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록 사건
'''And so, with deep confidence, I call upon the citizens of the State of Arkansas to assist in bringing to an immediate end all interference with the law and its processes.'''
'''이에 저는 깊은 신뢰로서 아칸소 주의 시민들에게 요청하고자 합니다. 부디 법의 집행을 더 이상 방해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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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9월 24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합중국 대통령의 담화(전문)
1. 요약
'''Little Rock Crisis'''
1957년 아칸소 주의 리틀록 센트럴 고등학교(Little Rock Central High School)에서 흑인 학생들의 백인 학교 등교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을 말한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주방위군과 연방군이 대치한 사건'''이며, 동시에 흑인 민권 운동에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평가된다.
2. 개요
1954년 이른바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Brown v. Board of Education, 347 U.S. 483)' 재판에서는 ''''피부색을 이유로 하여 학생들의 교육을 분리하거나 차별할 수 없다''''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NAACP[1] 에서는 인종차별이 심하던 남부의 주에 위치한 백인 학교에 흑인 학생들을 등록시키고자 하였다. 아칸소(Arkansas)의 주도인 리틀 록(Little Rock)에서는 성적이 우수한 9명의 학생들을 등록시키기로 하였다.
1957년, 백인 학교였던 리틀 록 센트럴 고등학교(Little Rock Central High School)에는 9명의 흑인 학생이 입학했다. 원래는 17명이었으나 이들 중 8명은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포기하지 않은 학생들의 이름은 아래와 같으며, 이들은 리틀록 나인(Nine)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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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이사회는 해당 학군의 교육감이었던 버질 블로섬(Virgil Blossom)의 결정 하에 흑인 학생들의 입학을 만장일치로 허가하고, 이후 점진적으로 흑인 학생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으나(이른바 Blossom Plan), 수많은 백인 학부모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인종차별주의자들 가운데에서는 당시 아칸소의 주지사였던 오벌 포버스(Orval Faubus, 1910 - 1994)도 포함되어 있었다.
3. 전개
3.1. 주 방위군의 봉쇄
1957년 9월 4일, 연방 대법원에서는 리틀록 학구(School District)가 흑인 학생들의 입학을 허가해야 한다고 선고했다. 하지만 포버스 주지사는 이를 거부하고, '''주 방위군을 학교로 보내 흑인 학생들의 접근을 원천 봉쇄'''했다. 포버스 주지사는 이에 대한 근거로 ''''평화에 대한 침해와 폭동, 그리고 소요의 즉각적 위험이 있으며, 사람들 및 재산에 해를 끼칠 상당히 유력한 근거가 있기 때문''''[원문] 이라고 주장했지만, 현재까지도 이에 대한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주 방위군은 주지사의 명령에 철저히 따랐으며, 마리온 존슨 육군 중령(Lt. Col. Marion Johnson) 휘하의 주방위육군과 인근 리틀 록 공군기지에서 지원 나온 주방위공군 병력이 흑인 학생들의 접근을 봉쇄했다. 이로 인해 9월 4일 등교했던 흑인 학생은 엘리자베스 엑포드 한 명 뿐이었다. 흔히 그녀가 이에 저항하기 위해 혼자 등교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녀 혼자만 등교한 이유는 집에 전화가 없어서 아무도 그녀에게 학교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영문 위키피디아의 설명이다.
리틀록 나인은 23일 다시 모였으나, 수많은 백인 시위대가 학교 밖에 모이는 통에 안전을 이유로 결국 수업 중 학교에서 나가야 했다.
이 상황을 전해들은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3204호 명령을 내린다.
3.2. 연방군 투입
3204호 명령의 요지는 ''''정의의 실현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즉각 해산할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연방군을 투입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포버스 주지사가 끝까지 거부하자, 아이젠하워는 실제로 연방군인 미합중국 육군 제101공수사단 병력을 투입한다. 그 결과 '''미합중국 연방군과 주방위군이 대치하는 전무후무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물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연방군을 투입과 동시에 아칸소 주방위군의 통수권을 주지사에게서 회수하여 주지사를 지휘계통에서 배제시켰기에 대치 상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틀만에 오벌 포버스 주지사는 백기를 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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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공수사단 병사들이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있다. 병사의 왼팔에 달린 '울부짖는 독수리'(Screaming Eagle) 부대마크와 들고 있는 총기에 주목. '''착검을 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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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중 한명이 101공수사단 병사의 무기를 탈취하려고 하자 무력을 사용해 저지하여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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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주방위군의 통수권을 회수한 이후의 모습으로 '''주방위군'''이 흑인 학생들을 호위하고 있다.
투입 이후 한 학기 동안 연방군은 학교 인근에서 출동 대기 상태로 등하교하는 흑인 학생들의 신변을 지켰다고 한다.
4. 이후
- 최초로 졸업한 어니스트 그린은 이른바 리틀록 나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는 1958년 센트럴 고등학교를 졸업함으로서 최초의 흑인 졸업생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이는 흑인의 인권과 자존심을 상당히 고양시켰다. 졸업식 당일, 학교의 교장은 어니스트에 대한 공공연한 린치 시도가 재학생들 사이에 오르내리고 있던 상황이라 그의 안전을 우려, 졸업식에 오지 말고 집에서 학교 졸업장을 우편으로 받으라는 제안을 하지만, 어니스트는 거절하고 졸업식에 참석했으며 린치 등 불미스러운 사태는 당일에 일어나지 않았다. 졸업 후 어니스트는 미국의 미시간 주립 대학교에 입학해 학사 학위와 대학원 학위를 받았다. 1965년, 그는 아돌프 협회(Adolph instituet, 남부 지역의 소수민족 여성들의 경력 개발을 위해 세워진 단체)의 건축업에 속하는 견습직을 얻었다. 1968년에서 1976년 사이, 그는 필립 랜돌프(A. Philip Randolp)의 교육 기금단체(A. Philip Randolph Education Fund)의 책임자로 일했다. 또한 1985년부터는 리만 브라더스에서 일했다. 1981년에는 특출한 이글 스카우트 상(Distinguished Eagle Scout Award)을 받았다.
-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식 날, 그간 생존해 있던 리틀록 나인 멤버 전원을 초청했다.
- 미국에서 연방 정부가 주 정부에 간섭하여 군 통수권을 박탈한 몇 안 되는 사건이기에 여러 미디어에서 인용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드라마 지정생존자에서도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 이 사건을 일으키게 한 주지사 오벌 포버스(민주당)는 1958년 갤럽지 앙케이트 조사로 멋진 미국인 남성 10에 들어가며 오히려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그는 1967년까지 주지사를 역임했지만, 이후에는 번번히 낙선하고 정계에서 물러나 아칸소에서 살다가 1994년 전립선암으로 죽었다. 그는 살아 생전 남부연합 깃발 앞에서 인터뷰하는 등 흑인 차별에 지지를 보내온 인종차별주의자였다.
- 재즈 베이시스트 찰스 밍거스가 오벌 포버스를 비판하는 곡인 'Fables of Faubus'를 작곡하여 자신의 앨범 'Mingus Ah Um'에 수록하기도 했다.
- 리틀록 나인의 모습 중, 어느 백인 여성이 흑인 학생들에게 화를 내는 장면이 유명하다. 이 여성의 이름은 헤이젤 브라이언(Hazel Bryan)인데, 이후 헤이젤은 1997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해서 자신의 행동을 참회하고, 리틀록 나인 중 한명인 엘리자베스 엑포드와 직접 만나서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했다. 헤이젤은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유명해진 뒤 인종차별주의자로 두고두고 비난을 받아야 했다고. 텔레그래프 기사
- 1998년 리틀록 9인이 등교한 센트럴 고등학교는 자체가 사적지로 등록되었다. 물론 학교로도 계속 사용되고 있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