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굴리스탄 칸국

 



'''모굴리스탄 칸국'''
''Moghulistan''
존속기간
1347년 ~ 1705년[1]
위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일대
수도
야르칸드, 투르판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주요 칸
투글루크 티무르
에센 부카 2세
유누스 칸
언어
중세 몽골어, 차가타이어
민족
몽골인, 위구르족
종교
텡그리
이후 이슬람
주요사건
1347년 차가타이 칸국으로부터 분리
1462년 유누스 칸 때에 분열
1514년 동서 분할에 합의
1705년 마지막 칸 인도로 망명
성립 이전
차가타이 칸국
멸망 이후
준가르, 청나라, 하미 칸국
1347 ~ 1705년까지 존재했던 차가타이 칸국의 동쪽 부분. 톈산 산맥 북쪽의 모굴리스탄과 남쪽의 타림 분지를 지배했다. 중세 카라한 칸국의 영토와 유사하다.
1. 모굴리스탄(동투르키스탄)
2. 14세기 중반 : 모굴리스탄 칸국의 탄생
3. 14세기 후반 : 티무르 제국의 등장
4. 15세기 : 전성기와 분열의 시작
5. 16세기 : 완전한 분열
6. 17세기 및 18세기 : 호자 가문의 득세와 멸망


1. 모굴리스탄(동투르키스탄)


모굴리스탄은 톈산 산맥 (천산 산맥) 북쪽의 현 카자흐스탄 동남부와 이닝, 대충 말하여 발하슈 호이식쿨 호의 중간에 있는 초원, 스텝 지대를 의미한다. 그 지역은 차가타이 칸국에 소속되었으며, 이주해 온 몽골인들은 전과 그대로 유목생활을 이어나가며 토착 튀르크 계와 혼혈되었고, 모굴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2. 14세기 중반 : 모굴리스탄 칸국의 탄생


1346년, 차가타이 칸국의 카잔 칸이 카자간에 의하여 피살되었고, 이 때부터 차가타이 칸은 실권을 잃게 되었다. 1347년, 칸국의 동쪽에서 유목생활을 고수하며 지내던 모굴인들은 카자간의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차가타이의 후손인 투글루크 티무르를 칸으로 추대했다.
1358년, 카자간도 피살되면서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은 무정부 상태가 되었고, 반면에 모굴리스탄 지역은 투글루크 티무르 칸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등 튀르크 계에 대한 포섭을 성공하여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또한 두 번에 걸친 원정으로 옛 차가타이 칸국 영토를 통일했으며, 아들인 일리아스 호자에게 서쪽 지역을 맡기고 모굴리스탄으로 복귀했다.

3. 14세기 후반 : 티무르 제국의 등장


1363년 아미르 티무르와 아미르 후세인이 일리아스 호자를 몰아내고 서 차가타이 한국을 차지했다. 1370년, 아미르 후사인을 제거한 티무르는 티무르 제국을 세워 여러 차례의 원정을 통해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잡았다.
한편, 모굴리스탄으로 쫓겨난 일리아스 호자는 1368년에 두글라트부의 카마르 앗딘에게 칸위를 찬탈당했다. 하지만 1390년 티무르가 모굴리스탄에 들어와 찬탈자인 카마르 앗딘을 내쫓자, 두글라트부 카마르 앗딘의 조카인 후다이다드(Khudaidad)가 투글루크 티무르의 다른 아들 히르즈 호자를 지원하여 옹립함으로써 왕조가 복구될 수 있었다. 이후 후다이다드는 큰 권력을 행사했고, 실질적으로 카슈가르 일대를 지배하면서 이를 자신의 두글라트부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

4. 15세기 : 전성기와 분열의 시작


티무르 사후, 티무르의 손자 울루그 벡이 사투크 칸이라는 명목상의 칸을 내세워 모굴리스탄 칸국으로 쳐들어왔다. 1429년, 우웨이스 칸이 이를 막다가 전사했고 모굴리스탄 칸국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티무르 제국의 지배에 대한 반발이 여기저기서 일어났고, 에센 부카 2세가 이를 통합하여 사투크 칸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티무르 제국의 침입으로 인한 혼란을 수습한 에센 부카 2세가 역공에 나서 타슈켄트를 공격하고 그 근방을 약탈하면서 모굴리스탄 칸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티무르 제국은 자신들에게 의탁중이던 에센 부카 2세의 동생인 유누스 칸을 부추겨 모굴리스탄을 공격하게 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462년, 에센 부카 2세가 죽고 아들 도스트 무함마드 칸이 즉위하자, 유누스 칸이 다시 쳐들어왔다. 도스트 무함마드는 아커쑤에 주둔했고, 유누스 칸은 카슈가르의 아미르인 두글라트부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1468년, 도스트 무함마드가 죽고 어린 아들 케벡 술탄이 즉위하자 유누스 칸은 곧바로 아커쑤를 점령하고 케벡 술탄을 몰아냈다. 케벡 술탄은 투르판으로 도망쳤으나 부하들의 배신으로 곧 죽었고, 유누스 칸이 모굴리스탄의 유일한 칸이 되었다.
1484년 유누스 칸은 티무르 제국의 내분에 개입, 타슈켄트를 점령했다. 유누스 칸은 도시에서 오래 생활했기 때문에 도시 생활을 원했고, 타슈켄트에서 여생을 보내다 사망했다. 하지만 모굴리스탄의 부족들은 유목 생활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유누스 칸을 따르지 않고 그의 아들 아흐마드 알라크를 따라 떠났다. 유누스 칸의 세력은 그의 사후 장남 마흐무트 칸에게 계승되었으며 이로 인해 칸국은 다시 동서로 분열되었다.

5. 16세기 : 완전한 분열


16세기 들면서 무함마드 샤이바니가 이끄는 우즈베크 족이 남하해왔다. 1503년, 이에 위협을 느낀 마흐무트 칸과 아흐마드 알라크는 힘을 합쳐 샤이바니와 전투를 벌이나 패배하고 둘 다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샤이바니는 둘을 석방해주었으나, 아흐마드 알라크는 그 해에 바로 동쪽 아커쑤에서 죽었고, 만수르 칸이 칸위를 계승했다. 5년 뒤, 서쪽에서 마흐무트 칸이 죽고 사이드 칸이 즉위하자 만수르 칸은 사이드 칸을 공격하여 몰아내고 모굴리스탄을 다시 통일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후 북쪽으로 오이라트에 원정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1514년, 만수르 칸에 패해 도망쳤던 사이드 칸은 다시 모굴리스탄으로 진입해 두글라트부 아미르가 다스리던 카슈가르와 그 일대를 공격해 점령했다. 만수르 칸은 사이드 칸과 협상에 나섰고, 2년 뒤인 1516년 사이드 칸은 카슈가르 일대, 만수르 칸은 투르판 일대를 지배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합의 이후 모굴리스탄 칸국은 일시적인 경우를 빼고는 분열의 상태를 지속했다. 서쪽 정권을 '''서 모굴리스탄 칸국''', '''카슈가르 칸국''', '''야르칸드 칸국'''[2]등으로 부르며, 동쪽 정권을 '''위구르스탄 칸국''', '''동 모굴리스탄 칸국''' 등으로 부른다.
1533년, 야르칸드 칸국에서 사이드 칸이 죽고 압둘 라시드 칸이 즉위했으며, 1548년에 위구르스탄에서 만수르 칸이 죽고 샤 칸이 즉위했다. 압둘 라시드 칸 때에 수피즘 종교 지도자인 아흐마드 카사니가 카슈가르에 도착했으며, 그의 후손들은 '호자(Khoja)'라는 이름으로 이후 이 지역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했다. 위구르스탄에선 샤 칸의 동생이 하미(쿠물)를 차지하고 자립했으며, 이 후 하미(쿠물) 칸국은 청나라에 복속하면서 1930년까지 지속했다.
야르칸드 칸국과 위구르스탄 칸국으로 분열된지 3대째에 접어들면서 서로간의 합의는 깨지기 시작했다. 압둘 라시드 칸의 장남으로 야르칸드의 칸이 된 압둘 카림 칸은, 위구르스탄의 샤 칸이 죽자, 자신의 동생 코라이쉬를 보내 위구르스탄을 공격했다. 코라이쉬는 샤 칸의 아들들을 물리치고 위구르스탄을 차지한 후 자립을 선언했다. 이에 압둘 카림 칸은 다른 동생인 무함마드를 보내 코라이쉬를 쫓아냈으며, 코라이쉬는 무굴 제국으로 도망쳤다. 압둘 카림 칸이 죽은 뒤 무함마드는 야르칸드의 칸이 되었고, 위구르스탄에선 무함마드의 동생인 압둘 라임이 칸이 되었다. 이로써 야르칸드와 위구르스탄 칸국 모두 압둘 라시드 칸의 자손들이 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6. 17세기 및 18세기 : 호자 가문의 득세와 멸망



무함마드 칸 대에는 주변국과의 교류가 활발했다. 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1603년에 예수회 선교사 벤투 드 고이스가 명나라로 가는 길에 야르칸드 칸국에 체류한 것이었다. 한편 무함마드 칸은 아흐마드 카사니의 아들인 호자 이샤크 왈리를 후원했고, 이들의 세력은 이후 야르칸드를 중심으로 '''흑산당'''을 형성했다. 1638년, 압둘라 칸은 아흐마드 카사니의 손자 무함마드 유수프에게 카슈가르 근처의 마을을 하사했고, 이들은 무함마드 유수프의 아들 아팍 호자를 중심으로 '''백산당'''을 형성했다. 칸의 후원을 통해 성장한 백산당과 흑산당의 호자 가문은 아예 칸을 옹립함으로써 실권을 행사하고자 싸우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칸의 권력은 유명무실하게 되어 버렸다. 점차적으로 타림 분지 도시들에 대한 지배권은 느슨해졌고, 도시 귀족들의 영향권도 강화되었다.[3]
1670년, 흑산당의 지원을 받아 칸에 오른 이스마일 칸은 아팍 호자가 이끄는 백산당을 내쫓았다. 아팍 호자는 준가르의 갈단 칸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준가르의 갈단 칸은 군대를 보내 야르칸드를 공격했다. 준가르는 야르칸드를 점령, 이스마일 칸을 생포한 후 라시드 칸을 칸으로 만들고 돌아갔다.[4] 이 때의 원정으로 모굴리스탄은 사실상 준가르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갔다. 갈단 칸이 돌아간 이후, 아팍 호자는 라시드 칸을 제거하고 야르칸드를 지배했다. 1690년, 투르판의 무함마드 아민 칸이 야르칸드로 진입하여 아팍 호자를 몰아냈으나, 얼마 안 있어 아팍 호자가 카슈가르에 있던 아들 야흐야 호자의 지원으로 복귀, 무함마드 아민 칸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차가타이 계통의 경쟁자들을 제거한 이후 아팍 호자는 아들인 야흐야 호자를 칸에 추대했다.[5] 1694년 아팍 호자가 죽고, 1년 뒤 1695년에 아흐야 호자도 암살당하자 차가타이 계통의 아크바쉬 칸이 다시 즉위했다. 하지만 아크바쉬 칸은 1705년에 인도로 망명했고, 차가타이 계통 칸의 지배는 마무리되었다.[6][7]

[1] 첫 분열은 1462년. 투르판의 마지막 칸은 1690년. 야르칸드 칸의 마지막 칸이 쫓겨난 것이 1705년.[2] 17년 뒤인 1533년에 사이드 칸은 야르칸드로 근거지를 옮겼고, 그의 후손들은 대부분 야르칸드에 거주했다.[3] 봉건제와 유사하게, 야르칸드나 투르판의 칸이 자신의 일족들을 각 지방 도시의 지배자로 임명했으며, 이들은 사실상 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했다. 칸의 계승 문제로 인해 각 도시의 왕족들 간의 다툼이 발생하면, 도시 귀족이 쿠릴타이를 통해 칸을 선출, 중재자의 역할을 행사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도시 귀족들의 권한도 강화되었다.[4] 투르판은 이전에 미리 준가르에 복속해 군대를 보냈다[5] 몽골 제국 성립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칸은 징기스 칸의 후예들만 칭할 수 있었다. 때문에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도 아미르를 칭했으며 칸을 칭한 적은 없었다. 호자 가문은 그 동안 이러한 관례 때문에 명목상의 칸을 내세웠는데 이제는 이러한 관례도 지키지 않겠다는 뜻이다.[6] 차가타이 계통의 칸은 하미(쿠물)에 남아 있었으며, 이들은 이후 청나라의 준가르 정복에 협력해 청나라에 복속된 상태로 중화민국 때인 1930년까지도 존속했다.[7] 이후 백산당은 카슈가르, 흑산당은 야르칸드에서 각자 호자를 칸으로 내세워 대립하다가, 1713년 양 쪽 모두 다시금 준가르에 복속되었다. 1752년 흑산당의 반란이 일어나 준가르에게서 독립했으나, 얼마 뒤인 1759년 청나라에 정복됐으며, 1760년 이 지역에 청나라의 행정구역인 남로(南路)가 설치되었다. 투르판 일대에는 1756년에 북로(北路)가 설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