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라틴어: Marcus Tullius Cicero

[image]
'''생몰년도'''
기원전 106년 1월 3일 ~ 기원전 43년 12월 7일
'''출생지'''
[image] 이탈리아 아르피눔
(現 이탈리아 라치오주 프로시노네현 코무네)
'''사망지'''
[image] 이탈리아 포르미아
(現 이탈리아 라치오주 라티나현 코무네)
'''지위'''
에퀴테스
'''국가'''
로마 공화정
'''가족'''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아버지)
헬비아(어머니)
테렌티아(아내BC.79 ~ BC.51)
툴리아(장녀)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첫번째 사위BC.63 ~ BC.57)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두번째 사위BC.50 ~ BC.46)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동생)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아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조카)
'''참전'''
동맹시 전쟁
카이사르의 내전
'''직업'''
집정관, 변호사, 철학자, 웅변가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63년
'''전임'''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
'''동기'''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
'''후임'''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
1. 개요
2. 이름
3. 생애
3.1. 청년기
3.2. 장년기
3.2.1. 정계 진출
3.2.3. 추방
3.2.4. 정계 복귀와 내전기
3.3. 노년기
3.3.1. 카이사르 암살 이후
3.3.2. 필리피카이
3.4. 최후
4. 평가와 사후의 영향
4.1. 업적 및 긍정적 평가
4.2. 비판 또는 한계
5. 성격 및 일화
6. 기타 매체에서
7. 어록
8. 한국에서 번역된 책 목록


1. 개요


potestas in populo, auctoritas in senatu

권력은 인민에게 있고 권위는 원로원에 있어야 한다

키케로, 『법률론』 3.12.28. 키케로의 정치적 신념이 요약된 말이라 할 수 있다.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 변호사, 웅변가, 문학가, 철학자이다. 명실공히 로마 공화정을 대표하는 인물로, 원로원 의원을 역임하였고 집정관에도 선출된 적이 있다.[1] 30대에 원로원에 입성하였으며 유창한 언변으로 카틸리나 탄핵 사건에서 정적 카틸리나를 제거하였으나 법을 무시한 절차로 인해 많은 논란을 낳았다. 중년 시기에는 쓰러져가는 로마의 공화정을 유지하려고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대립하기도 했으나 내전에서 승리한 카이사르는 그를 사면하였다. 카이사르의 사후 키케로는 새로이 권력자로 떠오른 카이사르의 부하 안토니우스를 타도하고,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를 지원하기 위한 원로원 연설을 하였으나 결국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야합의 제물로 암살되었다. 결론적으로 키케로는 로마의 공화정이 제정으로 변하는 것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으나, 그의 사후에 그가 남긴 저작물과 공화주의와 관련된 사상은 후대의 공화주의자들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당대 최고의 문필가 중 한 명이었으며 라틴어를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역사적 공적에 관계없이 반드시 이름을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키케로를 상고 라틴어와 고전 라틴어를 나누는 기준으로 치고 고전 라틴어의 기준을 키케로의 저작으로 정했기 때문.[2] 또한 현대법의 근간이 되는 로마법을 공부하다보면 필연적으로 들어보는 이름이기도 하다.[3] 후세에도 그의 저작은 여러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헌 중에서도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특히 인정받고 있다. 천병희 교수도 플라톤 전집을 완간한 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다음으로 번역이 나와야 할 그리스, 로마 원전'으로 주저없이 키케로를 꼽은 바 있다.#
철학적으로는 스토아 학파와 신 아카데미아 학파 양쪽의 절충론자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키케로는 스스로를 '윤리에서는 스토아 학파의 영향을 받은 신 아카데미아 학파'로 인식한 것으로 보이므로 일단은 신 아카데미아 학파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아들은 소요학파. 키케로는 아들에게 「의무론」을 선물하면서, 어차피 신 아카데미아 학파나 소요 학파나 하는 소리는 비슷하니 자기 책을 읽어보라고 권했다고 한다. 물론 키케로가 무식해서 그런 것은 아닐 테고 아들이 자기 글을 읽어줬으면 하는 마음이었겠지만.

2. 이름


이탈리아어로는 라틴어의 단수 대격에서 유래된[4] 치체로네(Cicerone)라고 부르고 대중 라틴어로는 '치체로'라고 한다. 영어권에서는 시세로(Cicero)라고 부른다.
'키케로'는 당시 기준으로 봐도 굉장히 특이한 이름이었다고 한다. 이 이름에 대해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의하면 키케로 집안 사람들의 코가 마치 병아리콩(라틴어로 cicer)처럼 생겼기 때문에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설명했으나 아무래도 자신들의 생김새에 따라 성이 붙여졌다고 믿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차라리 집안 사람들이 병아리콩 농사나 판매에 종사했다는 설명이 더 그럴싸하게 들린다.

3. 생애



3.1. 청년기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고향인 아르피눔 출신으로 비록 귀족 태생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재력을 가진 기사계급(equites)의 아들로 태어나서 남부러울 것 없이 유복하게 자랐다. 학생이었을 때는 누구나 예상하듯 매우 총명한 학생이었으며 당시 로마 귀족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다만 자기 대에 로마 정계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신참자라는 출신 성분으로 인해 또래의 유망한 귀족 청년보다 정계 진출 및 출세에는 여러 애로사항을 겪었다.
그는 동맹시 전쟁 때, 폼페이우스 스트라보 휘하에서 복무했다. 스트라보는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아마 이때 동갑내기인 폼페이우스와 처음 만났을 것이다. 이어 술라의 군대에서 복무했던 것으로 보이나 곧 군생활을 그만두고 변호사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기원전 80년, 아직 신출내기 변호사일 때 섹스투스 로스키우스의 아버지 살해 혐의를 변호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권력의 정점에 있던 술라를 간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그 이후에는 잠시 변호사 활동을 접고 아테네, 로도스 등지로 가 당대 최고의 학자들 밑에서 공부를 계속한다. 이는 술라로부터의 정치적 보복이 두려워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술라는 반대파를 철저히 숙청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살생부에 이름이 오르면 거의 무조건 사망이었다. 카이사르 역시 술라의 조치에 반대하다가 죽을 뻔했다.

3.2. 장년기



3.2.1. 정계 진출


그렇게 한층 자신을 갈고닦은 키케로는 로마로 귀국해 기원전 75년, 31세의 나이로 재무관으로 선출돼 원로원 의원 자격을 얻고 시칠리아 서부 릴리바이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솜씨 있는 일 처리로 지역 주민들의 호감을 사고, 시라쿠사에선 아르키메데스의 무덤을 발견해 지역 주민들을 환호케 했다. 이런 업적으로 키케로는 시칠리아에서 적지 않은 지지자를 확보했으며, 본인도 이를 무척 자랑스러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과했던 나머지 공적에 대한 자부심이 자만심에 달해 스스로를 로마 전체의 명사로 여길 지경이었으나 얼마 후 그의 입장에선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재무관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귀환하던 중 캄파니아에서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만났으나 그중 한 사람은 그가 로마에서 이곳으로 향했다고 생각해 로마의 현황을 물었고, 상황을 수습하려 한 사람들도 그의 부임지로 엉뚱한 지명을 언급해 키케로가 직접 오류를 정정해야만 했던 것이다.
결국 로마에서 키케로는 이제 막 원로원에 입성한 무명 인사에 지나지 않았다. 굴욕 아닌 굴욕을 겪은 키케로는 자신이 로마라는 거대한 바다에 고작 돌멩이 하나를 던졌을 뿐임을 깨닫고 전보다는 겸손해짐과 동시에 새삼 성공에 대한 각오를 다지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시칠리아엔 키케로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을 간직하는 사람이 적지 않게 존재했다. 그래서 이들이 꾸린 대표단은 기원전 70년 시칠리아에서 사령관을 역임한 폼페이우스의 추천을 받아 키케로에게 전 시칠리아 총독이자 탐관오리인 가이우스 베레스를 고발해 줄 것을 의뢰하고, 마찬가지로 시칠리아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을 간직하고 있던 키케로는 고민 끝에 피호 관계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이를 승낙한다. 이어서 시칠리아로 건너가 지역 인사들의 도움으로 수많은 증거를 확보해 정식으로 베레스를 고발, 변호인의 허를 찌르는 수로 패소하리라는 세간의 예상을 깨고 승소를 이끌어 낸다. 당시 로마 법정에선 고소인과 변호인이 길고 긴 서두를 끝낸 뒤에야 본론에 들어갔는데 키케로는 배심원과 변호인의 동의하에 그런 절차를 생략하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 베레스의 유죄를 입증하는 수많은 증거를 제시해 첫 번째 공판에서 승소를 확정지었다. 반면 베레스의 변호를 맡았던 호르텐시우스는 당시 로마 최고의 웅변가이자 법조인으로 여겨졌으나 이 재판에서 패소하면서 왕좌를 키케로에게 넘기게 됐고, 베레스는 전 재산이 몰수당하는 일만은 피하고자 아직 정식으로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야반도주를 감행해 로마에서 도망치나 훗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재산은 물론 목숨마저 빼앗긴다.
한편 베레스 재판에서 승리한 키케로는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로마의 명사로 부상, 다음 해 그의 노고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저렴한 가격에 곡물을 대량 판매한 시칠리아인들의 지원에 힘입어 성공적인 조영관 임기를 보내고 법정에서는 대개 명망 높은 가문 출신 인사들의 변호인으로 활약해 신참자인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진 끝에 기원전 66년 수석 법무관을 역임하는 등 순조롭게 로마 정계에서 명예로운 경력으로 여겨진 출세코스를 밟아간다. 같은 해 민회에서 당시 전쟁영웅으로 로마인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던 폼페이우스가 지난해 지중해의 해적 무리를 소탕한 일을 칭송하는 한편 그에게 폰토스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의 지휘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지지하는 연설을 해 정치적 기반을 확장해 간다.
임기를 마치고 전직 법무관이 된 기원전 65년, 키케로는 공화정 로마 정무직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집정관 선거를 준비하며 훗날 악연으로 점철될 루키우스 세르길리우스 카틸리나와의 정치적 제휴를 염두에 둔다. 이는 높은 확률로 파트리키[5] 태생인 카틸리나의 존재감이 신참자인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상쇄해주리라는 판단에서 내려진 결정일 텐데, 그런 연유에서인지 이 시기에 쓰인 그의 편지에서 카틸리나는 훗날 서술해낼 불한당이 아닌 긍정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그러나 카틸리나가 파트리키적 오만함을 내비치며 법정에서 변호인 역할을 해주겠다는 신참자 키케로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둘의 관계는 크게 어긋난 것으로 보이며, 키케로는 선거 전략을 수정해야만 했다.[6]
이윽고 다가온 기원전 64년, 키케로는 집정관 선거에 출마해 카틸리나, 안토니우스 히브리다와 각축을 벌인다. 이때 키케로는 부채 말소 등 급진적이고도 무모한 혹은 기회주의적인 정책을 주장해 당시 로마를 휩쓴 불경기로 고통받던 소상점주, 소장인, 인술라 거주자 등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은 카틸리나와 대조적으로 이탈리아 유산자의 보호자를 자처해 기사계급의 지지를 얻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대 로마의 실세라 할 수 있는 옵티마테스[7]가 당선이 유력시되던, 유서 깊은 파트리키 가문 출신이나 전부터 좋지 않은 평이 떠도는, 여러모로 종잡을 수 없는 카틸리나보단 신참자이긴 해도 유산자의 보호자를 자청하는 키케로가 낫다는 판단에 그를 지원하면서[8] 키케로는 신참자라는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수석 집정관에 선출되는 기쁨을 누린다. 참고로 차석은 안토니우스 히브리다, 그다음이 카틸리나였는데, 이는 로마의 선거 제도가 신분차등적이었기 때문이다. 고위 공직자를 선출하는 켄투리아회의 경우 시대별로 비중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공통적으로 가장 부유한 기사 계급부터 차례로 투표를 해 안건이 대한 찬반이 과반수를 넘으면 선거를 종료했는데, 18표를 보유한 기사 계급과 80표를 보유한 보병 1계급의 의사가 합치될 경우 그것만으로도 총 193표가 부여된 켄투리아회에서 반수를 넘어서는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카틸리나에 비해 상위 계급을 주 지지층으로 두었으며 당대 로마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던 옵티마테스의 지지까지 등에 업은 키케로는 승리의 축배를 들고 카틸리나는 패배의 쓴잔을 마시게 된 것이다.

3.2.2. 카틸리나 탄핵


집정관을 역임한 기원전 63년, 어떤 이유에서든 카틸리나의 위험성을 확신하고 여름 무렵부터 그를 주시하던 키케로는 재차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 그의 당선을 막기 위해 원로원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카틸리나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한편 본래 7월로 예정됐던 집정관 선거를 지연시킨다. 카틸리나의 주 지지층인 저소득층은 생업 문제로 인해 연기된 선거 날까지 로마에 머무르거나 선거 날에 맞춰 다시 로마를 방문할 여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는 큰 타격이었다.
또한 소아시아에서 악덕 세리들을 규제했다가 기사 계급의 사주를 받아 개선식이 막혀 있던 루쿨루스의 어려움을 풀어주는 대가로 지원을 얻어 다른 후보인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를 후원하고 선거 날 토가 밑에 흉갑을 착용하고 선거를 주관함으로써 계엄 분위기를 조성해 카틸리나를 낙선시키는 데 성공한다.[9] 반면 연달아 집정관직을 놓친 카틸리나는 정치적-경제적 궁지에 몰리게 된다.
이후 다사다난한 전개 끝에 키케로는 카틸리나의 반란을 진압하고 국부라는 칭호를 선사받는 정치적 영예를 누린다. 이때 그는 '문으로 무를 제압했다'며 자신의 공적을 칭송했으나 키케로의 지지층을 제외한 대다수 로마인은 이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는데, 법리적 근거가 부족함에도 아직 논쟁 중의 혐의자들의 즉결처형을 강행한 데다 당시 로마는 유동성 부족에 따른 불황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채 말소를 위시한 급진적이고 무모한 혹은 기회주의적인 정책을 주장한 카틸리나를 따르는 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는 것은 그 무렵 경제적인 이유로 고통받는 이가 적지 않았음을 시사하며, 키케로와 마찬가지로 기사계급 출신이나 옵티마테스를 로마를 제멋대로 농단하는 집단쯤으로 취급했던 원로원 의원 살루스티우스[10]는 자신의 저서에서 카틸리나를 적지 않은 악덕의 소유자일지언정 본질적으론 고통받는 인민을 위한 투사적인 인물로 묘사했다.
즉 당시 로마가 진정으로 대응해야 할 문제는 경제난이며[11] 그것이 뜻한 바를 실제로 이룰 가능성이 희박함에도[12] 카틸리나가 광범위한 지지자를 모을 수 있던 근본적인 원인이었던 셈인데, 키케로는 근본적인 문제는 외면한 채 무리한 수까지 써가며 신참자인 자신의 위상을 드높여줄 상대적으로 만만한 문제 해결에 매달렸다는 평을 피하기 어려웠다. 예컨대 익명의 한 기록자는 키케로의 집정관 재임기야말로 음모의 원인이며, 나라의 어려움을 자신의 영광으로 바꾸었다고 키케로를 비난했다. 더구나 키케로는 비상시국이라는 이유를 들어 자신이 원로원 최종 결의로 명한 초법적 권한[13]을 이용해 '로마 시민을 재판 없이 처벌할 수 없다'는 규정을 공공연히 깨트리려 했다. 그러자 당시 수석 법무관 당선자 신분이었던 카이사르는 "아무리 나쁜 결과로 끝난 일이라고 해도 애초에 그 일을 시작한 동기는 선의였다"라는 논지의 연설을 통해 이 사례가 훗날 악용될 수 있음을 지적하며 키케로의 주장에 반대, 대신 관련자들을 이탈리아 도시에 유배해 종신형에 처하고 거기에 필요한 비용은 몰수한 그들의 재산에서 충당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여담으로 카이사르의 이 발언은 기록으로 전해지는 한 서양사에서 최초로 종신형으로 사형을 대신할 것을 주장한 사례이다.
카이사르의 연설 이후 원로원의 분위기는 카이사르에게 동조하는 쪽으로 흘렀으나, 카이사르의 정적이었던 소 카토가 즉결처분의 필요성을 강변하면서[14] 원로원의 분위기는 결정적으로 즉결처형 쪽으로 기울게 된다. 반면 키케로가 확대 적용하려 한 원로원 최종 결의에 내재한 위험성을 이유로 키케로의 주장에 반대하던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가 파한 후 키케로를 따르던 기사계급 인사에게 위협을 받았으나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사건에 가담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하여 그를 기소하는 것을 포기한다. 키케로나 소 카토나 심증이 아니라 물증이 있었으면 이 때 카이사르를 같이 몰아서 처벌했을 것이다.
그리고 키케로는 이 논쟁 많은 사건을 진압한 공적으로 원로원으로부터 '''조국의 아버지(pater patriae)'''라는 칭호를 수여받는다.

3.2.3. 추방


하지만 재판 없이 카틸리나를 지지한 고위급 인사들을 처형하고 차석 집정관 안토니우스 히브리다에게 군 지휘권을 부여해 카틸리나와 그를 따르는 무리를 일소한 일은 안 그래도 시큰둥했던 로마 시민들의 반응을 한층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결과 키케로는 집정관에서 퇴임하던 날 호민관 메텔루스 네포스의 거부권 행사[15]와 군중의 흉흉한 분위기에 떠밀려 관례적인 퇴임 연설조차 하지 못하고 자리를 떠나야 했다. 또한 카이사르는 카틸리나 처형에 대한 항의의 의미에서 키케로의 집정관 임기가 만료될 때까지 원로원 회의에 불참하는 한편 과거 사투르니누스를 즉결처분한 일에 가담한 이를 고발함으로써 여전히 키케로가 확대 적용한 원로원 최종 결의의 논지에 동의하지 않음을 암묵적으로 주장했다.
더욱이 기원전 60년에 접어들어 과거 여자들만 참석이 허락된 보나 데아 축젯날, 그날만은 금남의 장소여야 할 대신관 관저에 침입하려 시도했다 발각되는 신성모독이나 다름없는 대형 스캔들을 일으켜 기소된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일을 계기로 키케로에게 앙심을 품고 반목하게 된 파트리키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16]가 호민관이 되겠다는 목적에서 평민으로 신분을 바꾸려 하는 한편 재판 없이 로마 시민을 처형한 그를 기소하겠다고 위협하자, 본격적으로 자신을 변호하고 행위를 정당화할 필요성을 느낀 키케로는 집정관 재임기에 한 연설문을 다듬어 책으로 출판한다.[17]
그러나 이듬해인 기원전 59년, 과거 키케로의 동료 집정관이었으며 키케로에 의해 군 지휘권을 부여받아 카틸리나 무리를 일소한 안토니우스 히브리다가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해 각종 만행을 저지른 대가로 고발당하자, 히브리다에게 유죄가 선고된다면, 이를 발판 삼아 자신을 공격하는 인물이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감지한 키케로나 직접 히브리다 변호에 나서나 패소하고 만다. 히브리다에게 유죄가 선고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과거 카틸리나를 지지했던 많은 이들은 환호했고 심지어 카틸리나의 무덤엔 꽃다발이 바쳐지는데, 이 일의 의미를 섣불리 확대 해석해선 안 되겠으나 피상적이나마 그 무렵 다수의 로마인이 키케로가 필사적으로 정당화하려 한 카틸리나 탄핵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으로 삼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키케로는 법정에서 히브리다를 변호하던 중 여러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데다 승소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 때문인지 평정심을 잃고 그 무렵 자신에게 압박을 가하던 카이사르를 위시한 삼두를 거명해 공격하게 된다. 이 소식을 접한 당년도 수석 집정관이자 그와 반목하던 카이사르는 바로 당일 로마의 최고 신관 자격으로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라는 귀족이 평민의 양자로 입양되는 일을 승인해버린다. 카이사르가 아무 이유 없이 승인한 것은 아니고, 풀케르가 키케로와 사이가 매우 나빴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풀케르 역시 아무 이유 없이 귀족 신분을 버린 것은 아니고, 평민만이 당선될 수 있었던 호민관 자리를 노렸던 것이다. 소원을 성취한 풀케르는 귀족의 3작명법에서 평민의 2작명법으로 개명하여 이후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로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클로디우스는 진짜로 호민관에 당선되었으며, 해가 바뀌고 자신의 임기가 시작되자 재판없이 로마인의 목숨을 앗아간 이를 추방하는 법안을 발의하면서 키케로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위기에 직면한 키케로는 도시를 배회하며 도움을 간청하나 옵티마테스를 위시한 당대 로마 정계의 실력자들은 신참자인 키케로를 위해 발 벗고 나설 생각이 없었기에 형식적인 움직임만을 보였고, 일반 시민들은 클로디우스가 제정한 곡물법에 수혜를 입은 데다 집정관 재임기 경제 문제엔 대응책을 내놓지 않고 카틸리나의 죄를 입증하는데 골몰한 그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유일한 희망은 폼페이우스의 지원이었으나,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도 손을 잡으면서 최후의 희망조차 사라져버렸다. 키케로는 로마에서 정식으로 기소되기 전에 로마를 떠나는 것으로 유죄 선고를 받고 정치적 생명이 끊어지는 일만은 면하려 했으나, 그의 정적들은 그를 기소하지 못하게 되자 법적으로 그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를 국외 추방하는 안건을 통과시켜 키케로의 정치적 생명을 끊어버렸다.
키케로는 이후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전성기의 위세를 되찾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 절망한 키케로는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살을 하려 했으나 자네의 청원으로 간신히 단념했네... 그러나 내 미래에 무슨 희망이 있는가'라고 쓸 정도로 크게 낙담하였다.
하지만 로마의 정국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듦에 따라 키케로는 로마로 귀환할 수 있었다. 로마에선 클로디우스를 중심으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갈등이 전면에 대두했고, 당시 클로디우스 및 그를 후원하는 크라수스와 반목하던 폼페이우스는 언변으로 자신을 방어 및 상대를 공격할 인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때문에 폼페이우스는 키케로의 귀환에 마뜩잖은 반응을 보이는 카이사르를 최대한 달랬으며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직감한 카이사르는 '향후 자신들의 의사에 반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달아 폼페이우스의 의사에 동의한다. 그러자 폼페이우스는 키케로에 대한 국외 추방령을 무효화하는 법안을 발의해 클로디우스를 제외한 대다수 의원의 동의를 얻어 통과시키는 데 성공, 키케로는 지지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로마로 귀환한다.

3.2.4. 정계 복귀와 내전기


로마로 복귀한 키케로는 전성기의 위세를 되찾기 위해 폼페이우스에게 카이사르와의 동맹 관계를 청산하고 자신의 조언에 귀를 기울일 것을 종용하나 카이사르의 외동딸 율리아와 화목한 가정을 꾸린 데다 클로디우스의 공세에 밀려 수세에 몰린 끝에 정치적으로 몰락해 과거의 영향력을 상실한 키케로보다는 집정관 재임기 삼두의 행동대장격으로 혁혁한 성과를 올린 데다 끊임없이 부상하는 카이사르와 협력하는 것이 이롭다고 판단한 폼페이우스는 키케로의 설득에 무심한 반응을 보인다. 또한 기원전 56년, 본래부터 관계가 험악했던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해 붕괴 직전에 다다랐던 삼두의 협력 체제가 카이사르의 개입으로 다시 공고해져 소카토를 위시한 옵티마테스의 공세마저 이겨내자, 카이사르의 압력에서 벗어날 호기라는 판단에서 카이사르에 대한 공세에 나섰던 키케로는 역으로 삼두의 압력에 굴해 그해 여름 원로원 회의에서 카이사르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는 굴욕에 가까운 일을 겪는다. 일이 마무리되자 자신이 직면한 현 상황에 낙담한 키케로는 정계에서 벗어나 저술 활동에 전념한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부인인 율리아가 요절하고 파르티아 원정에 나선 크라수스가 카르헤에서 패사하면서 둘의 사이를 중재할 존재가 사라지자 갈리아에서 엄청난 군공을 거두며 로마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한 카이사르와 그의 부상을 경계하는 폼페이우스 사이엔 차츰 긴장이 감돌게 되고, 그에 따라 키케로 역시 서서히 카이사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때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를 견제할 목적에서 향후 집정관과 법무관은 임기를 마치고 5년이 지나야만 속주 총독 부임이 가능하다는 규정을 신설하는 바람에 당장 속주 총독으로 부임 가능한 인사가 부족해져 예전에 집정관을 역임하고도 속주 총독으로 부임하는 일을 거절했던 키케로가 뜬금없이 킬리키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총독 임기 자체는 성공적이었고, 소소하게나마 군사적 업적도 거둠으로써 개선식을 허락받는 등 조금씩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얼마 후 속주 총독으로서의 임기가 종료되는 카이사르의 향후 지위를 쟁점으로 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및 옵티마테스의 갈등이라는 더 큰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이 시기 대다수 의원은 내전만은 피하길 원했고 카이사르도 합의를 위한 시도가 좌절돼 군사적 수단에 의존하기로 마음먹기 전까진 군사적 충돌만은 피하려 했다. 그래서 카이사르를 지지하여 일종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던 따라서 호민관 쿠리오[18]가 원로원에 제안한 관대한 조건의 타협안은 표결에 부쳐져 찬성 370에 반대 22이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으며, 얼마 후 속주 총독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개선식을 기다리며 로마 외곽에 자리 잡은 키케로도 양자의 타협을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원로원 내 소수 강경파[19]에 의해 이러한 시도는 전부 수포로 돌아간다. 그들은 자신들의 국정 장악력을 증명 혹은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카이사르의 전면적 항복을 원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옵티마테스의 주도하에 카이사르를 표적으로 한 원로원 최종 결의가 가결되나 이에 불복한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을 넘으면서 내전이 발발하자, 키케로는 여러 날에 걸쳐 어느 쪽에 가담할지 고민한다.
그는 숙고 끝에 폼페이우스 및 옵티마테스 세력에 가담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는 카틸리나 탄핵에서 대립한 이후 여러 차례 충돌하며 악화한 카이사르와의 관계, 전부터 카이사르파 인사들을 탐탁지 않게 여긴 것, 폼페이우스와의 우호 관계 및 어찌 됐건 폼페이우스 및 옵티마테스 일파가 공식 정부로서 정통성을 지녔다고 여긴 것 등의 복합적인 이유에서 내려진 결정일 것이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대신 한동안 이탈리아에 머물며 사태의 추이를 관망했으며, 카이사르의 회유에도 응하지 않고 기다리다가 폼페이우스와의 대결에 앞서 후방을 정리하기 위해 현재의 스페인인 히스파니아로 향한 카이사르의 패전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비로소 그리스에 있는 폼페이우스의 진영으로 향한다. 반면 키케로의 사위인 돌라벨라는 전부터 열렬한 카이사르 지지자로 유명했고 이 시기에도 당연히 카이사르 휘하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폼페이우스가 "당신 사위는 어디 있소?"라고 비꼬자 키케로는 "당신 장인과 함께 있소"라는 대답으로 맞받아쳤다.[20]
그러나 키케로에게 폼페이우스 진영에서 머문 나날은 암울함의 연속이었다. 우선 카토는 이탈리아에 남아 카이사르의 걸림돌 역할을 하는 대신 그리스로 건너온 그를 비난했고[21][22], 그는 그대로 작금의 상황에 불만을 품어 자꾸 초를 치는듯한 발언을 일삼은 탓에 폼페이우스의 진영에서 인기가 없었다. 또한 과거 카이사르 휘하에서 복무하며 우호 관계를 구축한 그의 아우 퀸투스는 심정적으로 카이사르파였으나 형과의 의리 때문에 마지못해 동행한 처지였으므로 형제 사이에도 암운이 감돌게 된다. 더구나 키케로는 동생에게 고압적으로 구는 면이 없잖았기에 이전부터 은근히 동생의 불만을 사고 있었다.
그렇게 우울한 날이 이어지는 중, 후방에 남아있던 키케로에게 파르살루스에서 카이사르와 격돌한 폼페이우스가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그로써 내전의 승자가 카이사르임이 대략 판가름 났으나, 후방에 남아있던 옵티마테스 인사들은 카토의 주도하에 파르살루스에서 패주한 인사들을 받아들이고 남은 이중 가장 높은 직책을 역임했던 키케로를 신임 사령관으로 지목[23]하는 등 저항을 이어갈 의지를 다진다. 그러나 키케로는 비관적인 태도를 보였고, 그에 분개한 이들이 칼을 뽑아 들고 목숨을 위협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소란 끝에 군영에서 사실상 추방된다. 설상가상 심정적으로 카이사르파였던 동생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이제 깨져버린 카이사르와의 우호 관계를 이유로 형을 비난하면서 형제의 사이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런 상황에 질려버린 키케로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친구인 아티쿠스[24]에게 '내가 당시 저지른 일에 대해 내 자신도 믿을 수 없네. 내 정신이 잠깐 이상해졌던 모양이야'라는 편지를 쓰며 자신을 질책한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내전 발발 직후부터 대인배를 표방하여 자신과 대립한 인물을 처벌하지 않았다. 이후 집권해서도 관용(클레멘티아)이란 말을 화폐에 새길 정도로 관대함을 표했던 카이사르는 [25][26] 승자로서 로마로 귀환하던 중 환영인파 속에서 키케로를 발견하자 불러내 말머리를 나란히 함으로써 그를 대우하고, 이후에도 키케로가 폼페이우스 및 옵티마테스를 지지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 오히려 키케로를 과거 자신에게 맞섰던 이들과 소통하는 창구로 삼고 친교를 다지기 위해 그의 별장을 방문하는 등 그를 우대한다.[27] 키케로도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패전 인사들에 대한 사면을 이끌어 내는 등 나름대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편 내전의 승자 카이사르는 명실상부 유일무이한 최고권력자가 됐으나 제정 수립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진 않았기에 공화정 존속에 대한 희망이 남아있었다. 게다가 이전까지 카이사르는 나름 헌법주의자의 모습을 보였다. 키케로는 지금껏 카이사르가 보여준 모습에 기반해 술라처럼 독재관을 역임해 현재 로마가 당면한 혼란을 수습하고 공화정을 존속시키리라 기대했다. 당시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유지하리라 생각했으며 이런 입장을 보이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3.3. 노년기



3.3.1. 카이사르 암살 이후


그러나 이런 표면상의 우호관계는 키케로가 상류 사회의 여론을 염두에 두고 우티카에서 자결한 카토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은 책을 집필하고 뒤늦게 그 소식을 접한 카이사르가 키케로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직접 카토를 비난하는 내용의 책을 집필하는 일이 일어나면서 급격히 냉각하고, 키케로는 정계에서 멀어져 저술 활동에 전념한다.
한편 기원전 46년 10년 기한의 독재관에 취임한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 자신의 지지자 삼백여 명[28]을 원로원 의원으로 만들고 이들의 지지를 발판삼아 종신 독재관이 된다. 이에 카이사르가 최고권력자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다고 판단한 브루투스, 카시우스를 위시한 적지 않은 수의 인사들은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를 암살한 뒤 키케로와 접촉한다. 키케로는 암살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이들의 호출 이후 다시금 로마 정계의 핵으로 부상하게 되는데 이는 공식 석상에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언변과 명성을 갖춘 정치인은 그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이사르를 암살한 소위 공화파 인사들과 키케로에겐 그들의 명분을 뒷받침해줄 힘이 부족했으며, 로마인들은 전쟁영웅이자 전부터 여러 방면에서 자신들의 권익을 옹호해온 카이사르에게 우호적이었다. 다시 말해, 대다수 로마 시민은 소위 공화파 인사들이 내건 명분에 거의 공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키케로나 카이사르 모살자들이 사태의 주도권을 장악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를 증명하듯 안토니우스의 주도하에 카이사르파와 공화파 사이의 타협이 이루어진 것도 잠시, 이내 공화파 인사들은 여론과 상황에 떠밀리듯 로마를 떠나야 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키케로는 카이사르 모살자들이 안토니우스도 함께 제거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했으나, 이 일은 도리어 키케로의 정치적 안목이 후대에까지 자자한 명성에 미치지 못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카이사르 암살은 참주 살해라는 명분하에 결행됐으며 그렇기에 부분적이나마 카이사르파에 속한 인사들에게서도 공감대를 끌어내 카이사르파와 카이사르 모살자들 사이의 타협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반면 키케로의 말처럼 카이사르를 넘어 안토니우스까지 제거되었다면 이 일은 카이사르파 전체에 대한 공세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암살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타협의 가능성이 아니라 카이사르파의 칼날이었을 것이다. 당장 카이사르파인 레피두스가 암살 소식을 접하고 군대를 이끌고 로마 시내까지 들어왔을 때 그를 멈춰세운 인물이 다름 아닌 안토니우스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워낙 다채로운 인사들의 연합이었던 카이사르파는 카이사르가 존재했기에 하나로 결집한 세력이었으며, 구심점인 카이사르가 사라지자 급속히 결집력을 잃고 와해된다. 안토니우스는 당년도 집정관이란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세를 불리는 등 그럭저럭 정국을 주도해나갔으나 혼란을 완전히 가라앉히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으며, 카이사르의 유산상속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에 입성하면서 정국은 다시 혼란에 빠진다.

3.3.2. 필리피카이


키케로는 점차 위세를 더해가는 안토니우스의 행보에 위협을 느끼고 로마를 떠나 그의 집정관 재임기가 끝날 때까지 아들이 유학 중이던 아테네에 떠나려 했지만 두 차례나 역풍에 의해 이 시도가 실패했다. 그가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로마의 미래를 위해 가장 중요했을 카이사르 사후의 6개월간이나 원로원 회의에 불참해 안토니우스에게 진짜 중립이란 도망치지 않는 것이라 비꼼당한다. 키케로 숭배자들은 키케로를 로마 공화정을 위해 카이사르에게 맞서고 일생을 헌신한 위인처럼 묘사하길 즐기나 원래 키케로는 이런 인간이었다. 더욱 황당한 사실은 2차 필리피카이의 주 내용이 자신은 도망쳤던 시기 난관을 무릅쓰고 사태 수습을 위해 애썼던 안토니우스(전부터 키케로와 사이가 별로긴 했다)에 대한 중상모략이라는 것이다. 대체 얼마나 철면피라야 이런 일이 가능할까.
어쨌든 키케로는 공화정의 부활을 위해선 카이사르파 전체를 제거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단적으로 말해 카이사르 사후 키케로의 정치적 목표는 카이사르 이전 시대로의 회귀로 요약할 수 있다. 이에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군대에 영향력을 행사할 목적으로 새로운 카이사르인 옥타비아누스에게 접촉하고, 이전부터 키케로를 아버지라 부르며 존경심을 내비치던 옥타비아누스는 이에 응해 이유는 다를지언정 안토니우스의 타도를 원하던 두 사람의 연대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안토니우스에게 맞설 군사력을 확보한 키케로는 자신의 정치력과 언변을 총동원해 카이사르파의 절멸이라는 속내를 감춘 채, 일단 상황을 독재정을 꿈꾸는 국가의 적 안토니우스와의 대결로 몰아가는 작업에 착수한다.
이때 키케로는 원로원에서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라고 요청하며 그를 "저 검투사의 육체에 두뇌라고는 없는 이"로 칭하는 등 인신공격이나 다름없는 언사를 사용해 신랄하게 비난했으며, 그가 안토니우스에게 가한 인신공격은 그의 명성과 함께 여전히 회자된다. 예컨대 키케로의 혹평에 의해 안토니우스는 정치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검투사 같은 놈이라는 인식이 박혀있지만, 실제로 그 정도로 정치 감각이 없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아테네의 연설가 데모스테네스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를 탄핵한 연설을 따라 '필리피카이(필리포스 탄핵)'라고 명명된[29] 이 연설문은 카틸리나 탄핵에 버금가는 명문장이라고는 하나,[30] 정작 그 말을 전해 들은 안토니우스의 심정은 키케로에 대한 분노로 들끓었을 것이다. 참고로 필리피카이는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대두 이후 정세가 악화되자 모종의 대응안을 실행하기 위해 로마를 떠난 이후 작성되고 발표된 연설문이다. 즉, 일종의 빈집털이였던 셈이다. 또한 키케로는 연설 때마다 "풀비아를 아내로 맞이한 남자는 클로디우스처럼 비명횡사한다"는 말을 되풀이 해 안토니우스의 아내아 풀비아에게도 어그로를 끌었는데, 풀비아는 안토니우스와 재혼하지 전에는 클로디우스와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필리피카이는 '''14번에 걸쳐''' 나온 연설이다.
그리고 마침내, 키케로는 과거 자신을 로마 최고의 웅변가이자 법조인으로 군림하게 해준 뛰어난 언변을 이용해 안토니우스를 정점으로 하는 위태로운 균형상태를 완전히 깨뜨리고 원로원 내부의 분위기를 장악해 자기 뜻에 따르게 하는 데 성공, 독재정을 꿈꾸는 공적 안토니우스 타도라는 명분과 새로운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보상을 미끼로 뜻을 이루는 데 필요한 인사들과 병력을 얼마간 규합해내는 일에 성공한다. 이 공작이 어찌나 절묘하고 그럴듯했는지 먼 히스파니아 총독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같은 카이사르파에 속했던 인사들마저 키케로에게 공화정 수호의 기치에 동참하길 원한다는 의사를 전해왔고, 내심 카이사르파의 절멸을 꿈꾸고 있던 키케로는 이러한 정황에 고무된다.
마침내 안토니우스에게 부여된 집정관으로서의 권리가 만료된 기원전 43년 1월, 이전까지 거듭 행해진 키케로의 연설의 영향으로 안토니우스를 적대하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룬 원로원은 집정관 히르티우스와 판사의 주도하에 옥타비아누스에게 전직 법무관급 권한을 부여하고 휘하 장병에게 보상을 약속하는 등 안토니우스를 타도하기 위한 준비를 갖춰나간다. 이때 키케로는 주전파의 대표로서 온건파의 의견을 묵살하고 '''옥타비아누스의 정치적 보증인을 자처'''하는데,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이 무렵 키케로는 그전까지 옥타비아누스에게 보냈던 의혹의 시선을 거둬들임과 동시에 자신이 아직 10대의 어린 나이인 옥타비아누스를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31]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으로 키케로가 자신의 역량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무티나에서 당년도 집정관 히르티우스 및 판사와 연합해 안토니우스를 패퇴시킨 뒤, 집정관인 히르티우스와 판사의 사망을 틈타[32] 군대를 장악하고 키케로의 뜻에 따를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한다.
사실 옥타비아누스는 처음부터 자신만의 속셈을 지니고 키케로에게 접근했으며, 그가 키케로를 아버지라 부르며 따른 이유는 아슬아슬하게나마 안토니우스를 정점으로 하는 체제가 유지되는 상황이 키케로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이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즉 키케로가 옥타비아누스를 이용해 카이사르파의 분쟁을 극대화해 궁극적으로 그들의 절멸시킨다는 계산을 하고 있던 것처럼, 옥타비아누스도 키케로를 이용해 안토니우스의 위세에 타격을 가하고 공식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아 입지를 다진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33] 또 사람이라면 당연한 반응이겠으나 키케로는 클로디우스에 의해 정치적으로 몰락한 후 여러 차례 전성기의 영광을 되찾기를 갈망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행보를 보였는데, 옥타비아누스는 그간 행보를 통해 키케로의 내면에 존재하는 공명심을 정확히 간파하고 그와의 연합에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정리하자면 정치적으로 옥타비아누스가 키케로보다 고단수였고, 과장하자면 키케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옥타비아누스의 손 위에서 놀아난 셈이었다. 미래의 아우구스투스가 키케로에게 내린 평가는 제법 의미심장하다. 아우구스투스가 보기에 키케로는 학식이 뛰어난 교양인이자 그 나름대로 애국자였지만, 동시에 딱 그 정도의 평가만을 내릴 수 있는 인물이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더욱이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상속자와 카이사르의 군대를 이용해 카이사르파의 절멸을 꾀하고 있으면서도 공공연히 "쓸모가 다하면 새로운 카이사르도 제거할 거다"란 취지의 말을 입에 담는 신중치 못한 모습을 보였는데,[34] 무티나 전역이 자신의 바람처럼 안토니우스의 파멸로 귀결된 것처럼 보이자 다시 한번 지나치게 일찍 승리를 확신하고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군 지휘권을 부여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겐 그의 휘하에 들어가라고 명하는 등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옥타비아누스도 제거한다는 속내를 짐작할 수 있는 움직임을 보이는 신중치 못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미 군대를 장악한 옥타비아누스는 병사들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키케로가 주도하는 원로원의 지시를 거부하고 약속된 보상을 이행하라고 요구한다. 카이사르의 군대는 가뜩이나 전우에게 칼을 겨누는 상황을 기꺼워하지 않았는데 무티나 전투 이후 키케로가 주도하는 원로원은 임의로 병사들에게 약속한 보상금을 절반으로 삭감하려 했기 때문이다. [35]
옥타비아누스는 그들의 반응에 적절히 대응해 키케로와 그를 따르는 일단의 무리의 최종 목표가 카이사르파의 절멸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도록 한다. 이 무렵 옥타비아누스의 목표는 누구나 인정할 한 세력의 수장으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카이사르의 상속자라는 입장과 그 무렵 제국 동부에 웅거하고 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세력을 고려하면 이미 키케로가 주도하는 원로원과 척을 지기 시작한 그에게 카이사르파 세력과의 연합은 선택이 아닌 필수에 가까웠다. 따라서 옥타비아누스는 원거리에 머물고 있어 사태의 추이에 제대로 따라오지 못한 채 분열돼있던 서방 속주의 카이사르파 세력을 단결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여담으로 이 무렵 작성된 글에 의하면, 안토니우스 역시 카이사르파의 절멸이라는 키케로의 진의를 파악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카이사르 사후 지속해서 분열돼있던 카이사르파는 고위인사부터 하급장병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단결, 원로원파 인사인 데키무스 브루투스 휘하의 장병들마저 지휘관을 버리고 옥타비아누스를 따르는 사태가 발생한다.[36] 훗날 제2차 삼두정의 일원이 되는 레피두스도 상황이 독재정을 꿈꾸는 공적 안토니우스와의 대결로 보인 시점엔 사태 수습을 위해 안토니우스와의 중재역을 자청하는 등 중립적 태도를 취하면서도 그럭저럭 키케로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으나,[37] 카이사르파간의 분쟁을 원치 않는 군대의 요구와 점차 명확해지는 키케로의 목적에 따라 중립적 태도를 버리고 안토니우스와 손을 잡고 키케로를 적대하는 등 자신이 카이사르파 인사임을 분명히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당장 활용 가능한 군사력이 사라져 사면초가의 상황으로 몰린 키케로는 그 무렵 로마를 떠나 마케도니아 속주에서 머물며 군세를 확충하던 카이사르 암살의 주역 마르쿠스 브루투스에게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할 것을 거듭 촉구하나, 이전까지 군사적 충돌을 염두에 두고 옥타비아누스와의 협력을 꾀하는 키케로를 만류하는 등 가급적 평화로운 사태 해결을 바랐으며[38] 상황이 바뀐 현재 자신이 이끄는 군세만으론 이탈리아로 진군해 재결집하기 시작한 카이사르파의 군세에 맞서는 일은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이는 브루투스는 키케로의 요청에 따르는 대신 서서히 가시화되는 카이사르파와의 군사 충돌에 대비해 시리아 속주를 장악하고 군세를 불리고 있던 카시우스와 합류하기 위해 동진한다.[39] 한편 로마의 키케로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여러 타협안과 회유안을 제시하나 옥타비아누스는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이후 로마에 입성해 정식으로 집정관 직에 오른 옥타비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북상해 이탈리아 북부에서 남하하는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를 주축으로 한 카이사르파 세력과 접촉,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카이사르파 간의 분쟁 종식을 원하는 군심을 달래고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제국 동부에서 막강한 세력을 구축한 브루투스 및 카시우스의 세력에 맞서기 위해 표면적으로나마 과거의 앙금을 털어내고 안토니우스와 화해한다. 정국을 장악한 제2차 삼두는 살생부를 작성하는 한편 그들이 이 관계를 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증명할 목적에서 각자 가까운 이를 한 명씩 희생제물로 내놓기로 한다. 안토니우스는 무티나에서 패한 자신을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는 데에 동의한 외삼촌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레피두스는 그들을 적대하며 키케로를 지지한 형 레피두스 파울루스를, 옥타비아누스는 훗날 자신을 제거하겠다는 말을 입에 담은 한때의 아버지 키케로를 희생제물로 지명한다. 여기서 최종적으로 카이사르파의 절멸을 꿈꿨던 키케로는 셋 모두 더 나아가 카이사르파 전체의 공적이라 할만했는데, 특히 신랄한 인신공격에 시달렸던 안토니우스는 키케로에게 크게 분노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키케로는 그의 죽음에 열을 올린 안토니우스의 의지와 레피두스의 동의 그리고 옥타비아누스의 묵인하에[40]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가 지명한 세 명의 희생제물 중 유일하게 목숨을 잃는다. 안토니우스의 희생제물인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그의 누이이자 안토니우스의 어머니인 율리아 안토니아의 탄원에 힘입어 사면받았고, 레피두스의 희생제물인 레피두스 파울루스는 레피두스의 은근한 지원과 방조에 힘입어 로마에서 탈출해 브루투스의 세력에 합류하는 데 성공하나 필리피에서 재차 카이사르파에게 패한 후 사면을 허락받고 밀레토스에 칩거한다. 성격은 다르지만 지명된 이가 목숨을 부지하는 일은 제2차 삼두정이 작성한 살생부의 별난 특징이기도 하다. 이들이 살생부를 작정한 근본적인 이유는 정적 숙청보단 군자금 확보 쪽에 가까웠다. 따라서 군심을 다잡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처형이 필요했던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인물이 아닌 이상 재물이 확보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긴듯하며, 적절한 목숨값을 내놓으면 사면을 사는 일도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제2차 삼두정이 작성한 살생부는, 원로원 의원 130명과 기사계급 인사 2천여 명의 처형이 아닌 추방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3.4. 최후


플루타르쿠스가 쓴 키케로의 열전에 따르면 키케로의 최후는 이렇다. 키케로를 체포하러 온 호민관 포필리우스, 백부장 헤렌니우스와 병사들이 그의 자택에 쳐들어오자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때, 키케로의 아우 퀸투스[41]의 해방 노예인 필롤로구스가 키케로의 가마가 오솔길을 따라 바다를 향해 갔다고 말했다. 포필리우스는 우회하여 달려갔고, 헤렌니우스는 숲길을 따라갔다. 추격당한다는 것을 안 키케로는 그 자리에 가마를 멈추도록 했다. 키케로는 왼손으로 턱을 만진 채 그를 죽일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키케로가 가마 밖으로 머리를 내밀자 헤렌니우스는 그 목을 치고 손도 또한 잘랐다. 헤렌니우스가 그를 죽이는 동안 주위의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플루타르쿠스 말고도 키케로에 대한 다른 기록이 있어서 키케로의 최후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살생부에 올랐던 인물들은 목을 광장에 전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키케로의 경우 안토니우스에 대한 인신공격을 감행한 대가로 그 글을 작성하는 데 사용된 손까지 잘려서 전시됐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먼 훗날, 아우구스투스의 손자가 키케로의 저작을 읽던 중 할아버지에게 발견되자 감추려고 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받아들고는 잠시간 읽다가 이윽고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고 한다.

λόγιος ἁνὴρ, ὦ παῖ, λόγιος καὶ φιλόπατρις.

'''교양있는 사람이었지, 얘야. 교양있는 사람이었어. 그리고 애국자였고.'''[42]

[43]

카이사르 사후 정세가 악화해 로마를 떠난 이후 여러 차례 서신을 교환했으나 군사 활동을 비롯한 여러 사안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종국에 이르러선 서로를 비난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카이사르 암살의 주역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소아시아에서 키케로의 최후를 전해 듣고 그의 죽음을 부끄러운 것으로 평했다.

4. 평가와 사후의 영향


그를 긍정적으로 여기든 부정적으로 여기든, 후대에 키케로는 그의 최후가 로마 공화국의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묘사될 만큼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4.1. 업적 및 긍정적 평가


키케로는 야심이 높고 자기 자랑도 심했지만 남을 시기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가 쓴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그는 자기를 칭찬하는 사람에게나 비난하는 사람에게 언제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중략)

키케로는 시칠리아에 재무관으로 가기도 했고, 카파도키아와 킬리키아의 총독으로 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시대는 악덕이 판을 치고 있었던 때였다. 그래서 로마의 장군이나 총독들은 공금을 몰래 챙기는 것은 오히려 비겁하다는 듯이 아예 드러내놓고 약탈하곤 했다. 그 지방 주민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그것이 너무 지나치지만 않으면 훌륭한 총독으로 이름을 떨치던 떄였다. 그러나 그런 시대에 살면서도 키케로는 돈에 대해 무관심했으며, 어질고 너그러운 태도로 한층 더 큰 명성을 얻었다. 그는 집정관을 지낼 때도 카틸리나의 내란을 잘 다스려 칭찬을 받았으며, 1인 집정관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때에도 키케로는, "통치자가 공정한 정치를 해야만 나라에 재난이 없다"는 플라톤의 말을 뚜렷이 증명해 보였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플루타르코스

우리는 기나긴 고대 로마 역사에 있어 남녀를 막론하고 다른 누구보다 키케로의 생애와 성격을 더 많이 알고 있다. 그는 공화정 말기에 관해 가장 귀중한 개인의 사료를 제공할 뿐 아니라, 당시의 극적인 사건들에 적극 참여한 바 있다. 무엇보다 키케로는 자신의 저술들을 통해 동시대인인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율리우스 카이사르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는 결점들을 지닌, 일관성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상주의자이고 원칙주의자이며 용감한 인물이었다. 그는 무너져가는 공화정을 부질없이 수호하느라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

(중략)

편지에서는 또 연설가이자 철학자인 키케로의 결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약하고 우유부단하고 허영심 많고 변명이 많으며, 종종 자기 자신과 남들에 대해 그릇된 판단을 내렸다. 동시에 총명하고 사려 깊은 이상주의자의 모습과 함께 때때로 영웅적인 모습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이상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다. 종종 그렇게 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자신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키케로는 궁극적으로 자기 이상을 수호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카이사르보다 1년 반을 더 살았지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후일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끄는 제2차 삼두정의 명령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러나 키케로에게 알맞은 묘비명을 마련해준 사람은 바로 아우구스투스였다. 키케로의 작품을 읽고 있는 손자를 보자, 그는 책을 집어들고 한참 읽은 다음 돌려주며 말했다. "얘야, 그는 학식이 높은 분이란다. 학식이 높을 뿐 아니라 조국을 사랑했지."

「로마 공화정」, 데이비드 M. 귄

세계사의 어느 시대도 하나의 인격 속에 정치가이자 철학자로서 그(키케로)보다 더 위대한 자질을 갖춘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권위는 엄청난 무게를 갖는다. 권력의 세 가지 요소를 지지하는 그의 결연한 주장은 변할 수 없는 근거 위에 서 있다. 법은 정의를 구현하고, 측정하고, 또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시간이 흘러도, 법은 다른 정치체제 속에서는 확실하게 보호될 수 없다. 공화정이라는 이름 자체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인민의 재산이 입법을 통해 주장되고, 정의가 지배하도록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존 애덤스[44]

키케로는 사후 많은 정치인들과 철학자들에게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동시대인보다 후대인에게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심지어 제정 로마시대 때도 그러했다. 그는 공화주의자로서 공화정을 지키려고 애썼지만 결국 그 뜻을 실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실패했으나 문학, 철학면에서는 많은 업적을 남겨 로마를 대표하는 철학자, 문학가로 아직도 그 이름을 떨치고 있다. 내용 자체는 그리스에 비해 아주 얕고 천박하다는 혹평도 있으나, 키케로는 로마인으로서는 '그리스나 동방(이집트 포함)에서 수입한 학문'이 아닌 로마인으로서 로마의 철학과 문학을 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인물로서 높게 평가되고 있다. 또한 플라톤의 계보를 잇는 이상주의적 스토아 철학과 그 반대로 매우 현실적인 정치학 및 수사학을 결합하는 어려운 일을 해냈으며, 그 결과 공익을 추구하는 공화정 로마만의 철학을 보여주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자신의 철학에 맞게 활발한 정치적 활동을 벌였는데, 위인 중에도 키케로처럼 덕업일치와 출세와 재산까지 전부 이루어낸 경우는 정말 드물다.[45] 또한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는 글 자체도 엄청나게 잘 썼다. 비슷한 인물로 카토가 있으나, 그는 저술을 많이 남기지 않은 편이다.

그러니까 키케로의 고유한 [철학적] 기여는 무엇보다도 다음에서 찾을 수 있다(이는 단순 번역을 통한 그의 철학적 기여와는 구별해서 보아야 한다). 키케로의 작업 방식은 이렇다. 키케로는 각 [철학] 학파 중에서 각기 학파를 대표하고 그 학파를 집약적으로 부여줄 수 있는 저자를 고르고 그들의 입장과 견해를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진술한 다음, 각각의 입장과 견해를 비판적으로 접근하는데, 이 과정에서 키케로는 표현 양식의 문학적 맥락에 따라 자신의 고유한 척도를 탐색한다. 그러니까 [이를 통해서] 자기가 수집하고 정리한 각 학파의 교리와 입장을 단순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개별 학파의 이론에 대해서 비판적 접근과 논의를 제공하자는 것이 키케로 [철학의] 근본 특성이라 할 수 있다. (···) 키케로의 저술들은 이러한 점에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철학자들의 생애」] 모음집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러한 키케로의 특징은 현대 독일의 대학 강단에서 진행되는 철학 교수들의 강의 진행 방식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점도 이 자리에서 언급해야 할 것이다. 정신-사상의 발전에 대한 해명과 해석 그리고 이에 대한 비판적 접근과 전승되어온 철학 이론들의 합리적 재구성이 적어도 최근 10년 동안 독일 대학 강단의 [강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철학 교수들이 세미나와 독강형 강의(Vorlesung)에서 하는 강의 방식은 키케로가 「최고 선악론」에서 실제로 실연해 보였으며 그가 간략하게 요약-제시했던 작업 방식과, 내 생각에는 근본적으로 전혀 구별이 가질 않는다.

Gunther Patzig,[46]

Cicero als Philosoph, am Beispiel der Schrift "De finibus", Gymnasium 1979(86), p. 311 인용.

또한 키케로가 남긴 수많은 저술들은, 후대의 공화주의자들에게 사상적 뿌리가 되어왔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새로운 카이사르들이 출현할 때마다, 역시 수많은 키케로들이 출현하여 Res publica(공공의 것, 의역하면 '공화국'), Res populi(인민의 것)를 부르짖었다. 키케로들은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권력분립 및 상호견제 만큼은 양보할 수 없으며, 이것이 무너진다면 인민은 독재자의 노예로 전락할 뿐이라고 호소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훗날 수많은 독재자들의 롤모델이었다면, 키케로는 훗날 수많은 공화주의자들의 롤모델이었던 것이다. 비록 살아서는 옥타비아누스라는 새로운 카이사르의 제물이 되어버렸지만, 죽어서는 수많은 카이사르들을 침몰시킨게 바로 키케로이다. 또한 키케로는 단순히 기존의 체계를 지키는 것만을 고집하지 않고, 저서 『법률론』에서 공화정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과 개혁적 방안들을 제시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기에 "아무런 대안 없는 극렬수구파" 같은 비판을 그대로 듣기도 어려운 인물이고, 동료 귀족들에 대한 단순한 예스맨도 아니었고, 플루타르코스가 저술했듯이 개인으로서도 청렴했다.
또한 공화정 로마의 법 체제는 원로원의 지나친 권한 등 21세기의 관점에서는 여러모로 미흡한 점이 많다고는 하지만, 당대 기준으로는 충분히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체제였다. 물론 로마 공화정에 대한 평가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게 사실이다. 본질적으로 소수의 금권정치였던 당대 로마 공화제의 가치를 후대인들, 특히 근대인들이 지나치게 과대평가한다는 의견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키케로에게 그 나름대로 공화정 로마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는 평가조차 부여하지 않는 것은 지나치게 인색한 처사일 것이다.

그는 인적이 끊긴 길을 따라 쫓아오는 추적자들을 조용히 기다린 끝에 기원전 43년 12월 7일에 살해되었다. 그는 운명해 가던 공화정을 지키려다가 희생된 순교자였다. 그 연사의 가장 유력한 도구였던 혀와 오른팔이 로마 광장의 연단에 못박힌 채 걸렸다. 그것은 삼두들에게 반대하는 자는 이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한 잔인한 조치였다.

키케로가 안토니우스를 비판한 것은 무모하고 단견적인 행위였을 수도 있지만, 그는 공화정 말기에서 개인적 영예와 위신을 위한 귀족들간의 편협한 정쟁을 초월하는 정치적 식견을 지닌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가 품었던 공화정의 이상, 즉 이탈리아 전역의 공적 있는 귀족들과 기사 계층에서 선별한 한 사람의 지식인 엘리트의 통치를 받는 공화정의 이상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 순진하고 온정주의적(paternalistic)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기 자신의 편협한 이기심의 한계를 넘어선 관심사들에 기초하여 더 나은 세계를 지항하여 세운 이상이었다. 그것은 그의 동료 의원들, 심지어 스토아 학자연하던 카토와 브루투스에게조차 해당되지 않았다.

Friz Moritz Heichelheim, 『하이켈하임 로마사』 中

키케로가 바라본 이상적인 공화국은 법이 지배하는 국가였고, 정무관에게 행정권을, 원로원에게 권위를, 인민에게 자유를[47] 부여하는 국가였다. 그리하면 그 나라의 인민들은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면서 일하고, 엘리트들은 지위와 위신에 걸맞는 성취감을 누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또한 키케로의 정치적 숙원은 자신의 출신인 기사계급과 원로원 주류인 귀족계급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 화합을 이뤄냄으로써 공화정에 안정에 기여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결국 공화정이 무너지면서 실현되지 못한다. 결국 키케로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는 모두 키케로가 바라보았던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긍정적인 면에서 보자면, 키케로가 바라본 이상국가는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의 유럽인들이 바라본 가장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에 상당히 부합한다. 심지어 제정 로마 역시도 이념적으로는 스스로를 공화국으로 바라보았으며, 중세에도 근대에도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지던 체제는 '강력한 행정권자'와 '권위를 지닌 엘리트'와 '여론'이 균형을 이루던 혼합정 체제였다. 웃기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군주들은 키케로의 논리를 인용하여 자신들이 행정권을 휘두르되 엘리트의 권위와 여론을 존중하는 군주라고 옹호하였고, 엘리트들은 키케로의 논리를 인용하여 군주 혼자 다 해먹으면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인민들은 국가는 Res publica(공공의 것)라는 키케로의 논리를 좋아했다.[48] 이렇듯 그의 논지는 어느 쪽이든 좋게 해석할 여지가 존재했기에 훗날 군주, 귀족, 부르주아, 공화주의자, 급진론자 등에게 모두 수용된 것이다. 엘리트들의 권위를 옹호하는 키케로의 논리는 오늘날에는 그 호소력을 상당히 잃었으나, 제아무리 여론이 원하더라도 견제가 불가능한 절대권력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공화주의적 호소는 여전히 유효하고 설득력이 있다.
이러한 면모에서 볼 때, 키케로가 민중에게 대하는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키케로는 새로운 법안을 추진하여 민중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되 체제를 흔들 수 있는[49] 방법은 비판을 하였으나, 체제를 흔들지 않고 그 건전성을 올리는 틀 내에서는 인민들의 유익함을 추구하는 행보를 보였다. 특히 그가 킬리키아 속주와 시칠리아 속주에서 보인 행보는, 그가 공직자로서 품고 있던 사상을 엿볼 기회를 제공한다.

로마에 흉년이 들어 식량이 부족했을 때 키케로는 재무관으로 임명되어 시칠리아로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강제로 식량을 모아 로마로 보냈으므로 섬사람들은 그를 무척 원망하였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공정하고 너그럽게 일을 처리하는지를 차차 알게 되자, 그들은 키케로를 지금까지의 어느 총독보다 더 존경하게 되었다.

키케로는 파르티아에서 전사한 크라수스 2세의 뒤를 이어 복점관이 되었다. 그리고 곧 킬리키아의 총독이 되어, 보병 1만 2천 명과 기병 2천 6백 명을 거느리고 그곳으로 건너갔다. ··· 그 뒤 파르티아군과 싸우던 로마군이 크게 패배하자 킬리키아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킬 기미를 보였다. 그래서 키케로는 온화한 정책을 써서 그들을 가라앉히고, 다시금 로마에 순종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여러 나라의 왕들이 보내는 선물을 하나도 받지 않았고, 각 지방에서 베풀던 성대한 제사나 잔치도 중지시켜 주민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 또 그는 많은 공금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일을 완전히 뿌리뽑아 각 도시 주민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으며, 손해를 변상한 사람에게는 그 이상의 벌을 주지 않았음은 물론 시민으로서의 권리도 보장받을 수 있게 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위의 두 행보에서 알 수 있듯이, 공직자로서 키케로는 기존의 틀을 깨지 않고 여건이 허락하는 한 자신이 모범을 보이고 공익을 모도하는 등 온건하게 처신하는 데 힘썼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거의 모든 공직자가 자기 재산을 불릴 장소쯤으로 취급한 속주에서 활약할 때 장점이 극대화되어 성공적인 임기를 가능케 했다.[50] 그리고 이런 면모가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키케로는 신참자라는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호자를 자청한 이탈리아 유산자들의 지지에 옵티마테스의 지원이 더해지면서 집정관에 선출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마르쿠스: 퀸투스, 자네는 호민관직의 폐해를 명백하게 간파했지만,[51]

무릇 사물을 비판함에 선한 점들은 제외하고 악한 점만 열거하고 폐단들만 선정하는 것은 불공정하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통령직 역시 비난을 받을 수 있지. 내가 일일이 꼽고 싶지는 않지만 통령들의 범법행위도 얼마든지 자네가 수집할 수 있을 것일세. 나도 호민관의 저런 권한에 나쁜 면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하네. 그러나 저 제도에서 시도하는 선(善)은 저런 악이 없이는 달성하지 못할 것이네. ··· "그렇지만 인민이 호민관한테서 선동을 받는 수가 많다!"(라고 말해지지만) 또 그만큼 호민관한테서 무마되는 수도 많다네. 호민관들의 집단이 하도 가망이 없어서 열 사람 가운데 한 명도 온전한 정신이 아닌 그런 사태가 가능하겠는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본인을 파멸시킨 사람은 거부권을 행사하다 무시만 당했을 뿐 아니라 아예 정무직에서 제거당한 인물이었지. 그러니까 그를 몰락시킨 것은 거부권을 행사하는 동료에게서 권한을 박탈한 바로 그 조처가 아니고 무엇인가?[52] ··· 참으로 선량하고 다정한 아우님. 호민관 권력과 충돌한 우리의 사건은 호민관직 자체와는 아무런 시비가 없었네.

키케로, 『법률론』 3.10.23-24

또한 키케로는 대중주의자는 결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민의 유익함을 등한시한 인물도 아니다. 특히 『법률론』의 3권에서는 키케로 나름의 개혁안이 돋보인다. 정무직을 수행하는 공무원에게는 명예로운 퇴직을 권장하되[53] 퇴직 공무원에게 면책특권을 부여하지 않는다.[54] 당시의 전관예우 제도인 '무임소 사절'[55] 제도를 제한하고자 하는데 이것은 키케로 자신이 집정관 시절 때 폐지를 시도했으나[56] 제한을 가하는 데 그쳤고, 이번의 법안에서 구체적 법조항으로 그 폐지를 다시 시도한 것이다. 또한 그는 정무관과 원로원의 청렴의무도 규정하고,[57] 호구조사관이 청렴문제를 감독할 권한을 갖는다고 규정한다. 이는 원로원의 횡포를 막기 위함이다. 또 한 투표로는 한 안건만 취급하게 해서 일괄투표에 의한 정치타협을 막으려고 시도했고, 원로원 운영세칙으로 출석의무를 규정하였으며, 각자가 사전에 발언을 신청해 그 순서대로, 한 사람씩만 발언하자는 제안을 하여 장시간 발언으로 인한 지연작전을 펴지 못하게 의도했다. 또한 민회에서의 폭력을 금지하려고 했고 그런 사태에서는 사회자가 책임을 지게 하였고, 민회나 정무관의 결정에 대하여 거부권(veto)을 행사하는 자는 국가에 공헌하는 용기 있는 인물로 간주되어야지, 정권에 도전하는 정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도 새로 넣었다.[58] 물론 키케로의 이러한 개혁조치들은 공화정을 밑바닥부터 뒤집는 정책이 아니라, 공화정이라는 기본적인 체제를 유지하고 사회 전체에서 두루두루 합의되어있는 가치를 보호하되, 체제의 건전성을 높이려고 시도한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개혁이다. 하지만 그가 아무런 대책이 없이 과거만을 부르짖었던 인물은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부분에서 많은 오해가 있는데, '''키케로는 옵티마테스가 아니며 옵티마테스를 비판했다.'''

전반적으로 보아 장차 공화국의 정무를 맡아보려고 하는 자들은 필히 플라톤의 두 가지 교훈을 명심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항상 시민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무슨 일을 하든지간에 사리사욕을 떠나 시민의 복리를 증진시킨다는 것이고, 둘째는 공화국 전 시민들을 일일이 보살펴야 하는 것인데, 이때 어느 일부 계층의 사람들만을 돌보다가 다른 계층의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경영은 후견인의 일과 같아서 그것을 위탁한 사람들, 말하자면 전체 시민의 이익을 위해 수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시민의 이익을 배려해 주다보니 또 다른 일부 시민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공화국에 가장 위험한 소요와 불화를 불러일으킨다. 그 결과 어떤 자들은 포풀라레스로 나타나고, 그 밖의 다른 자들은 열렬한 옵티마테스로 보이게 되는데, 이때 국가 전체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이기 마련이다.

『의무론』1.25.85

옵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라는 단어는 오늘날의 정당, 특히 양당제 구도에서의 정당 개념과는 다르며, 좌파 우파 등 정치적 스탠스 개념과도 다르다. 그보다는 '공화국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자들' 정도의 뉘앙스에 가깝고, 실제로 옵티마테스들과는 정치적 견해에서 상당한 차이가 났다. 특히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가이우스 마리우스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대한 그의 태도이다.

따라서 친구들 간에 이익이 되면서 아무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바로 그러한 관대함을 베풀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루키우스 술라와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정당한 주인에게서 돈을 빼앗아 남들에게 준 것은 관대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정의로운 것이 아니면 절대로 관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무론』1.14.43

참으로 동맹국들에 대한 어떤 강압정책도 공정치 못하다고 생각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가버렸으니, 그것은 로마 시민들에게조차 그처럼 잔학한 행위가 가해지는 것을 볼 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술라의 경우, 명예롭지 못한 승리는 도덕적으로 선한 명분을 수반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선한 시민들과 부자, 그리고 확실한 로마 시민의 재산을 빼앗아 광장에서 창을 꽂아 놓은 채 경매에 붙여 팔면서도 뻔뻔스럽게 "나는 나의 전리품을 팔고 있는 것이요"라고 말했기 떄문이다.

『의무론』2.8.27

반면 가이우스 마리우스에 대해서는 직접 서사시 『마리우스』를 지었을 정도로 호의적이었던 사람이 키케로이다.[59] 물론 마리우스는 키케로와 동향 사람이므로 우리가 남이가 정신에 입각한 것일 가능성도 있으나 술라와 마리우스에 대한 키케로의 태도는 그가 단순히 "옵티마테스 만세"를 외치는 인물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카이사르 등에게 대항하기 위해 옵티마테스들과 함께 행동한 것을 부정할 수 없고, 관점에 따라서는 이것이 비판의 여지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키케로가 옵티마테스의 파당적 이해만을 추구한 것은 결코 아니다. 카이사르에 반대한다고 다 옵티마테스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생했을 때 키케로가 보여준 반응은 (업적 여부와는 별개로) 키케로가 '체제의 건전성'과 '민중의 유익함'이라는 양자 속에서 어떻게 갈등했는지를 인간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이때 키케로는 누구를 편들어야 할지 몰라 무척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그의 편지 속에 적혀 있는 다음 구절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어느 편에 가담해야 좋을지 정말 모르겠다. 폼페이우스는 명예롭고 떳떳한 이유로 싸우고 있고 카이사르는 자기 자신과 민중을 구할 만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키케로 열전』 中


4.2. 비판 또는 한계


그러나 키케로의 정치 철학과 정치적 행보는 "유산자들", 달리 말해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부유한 이들의 결속과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형태의 권력 분립 및 원로원의 권위를 옹호하는 일에 거의 모든 초점이 맞춰졌으며, 종류를 불문한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무심했고[60][61] 그런 요구에 부합하는 일을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깨트리는 포풀라레스[62][63]적 행위로 여겨 비난했다.
이는 그의 역사관에서 기인하는데, 키케로는 아테네의 민주정이 시민에게 지나친 자유가 부여돼 그것이 방종으로 치달은 끝에 몰락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때문에 그가 진정으로 긍정한 자유는 원로원 그리고 그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설파한 유산 계급의 자유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가 말하는 인민의 자유란 진정한 자유가 허락된 원로원의 권위를 그대로 따르는 자유이다.[64] 이런 맥락에서 그는 당시 로마에서 시행되던 비밀무기명투표에 부정적이었나 해당 법률의 철폐가 불가능하기에 차선책으로 사전에 투표의 내용을 상위 계급 인사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시민들의 방종을 억제하면서도 시민들에게 비밀무기명투표의 권리를 행사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비밀무기명투표를 법제화한 호민관을 형편없는 인물로 취급하며 맹비난했다. 그런 그에게 인민의 자유란 방종일 뿐이었고,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유산자와 무산자가 조화를 이룬 이상적인 상태를 깨트리는 죄악일 뿐이었다. 그가 주장한 원로원과 기사 계급 나아가 전 이탈리아 유산자의 조화와 결합은 이런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적극 저지하고 침묵시킴으로써 그가 평생의 이상으로 여긴 '권위 있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또한 그가 주장한 혼합정에서 인민 즉 민주정이란 하나의 구성 요소이자 견제 요소로서만 그 의의가 있다. 그러나 당대 로마의 사정을 고려하면, 이는 그의 치명적인 한계였다.
일례로 키케로는 클로디우스와 대립하던 시기 그의 지지자로 수공업자, 소상점주, 임금노동자, 고용인 등을 지목하며 이들의 저급한 성품을 강조해 이런 자들에게 지지받는 클로디우스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일에 몰두했다. 현존하는 클로디우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적으로 그 시대 최고 최대의 사료원이자 클로디우스의 정적이었던 키케로의 저술을 1차 사료로 삼은 탓에 클로디우스를 오로지 하늘 높을 줄 모르고 날뛰는 무법자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65]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을 오로지 무법자로만 묘사된 클로디우스의 이미지가 현실의 클로디우스와 완벽하게 부합하리라 생각하지 않으며, 여러 이유에서 그의 이미지가 적잖이 왜곡됐으리라 생각한다. 예컨대 관점을 달리하면 클로디우스를 하층민의 요구에 귀를 기울인 그들의 영웅으로 볼 수도 있다. 실제로 클로디우스가 정적 밀로가 이끄는 무리에게 피살당했다는 소식은 로마에 큰 파장을 일으켜 군중에 의해 원로원 회의장이 전소되고 폼페이우스가 질서 회복을 위해 단독 집정관에 취임하는 결과를 낳았다.[66] 또한 클로디우스는 단순히 포풀라레스적 행위를 통한 민중 선동만이 아닌 기사 계급과 원로원 의원에게도 구미가 당기는 법안을 제출함으로써 광범위한 정치적 연대를 이룩해 삼두와 옵티마테스라는 거대 세력 사이에서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하는 수완을 선보인 그 나름의 체계와 합리성을 갖춘 인물이었다.[67][68] 그 영향으로 정적인 클로디우스를 적극 비난하고 그의 정책에 격렬히 반대하던 키케로는, 종국엔 클로디우스도 그와 연대했던 카이사르를 위시한 삼두도 아닌 옵티마테스 측 인사들의 개입으로 입을 다물고 침묵해야 했다.
이후에도 키케로는 클로디우스가 제정한 곡물법에 따라 무상 곡물을 지급받기 위해 모인 가난한 시민들을 '민회에 집단으로 참석하여 국가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저 비참한 반아사의 거머리들인 근성이 더러운 평민들', '먼지를 뒤집어쓴, 더러운 도시의 인간 쓰레기들', '배 밑에 괸 더러운 물과 같은 도시의 쓰레기들', '가난에 찌들고 몸을 닦지 않는 자들', '사악한 자들' 로 묘사할 만큼 이들을 멸시했으며, 천하고 지저분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정책을 결정하는 데 적극 참여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또 둘의 사이를 중재할 카이사르의 부재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갈등이 극에 달해 삼두의 연합 체제가 붕괴 직전에 도달했던 기원전 56년, 카이사르의 압력에서 벗어날 기회를 포착했다고 여긴 키케로는 원로원 회의에서 카이사르가 집정관 재임기에 제정한 일정 자격을 갖춘 빈민을 수혜 대상으로 한 농지법을 공격하는 취지의 연설을 했고, 추가 연설을 공표함으로써 당시 로마를 떠나있던 카이사르를 불쾌하게 만들었다.[69] 공정을 기해 말하자면, 키케로가 카이사르가 제정한 농지법에서 문제 삼은 사항은 빈민에게 토지를 분배했다는 것이 아니라 이 법안이 발효됨으로써 공유지가 줄어들어 국고 수입이 감소한다는 것이었으며 이 행위에 내포된 정치적 의도도 간과해선 안 되겠으나,[70] 빈민을 대상으로 한 토지개혁법을 재기의 표적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키케로가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얼마나 무심했고 또 부정적이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를 증명하듯 키케로는 국가란 유산자의 사유재산을 옹호하기 위해 생겨났다고 주장했으며, 하층민이 유산자로 구성된 원로원의 권위를 그대로 따르는 상태의 국가를 이상적으로 여기며 그런 질서가 무너진 인민의 자유는 방종에 불과하다고 규정했다. 이런 맥락에서 키케로는 호민관을 인민이 원로원의 권위에 반발하거나 불만에 차 날뛰지 않도록 달래는 데에 그 존재 의의가 있는 정무직으로 여겼다. 당연히 이런 생각은 '''공화주의와도 민주주의와도 거리가 먼 생각일 뿐이다. 오히려 플라톤의 철인론에 더 가까운 엘리트 위주의 정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키케로의 생각은 현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덩샤오핑 ~ 후진타오 시대의 일당독재 중국 공산당처럼 일인독재는 경계하지만 민중들의 실질적 정치 참여를 봉쇄하는 엘리트들의 집단지도체제에 더 가깝다.'''[71]
그리고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둬야만 키케로가 그라쿠스 형제, 특히 그가 최초의 포풀라레스로 규정한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비난한 이유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즉 키케로의 관점에서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인민이 함부로 날뛰지 않도록 제어하고 원로원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그들을 달랜다는 임무를 부여받은 호민관의 직분에서 벗어나, 곤궁한 처지에 있는 이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정책의 필요성을 설파함으로써 로마의 국론을 양분시킨 인물이기에 비난한 것이다. 또한 키케로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준동으로 과거 인민이 원로원의 권위에 복종하는 조화롭고 이상적인 로마의 권위있는 질서가 무너지고 지금의 혼란이 도래했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의 저서에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비난하고 울분을 토했으며,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준동 이전의 공화정 로마를 평생의 이상향으로 여겼다. 그러나 키케로의 생각과 달리,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농지법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던 시절 민회에서 호민관직의 존재 의의는 인민의 권리 보호임을 강변했다. 물론 이 말이 정치적 수사일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으나 피상적이나마 그의 사상을 엿볼 기회를 제공하며, 키케로의 이상이 존중받아야 한다면 마찬가지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이상도 존중받아 마땅할 것이다.[72]
또한 키케로가 나름대로 개혁안을 제시했다고 하나, 그것은 그가 필생의 염원으로 삼은 원로원과 이탈리아의 유산자를 아우르는 유산 계급의 화합 촉구나 이상적으로 여긴 정치 체제 성립에 국한되는 이야기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키케로는 소위 포풀라레스 인사들을 민중을 선동해 민심을 등에 업고 참주 등극을 꿈꾸는 악당이자 로마에 혼란을 불러오는 암적인 존재로 취급했는데, 그가 선한자들이라고 칭한 옵티마테스로 대표되는 당대 로마의 실세들은 원로원 최종권고와 같은 초법적 권한을 사용해 그들이 적이라고 규정한 인사들을 폭력적으로 제압하고 있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표적으로 이 조치가 최초로 시행됐을 때, 그의 지지자 3천여 명은 문자 그대로 몰살당하고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그의 머리를 가져온 이는 같은 무게의 황금을 주겠다는 보상이 제시됨에 따라 목이 잘리고 머리 내부가 납으로 채워지는 최후를 맞이했다. 일이 마무리되자 당년도 집정관이자 이 사태를 일으킨 주역인 루키우스 오피미우스는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자신의 공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화합의 여신 콩코르디아에게 바치는 신전을 건립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의 지지자들이 이런 무자비한 학살극을 용인해야 할 사악한 악당들이었을까? 사람에 따라선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고 개중엔 진짜 악당이 존재했을지도 모르나, 대체로 이 일은 그가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정제로 여긴 아테네의 중우정의 폐단이나 비판한 참주정의 폐단 못지않게 과두정의 폐단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러나 후대에 헌법주의자로 명성이 자자한 키케로는 정작 자신의 공적을 위해 이 일을 가능케 한 초법적 권한을 확대 적용했고 그 후폭풍으로 몰락하게 된다.
또 자신의 저술을 통해 그리고 후대인들의 손에 의해 한껏 이상화된 키케로가 실제로는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 주는 일화가 있다. 시기는 그가 법무관을 역임한 기원전 66년, 전직 법무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마케르란 인물이 직권 남용 혐의로 기소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나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빈약해 무죄가 유력해 보였던 이 재판을 주재한 키케로는 화려한 웅변으로 배심원단을 설득해 마케르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일이 이렇게 진행된 데에는 마케르의 과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마케르는 과거 호민관을 역임하며 인민의 권리를 옹호하고 토지개혁법을 주장하는 등 소위 포풀라레스적 행보를 보여 논란의 대상이 됐는데, 키케로는 장래를 염두에 두고 마케르에게 유죄판결을 내림으로써 그를 언짢게 여기던 세력가들에게 만족감을 선사한 것이다. 키케로가 재판을 끝내고 친구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의도가 잘 드러난다. "마케르 소송을 취급해 사람들[73]에게서 놀라울 정도의 지지를 얻었소. 그에게 나쁜 심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죄를 선고해 마케르에게서 감사를 받는 것보다 유죄를 선고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었소." 덧붙여서 이 사건의 결말은, 키케로에게 의외의 유죄를 선고받은 마케르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런 실례는 키케로가 평생의 이상으로 여긴 '권위 있는 질서'가 도래한 로마가 도대체 어떤 나라일지 의구심을 품게 하며,[74] 동시에 이런 실례들은 동시대인들이 대체로 키케로를 기회주의자적 인물로 여긴 이유를 설명해 준다.[75]
마지막으로 키케로가 내놓은 개혁안은 당대 로마의 사정을 고려했을 때 딱히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 있다고 평하기 힘들며, 키케로가 인민의 유익함을 등한시하지 않았다는 평가는 여러 일화를 고려하면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권위 있는 질서'로 대변되는 키케로의 주장 및 개혁안은 정부와 유산자의 이해관계를 제외한 사안에 대한 관심이 현저히 결여되어 있다. 다시 말해, 키케로의 주장 및 개혁안은 자신이 악이라 여긴 포풀라레스적 행위를 도려내고 이상적이라 여긴 형태로 구현된 체제의 건전성을 높이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당시 로마는 기존의 귀족들과 신흥 부유층인 기사계급 그리고 민중간의 격차와 갈등, 안건이 상정될 때마다 극심한 소란을 일으킨 제대병에 대한 보상 문제, 이탈리아인과 속주민에 대한 처우, 제국으로 팽창한 현실에 부합하는 행정력의 미비 등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그것이 키케로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준동 이후 도래했다고 믿은 혼란이 생겨나고 지속된 근본적인 원인이었다.[76] 그러나 키케로나 그가 동류로 인정받길 원했던 옵티마테스 인사들은 이런 문제에 무심했거나 적절한 해결안을 내놓지 못했으며, 이런 관심과 능력의 미비야말로 그가 경멸한 포풀라레스들의 준동을 카이사르의 부상을 최종적으로 공화정이 무너지고 제정이 수립하는 일을 가능케 했다. 물론 키케로처럼 속주 총독으로 부임해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등 개인으로선 성공적인 성과를 거둔 인사들이 존재했으나, 당시 로마는 개개인의 성공이 아닌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는 거시적이고 광범위한 개혁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키케로는 당대 로마가 직면한 여러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에 대해선 실효성이 있는 의견을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내놓지 못했고, 종합적으로 사회적 경제적 압력의 결과로서 발생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준동을 도리어 사회적 갈등을 야기한 원인으로 여겨 그를 비난했을 만큼 당시 로마가 직면했던 여러 문제를 제대로 파악 및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맥락에서 공화정은 어차피 망할 운명이었다는 운명론적 역사관을 배격한다고 해도, 시대의 요구에 적절히 부합하지 못한 공화정이 무너지고 제정이 수립됐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제정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뿐만 아니라 키케로를 비롯한 공화파 인사들에게도 공화정 붕괴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외에 카이사르를 찬양하며 키케로를 깎아내리는 사관이 발생한 이유는 카이사르 찬양과 키케로 비하의 원류 이 글을 참고.

5. 성격 및 일화


키케로의 개인적인 성격이나 일화들은 유달리 자세히 남아 있는데, 격동의 시기라 기록이 많았던 것도 한몫하지만, 본인부터가 편지를 매우 많이 쓰는 성격이었던데다 특히 가장 많은 편지를 주고받은 절친 아티쿠스[77]가 '''키케로에게 받은 편지를 모조리 보관해 뒀기 때문이다.''' 정작 아티쿠스는 키케로 사후 자기가 키케로에게 보낸 것들은 싸그리 찾아내 없애 버렸기 때문에 키케로의 시도때도 없는 징징(…)에 아티쿠스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알 수 없다. 키케로 사후 그의 해방노예이자 비서였던 티로가 아티쿠스에게 이 편지들을 받아 책으로 묶어 출간했다.
남아있는 서간과 행적을 보면 개인적으로는 성격이 괜찮은 사람이었다. 정적인 카이사르와의 사이도 우호적인 편이었고,[78] 종종 지나치게 참견하려다 반발을 사긴했지만 동생을 아낀 것만은 사실이며, 여자 문제 없이 아내에게 충실했고 자식들에게도 애정을 쏟았다.[79] 티로를 비롯한 노예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비록 공문서등에선 노예의 버릇을 바로잡기 위해선 잔혹해야 된다고도 얘기했지만, 아들에게 남겨주기 위해 집필한 'De officiis(의무에 관하여)'에서는 노예에게 잘 대해주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미덕이며 '그 불운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일을 시킬 때에는 반드시 예의바르게 권할 것이며, 상응하는 보상을 반드시 주어야 한다'고 일렀다. [80] 또한 티로가 몸이 아프자 걱정해서 의사도 보내주는등 아랫사람에게 매우 친절했다. 이는 공화정 말기~제국 초기의 귀족들 사이의 특징이기도 했는데, 당시 그들은 자신의 노예들에게 잘 대해주는 것이 교양과 명예를 잘 보여주는 행동이라 생각했다. 티로의 경우는 단순히 키케로의 노예일뿐 아니라 친구이자 비서이기도 했는데 키케로가 말하는걸 뒤쳐지지 않고 적을수 있었을뿐 아니라 키케로가 연설문을 작성하는데에도 도움을 주기도 했다[81]. 티로가 해방된뒤에 토지를 사자 키케로는 그에 대해 축하하는 편지를 썼고 티로도 꾸준히 키케로와 그의 가족을 도왔다. 티로가 과로로 쓰러지자 키케로는 이에 의사도 보내고 하루에 편지를 3통이나 쓸 정도로 그를 걱정했다. 티로는 키케로 사후 그의 열전을 작성했다고 하고 100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다만 키케로는 타인의 좋은 점을 비교적 너그러이 칭찬했으나 자화자찬이 심한 편이라 타인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의 집정관 재임기를 자축하는 취지에서 집정관인 자신이 올림포스의 신들과 카틸리나의 난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는 모습을 묘사한 글을 썼고, 킬리키아 속주 총독으로 활동하던 시절 군을 지휘해 소규모이나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자 (아마도 장난이었겠으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자신보다 그리 나을 것 없는 지휘관으로 취급했다. 게다가 그의 이런 면모는 널리 알려져 있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기도 했다. 그를 아버지라 부른 옥타비아누스는 말 할 것도 없고, 삼두 결성 이전 폼페이우스와 반목하던 크라수스는 동방에서 귀환한 폼페이우스가 쌓은 공적의 빛을 바라게 할 속셈으로 원로원 회의에서 키케로의 집정관 재임기를 한껏 칭송하는 연설로 그를 들뜨게 했다. 그러나 그 여파로 키케로는 한동안 폼페이우스와의 관계가 악화되는 대가를 치뤄야 했다. 또한 키케로는 기본적으로 유쾌한 성격이고 농담과 풍자를 좋아했는데[82] 이것이 시간과 장소 및 상대를 가리지 않고, 심지어 클로디우스나 옥타비아누스 같은 정적까지 대상으로 삼은 탓에 타인에게 불쾌함을 안겨준 것을 넘어 그것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자신을 곤경에 빠트리기도 했으니 그의 입은 그에게 성공과 좌절을 모두 안겨줬다고 할 수 있겠다. 키케로의 이러한 성격적 결함들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도 상당히 인용되어 있는데, 그 중 일부만 추려내서 인용하자면 이렇다.

키케로가 캄파니아의 땅을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자는 제안을 내놓았을 때 대부분 원로원 의원들은 반대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의원이었던 루키우스 겔리우스는 눈을 감기 전에는 절대로 이 제안을 통과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어디 기다려 보지요. 뭐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도 않으니 말이오."

언젠가 그는 연단에 올라가서 마르쿠스 크라수스에 대해 굉장한 칭찬을 했는데, 그때 관중들은 아주 큰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런데 며칠 뒤 그는 똑같은 연단에 올라가 크라수스를 몹시 공격하는 연설을 했다. 그러자 크라수스는 그를 불러서서 물었다. "아니, 이것 보시오. 바로 며칠 전에 당신은 바로 여기서 내 칭찬을 하지 않았소?"

키케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랬지요. 나쁜 일을 한 사람을 얼마나 칭찬할 수 있는지, 내 웅변 실력을 한 번 시험해 봤었지요."

또 어느 때인가 크라수스는 연단에 올라서서, 자기 조상 중에 60이 넘도록 수명을 누린 사람이 없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며칠 후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고 말하며 자기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키케로에게 말했다. 그러자 키케로는 대답했다. "그거야 시민들의 인기를 끌려고 그랬겠지요. 시민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기뻐할 테니까요."

크라수스의 아들 중 하나가 악시우스라는 사람의 얼굴 생김새를 너무나 많이 닮아서 크라수스의 아내의 행실이 의심 받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아들이 원로원에서 아주 훌륭하게 연설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것에 대해 평가를 해보라는 청을 받자, 키케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과연, 악시우스[83]

크라수스로군."

시리아로 출정하게 된 크라수스는 키케로를 식사에 초대했다. 키케로는 이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며칠 뒤 한 친구가 키케로를 찾아와서 바티니우스가 그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키케로는 "그러면, 바티니우스도 나와 저녁을 먹고 싶다는 얘긴가?"라고 하여, 크라수스의 형식적인 초청을 비꼬었다. '''크라수스에 대한 키케로의 태도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키케로 열전> 中

그래도 키케로는 해방 노예인 티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고, 사적으로 상당히 폭넓은 친분관계를 쌓는 등 종합적으로 거슬리는 면이 있긴 해도 사교적인 성격의 사람이었다. 사실 자화자찬은 일반적으로 자수성가한 사람들에게 곧잘 관찰되는 특징이고, 키케로에겐 기사계급 출신의 '신참자'인 자신이 원로원 의원에 공화국의 집정관까지 올라섰다는 실적이 있었기에 아주 이해못할 일은 아니다.[84] 그러나 신참자로서 집정관까지 오른 것이 그의 자부심의 원천이었다면, 동시에 신참자라는 정치적 신분은 그의 가장 큰 컴플렉스였다. 과장해서, 그의 정치적 행보는 전부 신참자인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으로 요약이 가능하다. 그래서 키케로는 정계에서 몇 대를 이어 성공해온 가문이나 유서 깊은 역사를 지닌 가문 출신 인사와 비교되는 일에 굉장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고, 대카토라는 유명한 선조를 뒀으며 그 무렵 당대 옵티마테스의 리더로 부상하던 소카토가 원로원 회의에서 자신과 상반된 의견을 지닌 신참자 의원과 논쟁을 벌이다 화를 못이기고 상대의 뺨을 갈기는 폭거를 저지르자 기겁하며 편지로 친우인 아티쿠스에게 불만을 쏟아했다.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일화도 있다. 원래 키케로와 카이사르는 정적(政敵)이기 이전에 사적으로는 편한 사이였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집무실 또한 키케로는 제집 드나들듯 자유로이 방문했는데, 카이사르가 독재관이 되고 난 후 업무량이 늘어나 새로 충원된 비서들이 그 사실을 모르고 '저기서 대기표 뽑고 기다리세요.' 하고 못 들어오게 해서 앉아서 대기해야 했던 적이 있다. 한때는 자신이 선배 정치인[85]이자 대등한 사이였는데 이젠 이런 처지라니 굴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굴욕감은 곧 말끔히 해소되었는데, 마침 볼일이 있어 잠시 집무실을 나왔던 카이사르가 대기실에 있는 키케로를 보고는 '''"이래서야 내가 미움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거짓말이라고 말할 수 있나? 그 마르쿠스 키케로조차도 자유롭게 내 집무실에 들어오지 못하고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하는 게 현실이라면..."''' 이라고 비서들을 갈군 것이다. 키케로는 당연하겠지만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이런 일화를 편지에 적어 보낸 걸 보면 키케로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동시에, 카이사르의 사람 마음 휘어잡는 솜씨(…)[86]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클레오파트라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이유는 선물을 보내주겠다고 하고 안 보내주었기 때문이라고. 좀 쪼잔한 면도 있었던듯.
키케로가 어느정도 성격적인 약점을 보이긴 하였으나, 오히려 편지에 나타나는 정이 많고 고민하는 모습에서 인간미가 느껴진다고 할 수도 있다. 또한 그의 많은 장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약점들은 이럭저럭 상쇄가 가능하며, 사적인 서간에서는 우는 소리를 하긴 하였으나 그러면서도 필요할 땐 움직였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할만 하다. 특히 카이사르 사후 군사력도 없고 민중의 지지도 약한 상황에서 자신의 정치력을 바탕으로 짧은 시간이나마 안토니우스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인 수완은 그의 저력을 보여주는 일화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이상을 이룩하기 위한 현실주의자 기질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고 정치적 식견도 나쁘지 않았다. 살아생전 정치적인 측면에서 카이사르와 그의 후계자에게 완패했으나 그것은 상대가 너무 뛰어났을 뿐, 애초에 본연의 능력이 부족했다면 집정관까지 올라가는 일 자체가 무리였을 것이다.
참고로 정치인들과 장군의 경계가 모호했던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 답지 않게, 집정관까지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키케로는 장군으로서의 이미지가 약한 편이다. 실제로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의하면, 키케로가 시민들에게 '샌님'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다만 킬리키아 총독 시절 군사적 업적으로 인해 '위대한 장군'이라는 명예로운 호칭도 받아보는 등 군사적 행적이 아예 없는 인물은 아니다. 대적한 상대가 군대가 아니라 산적들이기는 하지만.
수사학적 시선에서 보자면 키케로는 변호사답게 길고 화려한 문장을 자주 썼으며 그의 문장은 훌륭한 라틴어의 표본으로 쓰인다. 특히 카틸리나의 반란사건 때 한 연설인 "카틸리나 탄핵"은 키케로 문장의 걸작으로 꼽히며 오늘날 라틴어를 배우는 유럽의 고등학생들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연설 말고 철학적 저술을 읽어보면 논리정연하기 그지없으며 수사학에 정통한 변호사답게 풍부한 예를 제공하여 비교적 머리를 덜 쥐어뜯게 되는 편이다. 또한 변증법적 구조를 주로 사용하여 철학적 결론을 제시하는데, 그 과정이 논리적이라서 따라가다 보면 플라톤 왈 아리스토텔레스 왈이 그다지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도덕 교육에 있어서도 저서 「의무론」이 서양에서는 고전으로 사랑받아 왔다. 볼테르는 1771년에 다음과 같이 평했다.

"아무도 이보다 더 현명하고 더 진실되며 더 유용한 어떤 것도 쓰지 못할 것이다. 이후로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거나 훈시하려는 야심을 가진 어떤 작가가 만약 키케로의 「의무론」보다 더 잘 쓰기를 원한다면 그 작가는 허풍선이이거나 아니면 그러한 책들은 모두 이 책의 모작이 될 것이다."

키케로는 그리스도교의 교부들에게도 주목 받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어서부터 지금은 유실된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를 읽고 진리추구에 대한 열의를 열었으며, 역작 『신국론』에서는 키케로를 25회나 직접 인용하고 또는 언급했다. 그 자신이 수사학 교수이기도 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들에 나타나는 수사학적 기교는 키케로의 문장과 연관이 깊고, 보에티우스의 대화체와 문장 형식에서도 키케로의 수사학이 흔적을 보인다.[87] 호교론자 락탄티우스(Lactantius)는 '그리스도교 키케로'라고 불릴 정도로 키케로의 수사학과 사상에 심취했다.[88] 암브로시우스는 저서 『의무론』에서 내용으로도 제목으로도 문체로도 키케로의 저작과 연관이 깊다. 이 중 가장 압권은 불가타 성경의 번역자로 유명한 예로니모(히에로니무스)인데, 예로니모는 키케로에 너무 빠져든 나머지 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키케로주의자이다"라고 꾸중을 하였다고 한다. 이게 진짜로 계시이든, 혹은 예로니모의 트라우마에 기인한 단순한 꿈이든 간에, 예로니모가 얼마나 키케로빠였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라 할 수 있다.
르네상스때 키케로의 작품은 또 주목 받게 되는데, 니콜로 마키아벨리 등 공화주의자들이 키케로의 논리를 계승했으며, 그 외에도 그의 정치적 견해를 담은 수많은 연설문들이 주해되어 돌아다녔고, 키케로의 문장을 모방해 집필하는 일이 학계의 유행이 되었을 정도다. 심지어 레오나르도 브루니(Leonardo Bruni, 1369~1444)의 별명이 '새로 나온 키케로'였다는 것은 키케로가 가졌던 위상을 잘 보여준다. 동시에 빠가 까를 만드는 풍조도 생겨 에라스무스는 당대 지성인들이 지나친 키케로 위주의 문학에 반발하기도 했다.[89]
그외에 알려지지 않은 사항으로, 키케로는 당대에는 시인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다만 만렙 수준에 도달했던 그의 연설 솜씨와는 달리, 운문쪽은 '읽을만한 베스트셀러 작가' 정도의 위치였기에, 키케로의 시들은 후대에 거의 인용되지 않았고 지금은 소실되었다.
그의 저작인 최고선악론은 20세기에 약간의 마개조를 거쳐서 Lorem Ipsum이라는 샘플 텍스트로 쓰이고 있다.
고대인으로는 드물게 좋아하던 음식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지금의 형태와는 달랐지만 라자냐를 매우 좋아했다.

6. 기타 매체에서


사극 ROME에서는 이상은 높으나 그것을 실현할 수 없는 문약한 정치인으로 나오는 것은 위에 언급된 사관의 영향이다. 여기에 대부분의 업적이 날아가버렸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카이사르의 내전기편인 1부에서는 오히려 버프를 먹은 것이다. 당시에 키케로는 거의 은퇴상태였고, 킬리키아 총독 역임으로 약간 명성을 회복했어도 여전히 추방 당하기 이전의 권세를 회복하지 못 했으며 전직 집정관이였는데도 원로원의 '화친파'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의원은 더더욱 아니였다. 그런데, ROME 1부에서는 원로원의 1/3을 차지하는 온건파의 수장으로 나온다. 게다가 처음부터 소 카토나 스키피오등과 함께 하는 걸로 나오는데, 오히려 이런 인물들과 사이가 나빴으며, 이 인물들과 동급 정치적 영향력이나 역량을 가진 것도 아니였다.[90] 게다가, 키케로가 폼페이우스가 로마에서 도망칠 때부터 함께하는 걸로 나오는데, 키케로는 유우부단하게도 어느 쪽에 붙을지 결정하지 못 한체 기다리다가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야 폼페이우스파에 함류한다. 근데 거기에서도 소 카토에게 로마에서 카이사르나 견제하지 왜 여기왔냐는 식으로 비난을 받는 굴욕마저 받는데 이것마져 빠져있다. 즉, 오히려 어느 정도 키케로에게 우호적인 편. 참고로 ROME에서 들어난 키케로의 오판들은 거의 실제로 키케로가 저지른 것들이다. 다소 무능한 인물처럼 묘사됐다고 불평하는데 내전기에서 정치인으로 유능하냐 무능하냐라고 따지면 자신을 과대평가했고 무능했다가 옳은 평가다. 몇 가지 부족한 것은 카이사르 내전기 시작 바로전에 키케로는 소아시아에서 어느정도 군사적 성공을 거두고 돌아오는 길이였다는 것과 키케로의 그 유명한 필리피카이 연설들이 거의 빠졌다는 것이다.[91] 폼페이우스와 비슷한 연배인데 좀 심하게 동안으로 나와서 오히려 카이사르보다도 어려보이는건 덤이고 완전 폭삭 늙어버린 카토와의 비교는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최후는 상당히 멋지게 각색되었는데 자신을 죽이러 온 티투스 풀로에게 그 유명한 풀로가 오다니 영광이라고 말하면서 풀로를 막아서려는 노예를 타이르고는 자유민으로 만들어주고 의연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죽기 직전 급하게 브루투스에게 서신[92]을 보냈는데 이를 가지고 가던 전령이 루키우스 보레누스의 가족들과 엮이다가 가족에 대한 애착이 강한 보레누스를 분노케해서 털리는 바람에 서신을 흘려서 루키우스[93]의 장난감이 되어버리는 결말을 맞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콜린 맥컬로마스터스 오브 로마(Masters of Rome) 시리즈는 작가가 후대 사람들은 동시대인보다 키케로에게 훨씬 아첨하고 있다는 평을 남긴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키케로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박하다.
반면 '로마의 전설 키케로'라는 작품은 키케로를 지나치게 미화해 문제가 되는 작품이다. 간단히 말해 키케로 버전 로마인 이야기.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을 실감하게 해주는 사례인데, 로마인 이야기로 편향된 시각을 바로잡기 위해 이 작품을 잡는다고 해도 이 작품은 전지적 키케로 시점에서 서술된 작품이라는 사실 정돈 숙지해 두는 게 좋다.
로버트 해리스의 로마사 3부작에선 주인공이다. 그래서 키케로 시리즈라고도 부른다. 단 화자는 키케로의 노예이자 친구였던 티로. 이 작품은 키케로가 이제 막 정계에 입문한 변호사 겸 의원일 시절부터 시작하는데 자신의 지위를 향상시키려 노력하는 야심있는 정치가인 동시에 불의를 두고 보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엘더스크롤 5: 스카이림에서는 성씨를 딴 툴리우스와 가계명을 딴 시세로가 등장한다.
툴리우스는 제국군의 장군이며 울프릭 스톰클록의 스톰클록 반란군과 대치하고 있으며, 작중 도입부에 울프릭과 반란군을 매복해서 사로잡는 등의 뛰어난 지휘실력을 갖고 있고, 제국의 변방 지역인 스카이림을 지휘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실제 키케로보단 정적인 카이사르[94]에 가깝게 묘사된다.
다크 브라더후드의 암살자인 시세로는 다크 브라더후드 퀘스트 진행 종반부쯤 동료로 영입할 수 있다.
은신 스킬과 한손무기 스킬이 뛰어나 성능이 좋은 편에 속하며, 동행하면 말을 끊임없이 하는 독특한 캐릭터.
여담으로 둘 다 제국의 심장부 지역인 시로딜출신이라고 한다.
로마 재벌가의 망나니에서도 등장, 여기서는 주인공의 개입 덕에 일부 업적이 주인공과 반반씩 나눠지게 되었다. 그래도 주인공과의 관계는 좋은 편이며[95] 주인공을 공화정의 미래를 이끌 젊은이로 주목 하고 있다.
현대 책 디자인이나 문자 디자인 웹 디자인 등에서 영어 등 현대 유럽어와 비슷해보이지만 현대어가 아닌 예시문이나 채움 글로 쓰이는 로렘 입숨도 키케로의 글을 알아보기 어렵게 변형해서 만든 글이다.

7. 어록


Etiamne si quae leges sint tyrannorum? Si triginta illi Athenis leges inponere uoluissent, et si omnes Athenienses delectarentur tyrannicis legibus, num idcirco eae leges iustae haberentur?

독재자들이 제정한 법률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정당하다는 말인가? 아테네에서 저 유명한 30인(三十人) 독재자가[96]

법률을 부과하려고 한다면, 또 설령 아테네인들 전부가 독재자의 법률을 좋아한다면, 그것만으로 그 법률을 정당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말인가?[97]

키케로, 『법률론』 1.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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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마찬가지로, 단순히 고통이라는 이유 때문에 고통 그 자체를 사랑하거나 추구하거나 소유하려는 자는 없다. 다만 노역과 고통이 아주 큰 즐거움을 선사하는 상황이 때로는 발생하기 때문에 고통을 찾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모종의 이익을 얻을 수도 없는데 힘든 육체적 노력을 기꺼이 할 사람이 우리들 중에 과연 있겠는가? 하지만 귀찮은 일이 뒤따르지 않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선택한 사람, 혹은 아무런 즐거움도 생기지 않는 고통을 회피하는 사람을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키케로, 『최고선악론』 1.32.33[98]

dum spiro, spero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99]


8. 한국에서 번역된 책 목록


  •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천병희 역)
  • 국가론(김창성 역) De Re Publica
  • 키케로의 의무론(허승일 역) De Officiis
  • 수사학(안재원 편역) Partitione Oratoria
  • 법률론(성염 역) De Legibus
  • 키케로의 최고선악론(김창성 역) De finibus bonorum et malorum[100]
  • 신들의 본성에 관하여(강대진 역) De Natura Deorum
  • 연설가에 대하여(전영우 역) De Oratore
  • 키케로의 노년에 대하여(정윤희 역)
  • 설득의 정치(김남우 외 역) - 주요 변호연설들, 탄핵연설들의 발췌역이다.
  • 투스쿨룸 대화(김남우 역) DISPUTATIONES TUSCULANAE
2018년부터 플라톤 번역으로 유명한 정암학당과 출판사 아카넷의 협업으로 "정암고전총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키케로의 전집 번역이 예정되어 있다.''' 《법률론》과 아직 국내 역서가 없는 《아카데미카》를 시작으로 차근차근 번역될 예정이다.

[1] 다만 키케로의 이상적인 공화주의는 그 개념에 있어서 후대나 오늘날의 공화주의와는 다소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2] 타이포그래피 쪽에도 족적을 남겼다. Lorem ipsum이 그의 최고선악론 본문을 마개조(?)한 물건이기 때문.[3] 고대 로마에서는 변론가와 법률가가 구분되어 있었는데, 키케로 자신은 법률가는 아니었지만 법학을 배워서 법에도 정통했다. 오늘날 원문이 전해지지 않는 십이표법의 내용을 재구성해 볼 수 있는 근거 자료 중 하나가 키케로의 저작이다.[4] 라틴어에서 유래된 로망스어 단어 대다수와 프랑스어에서 차용된 라틴어계 영단어는 그 라틴어 단어의 단수 대격에서 유래하였다.[5] 법으로 신분이 보장된 혈통 귀족. 공화정 말기에 이르러선 몰락한 가문이 적지 않았고 신분에 의해 법으로 보장된 신분상의 특권도 전무하다시피 했으나, 로마보다도 오랜 역사를 지녔다고 여겨진 유서 깊은 파트리키 가문 출신 인사는 가문의 명성만으로도 많은 로마인, 특히 선거철에만 로마를 방문해 상대적으로 로마 내부 사정에 어두워 출마자를 배출해낸 가문의 명성에 끌리기 쉬운 외지인의 지지를 기대할 수 있었으며, 생득권이라 할 수 있는 상류층에서의 인맥과 존재감도 무시 못할 자산이었다.[6] 훗날 두 사람이 대립하게 되자 카틸리나는 다시 키케로의 태생을 조롱하고, 키케로는 카틸리나에 대한 흑색선전으로 응수한다.[7] 간단히 말해 로마 정계를 좌지우지하던 유력 가문 출신 인사들.[8] 또한 이 같은 판단엔 키케로가 법무관 시절 내린 하나의 유죄판결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관련 내용은 비판 또는 한계 항목에 하술.[9] 수석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차석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10] 이 인물을 마냥 긍정적으로 여길 가능성이 있기에 첨언하자면, 그는 한때 부패한 속주 총독으로 악명을 떨쳤다.[11] 정확히 말하면 포에니 전쟁 이후로 급변한 환경에 대응하고 무너진 중산층을 다시 일으켜 세우며 포에니 전쟁으로 인해 얻게 된 이득을 로마 시민들에게 골고루 분배하도록 하는 것이다.[12] 사실 카틸리나의 최종 목적이 무엇이었지에 대해선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심지어 사람에 따라선 카틸리나를 집정관으로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는 데에 열을 올리던 키케로가 꾸며낸 부당한 음모론의 희생자로 보기도 한다.[13] 이 규정은 국제를 수호하기 위해 시민의 권리를 일시 정지시키는 것을 골자로 하는데, 처음부터 국제 수호라는 명목하에 반대 세력을 정치적으로 탄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다분했던 이 문제의 규정은 이전까진 그래도 소요 사태 등 실제적인 충돌이 일어난 경우에만 적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키케로는 유혈 사태를 획책했다는 혐의만으로 이 규정을 확대 적용해 혐의자에 대한 즉결 처형을 강행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을 보인 연유는 십중팔구 자신의 집정관 재임기 반란을 꾀한 이들을 처형해 난을 진압했다는 공적을 세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14] 단 이는 강직한 원칙주의자라는 평에 걸맞지 않은 모습이다. 원칙적으론 키케로가 아니라 카이사르의 주장이 옳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처사는 소 카토와 카이사르 양자 간의 불화가 원칙이나 정치적인 이유를 넘어선 개인적인 악감정에 기반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15] 이 시기 폼페이우스 파벌에 속했던 네포스의 거부권 행사엔 정략적인 의도도 포함돼 있었다. 그 무렵 동방 원정을 마무리 짓고 귀국할 채비를 하던 폼페이우스는 카틸리나의 반란으로 도래한 혼란을 수습하겠다는 명분을 이용해 특별 직권을 부여받고 로마로 귀환하려 했으나 자신이 이룬 공적의 빛이 바랠 것을 우려한 키케로의 반대에 부닥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따라서 네포스의 거부권 행사는 재판 없이 로마인을 처형한 일에 대한 반대의 의미 외에, 카틸리나의 반란을 빌미로 특별 직권을 확보하려 한 폼페이우스의 시도를 좌절시킨 일에 대한 앙갚음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16] 본래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카틸리나에 대한 논쟁이 한창 들끓던 시절 키케로를 호위하는 무리에 가담하는 등 키케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17] 이 말은 곧, 현존하는 카틸리나 탄핵문은 키케로가 원로원 회의에서 입에 담은 말이 아닌, 그것을 기반으로 다듬어지고 보강된 글임을 시사한다.[18] 본래 대표적인 반 카이사르 인사로 명성을 떨쳤으나, 이 무렵엔 카이사르 지지자로 선회한 상태였다.[19] 사실상 카이사르의 부상을 경계하던 폼페이우스와 카토를 위시한 옵티마테스[20] 상술했듯이 폼페이우스는 한때 카이사르의 사위였다.[21] 키케로와 카토는 대개 공화정의 수호자로 한데 묶이곤 하나, 정작 살아생전 두 사람의 사이는 좋지 못했다.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강렬한 성격의 소유자이자 그 무렵 옵티마테스의 리더격이었던 카토는 신참자인 키케로를 자신과 대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았고, 그러자 자연스레 카토를 보는 키케로의 시선도 곱지 못했다. 이런 관계는 훗날 카토가 자결해 공화정의 순교자로 추앙받기 전까지 계속된다.[22] 하지만 이미 이탈리아는 카이사르가 완전히 장악한 데다가 이탈리아 전체가 카이사르를 지지하고 있었고 옵티마테스는 전부 폼페이우스에게 가버린 이상 키케로가 남아있어 봤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함부로 나섰다가는 목숨도 위태로웠을 듯.[23] 당연하지만 바지사장 격의 위치였다.[24] 중립에 가까웠으나 굳이 고르자면 카이사르에게 우호적이었다.[25] 이에 비해 아우구스투스가 황제에 취임하면서 내건 구호는 평화(팍스)였다. 미묘한 차이.[26] 이 관용에 대해 키케로는 당신의 관용이 많은 생명을 구한다(clementia tua multas vitas conservat)라고 칭찬했는데, 드라마 추노의 오프닝 곡 '바꿔'의 첫 가사로도 쓰였다.[27] 그러나 정작 카이사르를 접대해야 했던 키케로는 "카이사르 자체는 참 괜찮은 사람이지만 그를 대접하는 일은 골치 아프니까 앞으로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뉘앙스의 불만을 토로한다.[28] 여기엔 속주 출신 인사가 얼마간 포함돼 있었는데, 이 사실은 사회 전반적으로 속주민을 멸시하는 풍조가 만연했던 당대 로마의 사정상 많은 이들의 공분을 사 카이사르 암살이 거행되는 데 일조한다. 키케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 원로원이 더럽혀졌다며 카이사르를 비난한다.[29] 즉 제목만으로도 안토니우스가 필리포스와 같은 독재자임을 의미하려 한 것이다.[30] 또 두 연설문은 키케로가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에게 사실 여부가 불분명한 인신공격 세례를 퍼부었다는 점에서도 유사점을 보인다.[31] 다만 이 시점에 이르러서도 키케로가 모든 상황의 주도권을 쥔 것은 아니었으며 안토니우스를 상대로 강경책을 고수하는 키케로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의원도 적지 않게 존재했다. 당년도 집정관이자 본래 카이사르파 인사였던 히르티우스와 판사도 이런저런 의견 차이를 보이면서도 위험인물인 안토니우스 타도라는 목적하에 키케로와 협력을 했지, 일방적으로 그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다. 애시당초 키케로는 로마군을 전혀 장악하지도 못했다. 만약 군을 장악하고 있었다면 굳이 원수의 아들인 옥타비아누스를 내세울 필요도 없었겠지만.[32] 이에 대해 옥타비아누스에 의한 암살 의혹이 있으나, 정황상 전란에 휩싸여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키케로 입장에선 운도 따르지 않았던 셈인데, 이후 일어날 카이사르파의 재단결이라는 전개를 감안하면 설령 히르티우스와 판사가 생존했던들 키케로의 진의가 폭로된 순간 그들도 입장을 바꿔 키케로에게 칼을 겨눴을 가능성이 작지 않다. 그러나 당년도 집정관이 모두 전사한다는 돌발 상황은 쉽사리 찾아오는 일이 아니며 둘 중 한 명이라도 생존했다면 차후 전개가 바뀌었을 가능성도 충분하기에, 역시 운마저 따르지 않았다고 평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이다.[33] 물론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통해 그의 정식 후계자로 인정받았고, 또 정식 후계자가 될 만한 능력도 가지고 있어서 카이사르 파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는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카이사르를 따라다니며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안토니우스를 능가하기는 힘들었다.[34] 당연하지만 이 말은 새로운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의 귀에도 들어갔다.[35] 애시당초 로마에 민중파라는 게 생긴 이유가 바로 원로원에서 병사들에 대해 당연히 줘야 할 보상을 떼먹고 이걸 자기들의 사리사욕에 사용했기 때문이었다.[36] 이후 악화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패주하는 안토니우스를 추격하던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재결집한 카이사르파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에서 이도 저도 못하는 신세가 됐고, 결국 휘하 장병을 포기하고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자리 잡은 마케도니아 속주로 도주를 감행하나 도중 한 갈리아 부족장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한다.[37] 다만 두 사람의 관계는 키케로가 레피두스의 제안에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임으로써 진즉 어긋난 상태였다.[38] 키케로가 옥타비아누스를 이용해 카이사르파의 분쟁을 극대화해 카이사르파 전체를 제거하는 것으로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면, 브루투스는 되도록 로마인의 피를 흘리지 않고 쌍방의 타협 등을 이끌어내는 형태로 평화롭게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39] 카시우스는 과거 카레하에서의 패전 이후 파르티아의 공세에 맞서 시리아 속주를 지켜낸 일로 해당 지역에서 높은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40] 플루타르코스가 전한 기록에 의하면, 처음 이틀 동안은 옥타비아누스가 키케로의 살해에 반대하며 막아섰으나, 마지막 날이 되자 양보했다고 한다.[41] 이 무렵엔 앙금을 털어내고 형과 화해한 상태였다.[42] "A learned man, my child, a learned man and a lover of his country." 플루타르크. 키케로의 삶 49.3http://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plutarch/lives/cicero*.html [43] 플루타르크가 그리스어 저자라 넘어가지만, 정작 아우구스투스는 스스로 인정할 정도로 그리스어를 못 했다. 그리고 키케로의 아들이 필리페 전투 이후에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한 이후로 측근이 되었고, 그 이후 키케로의 저작들이 출간됐을 정도로 대접이 나쁘지 않았다.[44] 미국 제2대 대통령[45] 다만 안타깝게도 화목한 부부생활까지는 가지지 못했다. 키케로는 결국 첫 번째 아내인 테렌티아와 이혼을 하였는데,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녀는 전쟁 중에도 그를 보살펴 주지 않았고, 피난을 갈 때는 필요한 물건들도 챙겨 주지 않았다. 또한 키케로가 로마에 돌아왔을 때도 반갑게 맞아 주지 않았고, 그가 브룬디시움에 오랫동안 머물고 있을 때도 한 번도 만나러 간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어린 딸이 먼 길을 혼자 떠날 때도 호위할 사람이나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주지 않았다. 게다가 키케로가 없는 동안에 그 많던 살림을 다 처분해 버리고 큰 빚까지 만들어놓았다." 결국 그는 이혼을 하고 부유한 젊은 여인과 결혼하였는데, 빚을 갚기 위한 동기도 어느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래는 이 여인의 재산을 관리해주던 후견인이 키케로였는데, 어느새 나이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한 셈. 당대에도 이건 막장드라마로 보였는지, 안토니우스는 키케로의 재혼 문제에 대해 조강지처를 버렸다고 비판했다. 물론 우리는 안토니우스가 키케로 사후 훨씬 더 거한 스케일의 막장드라마를 찍었음을 안다(...).[46] 독일의 현대 철학자.[47] 오늘날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간섭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간의 예속(dominance)에 대한 반대말로서의 자유이다. 키케로는 자신이 꿈꾸는 올바른 공화정이 인민에게 온전한 자유를 줄 것이라고 상상했으나,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실질적으로 매우 결함이 있는 자유이다. 왜냐하면 실질적으로는 금권 정치로 이어져서, 빈자가 부자에게 개인과 개인의 관계로서 예속당하기 때문이다. 정치학적 의미에서 키케로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후대의 공화주의자들조차도, 다시 말해 키케로를 가장 호의적으로 평가해줄 수 있는 사람들마저도, 키케로의 자유관을 수용하는 동시에 '빈자가 경제적 이유로 부자에게 예속되는 것'을 막는데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키케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다. 즉 이 부분에서 만큼은 키케로가 명확한 한계를 가지고 있던 셈.[48] 파리 코뮌 같은 극단적 예외들을 제외한다면, 근대의 시민혁명들은 엘리트의 권위와 여론의 균형이 있는 혼합정을 주장한 경우가 많았다. 불과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영국인들은 아테네의 민주정보다는 스파르타의 혼합정을 이상적 체제로 해석하였음도 잊어서는 안된다.[49] 최소한 당대 엘리트들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그러한 건덕지가 있는[50] 일례로 카이사르 암살의 주역 브루투스는 로마에서 고결한 성품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속주에선 연이율 48%라는 조건으로 고리대금업을 벌여 재산을 불렸다.[51] 호민관의 권한이 너무 막대하여 온갖 폐해가 생겼다는 주장.[52]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몰락은 동료 호민관의 거부권 행사를 막은 그의 독단에 있는 것을 말한다. 또한 호민관의 정책은 동료 중 1명만이 거부권을 행사해도 막히는데, 티베리우스처럼 극단적인 케이스(동료의 해임)를 제외한다면, 그릇된 정책일지라도 최소한 동료 1명의 거부권은 나올 것이므로 호민관직은 여전히 유익하다는 의견이다.[53] 정무직을 수행하는 자는 "자신과 부하들을 통솔하도록 할 것이며, 자기 국민의 영광을 선양할 것이며, 승리해 귀국함으로써 칭송을 받도록 할지어다."(3.3.9)[54] "정무직에서 이직한 사인(私人)들은 호구조사관에게 봉직 기간의 업무에 대한 기록부를 제출할지어다. 그렇다고 법률로부터 더 면책되어서는 안 될지어다."(3.4.11)[55] libera legatio: 국가 경비를 여비로 받아서 사무를 처리하고 다니는 폐습.[56] "이런 종류의 사절직함이라면 내가 통령이었을 적에, 어느 경박한 호민관이 내게 반대만 하지 않았더라면 거의 폐지될 뻔했다네."(3.8.18)[57] "권자에 출마한 동안도, 수행하는 동안도, 수행한 후에도 선물은 받지도 말고 주지도 말지어다."(3.4.11)[58] 원로원 회의에 출석하지 않은 원로원 의원은 사유를 제출하거나 견책을 당하거나 할지어다. 원로원 의원은 자기 차례에서 절도 있게 발언할지어다. 그는 인민의 현안문제를 파악하고 있을지어다. 인민회에서는 폭력이 있어서는 안될지어다. 회의에서는 동등하거나 상위의 권한이 (회의를 사회하는 자의 권한보다) 우월할지어다. 그러나 의사를 진행하다가 소란이 발생할 경우의 과실은 회의를 사회하는 당사자가 짊어질지어다. 좋지 않은 사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자는 국가의 안녕에 이바지하는 시민으로 간주될지어다.(3.4.11)[59] 다만 모두 호평한 것은 아니고, 동료 시민 살해는 비판했다.[60] 다만 당대 로마 정계를 주름잡던 인사들의 시각으론 그의 주장 또한 아래로부터 요구였을 것이다. 일종의 아이러니.[61] 사실 키케로의 주장 자체는 철저히 기득권의 이득에 부합되어 있었다. 다만 당시 기득권층이었던 원로원 파는 그의 주장 자체는 이용해 먹으면서도 정작 키케로 개인의 위기에 대해서는 자신들과 같은 명문 귀족이 아닌 기사 계급 출신이라는 이유로 무심하게 대했다. 키케로 본인은 이런 자신의 출신 성분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고 더욱더 그들과 같은 카테고리에 엮이고 싶어 했다.[62] 흔히 민중파로 번역되며 대체로 긍정적인 의미로 여겨지나, 사실 당대 로마에서 이 단어는 '민중을 선동해 로마를 혼란에 빠트리고 왕이 되려는 꿍꿍이를 지닌 몹쓸 놈'쯤의 의미를 지닌 욕설이었다. 여담으로 이 단어의 고안자가 키케로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63] 여기서 나온 단어가 바로 포퓰리즘으로 역시나 포풀라레스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의미를 지녔다.[64] 과거 로마 공화정 시대의 파트로누스와 클라엔테스 간의 관계를 알면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65] 이전 글에 언급된 플루타르코스는 클로디우스와 키케로가 활동한 공화정 말기가 아닌, 그로부터 대략 150년 후 오현제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후대 인물인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을 집필하며 필연적으로 키케로의 저서를 참고했을 것이며, 키케로의 시각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다른 후대 사가도 사정은 마찬가지. 참고로 키케로는 클로디우스를 '뻔뻔스럽고 경멸스러운 괴물'로 평했다.[66] 참고로 키케로는 클로디우스의 목숨을 앗아간 밀로를 '훌륭하고 우아한 신사'로 평했다.[67] 대조적으로 키케로의 기록에선 클로디우스의 무법자적이고 포풀라레스적인 면모만이 두드러질 뿐, 광범위한 정치적 연대를 이룩한 그의 정치적 수완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68] 그리고 이런 광범위한 정치적 연대를 이룩할 수 있는 수완을 갖추지 못했다면, 클로디우스가 그토록 수월하게 키케로의 정치 경력을 파괴하진 못했을 것이다.[69] 이 시도는 최종적으로 카이사르의 개입으로 삼두 모두에게 득이 되는 협의안이 도출되면서 좌절된다.[70] 더 공정을 기하자면, 카이사르의 주도로 자격 요건을 충족하는 빈민에게 분배된 공유지를 사유화하다시피 했던 원로원 의원을 위시한 세력가들이 규정된 임차료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아 실제 국고 수입 감소분은 명목상 수치에 미치지 못했으리란 사실도 언급해야 했을 것이다.[71] 또 플라톤의 철인론은 지도자의 부패를 방지하는 방안에도 고심했다는 점에서, 유산자의 결합을 촉구한 키케로의 국가론과는 궤를 달리한다.[72] 애시당초 호민관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귀족들에게 치우쳐서 귀족과 평민간 차별대우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완화하기 위한 것으로 무엇보다 호민관은 귀족이나 원로원이 던져준 게 아니라 평민들의 투쟁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므로 평민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맞다.[73] 마케르를 언짢게 여긴 세력가들[74] 냉소적으로 말해, 키케로는 자신이 최상위 지배계급에 속하는 속주에 머무를 때나 현실의 압박에서 벗어난 저술 활동에 전념할 때 가장 공정했고 다소나마 인민의 유익함을 챙기는 마음 씀씀이를 보여줬다.[75] 일례로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키케로를 "그가 원하는 것을 주고, 그에게 아첨하고, 그를 칭찬하는 인민을 얻을 수만 있다면 예속적인 상태도 참고 견딜" 인물로 평했다.[76] 달리 말해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준동은 이러한 혼란을 해소하기 위한 움직임이었으며, 키케로의 정적 카이사르가 로마 영역 전역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것은 진의가 뭐든 이러한 문제 해결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77] Titus Pomponius Atticus(기원전 110년 ~ 기원전 32년). 키케로와 같은 기사계급 출신으로 집안에 재산이 많았고 본인도 사업감각이 뛰어나 부동산 투자, 출판업, 금융업, 검투사 양성 등의 사업으로 상당한 부자가 되었다. 그리스에 오랜 세월 머무르며 그리스 문화에 심취하여 '아티카(아테네가 포함된 그리스 동남부의 지명)인'이라는 뜻의 '아티쿠스'라는 이름을 스스로 붙였다. 4살 연하인 키케로와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으며 그가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거액을 들여 돕기도 했고, 카이사르도 젊은 시절 술라의 분노를 피해 그리스로 도망쳤을 때 그에게 몸을 의탁한 적이 있다. 정치적으로는 옵티마테스였으나 키케로만큼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여하지는 않았고 누구와도 적을 만들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격동의 시대를 살았음에도 편안히 천수를 누렸으며, 늙어서 죽음이 다가오자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음을 택했다. 딸인 체칠리아 아티카는 아그리파의 첫 번째 부인이 되었으므로 아그리파의 장인이기도 하다.[78] 친구라고 하기엔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존재를 마냥 긍정하진 않았다. 오히려 카틸리나 탄핵에서 대립한 일을 기점으로 둘의 관계는 악화해 이후 내심 상대방을 썩 탐탁지 않은 존재로 여긴듯하다.[79] 특히 딸 툴리아를 무척 아껴, 딸이 세상을 떠나자 한동안 삶의 의욕을 잃고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80] 무리도 아닌 것이, 애초에 키케로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인간이 친절과 연민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라고 쓴 이상주의자였다. 다른 저작도 읽어보면 대체로 도입부에 큰 이상을 세운 후 본론에서는 이걸 어떻게 현실로 구현할 수 있을지 나름 전략을 세우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81] 사람이 말하는 속도로 글을 썼다는 이야기. 이런 이유로 오늘날 키케로의 저작이라고 전해지는 작품들은 사실 키케로의 것이 아니라 티로의 것이라는, 농담 섞인 주장도 있다.[82] 바로 이러한 점에서, 그의 정적인 카이사르와 나름대로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카이사르도 사적으론 관대하고 유쾌하며, 그리스 문화의 애호가이자 수사학 고수였다. 이는 키케로와 일치한다.[83] 악시우스는 그리스어로 '잘 어울리는'이라는 뜻이다.[84] 하지만 어릴 적부터 내가 말을 너무 잘해서 학부모들이 내 논변을 들으러 학교에 왔다는 식의 말을 한 걸 봐선, 키케로의 자화자찬하는 성격은 기본적으론 타고난 것으로 보인다.[85] 키케로는 카이사르보다 6살 연상이고, 원로원 의석도 6~7년 먼저 받았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경험과 연륜을 상당히 존중하고 우대하는 편이었다. 당장 원로원(Senatus)부터가 (실제로 노인들로만 구성되었던 것은 초창기 뿐이지만) 이름 그대로 노인들의 지혜를 모으고자 만들어진 기관이었다.[86] 아마 키케로가 자뻑이 심하다는 것을 감안한 의도적인 오버액션(?)이었을 것이다. 이전에도 키케로가 폼페이우스 편에 붙었다가 폼페이우스가 패망하자 그 또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 카이사르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는데, 개선한 카이사르는 키케로를 보자마자 말에서 내려 그에게 먼저 다가가 친근하게 대했다. 카이사르가 키케로를 인간적으로 좋아한 측면도 있겠지만 확실히 사람 다루는 솜씨가 보통내기가 아니다. 카이사르 정도의 군사적·정치적 역량을 가진 사람들은 로마 역사상 꽤 있었으나, 인간의 심리에 대한 이런 깊은 이해와 통찰은 카이사르의 일생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그만의 특장점이다.[87]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에는 키케로의 문장이 강렬하게 반영되고 그는 『변론입문』(Topica)를 주석하기도 했다.[88] 『신적 교양』(Divinae institutiones) 전체가 키케로의 문장을 표준으로 집필된다.[89] 에라스무스는 "나는 키케로가 아니다. 나는 내 문장으로 표현했다"라고 말하였다.[90] 키케로 한테는 완전 굴욕인데, 예를 들어서 소 카토는 이 때 집정관 선거에서 실패한 상황이였다. 즉, 전직 집정관도 아닌 사람에게 정치적 영향력에서 밀렸다는 말.[91] 근데 필리피카이 연설은 라틴어적으로는 뛰어난 문장들이기는 하나 내용은 진짜 인신공격 투성이다.[92]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동맹을 맺었으니 대비해야 한다는 서신. 이 서신을 못받은 브루투스는 결국 대폭 불어난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자결한다.[93] 보레누스의 아내가 불륜으로 낳은 아들.[94] 로마(이탈리아) 지휘관인 카이사르가 갈리아(프랑스)에서 7년간 싸워 전역을 정복해낸걸 생각나게 한다.[95] 주인공의 아이들이 태어나자 무려 양피지 10장 분량의 축사를 써주었다. 양피지 가격을 생각한다면 엄청난 가치의 선물.[96] triginta illi: BC 404년 30명이 아테네에서 전권을 장악하고 폭정을 일삼다가 트라시불로스(Thrasybulos)의 반격으로 민주정이 회복된 사건이다.[97] 어째서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카이사르를 키케로가 반대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문장이다. 2000년이 지난 현대에도, 여론의 지지를 내세우며 폭정을 휘두르는 독재자들에게 모두 적용 가능하다.[98] 로렘 입숨에 인용된 문구이다.[99] 세계 각지에서 표어로 사용하는 문구로 그리스의 시인 테오크리토스가 인용했다는 설도 있다.[100] 로렘 입숨이 이 책의 내용 일부를 마개조해서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