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타타르의 멍에

 




'''몽골-타타르의 멍에'''
'''Монголо-татарское иго'''
'''Mongol-Tatar Yoke'''
[image]
국기
1240 ~ 1480
위치
루스 지역
정치체제
킵차크 칸국의 속령
종주권자
킵차크 칸국의 대칸
언어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
종교
정교회
1. 개요
2. 역사
3. 의의
4.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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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몽골-타타르의 멍에는 1240년부터 1480년까지 루스 지역이 킵차크 칸국에게 지배를 받던 기간을 말한다. 간단하게 줄여서 몽골의 멍에, 혹은 타타르의 멍에라고도 한다. 루스 지역을 정복하고 착취했던 것은 몽골인데 왜 타타르까지 포함해서 몽골-타타르의 멍에라고 하냐면 원래 타타르란 광의론 튀르크족에 대한 멸칭이었다. 당시 킵차크 칸국의 지배층의 경우 왕족은 소수의 몽골인이고 그 밑의 귀족계급이 이들 타타르인어서 '''러시아인들의 입장에선 몽골인들보다는 실제 통치 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타타르인이 훨씬 무서운 존재였다.''' 더구나 이후 서쪽으로 퍼져나간 몽골인들도 문화적으로 이슬람화, 투르크화 되고, 인종적으로도 완전히 뒤섞이면서 킵차크 칸국은 나중에는 사실상 투르크-타타르 국가가 되고만다.
여기서 멍에(иго)라는 말은 칸국의 지배 당시 러시아에서는 사용하지 않던 말이다. 이 말의 최초 용례는 1479년 폴란드의 연대기 작가 얀 드우고시(Jan Długosz)[1]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타타르의 멍에'라는 말은 이보다 약 1세기 이후인 1575년 다니엘 프린츠(Даниел Принц)에 의해 사용되었고, '몽골-타타르의 멍에'라는 말은 1817년 크루제(Х. Крузе)가 사용한 이후 러시아로 번역되어 널리 퍼졌다.[2]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동장군이 지켜주는 겨울의 러시아를 정복한 전무후무한 외세라고 일컫기도 한다. 실제로 몽골의 러시아 정복은 겨울에 이루어졌는데, 이는 러시아의 악명높은 라스푸티차 때문에 기마병들이 활약하기엔 오히려 겨울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몽골의 추위도 러시아 못지 않게 장난 아니기 때문에 몽골인 뿐만 아니라 말도 추위에 매우 익숙했던 점이 정복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 꼽힌다.[3]

2. 역사


오고타이 칸의 조카 바투1236년부터 감행한 유럽 원정은 루스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공국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루스 지역의 공국들은 몽골 제국군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랴잔 공국, 블라디미르-수즈달이 차례대로 함락되었고, 1240년에는 키예프가 몽골 제국군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루스 지역을 거쳐 폴란드 왕국헝가리 왕국을 침공한 바투는 1243년 오고타이 칸이 서거하자 정복활동을 멈추고 루스 남부와 중앙아시아를 아우르는 킵차크 칸국을 수립하였다. 키예프를 비롯한 몇몇 공국은 완전히 멸망해 사라졌지만, 모든 루스 지역이 몽골인의 직할통치를 받게 된 것은 아니라 노브고로드 공국 등 몇몇 공국은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았으나 같은 시기 고려원 간섭기와 비슷하게 속령으로 삼고 대신 일정 부분 자치권을 주었다. 이른바 몽골-타타르의 멍에가 시작된 것이다.
킵차크 칸국의 대칸은 바스카크(다루가치)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파견하여 루스 대공을 감독하게 하였다. 바스카크가 감독한 것은 대공과 대공이 징수하는 공물 등이었다. 이 공물은 교회의 성직자들을 제외한 모든 루스인들에게 인두세 성격으로 부과되어 징수되었다. 또한 대칸이 요구할 경우 대공은 적정 규모의 장정을 파견하여 대칸을 도울 의무가 있었다.
몽골-타타르의 지배 기간 동안 거의 모든 루스의 대공들은 킵차크 칸국의 수도 사라이를 의무적으로 왕래해야 했고, 자신의 대공직을 인정해주는 대칸의 야를릭(몽골어: ᠵᠠᠷᠯᠢᠭ / зарлиг, 러시아어: ярлык)이라는 윤허장을 얻어내야만 했다. 이 블라디미르 대공의 직위를 얻기 위해 모스크바 공과 트베리 공이 서로 치졸하게 경쟁하기도 하였다.
대공직을 얻기 위한 루스 공들 사이의 경쟁과 투쟁은 대칸에 대한 종속을 더욱 강화시켜주었고, 루스의 백성들은 지도자들의 권력투쟁에 불신과 환멸을 느끼면서 동시에 교회의 권위를 높여주는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이러한 치졸한 경쟁은 이반 1세 시기를 기점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대공직을 두고 트베리 공국의 미하일은 모스코바 공국의 유리를 몰아내고 1304년 대칸으로부터 야르릭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1313년, 우즈베크 칸의 취임식 때 유리가 사라이에 가 2년 동안 머무르면서 새로운 대칸으로부터 새로운 야르릭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유리는 우즈베크 칸의 누이인 콘차카와 결혼했다.
이로써 동시대에 두 명의 대공이 존재하게 되었고, 1317년 유리와 미하일은 이를 두고 전쟁을 벌였으나 모스크바 공국이 참패하게 되었다. 유리의 아내도 포로로 잡혀 트베리 공국에서 죽었다.
대칸은 두 대공을 사라이로 소환하였고, 미하일을 대칸에게 항거했다는 죄목으로 1319년 처형시켰다. 미하일의 처형으로 유리는 비로소 단독으로 대공 직위에 재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322년, 미하일의 아들 디미트리가 대칸에게 바칠 공물을 빼돌렸다는 죄목으로 유리를 고발하였다. 이 죄목으로 유리는 더이상 대공직을 유지할 수 없었다.
1327년, 디미트리와 유리는 사라이에서 만났고, 디미트리는 아버지 미하일의 복수를 하기 위해 유리와 결투를 하여 유리를 죽였다. 대칸은 디미트리가 사사롭게 형벌을 내렸다며 그를 처형했고, 1328년 대공직을 유리의 동생 이반에게 주었다.
1368년 트베리 공국의 미하일 2세(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올게르드와 동맹을 체결하고 난 뒤 마마이 대칸으로부터 블라디미르 대공직의 야르릭을 받아냈다. 그러나 모스크바 공국의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그가 블라디미르에 입성하는 것을 불허하였다. 1375년 미하일은 대칸으로부터 다시 야르릭을 확인받았으나, 드미트리는 도리어 트베리 공국의 영토를 침공하였다. 이 전투에서 대다수의 루스 공들은 드미트리에게 충성하였다.
결국 드미트리의 독단적인 행동을 보다 못한 킵차크 칸국 측이 1378년, 니즈니 노브고로드로 군대를 보내 그곳을 불태웠다. 그러나 이어진 보즈하 강 전투에서는 칸국의 군대가 패배하였다. 대칸 마마이는 설욕을 갚고자 리투아니아 대공과 랴잔 공 올레그와 동맹을 체결하고 20만 대군을 소집하였다. 드미트리도 일부 제후들의 지원을 받아 15만 대군을 소집했다.
1380년 9월 18일, 쿨리코프 언덕에서 마마이의 군대와 드미트리의 군대가 맞붙었다. 드미트리는 리투아니아군이 오기전에 결전을 서둘렀고, 결과는 드미트리 측의 승리였다. 쿨리코프 전투는 지금까지 무패신화를 자랑하던 몽골-타타르가 처음으로 패배한 역사적인 전투로써 루스가 몽골-타타르로부터 해방되는 첫걸음이 되었다.[4]
패전 직후 마마이는 토크타미쉬와의 전투에서 사망하고, 토크타미쉬는 사라이에서 새로운 대칸으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토크타미쉬에게 값진 공물을 보낸 것 외에는 종속의 표시도, 알현하지도 않았다. 토크타미쉬는 이를 문제삼고 1382년 모스크바를 침공하여 불태우고 루스 전 지역에서 잔인한 복수를 자행했다.
드미트리는 킵차크 칸국의 종주권을 다시 한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대칸에게 자신의 무례를 사죄했고 대칸으로부터 대공의 야르릭을 받기 위해 온 노력을 다해야 했다. 그는 몽골-타타르가 루스 지역에 입힌 피해를 수습하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다.
드미트리 다음 대공인 바실리 1세(Василий I Дмитриевич) 때에는 티무르 제국의 초대 군주 티무르의 침공을 받았다. 바실리 2세(Василий II Тёмный) 때인 1445년에는 킵차크 칸국이 분열하여 카잔 칸국이 출현하였다. 동년 7월 카잔 칸국의 군대에 의해 바실리 2세가 포로로 잡히고 10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바실리 2세 다음 대공인 이반 3세는 모스크바 공국을 중심으로 루스 지역을 통합시키고 동시에 절대군주 체제를 확립한 군주였다. 이반 3세의 치세 때 모스크바 공국은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주권을 회복하였고, 이는 러시아가 근대적인 국가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이반 3세는 1471년 6월 14일, 쉐론 강에서 대군을 이끌고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훗날 쉐론 강 전투(Шелонская битва)라고 불리는 이 전투의 패배로 노브고로드는 모스크바 공국에게 완전히 예속되었다. 이반 3세는 노브고로드를 모스크바에 예속시킨 것에 만족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노브고로드의 관리들을 압박했고, 결국 1478년 노브고로드는 이반을 주권자로 인정하였다. 이로써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멸망하였다.
이반 3세 시기 러시아는 동로마 제국의 궁중 문화와 예절을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러시아는 전제군주국이 되었다. 이는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한 동로마 제국을 계승하는 한편, 더이상 러시아가 킵차크 칸국의 종속국이 아니라는 제스쳐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1480년 이반 3세는 스스로를 정교회의 수호자라고 칭하였고, 자신을 차르라고 선언했다. 이미 몽골-타타르에게서 분리독립한 티무르 제국과의 충돌로 쇠퇴한 킵차크 칸국은 이러한 이반 3세의 독단적인 행동에 별다른 제재를 할 수 없었다. 이로써 몽골-타타르의 오랜 지배가 종식되었다.

3. 의의


몽골-타타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스웨덴 왕국, 프랑스 제국, 나치 독일 등 수많은 외적을 막아낸 러시아인들이 유일하게 막지 못한 외세였다.[5][6] 몽골-타타르의 시대를 거쳐 러시아인들은 동슬라브계의 혈통에 아시아 몽골계·튀르크계 혈통이 섞이면서 유라시아적인 체질과 문화를 가지게 되었다. 키예프 대공국으로 대표되는 유럽식 정치체제에서 아시아의 전제군주정 국가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유럽식 정치체제를 유지한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낙후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으나, 반대로 유라시아의 광활한 영토를 러시아가 차지할 수 있는 토대를 몽골-타타르가 마련해준 셈이기도 하다.[7]
루스 일대가 몽골-타타르의 멍에에 시달림에 따라 사실상의 병참기지 역할을 했기 때문에 타타르 세력이 멀게는 슬로바키아까지 침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몽골과 마주할 일이 없어 동양과의 교류는 처음부터 중국 및 일본과의 교류가 메인이 되었던 서유럽 및 미주 지역과 달리 동유럽이나 중부 유럽에서는 비교적 근대까지도 킵차크 칸국에 대한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었다.[8]

4. 참고 문헌


  • 오원교 (2011). 13세기 중반 ~ 15세기 러시아 문학 속의 ‘따따르 신화’. 노어노문학, 23(4), 315345.
  • 전지용, <러시아의 역사>, 새문사, 2016
[1] 폴란드 최초의 역사가라는 평가를 받는다.[2] 오원교 (2011). 316-317.[3] 몽골국은 아니지만 비슷한 지역에 있는 도시인 야쿠츠크에는 아예 유기견이 아닌 유기마(遺棄馬)들이 돌아다닌다. 야쿠츠크가 1월 평균 기온이 무려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장소임을 생각하면 이곳 품종의 말들이 추위에 얼마나 강한지 느낄 수 있다.[4] 러시아에서는 1240년(혹은 1238년)부터 쿨리코프 전투(1380년) 때까지를 따로 타타르의 압제(насилие татарского)라고도 구별한다. - 오원교 (2011). 329p[5] 다만 결국 흡수되기는 했지만 루스인들의 나라부터가 북유럽 바이킹이 세웠고 그들은 슬라브인들을 죽이거나 추방하기도 했다. 그리고 원래 다른 곳에 있던 슬라브족이 동유럽에 온 원인이 게르만족의 서유럽 이주와 아바르 같은 유목민들의 정복 및 공격이다.[6] 물론 이후 소련 시대에 들어 몽골을 자국의 영향권 밑으로 들여 간접적으로 원수를 갚아주기는 하였다. 지금도 몽골은 어느 정도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7] 몽골-타타르의 침입으로 동슬라브의 중심 지역인 키예프가 큰 피해를 입고 당대 내륙 깊숙이 위치한 소도시에 불과했던 모스크바가 후의 루스의 중심지역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 정성희, <가까운 러시아 다가온 유라시아>, 생각의길, 2017.[8] 한국의 경우 지금의 586세대가 아직 대학생 시절이었을 때 사회주의를 공부하려는 마음에 유럽으로 유학을 가는 일이 많았는데, 이때 유럽 현지 학자들이 동양인을 집시 같은 유랑민으로 생각하는 것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유럽 현지인들은 '''악의를 전혀 가지지 않고 한 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회주의를 공부하러 갔다면 유학 지역이 서유럽 쪽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고, 상술했듯 동양 하면 비교적 최근까지도 킵차크 칸국의 이미지가 강한 국가들도 상당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경우라면 동양인 → 유목민 → 유랑민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반대로 서유럽이나 미주 지역들은 농경 문화권인 한중일 3국 및 동남아시아 출신 이민자들의 영향으로 동양인 → 농경민 → 정착민이라는 스테레오 타입이 더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