는 빈 고전파 양식과 낭만주의 양식이 절충된 음악성향을 보여주고 있는데, 당대에는 베토벤의 제자로 꽤 이름을 날렸지만 오늘날 이들의 작품은 사실상 잊혀져 있는 상황이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절충양식으로 씌어진 작품들이 애매모호한 음악성 때문에 오늘날 그다지 평가가 좋지 않고 인기도 없기 때문.[38] 그나마 체르니의 연습곡이 현재까지도 피아노 교육 분야에서 중요하게 활용되고 있는 것이 위안거리.
  • 카를 체르니(Carl Czerny, 1791-1857) -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음악 교육자. 베토벤의 제자 중 대중적으로 유일한 유명인. 문서 참조.
  • 페르디난트 리스(Ferdinand Ries, 1784-1838) -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악보 출판업자. 베토벤이 가장 신뢰했던 역량있는 피아니스트였으며 단순한 사제관계를 넘어 베토벤의 비서이자 조언자 역할을 했다. 리스는 특히 런던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출판업자로 활동했는데, 뛰어난 기획력 덕분에 꽤 많은 돈을 벌었다. 또한 이 시기에 베토벤의 악보를 출판해서 영국에 베토벤의 음악을 알리는데에도 큰 공헌을 했다. 7곡의 교향곡과 3곡의 오페라, 9곡의 피아노 협주곡 등을 남겼다.
  • 이그나츠 모셀레스(Ignaz Moscheles, 1794-1870) -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음악교육자였으며 오늘날에는 음악보다 멘델스존의 스승이자 쇼팽의 후원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은 거의 모두 피아노를 위한 독주/합주/협주곡이며 교향곡은 1곡만 남겼다.

2.10. 말년의 비서 안톤 쉰들러


[image]
안톤 쉰들러
안톤 쉰들러(Anton Schindler, 1795-1864)는 체코 출신으로 10대 시절에 비인으로 이주했으며 성인이 된 이후 법률 사무소에서 일했다. 그는 본업 외에도 아마추어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했는데, 바이올린에 심취한 쉰들러는 아예 법률사무소를 사직하고 비인 소극장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취직했으며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베토벤과 인연을 맺는다. 쉰들러는 베토벤 숭배자를 자처하면서 그의 비서가 되기를 간청했으며, 결국 1822년 베토벤의 무급 재택비서로 채용(?)이 됐다. 베토벤은 일생동안 자택이 없이 하숙생활을 했으며 비서를 둘 만한 처지가 못되는 자신에게 굳이 비서가 되기를 간청하는 쉰들러에 대해 진짜 모를 사람이라고 제자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이후 쉰들러는 1825년까지 비서역할을 하다가 다른 극장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이직할 때 잠시 비서직을 그만두었으며 1826년에 다시 비서가 된 후 베토벤이 사망할 때까지 곁에 있었다. 베토벤 사후에는 부다페스트 - 뮌스터 - 아헨을 거치면서 음악 교수/감독으로 활동하면서 나름 음악인의 경력을 이어갔다.
사실 쉰들러는 음악적으로나 베토벤과의 관계 측면에서나 전술한 베토벤의 제자들에 비해 훨씬 비중이 떨어지는 인물이지만 베토벤의 말년에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중요한 증언자이자 최초로 베토벤의 전기를 출판한[39] 덕분에 오늘날에는 베토벤의 다른 제자들보다 더 인지도가 높다. 베토벤 사후 쉰들러는 베토벤의 물건들을 많이 챙겨서 돈을 받고 팔아먹었는데, 특히 베토벤의 필답을 적어놓은 공책을 챙겨서 숨기고 또 일부 대화내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가필하고 지우는 등 '''왜곡'''하는 짓을 저질러 악명이 높다.[40] 그가 갖고 있는 공책은 400권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나중에 이 공책 가운데 136권만 베를린 왕립 도서관(Royal Prussian Library in Berlin)에 꽤 비싸게 팔았으며 나머지는 끝내 내놓지 않았다.
베토벤의 제자들과 지인과 딸로 추정되는 사람까지 찾아다니면서 베토벤을 연구했던 미국의 베토벤 전문가 알렉산더 윌록 세이어(Alexander Wheelock Thayer, 1817~1897)에 의하면 '쉰들러가 베토벤의 대화를 적은 다른 공책 260여 권을 태워 버려서 베토벤의 숨겨진 이야기는 이제 영원히 사라졌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의하면 400권이라는 숫자는 세이어가 독일어 viel(많은)을 vier(4)로 잘못 알아들은 것이 와전된 것으로 실제로 분실된 공책은 쉰들러가 갖고 있지도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즉 분실된 공책들은 아직 어딘가에 존재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
[image]
알렉산더 윌록 세이어
쉰들러는 베토벤 연구가와 제자들의 분노를 뒤로 하고 그럭저럭 잘살다가 죽었는데, 이상하게 이후에 안톤 쉰들러가 베토벤의 제자라는 잘못된 정보[41]가 퍼져나갔으며, 21세기 이전에 한국에서 출판된 베토벤 위인전에도 쉰들러를 베토벤의 제자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어떤 베토벤 전기학자들은 쉰들러가 많은 부분을 왜곡했다는 의심을 하고 있다. 그는 베토벤의 혈육들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증언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베리 쿠퍼는 '쉰들러의 주장은 교차검증을 하기 전에는 믿을수 없다'고 주장하였을정도. 많은 베토벤의 유명한 일화가 쉰들러의 증언에서 나왔는데 일부 증언들은 사안을 이슈거리로 만들기 위해 내용을 각색했거나 정황상 일어나기 어렵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어찌됐건 그가 중요한 베토벤의 목격자이자 증언자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며 그래서 그가 쓴 베토벤 전기는 베토벤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참고문헌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리 질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고 거기 나온 이야기가 다 맞는건 아니라는 것도 문제다.
다만 비록 의도는 미심쩍지만 베토벤이 죽을 때까지 그를 데리고 있었던 것을 보면 비서 역할은 잘 했던 것으로 보인다. 베토벤 사후의 행적때문에 욕을 많이 먹고 있긴 하지만 그가 말년에 괴팍함이 극에 달했던 베토벤의 짜증과 푸념을 일일이 받아주면서 궂은 일처리를 나름 잘해냈다는 점은 평가할만 하다.


[1] 개구쟁이에다 골목대장이었던 탓에 얼굴에 흉터가 많았다고 한다. 살짝 곰보에다 어깨는 넓어서 친구들이 '몽골대왕'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성미가 급하고 다혈질이라 툭하면 친구들에게 주먹질을 해댔다고 한다. 다만 이러한 점은 나중에 베토벤한테서 심각한 성격적 결함이 된다.[2] 이렇게 카스파가 빼돌려서 출판된 작품들이 작품번호 40번대에서 60번대 사이에 대거 포진해 있다. 베토벤이야 당연히 화가 났겠지만 한편으로 카스파의 수완(?) 덕분에 베토벤도 나름 돈을 벌었기 때문에 무조건 카스파를 비난만 하기는 좀 그렇다. 그리고 카스파 덕에 자칫하면 환상의 작품이 될 뻔 했던 베토벤의 젊을 적 작품들이 대거 보존될 수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클래식 팬들과 전문가들에겐 오히려 고마운 측면도 있다. 그의 초기작품들은 베토벤 연구에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자료들이고, 젊은 시절 베토벤의 재능과 패기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클래식 팬들도 들어볼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다.[3] 당시 요한나의 평이 얼마나 좋지 않았냐면 칼이 카스파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이 파다했을 정도. 그런데 이걸 뜬소문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는게 진짜 문제였다.[4] 2천 플로린의 거액과 저택을 받았다.[5] 무엇보다 당시 재정이 나빠진 오스트리아 정부가 공무원들에게 주는 급여를 대거 삭감해서 공무원들도 생계에 어러움을 겪은터라 카스파도 박봉을 받는 공무원에 오래 일할수가 없었다.[6] 하도 사치스럽다보니 많던 돈을 탕진했고 까지 끌어다쓰다보니 집안 살림이 가난해진것은 당연했다.[7]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이 일어나 유럽 제일의 산업강국이 되어 있었다.[8] 한편 린츠 주민들에게는 적군을 도와주는 배신자로 찍혀 욕을 많이 먹었다.[9] 다만 이때 요한은 결혼하면서 루트비히가 요한의 결혼을 반대하고 그를 때린것에 대한 악감정이 깊은것이 컷다. 특히 루트비히는 자신이 동생을 때린 것에 대해 사과도 하지 않고 화해하려고도 하지않았기에 요한이 형을 더욱 싫어하여 거절했던 것이다.[10] 아예 린츠 시 당국에 테레제는 린츠 시민이 아니니 추방해달라고 요청까지 했다. 하지만 시 당국은 테레제가 문제를 일으킨것도 아닌데 그럴수 없다며 거부했다.[11] 다만 테레제는 요한과 결혼하기 전에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딸 1명을 낳았기에 테레제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요한에게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12] 현존하는 그의 유일한 초상화이다.[13] 그렇다고 매몰차게만 대한 것은 아니고, 요한나가 생활고 때문에 도와달라고 했을때 미망인 연금을 받게 해주기도 했다.[14] 이때 귀족 법정에서 재판을 벌였는데, 베토벤이 귀족 행세를 하고 다니다가 평민이라는게 들통나서 기각되기도 했다. 당시 귀족 법정에서는 평민의 소송은 아예 취급하지 않았다. 그래도 베토벤의 명성은 엄청나서, 당시 선임한 변호사가 '''베를린 법대 교수'''였다.[15] 하지만 판결상으로는 요한나는 제한적이지만 카를에 대한 면접교섭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베토벤은 이런 판결 내용을 가차없이 무시하고 모자간의 만남을 금지했던것이다. 그래서 요한나는 요한나대로 이 권리를 들먹이면서 꿋꿋이 카를을 만났다.[16] 베토벤은 조카 뿐만 아니라 동생들에게도 권위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걸핏하면 화를 내고 폭력을 행사하였다. 동생들이 괜히 형을 싫어한 게 아니다.[17] 베토벤이 보낸 사립학교가 기숙생활을 하는데 규칙이 엄격하여 카를로서는 견딜수가 없었던 나머지 술과 당구에 빠져들었는데 술을 마신것이 들통나서 퇴학당했다.[18] 다만 이게 흉터가 되었기에 카를은 이를 가리려고 머리를 이마 위로 길게 늘어뜨리고 다녔다.[19] 근본적인 이유는 삼촌인 베토벤이 싫어서이다. 특히 칼은 빈에서 복부할수 있었는데도 삼촌이 싫어서 보헤미아의 부대로 지원해서 사실상 베토벤을 떠나기로 결심했다.[20] 무엇보다 카를에게서 사정을 듣은 군무국의 직원인 베토벤의 친구 슈테판 폰 브라우닝도 카를이 안타까워서 군에 입대하라고 격려해주며 베토벤한테 가서 그를 달래고 설득했기에 베토벤도 어쩔수가 없었다.[21] 이때 베토벤은 카를 때문에 중병에 걸린 상황에서도 폭음을 멈추지 않았다. 다만 이것을 카를의 잘못으로만 볼 수는 없다. 카를 역시 삼촌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큰 상처를 안고 살아야 했으니. 전체적으로 보면 베토벤의 책임이다.[22] 특히 당시의 수송수단인 마차로 가는데 오래 걸렸다.[23] 카를이 조금만 더 세상 물정을 잘 알았다면 쉰들러 같이 베토벤의 주변에 기생하던 협잡꾼들이 베토벤의 유품이나 필기록 등을 마구 빼돌려 팔아먹는 것을 막고 스스로 관리하면서 훨씬 큰 돈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를은 당시 겨우 20살밖에 되지 않은 데다, 삼촌의 그늘에서만 살았던 샌님이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24] 카를이 베토벤의 친아들이 아니니 루트비히는 베토벤의 직계후손이라고 볼 수 없다. 동양으로 치면 공식적으로 봉사손이 되지 않은 방계 자손이 멋대로 봉사손을 참칭한 거나 다름없다.[25] 루트비히는 미국에서는 루이스 폰 호펜이라는 미국식 이름으로 바꿨다. 그런데 van을 von으로 바꾼 것을 보면 귀족 행세를 한 듯.[26] 다만 카를과 루트비히의 딸들이 낳은 후손들은 현재도 생존해 있다. 다만 이들은 당연히 베토벤이라는 성을 쓰지 않는다.[27] Singspiel, 18세기 독일에서 유행하였던 민속 음악극. 민요풍의 노래와 춤을 삽입한 대화체의 통속적이고 소박한 오페라로 희극적 내용을 특색으로 하며, 19세기 독일 오페라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모차르트의 작품이 대표적이다.[28] 여담으로 네페의 대표작이자 마지막 오페라 작품인 '아델하이트 폰 벨타임'에 나타난 음악성은 여러 측면에서 자신의 스승 요한 힐러를 뛰어넘고 있기 때문에 상황이 받쳐줘서 그가 계속 오페라 작곡가로 활동했다면 충분히 한 시대를 풍미한 작곡가가 되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물론 극음악 작곡가 커리어를 희생하는 대신 역사적인 대 음악가의 스승으로 이름을 남겼으니 아쉬워할 일만은 아니지만.[29] 점령군이 점령지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현지 사정을 잘 아는 현지인들의 도움이 필수적인데, 네페는 이런 차원에서 공무원으로 차출된 것이다.[30] 한 곡은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2세의 사망을 애도하는 곡이고 다른 한 곡은 레오폴트 2세의 황위 계승을 경축하는 곡이다.[31] 참고로 하이든은 피아노 3중주를 45곡 가량 남겼는데, 최후기의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그나마도 이 곡들은 베토벤을 가르친 이후에 작곡됐다) 현악기들이 독자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바이올린이 피아노의 고음부(오른손부)를, 첼로가 피아노의 저음부(왼손부)를 따라가거나 보강해 주는 구성을 갖고 있고 연주시간도 대체로 15분을 넘기지 않는다. 반면 베토벤이 작곡한 op.1의 3중주 3곡은 전개부가 굉장히 확대돼서 연주시간이 30분에 육박하는데다 현악기들의 독자성이 상대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하이든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을 것이다. 다만 op.1의 3중주는 중기 이후에 씌어진 3중주에 비하면 규모 대비 다채로움이 부족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하이든 입장에서는 좀더 간결하게 만드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32] 당대의 거장 '하이든의 제자'라는 타이틀은 베토벤의 운신에 꽤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지금도 어떤 분야에서 새로 이름을 알리려는 사람들이 그 분야의 대가나 유명한 사람의 제자 또는 협력자라는 타이틀을 내거는 일은 상당히 흔하다.[33] BBC에서 2003년 제작한 TV영화 Eroica에서 영웅교향곡이 정식 초연전에 롭코비츠 공작 저택에서 비공식으로 초연되는 에피소드를 다뤘는데 하이든이 예고없이 찾아와 초연을 듣고 떠나며 코멘트를 하는 장면이 있다. 물론 픽션이지만 당혹스러운 표정의 하이든의 코멘트는 "Quite, quite new...Everything is different from today."였다.[34] 모차르트도 요제프 2세 재위시절 오스트리아 황궁으로부터 정기적으로 후원금을 받기는 했는데, 이 후원금은 자신이 버는 돈에 비해 매우 미미한 액수로 실질적인 경제적 도움보다는 '황실 음악가'라는 타이틀을 위한 상징적인 후원금에 가까왔다. 다만 빚에 쪼들렸던 모차르트는 나중에 이 적은 돈도 아쉬워하기는 했다.[35] 한편으로 모차르트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가 떼이는 바람에 소송전으로 비화하기도 했다. 모차르트 문서 참조.[36] 이 후원금은 명목상으로는 구직 지원금 또는 일종의 실업급여의 형태로 지급됐는데, 베토벤이 평생 안정된 직장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구직활동도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사실상 돈을 '''그냥 준''' 셈이다. 하긴 전해지는 베토벤의 성격을 감안해 보면 그가 누구 밑에서 고분고분 일하는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37] 오퍼스도르프 백작은 리히노프스키 공작과 친척관계였으며 영지도 리히노프스키공작의 영지의 바로 옆(오늘날 폴란드 영토에 있는 Oberglogau)에 있었다. 베토벤은 그의 영지에 머무는 동안 4번 교향곡을 완성했으며, 원래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헌정될 예정이었던 이 곡은 이 사건 때문에 오퍼스도르프 백작에게 헌정되었다.[38] 관심이 있는 분은 요한 네포무크 훔멜 문서 참조. 훔멜 역시 당대에는 최고의 음악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이 절충양식의 한계 때문에 오늘날에는 많이 잊혀져버린 작곡가이다.[39] 쉰들러는 베토벤 사망 13년후인 1840년에 최초로 전기를 펴냈지만 내용중에 자신의 역할을 과장하는 등 왜곡된 기술로 인해 이후 베토벤 연구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편이다.[40] 쉰들러가 베토벤의 대화노트를 가필하고 지운 내용은 후대에 베토벤 연구자들이 그 부분만 따로 편집해 펴내기도 했다.[41] 1981년에 삼성서관에서 나온 만화 위인전 베토벤에서 쉰들러가 친구로 나와 바로 슈베르트를 소개하는 걸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