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현(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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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현 LG 트윈스 1군 감독. 전 국가대표팀 수비 및 수석코치. LG 트윈스의 명 유격수이자 팀 레전드이다. 현역 시절 등번호는 6번이었다.[8] 충암고-한양대 출신.
LG 트윈스 출신의 스타 플레이어로 원클럽맨이자 성골, 로컬보이.
2020년 11월 13일, 류중일의 후임으로 LG 트윈스의 제 13대 감독에 선임되었다.
2.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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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유격수로서 두각을 나타내어 리틀야구 국가대표팀으로 뽑혔고, 이종범과 함께 당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격수로 발돋움했다.
특히 김재박이 태평양으로 트레이드된 뒤 자타공인 LG 트윈스 최고의 유격수로 아직까지도 많은 이에게 각인되어 있으며, 그의 은퇴 후 LG는 오지환이 주전 유격수로 자리잡기 전까지 10년 가까이 그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며 고생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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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화려한 데뷔와 신인왕
1994년 LG에 1차지명으로 입단하게 되는데, 리틀야구부터 아마 시절 내내 이종범과 함께 최고의 내야수로 각광받았음에도 프로행 직전인 한양대 4학년 당시 어깨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성적이 추락하고, 이것이 부정적으로 작용해 자신의 가치에 비해 낮은 7천5백만원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한다. 연세대행이 확정됐음에도 온갖 공을 들여 영입한 입단 동기(이나 고졸인) 김재현의 계약금은 1억원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부분. 그러나 그는 신인 데뷔와 동시에 주전 1번타자 자리를 꿰차며 LG의 돌풍을 주도했고 그 해 태평양 돌핀스를 꺾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그는 이 해 .305-15홈런-51도루를 기록하며 신인 최초 20-20클럽의 김재현, 타율 3할1푼과 신인 최초 사이클링히트의 서용빈을 제치고 1994년 신인왕에 등극했다. 당시 유지현의 신인왕 수상은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고졸신인임에도 리그 역사상 신인 최초 20-20을 달성한 김재현의 임팩트가 굉장히 컸기 때문에 당시 대부분의 언론은 김재현의 신인왕 수상을 유력시했다.#당시 기사 그래서 정작 유지현이 신인왕을 수상하자 당시 야구팬들의 반응은 상당히 의외라는 반응이 대세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당시는 WAR같은 질적 분석, 지수가 그다지 보편하되지 않은 시기였고, 유지현은 득표에서 상당히 근소한 차이로 김재현을 제치기도 했다. (물론 양적 기록을 기준으로 따져도 유지현은 신인왕으로 손색없는 성적을 올렸다. 전 경기에 출전했으며 타율 .305와 15홈런 51타점 51도루로 신인 시즌이 연간 기준으로는 그의 최고 시즌이었다. WAR에서도 해당 시즌 김재현보다 우위에 있다.)
당시 유지현이 신인왕을 수상한 비결로 전 경기 출전과 1번타자로서의 공헌도를 높이 평가받았다는 식으로 기사화가 되긴 했지만, 그 시절만 해도 MVP나 신인왕, 골든글러브는 화제성 + 양적 성적 + 팀 성적 영향 등을 반영해서 투표하는게 대세였기 때문에 신인왕 투표 전에는 김재현이 유력하다는 식으로 기사가 많이 나왔지만, 정작 유지현이 수상하는 바람에 김재현이 기자들한테 밉보인 게 아니냐는 식의 얘기도 나왔을 정도였다. 다만 신인 3인방 중 김재현, 서용빈과는 달리 그 해 골든글러브는 수상하지 못했는데, 이유는 알다시피 그 해 4할-200안타-100도루에 도전했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분 때문에...
2.2. 경기 스타일
1990년대 전성기를 달리던 LG 타선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전성기의 유지현은 1번 타자의 교과서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대 팀 입장에서는 정말 죽이고 싶도록 얄미웠던 선수. 꾀돌이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특히 고 하일성 위원 등 대부분 해설위원이 유지현의 야구 지능에 대해서는 칭찬 일색이었을 정도로, 김재박과 같이 상황에 대한 이해가 빠르고 영리한 야구를 했던 선수. 약해진 어깨로 10시즌을 유격수-1번타자 역할을 했으니 체력이 마냥 약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공을 오래 보고 투구수를 늘리기 위해 초구는 그냥 흘려보내곤 했는데, 이를 의식한 상대 배터리가 초구를 대충 던지면 기습적으로 잡아당겨서 잠실 좌측 펜스(유지현존이라고 불린다)를 살짝 넘기는 홈런을 치기도 했다. 또한 출루해 놓고 도루를 할 듯 안 할 듯 하면서 상대 투수의 골치를 썩이는 지능적 플레이를 즐겨 했다. 때문에 차라리 아예 이종범처럼 도루해 버리는 게 상대 입장에선 편했다는 후문.
작은 체구 덕분에 적용되는 스트라이크 존도 좁았고 타격시 몸을 웅크리는 버릇 덕분에 존은 더 좁아졌고 거기에 훌륭한 선구안[9] 과 발군의 커트 실력이 갖춰져서 2스트라이크 노볼의 볼 카운트를 2스트라이크 3볼로 만들던 건 예사였다. 이른바 용규놀이의 원조격. 또한 장타력도 출중하여 두 자릿수 홈런도 곧잘 칠 정도였으니.. 상대투수는 피할 수가 없었다. 덧붙여 잠실에서 오히려 원정경기보다 많은 홈런을 기록했다. 선두타자 홈런 하면 이종범 또는 이순철을 떠올리기 쉬우나 유지현도 만만치 않았던 것. 그 덕분에 클린업도 아닌 선수가 한 시즌 평균 볼넷이 60여개로 통산 17위, 2할 후반대인 통산 타율에 비해 통산 출루율은 .377로 통산 30위다. 대놓고 발야구 컨셉이 아니면서도 주루 센스가 매우 좋은 편으로, 활동 시즌이 짧은 편임에도 도루도 통산 12위에 위치한다.
한 마디로 리드오프로서 필요한 장점은 모두 갖춘 선수로, 그의 높은 출루율과 찬스에 강한 면모를 볼 때 LG의 "신바람 야구"라는 팀 컬러를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 그가 주로 출전한 1994-2002 9시즌 중 LG는 1996, 1999, 2001년을 제외하고 모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1회 우승, 3회 준우승을 차지했다.
1994년 신인왕을 수상했음에도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는 그해 84도루와 0.393을 기록한 바람같은 분에게 내주고 만다. 1995년에도 매 경기 1994년 이상의 활약을 보여 주었으나 방위 복무[10] 로 인해 일부 홈경기만 출전할 수 있었던 탓에, 골든 글러브는 그해 우승 팀인 OB의 김민호에게 돌아갔다. 1997년, 감독추천으로 출장한 올스타전에서 MVP가 되었고[11] , 이종범이 떠난 1998년과 1999년에 드디어 KBO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을 수상하게 된다. 이처럼 전성기에 이종범이라는 벽에 가려 그의 천재성은 늘 2인자라는 수식어로 점철되어야만 했다.
공격력은 이종범보다 부족했지만, 수술로 인해 약해진 어깨에도 불구하고 수비력은 결코 밀리지 않았다. 약한 어깨를 풋워크와 한 박자 빠른 타구 판단으로 커버했고 특히 2루 쪽으로 쏠리는 타구의 경우 슬라이딩 후 역모션 송구 등 서커스에 가까운 명장면들을 자주 연출했다. 수비 측면에서는 어깨에 의존하는 이종범보다 오히려 기술적으로 김재박-류중일의 계보를 있는 정통 유격수라고 볼 수 있다. 1995년 한일 슈퍼게임에 이종범 유격수-유지현 2루수 포메이션이 가동됐는데, 이들은 이렇게 국가대표로 계속 활동하며 공수주를 모두 겸비한 최고의 키스톤 콤비로 꼽혔다. 유지현-이종범-박정태가 아마에 공존하던 시기에는 3루 유지현-유격 이종범-2루 박정태의 포메이션이 나오기도 했다. (이때는 유지현 부상 전으로 강견 시절임) 유격수 수비로는 전문가들도 이종범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유지현에 대해서는 간간이 힘에 부치는 3-유간 상황의 원바운드 송구만 빼면 타구 판단에 이은 풋워크, 다이빙, 글러브질 등 극찬하는 편이며 논란의 여지가 적은 편. 오히려 본인이 아닌 이종범 항목에 유지현과의 수비력 비교에 대한 언급이 더 많다.
LG가 리그를 평정하던 1994, 1995년 후 해태가 1996, 1997년에 살아나면서 자연스레 양 팀간 더비가 리그 최고 빅매치가 되었고, 이 둘은 같은 포지션에 둘 다 야구 지능이 높았고 각 팀의 리드오프로서 항상 비교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유지현과 이종범은 2006년 WBC에서 이들은 대표팀 코치와 주장으로서 재회하게 된다.[12]
이종범이 주니치로 떠나기 무섭게 골든글러브 2연패를 했고, 박정태와 키스톤 콤비를 이룬 1999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훌륭한 호흡을 자랑하며 나란히 베스트 포지션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때 획득한 출전권으로 이듬해 열린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의 주전 유격수로 출전이 예상되었으나, 대회 직전 대표팀 감독이 주성로에서 김응용으로 변경되며 주전 유격수로 박진만, 내야 백업으로 김태균을 대신 선발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13][14] 결과적으로 대표팀이 동메달을 획득하며 이런 논란은 자취를 감췄고, 유지현은 그해 플레이오프에서 분풀이 맹활약을 펼치며 2승 1패로 두산에 리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이기는 날은 스포츠 신문 1면에 나왔다. 그러나 엘지는 마무리 장문석의 연이은 블론 세이브로 이후 3연패하며 허망하게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이후 이광은 감독의 해임 및 김성근 감독의 부임 후 2001년부터 2루수-유격수를 보기 번갈아 보기 시작했고 2002년에는 완전히 2루수로 전향해 3할 1푼의 타율을 기록함과 동시에 여전히 준수한 리드오프 역할을 수행하여 팀의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기여하였다.
아마 시절부터 실력으로 국가대표 고정 멤버였던 덕에 유독 포스트시즌 같은 큰 경기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대표적으로 회자되는 것이 유지현 존으로 날려보낸 1997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의 역전 만루홈런(상대 투수 성준),[15][16] 2002년 한국시리즈 2차전 6회 임창용 상대 안타 및 도루로 역전 시발점 역할, 5차전 6회 2사에서 전병호 상대 2루타 및 3루 도루, 패스트볼로 득점 등 팀이 정말 필요한 순간에 깨알같은 안타와 도루를 시전하며 팬들로 하여금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통산 홈런은 적지만 특히 중요한 순간에 잡아당기는 2루타 코스의 타구를 잘 쳐냈다.
입단 동기인 김재현과는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하다. 이미 등번호(김재박의 7번), 계약금 등 문제로 입단 때부터 자존심 차원의 갈등을 빚어 사이가 좋다고는 말 못하는 관계였다가, 김재현이 선수협에 적극적으로 가담을 할 때 유지현은 구단 편을 들어서 크게 틀어진 것. 그러나 1년 후에는 유지현도 LG 구단이 선수협에 가담한 선수들의 연봉 삭감, 징계성 트레이드를 보다 못하여 LG선수 전원을 선수협에 가입시키고, 본인도 2001년에 가입했다. 선수협 가입, 뒤이은 2002년 연봉 조정 승리[17] 는 유지현이 구단과 틀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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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슬럼프와 은퇴
2002년까지의 활약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2003년 급격한 하락세를 타게 되는데, 타율이 2할대 초반에 머무르는 등 극도의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은사인 이광환 감독은 유지현을 2루수로 전향시켜가며 안정시키려고 했으나 성적은 나아지지 않았고 하필 이 슬럼프 시점에 찾아온 FA계약 때 1년 4억원이라는, 유지현이라는 존재 가치에 너무도 격에 맞지 않는 처우를 받기에 이른다. 유지현은 은퇴 이후, FA 계약 당시 원인불명의 신경통으로 고생하고 있었음을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유지현의 은퇴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는데 이순철이 유지현을 쓸모없는 선수로 취급해 결국 반강제적인 은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유지현은 2004년 안좋은 몸상태에 슬럼프까지 맞은 상황이었음에도 2군에서 재활 및 훈련을 할 수 있는 기회 조차 받지 못하고 1군 선수단을 따라 다니면서 배팅볼이나 던져주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이때 컨디션을 전혀 고려해주지 않고 갑자기 무리하게 유격수로 기용하여 성적이 좋지 않은 것을 핑계로 도태되게 만드는 식의 운영을 하였다. 특히 신인 내야수 박경수에게 사실상 반 강제로 주전 자리를 내주고 인스트럭터 역할을 코칭스태프와 구단으로부터 사실상 강요받으며 그해 가을 현역 은퇴 선언을 하였고, 10월 5일 롯데전 클리닝타임 때 약 20분 간 은퇴식을 가졌다. 은퇴식에서 김재현과 조우하는 장면은, 둘 사이의 관계를 떠나 동병상련에 처한 두 사람의 화해와 같이 비춰졌고, 많은 LG 팬들의 안타까움과 공분을 샀다. 이처럼 불운한 선수 말년으로 인해 본인의 가치와 재능에 비해 이후 끊임없이 저평가되는 계기가 된다. 유지현의 은퇴 직후 한화에 부임하여 팀 리빌딩 중이던 김인식 감독이 유지현을 안타깝게 여겨 반 농담 반 진담으로 현역 복귀 오퍼를 한 일화도 유명하다. 또한 SK 조범현 감독 쪽에서도 이적 제의가 있었으나, 본인은 엘지에서 현역을 마감하고 싶다며 고사하였다. [18]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열린 그의 은퇴 경기는 LG 트윈스 프런트와 팬들의 간극이 얼마나 벌어졌는지 보여주는 아주 좋은 사례. 워낙 갑작스러운 유지현의 은퇴에다 김재현 각서 건까지 겹쳐 은퇴식 내내 관중석 분위기는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은퇴식 때 경기 상대 팀인 롯데 덕아웃으로 걸어가 박정태 선수와 포옹하는 서프라이즈가 있었다. 원래 유지현과 박정태는 아마시절부터 대표팀 생활을 같이 하여 친분이 있었고 심지어 은퇴식 당일날도 박정태와 점심을 같이했는데 이때도 서프라이즈에 대해서 일체 말이 없었기에 박정태가 더 놀랐다고 한다.[19]
여러 인터뷰나 행적을 돌이켜보면 성격이 유하고 선후배 선수나 구단 관계자들과 각 세우지 않는 스타일이어서 스스로를 김기태, 김태형처럼 군기반장으로 포지셔닝하지 않았다. 반면 팀 내에서 주장일 당시 리더쉽은 본인의 실력이 받쳐줘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프라이드가 강했던 것으로 보이며, 선수협 문제에서도 엉뚱하게 친 선수협 멤버가 아닌 김기태와의 충돌로 팀원들이 그를 따라 단체로 가입 철회를 하여 같은 팀 양준혁, 김재현을 비롯한 친 선수협의 디스를 감수해야 했다. 결과적으로는 두고두고 리더십에 상처를 줄 수 있는 부분.. 나중에 본인이 주도하여 팀원을 선수협에 전원 가입시켰던 것과 구단과의 연봉협상 조정 신청 등을 봐서는, 본인의 소신은 있으나 말년에 LG 이외의 팀으로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구단의 지도자 연수 제의를 수용하는 것을 봐서 친정팀에 대한 로열티가 우선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앞에서 언급했던 내용들처럼 주변, 특히 구단과 마찰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임에도 어설프게 프런트와의 구원(?)이 있어서 LG 감독으로 앉을 수 있을 지 관전 포인트다. 류중일, 염경엽 등 선배들의 감독 데뷔 시점을 고려하였을 때,[20] LG의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인데다가 실력만 놓고 보면 이미 감독 후보로 언급되고도 남았어야 하지만, 런기태 사태 때에도 언론지상에 후임으로 언급이 되지 않은 점은 생각해봐야 할 일. 양상문 감독 밑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입지를 굳혀야 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양상문 감독의 사임 때에도 후보로 언급되던 차에 구단이 류중일 감독으로 급선회하며 이루지 못했던 감독의 꿈을 2020년 겨울에서야 이루게 되었다.
이후 2006년 WBC 국가대표팀 코치, 2007년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은 후 2008년부터 2011년까지 LG 트윈스의 작전주루 코치를 담당하였다.
홈으로 사용한 잠실에서 친 홈런이 원정경기 홈런보다 오히려 많았다. 당시는 95m로 5m 팬스를 당겼었는데, 폴대쪽으로 최대한 잡아당겨 살짝 넘어가는 홈런을 많이 쳤던 것. 신인시절 커리어하이인 '''15홈런을 기록했는데 이 중 11개가 잠실에서 넘긴 것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팬들과 기자들은 좌익수 쪽 폴대 옆 5m의 빈 공간을 '유지현 존'으로 불렀고 우익수 쪽 폴대 옆 5m의 빈 공간을 '정수근 존'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유지현에 비해 정수근의 홈런은 손에 꼽는 수준이라...
2.4. 평가
이처럼 LG의 간판스타로 손색이 없는 선수이지만, LG팬을 제외한 팬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우선 선수협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단골로 비판받는다. 김기태, 이호성이 그랬듯이 구단 측 편을 든 것이 원인으로 일명 선수협 오적 중 한 명으로 취급된다. 정작 본인은 연봉조정 갈등에서 구단에게 뒤통수를 맞았으니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지만 세간의 인식과는 다른 면도 있다. 류지현이 처음에 구단 선수협 결성에 반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후 구단들이 선수협 주동자들을 방출/트레이드하며 악질적으로 대응하자 이에 대한 항의로 LG 선수 전원을 선수협에 가입시킨 사람도 류지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LG 구단은 유지현을 눈엣가시로 여기기 시작했다. 다만 프랜차이즈 스타였기 때문에 섣불리 배척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2020년까지 LG에서 코치로 일하며 같은 구단에서 27년간 활동했으며, 2021년부터는 아예 LG의 감독을 맡으면서 구단과의 나쁜 과거도 정리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미 LG 구단의 프런트에서 유지현과 대립했던 이들은 2008년을 기점으로 그룹 감사로 잘려나갔다. 당시 단장이던 유성민도 2005년에 단장에서 물러나 2007년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2.5. 연도별 주요 성적
3. 지도자 시절
3.1. 코치 시절
선수 때의 센스있는 플레이에 비해 주루코치로서의 능력은 상당한 논란이 있었는데, 2011 시즌 유지현의 삑사리 주루 유도로 득점할 거 못하고 돌려야 할 때 주자를 안 돌리고 돌리면 안 될 때 주자를 돌려 대서 주자 횡사를 여러번 시켜서 이래저래 까였다. 아마 유지현 입장에선 "아니 왜 이걸 못 뛰어" 일지도 모른다. 어떻게보면 최태원 코치 이전에 유지현이 있었다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21]
박종훈의 뒤를 이어 김기태가 LG 트윈스 감독이 되면서 최태원 전 KIA 타이거즈 코치가 주루코치로 임명되었고, 그 결과 2011년 10월 14일 LG 트윈스의 수비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수비코치로는 비교적 평가가 좋다. 오지환에게 지옥의 펑고를 쳐 주면서 2013년부터 오지환의 실책 개수가 비교적 줄어들고 있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결승전에서 7회말 적시타를 지우는 수비는 그의 위치 선정 덕분이다. 참고로 19년 8월 박명환야구TV에서 안지만이 인천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유지현코치의 수비시프트 덕에 홀드할 수 있었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2014-2016 오지환의 수비만큼은 리그에서 확실히 인증받은 모습이다. 멘도사 라인임에도 수비장면만큼은 허구연 이효봉 등 해설자들의 극찬을 받고 있으며 ML 스카우터들도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고. 이는 반박의 여지없는 유지현의 작품이다.
한편, 2015 시즌 중 최태원이 2군으로 내려가면서 3루코치로 보직변경 되었다. 동시에 박종호가 2군에서 수비코치로 올라왔다. 이후 엘지 경기에서 홈 주루사는 확연히 줄어든 모습인데(괜히 죄태원이 아님) '''아직도 박용택의 경우 감히 유 코치의 신호를 종종 무시하고 뛰다가 돌아가시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아마 때부터 본인의 발을 믿고 엽기 주루플레이를 하도 시전하던 터라.. 선수시절 의외로 준족이 아니었음에도 쇼트트랙식 효율적 주루플레이를 시전했던 터라 선수들에게 전파해주길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2016년 10월 10일 와일드카드전에서 8회말 소중한 기회를 날려버리는 어이없는 주루지도를 했다.
10월 16일 준PO에서도 어이없는 주루지도가 또...
2017년 8월 10일,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에 내야 및 작전코치로 선임되었다.
2017년 팀의 성적 부진으로 양상문 감독이 최종전을 마치고 물러남에 따라, 사실상 감독으로 확정된 분위기에서 언론지상 및 각종 게시판에 후임자로 언급되었으나 구단이 막판에 류중일 감독으로 급선회하며 다음 기회로 미뤄야만 하게 됐다. 이유인즉슨 아직 감독으로서 준비가 덜 됐다는 것. 코치 생활 12년차에 아직도 준비가 덜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것은 본인의 입장에서 깊이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감독을 조용히 후방에서 잘 보좌하기보다는 이제 리더십 측면에서 강단있는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
다만 이번에 후임 감독 후보로 거론되며 존재감을 보여준 것도 있고, 류중일 감독과는 한양대학교 선후배 사이에다 국가대표팀에서 코칭스태프로 오래 같이 일한 만큼 중한 보직을 맡게 될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맞춰 2018 시즌을 앞두고 류중일 체제의 1군 수석코치를 맡게 됐다. 이제 LG에서 확고부동한 차기 감독 No.1이 된 셈이다. 프런트에서도 LG의 내부 사정을 잘 모르는 류중일 감독과 선수, 코치진의 가교로 최적의 인물이라 판단한 듯 보인다.[22]
1994 LG 신인 3인방 중 마지막까지 팀에 남은 인물이 되었다. 김재현은 팀과 최악의 형태로 헤어지면서 LG로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고, 서용빈은 2017년에도 팀 타선을 망치면서 결국 사퇴했다.
일각에서는 LG의 철밥통으로 분류하는데 그 이유는 구단주가 아끼기 때문이라나... 오죽하면 성적부진으로 코치진 개편을 요구할 때도 '유지현 빼고 다 바꾸라'는 지시가 자주 있었다. 서용빈도 평타만 쳐줬어도 철밥통을 유지했을 텐데, 워낙 코치 시절 팀 타선에 악영향을 준 것이 컸고, 박병호를 때렸던 사례와 같은 전과까지 더해져서 갈렸다는 후문이다.
2018년 시즌 후반기의 급격한 순위 추락, 포스트시즌 탈락으로 코치진의 절반 가까이가 해임될 때도 어찌어찌 살아남았다. 류중일 감독 이후의 차기 감독 후보로 유력하긴 하지만, 당초 감독감으로 염두에 두었던 김동수가 2군에서 그다지 신통치 못한 모습을 보이면서 유지현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2019년에는 수석 코치 및 수비 코치로 시즌을 출발했으며 등번호를 현역 시절에 달던 6번으로 바꾸었다. 4월 20일 부친상을 당하면서 잠시 1군 엔트리에서 말소 되었다.[23]
2019년 이후 수비 시프트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는 있으나 무슨 생각으로 걸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거는 족족 실패하며 실점에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2020년 들어 이런 현상이 심해지는 중.[24][25] 이런 점 때문에 2020시즌 후 류중일이 재계약에 실패할 경우 후임으로 류지현이 감독으로 발탁되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는 LG팬들이 제법 된다. 긍정적으로 봐도 류중일 재계약보다는 낫지 않겠냐는 정도. 다만 이러한 시프트에 대한 문제점을 본인도 인지하고 있었는지 감독 취임 후 기사에서 시프트에 대한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3.2. 감독 시절
LG가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한 후 류중일이 계약만료로 사퇴하면서 차기 감독으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사실 1년전 차명석 단장은 3년만의 포스트 시즌 진출 이후 차기 감독을 류지현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공사 구분 끝에 낙점을 하게 된다. 그리고 2020년 11월 13일 결국 류중일의 후임 감독으로 결정 되었다. 계약 내용은 2년 기간에 총액 9억원(계약금 3억원, 연봉 3억원).
LG 트윈스 선수 출신 감독으로는 4대 이광은 감독과 8대 김재박 감독에 이어 세 번째이며,[26] LG에서 선수, 코치, 감독으로 모두 활동했던 사람으로는 이광은에 이은 두 번째 사례다. 또 김기태 이후 6년 만에 트윈스 코치진 내부에서 발탁한 감독이기도 하다.[27]
LG와 비슷하다고 종종 인용되는 일본 요미우리식 순혈주의 감독 인사의 전형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류지현은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도 모두 서울에서 나온 뒤 서울 연고팀에서만 선수와 지도자로 생활한, 그야말로 서울토박이 야구인이다.[28] 이전엔 삼성 감독 시절의 류중일, 이 쪽의 원조에 해당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도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부임 이전의 오 사다하루 외에는 없었던 매우 드문 사례다.
이후 코칭스태프 인선을 진행하고 있는데 최일언, 가득염, 김현욱, 곽현희, 신경식, 김재걸 등 비LG 출신 코치들이[29] 대거 팀을 떠나게 되었다. 신 코칭스태프는 LG 선수 출신 코치들로만 구성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우선 1군 수석코치에 김동수 2군 타격코치가 선임됐고 김동수의 뒤를 이어 LG 주전 포수를 맡았던 조인성은 2011년 이후 9년만에 배터리코치로 복귀하게 됐다. 그리고 LG 선수 출신은 아니지만 LG 코치 경력이 있는 해태-KIA 출신인 이종범 코치는 일본에서 코치 연수를 마치고 코치로 복귀했다. LG에서 선수로 뛴 경력이 없는 코치는 이종범을 제외하면 황병일, 김호, 김민호, 유동훈 등 4명만 남았다.
1990년 LG 트윈스로의 팀명 변경 이후 처음 부임한[30] 역대 LG 감독 중 전년도 혹은 중도 부임시 성적 기준으로 가장 높은 순위에서 감독직을 수행한다.[31]
4. 기타
- 개봉초등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했지만, 리틀야구대회에서 충암초교 야구부 곽성렬 감독의 눈에 띄어 충암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 신바람 트리오로서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1990년대 중반, 하루에 팬레터를 3~40통씩 받았다.
- 방위병 시절에는 유류관리병으로 복무하였다.
- 위에도 나왔지만 김재현과는 선수 시절부터 서로간의 성향이 너무나도 안 맞아서 LG 시절 내내 좋지 않은 사이였으며, 김재현이 LG 코치로 오지 못하는 원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김기태가 LG 감독으로 있었을 때, 김재현이 해설위원 자격으로 사진을 찍었을 때 대놓고 언짢은 표정을 지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김재현이 LG 코치를 하려면 유지현이 LG를 떠나야 한다는 농담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단 2017년 LG 트윈스의 홈 개막전 후 94년 우승멤버들의 회식에는 함께 자리하긴 했다. 그러다가 2017 APBC에서 국가대표 코치로 (잠깐이지만) 한 팀이 되었는데 형동생해도 될 연차인데도 서로 지현씨 재현씨 하고 불렀다고... 아직도 서먹하다. 그러나 그 후에 김재현이 경기 해설 도중 선수에 대한 캐스터의 질문에 대해 유지현 코치에게 물어보니깐이라고 밝힌 걸 보면 외부팬들이 보는 것만큼 견원지간 수준으로 나쁜 사이가 아닐수도 있다. 심지어 2019년 1월 9일 94년 우승멤버 모임때 김재현과 자리를 함께 하기도 했다. 기사참조 요즘들어 모임에서 만나는 일도 잦고 소통이 많은 것으로 보아 조금 서먹서먹한 사이인 건 맞지만 "유지현과 김재현은 견원지간"이라고 보는 시선은 많이 줄어들었다.
- 2017년 현재 한국 나이로 47세임에도 불구하고 은퇴 직전 당시 얼굴을 꾸준하게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상당한 동안급 외모를 지니고 있다. 2020년 현재도 류중일 감독 옆자리에서 매 경기 카메라에 잡히지만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같은 71인 김한수도 마찬가지(수염 기른 시기 제외).
- MBC스포츠플러스에서 유격수 관련 토론이 있었는데, 양준혁, 정민철, 박재홍 위원은 유지현을 김재박과 이종범에 이어 역대 TOP3 유격수로 꼽았다. 반면 SBS 멤버들 술자리에서는 윤성호 아나운서는 유지현을 톱중 하나로 꼽은 반면 안경현 김정준은 톱은 커녕 김재호랑 동급이라며 난데없이 유지현을 폄하하여 댓글창이 후끈 달아올랐다. 참고로 유지현은 유격수 통산 WAR 3위이다. 김재호는 현역 중에서도 오지환보다도 통산 WAR가 밑이다.[32][33] 오해/논란이 의식된것인지 이후 술자리가 아닌 별도의 토론방송을 통해 다시 역대 유격수들의 수비력에 대하여 논의하는 자리를 가졌고 여기서 다시 언급되었다. 다쳐서 약해진 어깨가 늘 약점이었지만 이를 풋워크로 커버했다.. 등
5. 관련 문서
[1] WBSC 공식 등록명. 원래 이름은 류지현이지만 두음법칙 적용으로 인해 유지현으로 살고 있다가 2020년 7월초 법원에서 류를 쓰도록 허용받으면서 본래이름으로 돌아왔다.[2] 출생 당시 영등포구였다. 국민학생 때 은평구로 이사했다.[3] 99시즌 유격수와 2루수를 번갈아서 나왔고, 말년인 02,03시즌엔 아예 전업하여 주전 2루수로 출전했다.[4] 날려라 날려라 유지현~ 안타 유지현~ 안타!x2[5] 여담으로 이 응원가는 유지현 은퇴 후 제 2의 유지현이 되어주리란 기대를 받던 특급 신인, 박경수에게 갔으나, 응원가에 걸맞지 못한 성적만 내고 KT로 이적했다. 그리고......[6] 컴투스 프로야구 2016에 유지현의 응원가가 있는데 해당영상(소리만 나온다)에서 따온듯하다. https://kakaotv.daum.net/embed/player/cliplink/25363508[7] # [8] 코치로도 2019시즌부터 이 번호를 쓴다.[9] 통산 출루율 0.377로 역대 3000타석 이상 선수들 중 30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투고타저 시대에 투수가 승부를 회피하여 자연스럽게 출루율이 높아지는 슬러거 타입의 선수가 아니면서 체력 부담이 큰 유격수를 주로 소화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굉장히 높은 출루율이다. 동시대에 활약한 전준호의 통산 출루율이 .375, 이종범의 통산 출루율이 .369다. 키스톤 내야수로 유지현보다 높은 통산 출루율을 기록 중인 선수는 서건창과 정근우뿐이다. 활약한 시대가 다름을 감안하면 유지현의 출루 능력은 당대에선 독보적인 수준이었다.[10] 서용빈을 제외한 유지현, 박종호, 송구홍 셋 모두 방위로 갔다.[11] 9회 2사 만루에서 대타로 나와 역전 적시타를 때려냈다[12] 이종범이 류지현보다 1년 선배이다.[13] 다만 2000년 시즌부터 박진만이 기존의 정상급 수비와 더불어 타격 부분에서도 포텐이 터지며 공격형 유격수로 발돋움하며 팀도 우승하고 유격수 골든글러브를 받은 해라 대표팀 승선이 유력했던 상황이었고, 덕분에 유지현은 백업 유격수 또는 내야 유틸 자원으로 대표팀에 선발될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다. 다만 김태균의 경우에는 수비는 박진만, 유지현보다 아래였고 타격도 이따금씩 터지던 뜬금포를 제외하면 별 시원치 않았기 때문에 대표팀 선발 과정에서 논란이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14] 다만 이 당시 박정태와 유지현이 선수협 사태에 연루되어 있어서 최종 명단에서 빠진 거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15] 류지현의 개인 유일한 만루홈런이며 페넌트레이스에서 만루홈런 기록은 없다.[16] 이 만루홈런 역시 잠실에서 친것이다.[17] 유지현은 연봉 조정에서 선수가 구단을 상대로 승리한 최초의 사례이며, 2021년 주권 이전까지 유일하게 승리했던 선수다.[18] 당시 한국나이로 34였지만 타격, 주루가 리그 상위권에 2루수비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현대로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삼성에 남으려 했던 강기웅의 은퇴상황과 유사하다.[19] 박정태는 나중에 방송에서 유지현에게 너무 고마운 동생이라며 애정을 표현했고 이 은퇴식 상황이 안타까운 마음에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도 결국 몇달 지나지 않아 후배와 마찬가지로 원하지 않는 은퇴식을 치러야 했다.[20] 류중일은 48세, 염경엽은 45세에 감독직에 올랐다. 유지현 코치는 2017년 현재 46세.[21] 흔히 스타플레이어가 명코치, 명감독이 못된다고 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 현역시절 자신의 능력에 맞추어 코칭을 하거나 작전을 지시하는데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차범근의 경우 자신의 작전지시를 선수가 못 따라하자 스스로 실행해 보였는데, 그게 크루이프 턴에 논스톱 크로스.[22] 유지현이 한양대 재학시절 경북고에서 훈련할 일이 있었는데 때마침 경북고를 방문한 류중일이 “니가 유지현이가? 니 좀 한다매?” 라고 말을 건네며 두 사람이 처음 만났다고 한다. 실제로 유지현도 류중일을 가장 존경하는 선배 중 하나로 꼽았으며 류중일도 유지현을 좋게 평가했는지 대표팀 코칭스태프 인선때마다 유지현을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이런게 밑바탕이 되었는지 현재 어느 팀의 감독-수코 보다도 조화롭게 팀을 이끄는 모습이다.[23] 이례적으로 상을 당했는데 엔트리에서 말소된 것을 보면 2019년 신설된 경조사 휴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24] 대표적으로 2020년 홈 최종전 6회초 반즈에게 2타점 동점 적시 2루타를 맞았을 때의 전진수비 시프트. 해당 경기 패배 원인이 1차적으로는 류중일의 안일한 경기 운용 때문이었지만 이 같은 유형의 시프트를 여러 차례 지시했던 류지현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25] 내야수비 시프트 실패는 단타로 끝나지만 잠실에서의 외야수비 시프트 실패는 2루타, 3루타로 연결되기 때문에 매우 치명적이다. 결정적으로 LG 외야수들은 발이 느리다.[26] 1990년 LG의 이름으로 리그에 참가한 이후 입단한 선수 출신으로는 류지현이 최초다. 이광은과 김재박도 LG에서 뛰기는 했지만 MBC 청룡 시절부터 활동했다. 또한 이광은과 김재박은 이광환 감독이 부임하기 전에 팀을 개편하는 과정에서 은퇴하거나 이적했기 때문에 LG의 프랜차이즈 스타이기는 하지만 1990년대 중반 한국프로야구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꾼 LG 신바람 야구와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이었다. 즉 류지현이 이광환 시대에 선수로 활약했던 선수 중 LG 감독이 된 첫 사례다.[27] 김재박이나 류중일 등 거물급 감독을 외부에서 데려온 역사가 있기에 내부 발탁 사례가 흔치 않은 것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꽤 있다. MBC 시절에는 유백만이 내부 발탁으로 선임된 유일한 감독이고 LG로 간판을 바꾼 후에는 천보성, 이광은, 김성근, 이순철, 김기태 등이 LG 코치에서 감독으로 승진한 이들이다. LG 인수 후 거쳐간 정식 감독이 13명인 것을 고려하면 절반 정도는 내부 발탁 감독인 셈이다. 물론 천보성과 이광은을 빼면 대부분 향후 감독 선임을 염두에 두고 외부에서 데려온 인물이기는 하다.[28] LG 역대 감독을 살펴봐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서울팀에서 선수 생활을 한 감독은 이광은과 류지현 둘 뿐이다. 전신인 MBC 청룡 시기를 제외하면 프로에서 LG에서만 선수, 지도자로 활동한 경우는 류지현이 최초다.[29] 최일언 코치는 1990년 1시즌 동안 LG에서 뛴 것을 제외하면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OB 베어스에서 활동했다. 지도자도 OB-두산, 그리고 선수 시절부터 동료였던 NC 김경문 사단의 일원이었다. OB 원년 멤버로 선수 시절부터 김경문과 함께 했던 신경식 코치야 말할 것도 없고.[30] 따라서 2003년 재부임한 이광환 2기(전년도 준우승)는 제외된다.[31] 1989년 MBC 청룡이 6위로 마친 뒤 백인천이 부임했고 1991년 LG가 공동6위로 마친 뒤 이광환이 부임했다. 1996년 7월 LG가 7위로 추락했을 때 천보성이 감독 대행을 맡은 뒤 정식 감독으로 승격했으며 1999년 양대리그 합산 전체승률 6위를 기록한뒤 이광은이 부임했다. 그리고 이광은은 2001년 시즌 초 최하위로 추락한 뒤 김성근이 감독대행을 맡다가 정식 감독이 됐다. 암흑기를 거친 뒤 이를 끊은 김기태는 2014년 4월 LG가 최하위로 추락했을 때 사퇴하여 약 1달 뒤 양상문이 감독으로 부임했다. 양상문의 마지막 시즌인 2017년 6위로 PS 진출에 실패한 가운데 류중일이 부임했다. 그리고 류중일이 떠날 때의 순위는 4위였고 준PO 탈락이었다.[32] 오지환은 저평가 돼서 아닐거 같지만 세이버의 황제답게 WAR이 역대 유격수 중 2위, KBO 현역 중 1위이다. 2020 시즌 이전까진 5위였지만 4점대의 WAR을 기록하며 2위로 상승. 위로는 커리어 20년 중 5년 만을 유격수로 뛴 이종범 뿐이다. 오지환의 WAR을 넘길 만한 선수는 김하성 정도인데, 김하성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며 한동안 깨지진 않을 것이다.[33] 참고로 김재호는 통산 25.11로 10위. 김재호가 주전이 된 2013시즌 이후로 범위를 좁히더라도 오지환은 33.66으로 1위, 김재호는 23.09로 3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