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트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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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마누트 볼 (Manute Bol)
'''출생'''
1962년 10월 16일, 수단 공화국 투라레이[1]
'''사망'''
2010년 6월 19일, 미국 버지니아 주 샬러츠빌
'''신장'''
'''231cm (7 ft 7 in)'''[2]
'''체중'''
91kg (200lbs)
'''윙스팬'''
260cm[3]
'''소속팀'''
워싱턴 불리츠 (1985~1988)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1988~1990)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1990~1993)
마이애미 히트 (1993~1994)
워싱턴 불리츠 (1994)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1994)

'''수상내역'''
NBA All-Defensive Second Team (1986)
2× NBA blocks leader (1986, 1989)
1. 개요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2.2. 미국행
2.3. NBA
2.3.1. 워싱턴 불리츠: 데뷔 그 자체가 센세이션
2.3.2.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2.3.3.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2.3.4. 말년
2.4. 사망
3. 아프리카를, 그리고 남수단을 사랑한 사나이
4. 여담
5. 관련 문서


1. 개요


前 NBA 농구선수. 1988년부터 1994년까지 활약했으며, 231cm의 키로 '''두 명의 NBA 역대 초장신 센터''' 중 한 명이었다.[4]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1962년 10월 16일 아프리카 수단 남부 투라레이에서 태어났다.
볼은 딩카족 출신으로,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민족 중 하나로 유명한 딩카족 답게 볼의 가족들도 하나같이 키가 컸다. 할아버지는 '''239cm''', 아버지는 203cm, 어머니는 208cm, 여동생도 208cm에 달했다고. 볼은 15살 때 소떼를 자주 습격하던 사자를 창으로 찔러 죽이는 등 부족 내에서 이름을 날렸고, 18세 때까지 딩카족의 주업이었던 소를 치는 일을 하며 살다가 아프리카의 거인들에게 관심을 갖던 뉴저지 주의 페어레이 디킨슨 대학의 농구 코치였던 돈 페일리로부터 농구를 하자는 제의를 받고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2.2. 미국행


그렇게 이역만리 낯선 나라로 향한 볼에게는 농구고 뭐고 문명의 혜택이라곤 전혀 받지 못하다가 갑작스레 미국으로 넘어오게 된 상황 속에서 문화적 갭을 극복하는 것이 더 큰 문제였고, 영어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처음 체육관에 온 날, 볼은 슬램덩크를 찍으려고 공을 들고 골대로 돌진했지만, 림에 딥 키스를 하며 치아 몇개가 나가버리고 말았다.
결국 볼은 입학 적격성을 두고 온갖 시비를 거친 끝에 클리블랜드 주립 대학을 거쳐 1983년 드래프트에서 샌디에이고 클리퍼스에 5라운드 전체 120번 으로 지명됐지만, 나이 조항에 걸려 NBA 데뷔의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볼은 대학무대에서 더 뛰기로 결심하고 1984년 디비전 II 소속인 브릿지포트 대학에서 정식 농구선수로 데뷔하게 된다. 데뷔전에서 상대편 6'5(198cm)짜리 센터를[5] 쳐바르며 30득점 10리바운드 10블록슛을 기록한다. 비록 디비전 II 소속이었지만 신으로부터 선물받은 그의 높이가 있는 이상 볼에게 디비전 II은 그야말로 껌이었고, 결국 1985년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31번으로 워싱턴 불리츠에 지명되며 NBA 리거가 되었다.

2.3. NBA



2.3.1. 워싱턴 불리츠: 데뷔 그 자체가 센세이션


볼은 NBA에 데뷔하자마자, 특이한 겉모습만으로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골대를 장난감처럼 갖고 놀아도 될 정도의 엄청난 키, 키에 비해 밸런스가 맞지 않는 가벼운 체중[6], 그리고 딩카족 특유의 엄청나게 새까만 피부만으로도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비록 할 수 있는 건 어마어마하게 큰 키를 이용한 블록 슛 뿐이었지만, 볼은 그 '''블록 슛 하나만으로 NBA에서 뛸 수 있었다.'''
데뷔시즌 기록이 80게임 출장에 평균 3.7점 / 6.0리바운드 / 4.96블록슛. 무려 블록슛 개수가 득점보다 많다. 이로 인해 루키시즌에 올 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7년. 워싱턴 블리츠는 드래프트에서 역대 최단신 먹시 보그스를 지명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볼에게 집중되었던 주목이 타이론 보그스에까지 분산되는 효과를 낳게 되었다. 사진기자들에겐 무한한 일거리를, 관중들에겐 신기한 볼거리를 제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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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문제의 그 사진. NBA 팬이라면 한번씩은 봤을 듯. 자세히보면 알겠지만 보그스의 다리가 더 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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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바리에이션도 있다!
볼은 소포모어 시즌, 루키시즌보다 출장시간은 다소 줄었지만 82게임 전 경기에 출장, 3.68개의 블록슛(리그 2위)을 기록하며 건재를 알렸다.
하지만 그는 장점과 단점이 뚜렷한 선수였는데, 큰 키를 이용한 블록슛 능력은 발군이었지만 딩카족의 특성인 어마어마하게 큰 키에 비해 심하게 언밸런스한 체중 때문에 자신보다 작은 빅맨이 포스트 업을 걸어오면 그야말로 쭉쭉 밀리는 센터로써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박스아웃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골밑슛조차 잘 못하는 형편없는 공격력도 문제였기에 워싱턴에서 그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2.3.2.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결국 87-88시즌이 끝나고 볼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로 트레이드 된다. 볼 자신은 새로운 팀 동료인 크리스 멀린, 미치 리치몬드와 금새 친목질을 하며 팀 내 새로운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한다. 이것을 보고있던 당시 감독 돈 넬슨은 기발한 생각을 해 낸다. 공격에선 그야말로 잉여인간이었던 볼에게 3점슛이라는 신 무기를 장착시키기로 한 것.[7]
워리어스엔 센터라고는 83년 전체 1번에 휴스턴 트윈타워의 주역이었지만 누적된 부상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진 말년의 랄프 샘슨밖에 없었기 때문에 88-89시즌 나름 출장시간을 보장받으며 루키 시즌에 이어 두번째 블록슛 타이틀을 가져간다. 팀 역시 전년도 20승에서 43승으로 성적이 수직상승하며 플레이오프 진출 성공. 그 시즌 볼은 가끔씩 3점슛을 던져댔는데, 이것 역시 엄청난 볼거리가 되었다. (실제 성공률은 높지 않았다. 20/91로 22%)
88-89시즌 종료 후 볼은 시즌 활약의 보상으로 워리어스와 4년간 500만달러라는 거액 계약을 맺게 된다. 아프리카에서 소를 치던 촌뜨기가 본격 오백만 불의 사나이가 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의 뚜렷한 단점은 볼의 발목을 잡았고, 빠른 농구를 지향하는 워리어스에서 볼의 입지는 다시금 줄어들기 시작했다.

2.3.3.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결국 그는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즈로 트레이드 되었고, 이곳에서 찰스 바클리를 만나게 된다. 원래 트래쉬 토크 및 똘끼가 장난 아니던 바클리는 볼을 놀려먹으려고 했지만, 볼은 바클리를 역관광시키며 친구먹게 된다. 필라델피아에서도 볼은 자기 역할에 충실하며 90-91시즌에도 3.0개의 블록슛(리그 4위)을 기록한다. 91-92시즌에도 2.9개의 블록슛(리그 6위)을 기록하며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지만, 그 시즌 필라델피아는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고 만다.
필라델피아는 시즌 종료 후 찰스 바클리 = 앤드류 랭 + 제프 호나섹 + 팀 페리 트레이드로 바클리를 보냈고, 볼 역시 부상 크리로 56게임에 출장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3점슛 성공률이 높아지며 평균 득점이 소폭 상승했다. 10/32로 31.3%

2.3.4. 말년


92-93시즌 종료 후 볼은 마이애미 히트와 계약을 맺었지만 부상까지 있는 볼의 활용을 포기하고 8게임만에 방출. 그 후 워싱턴, 필라델피아와 10일 계약을 하며 근근히 선수생활을 하다 마지막으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5경기를 뛰고 쫓겨나며 NBA 커리어를 마감했다.

2.4. 사망


2002년 이래 종교적 망명자로 분류되어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었지만, 2000년대 후반 들어 100만 명 당 한 명 꼴로 발생하는 희귀병인 스티븐스-존슨 증후군으로 고통받기 시작했다. 피부 뿐 아니라 내장까지 손상을 입기 시작해 병원 신세를 지는 경우가 많아졌고, 2010년 6월에는 설상가상으로 급성신부전이 겹쳐 버지니아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도중 6월 19일 47세로 세상을 떴다.
장례식은 열흘 뒤인 29일에 워싱턴 D.C.의 국립 대성당에서 거행되었고, 미국 정부의 초청으로 도착한 볼의 가족들 외에 볼의 생전 마지막 거처였던 캔자스 주 출신 상원 의원과 NBA 부회장, 주미 수단 대사 등이 참석했다. 유해는 장례식 후 볼의 고향 수단에 비행기 편으로 운구되어 매장되었다.

3. 아프리카를, 그리고 남수단을 사랑한 사나이


자이르 출신의 디켐베 무톰보가 그랬듯 그 역시 아프리카를 사랑한 사나이였다.
NBA 선수로 수 백만 달러를 벌며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마누트 볼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수단사람이 되었지만 그의 조국 수단은 이슬람계 이주민과 토착 원주민이 남북으로 갈라져 다수인 북부 이슬람계남부 토착 원주민을 무력으로 강압통치하던 나라였다. 남부 원주민인 딩카족의 후예인 볼은 선수시절부터 고국의 가족과 내전으로 시달린 난민을 위해 난민캠프를 적극 지원하고 자기 연봉의 대부분을 대는 등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국제 사회에 수단 원주민들에 대한 탄압 실태를 알리며 국제 사회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수단 이슬람 정부에서는 그를 반체제 인사로 분류해 살해 위협과 탄압, 연금 조치 등을 수 년간 이어가기도 했다.
이 때 조국에 돈을 보내느라 개인적으론 파산 상태였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국을 돕기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직 풋볼 선수와 복싱 이벤트를 갖는다거나 아이스하키(...)팀과 일일 계약, 승마 선수 활동 등 광대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4년 택시 기사가 만취 상태인 것을 모르고 택시를 탔다가 사고를 당해 사망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원래 부상이 많던 몸이라 죽을 가능성이 높았으며 기적적으로 살아난 그는 병원비를 댈 능력도 없다는 걸 안 워리어스 시절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사회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조국을 위해 애쓰던 볼은 안타깝게도 남수단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2010년 세상을 떴다. 그로부터 약 13개월 뒤인 2011년 7월 9일, 볼이 이어온 공헌이 빛을 보며 남수단은 수단으로부터 독립했다.
같은 딩카족 출신 농구선수 루올 뎅이 7살때 아버지가 성직자라는 이유로 수단 정부로부터 탄압받아 이집트로 망명해있던 시절 마누트 볼을 만나 농구 지도를 받았고 13년후 그는 전체 7위로 시카고 불스에 입단해 NBA 역사상 두번째 수단 선수가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참고로 루올 뎅은 농구 내외적으로 모두 마누트 볼을 매우 존경한다.

4. 여담


  • 서두에서도 언급했듯 게오르그 뮤레산(231cm)과 함께 NBA 역대 최장신이였던 선수이다. 공식적인 수치는 아니지만 윙스팬은 8'6, 259cm로 역대 1위를 찍었다.
  • 득점보다 블록슛 기록이 더 많은 유일한 선수이다. 통산 18.7분에 3.3블락을 기록했는데, 이는 48분 환산시 8.6개(...)라는 엽기적 수치이다.
  • 마누트 볼의 1999년생 장남 볼 볼(Bol Bol)은 아버지처럼 센터로 뛰고 있는데 만 16세 시절 이미 키가 211cm에 달했고, 2017년 218cm(7피트 2인치)까지 자랐다. 마른 체구를 빼다 박았지만 근육량이 아버지보단 많고 운동능력은 아버지를 훨씬 상회하며 스킬은 과장 좀 보태 가드의 그것이라는 칭송을 받고 있다. 덕분에 19세 이하 미국 대표팀으로도 뽑혔고, 대부분의 매체의 전미 유망주 랭킹에서 5위권 안으로 꼽히고 있어서 NBA에서도 주목도가 높은 편. 2018년 오리건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드래프트에 참여하였는데 2019 NBA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Top 3 픽까지 예측되기도 했지만 18년 12월 이후 부상으로 경기 출전을 못하다보니 순위가 점점 내려와 2라운드 44순위로 마이애미 히트에 지명된 후 덴버 너기츠로 트레이드되어 최종적으로는 덴버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여담으로 대한민국의 농구팬들 사이에서는 볼 볼의 이름 때문에 벌써부터 드립이 나오고 있는데 공공 이나 쌍방울 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NBA 데뷔가 현실화된다면 이름보다 별명으로 더 많이 불리게 생겼다. 그리고 19-20시즌 데뷔에 성공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시즌 중단으로 많은 경기를 소화하지 못하며 20-21 시즌에도 루키 자격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5. 관련 문서


[1]남수단 투라레이.[2] 게오르그 뮤레산과 함께 NBA 역사상 최장신이다.[3] 앞서 언급한 뮤레산보다 약 20cm더 길다. 더불어 NBA 역사상 최장 윙스팬이며, 신장 대비 윙스팬도 단연 최장이다.[4] 다른 한 명은 1993~1998년까지 워싱턴 위저즈에서 뛰었던 루마니아 출신 게오르그 뮤레산.[5] 좀 작은 편이긴 하지만 디비전 2대학이란 걸 감안하면 그렇게까지 작은 건 아니다. 근데 이 선수와 볼의 키 차이는 김승현샤킬 오닐의 키 차이와 같다.[6] 231cm라는 엄청난 키에 비해 체중은 불과 91kg이 였다. 키를 생각하면 상당히 가벼운 몸무게. 비슷한 시기 레전드인 마이클 조던이 198cm/95kg였음을 감안하자.[7] 당시 워리어즈는 팀내 3명이 20점을 넘길 정도로 엄청난 공격팀이었고, 속공을 즐겨하는 팀이었다. 이런 팀들은 수비시 공을 찾으면 전원이 하프라인을 넘어올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바로 공격을 하는 얼리오펜스를 주로 했기 때문에 센터들은 웬만큼 발이 빠르지 않으면 공격에서 잉여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볼이 늦게 합류하면 당연히 상대 센터는 워리어스의 골밑돌파를 막느라 골밑까지 열심히 뛰어간 상태이기 때문에 3점라인 부근에서 완전히 오픈이 된다. 이 찬스를 노린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