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핀 드 보아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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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마리 조제프 로즈 타셰 드라파제리[1]
(Marie Josèphe Rose Tascher de La Pagerie)
'''출생'''
1763년 6월 23일
마르티니크
'''사망'''
1814년 5월 29일 (50세)
프랑스 왕국 뤼에유말메종
'''배우자'''
알렉상드르 드보아르네 (1779년 결혼 / 1794년 사망)
나폴레옹 1세 (1796년 결혼 / 1810년 이혼)
'''자녀'''
외젠, 오르탕스
'''아버지'''
조제프 가스파르 타셰 드라파제리
'''어머니'''
로즈 클레르 데베르제 드사누아
'''형제'''
카트린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반대로 당신을 혐오하오. 당신은 비열하고, 정말 심술궂고, 어리석은 신데렐라입니다. 당신은 내게 절대로 편지를 쓰지 않소,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요. 당신은 편지가 남편에게 얼마나 기쁨을 주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짬을 내서 짧은 편지도 쓰지 않소! 그러면 마담, 하루 종일 도대체 뭘 하는 거요? 헌신적인 연인에게 편지를 쓸 시간을 빼앗는 그렇게 중요한 일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어떤 애정이 이 사랑을 질식시키게 만들고, 당신이 약속했던 부드럽고 변하지 않는 사랑을 따돌리고 있소? 당신의 매 순간을 빼앗고, 당신의 날들을 지배하고, 당신의 남편에게 관심을 주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멋진 새 연인이 누구란 말이오?

조심하시오 조제핀, 어느 아름다운 밤, 문이 부서져 열리면, 그곳에 내가 서 있을 테니.[2]

나는 진실로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 당신에게서 어떤 소식도 듣지 못하고 있어요. 내게 빨리 내 마음을 감성과 기쁨으로 채울 네 페이지의 편지를 보내주시오. 되도록 빨리 당신을 내 팔에 안고 싶소. 그리고 적도의 태양처럼 불타오르는 백 만 번의 키스를 퍼붓고 싶습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조제핀은 늘 거짓말을 했어. 하지만 늘 우아하게 처리했지. '''그녀는 내가 일생 동안 가장 사랑한 여자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난 내 아내를 사랑하지, '''하지만 존경하진 않는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하루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소. 단 하룻밤도 그대를 내 팔에 끌어안지 않은 적이 없소. 어떤 여인도 그대만큼 큰 헌신과 열정, 자상함으로 사랑하지 않았소. 공감과 사랑, 진정한 감정으로 묶인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조제핀의 죽음을 듣고 말하길.

1. 개요
2. 일생
3. 일화


1. 개요


Joséphine de Beauharnais[3]
1763년 6월 23일 ~ 1814년 5월 29일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의 첫 황후. 나폴레옹 3세외할머니이기도 하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한때 형수, 그리고 장모였다. 자녀로는 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가 있다. 나폴레옹과의 사이에서는 아이가 없었다.
현재 스웨덴, 덴마크, 벨기에, 노르웨이룩셈부르크 공가가 모두 그녀의 후손들이다. 외젠의 장녀 조제핀 드 로이히텐베르크오스카르 1세와 결혼하면서 그 후손들이 각국의 왕이 되었다.

2. 일생


프랑스의 장군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의 아내였다. 알렉상드르가 왕당파로 찍혀서 로베스피에르에게 처형될 당시 투옥되었으나,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풀려난다. 참고로 그녀가 풀려난 건 '''처형 바로 전날'''이었다(!) 정말로 인생사 새옹지마. 게다가 감옥살이를 할 당시 만난 테레사 탈리앵과의 친분으로 총재 정부 아래의 파리 상류층에 들어가게 된다.[4] 파리 사교계에서 이름을 드날리다가 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와 나폴레옹의 인연을 계기로 나폴레옹과 교류하고 얼마 뒤 1796년 결혼하였다. 나이는 나폴레옹보다 6살 연상이었다.
사실 조제핀은 총재 정부의 주역 바라스의 정부였는데, 조제핀에게 어느 정도 질린 바라스가 관계를 정리하면서 대신 구해준 신랑감이 바로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이 조제핀에게 푹 빠져 있었는데 비해, 상류 사교계의 여왕이었던 그녀는 볼품없는 외모[5]의 군인 나폴레옹에게 크게 애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결혼하게 되었던 것은 그녀의 애인이자 당대의 권력자였던 바라스가 나폴레옹의 장래가 유망하다며 설득했기 때문이라고. 게다가 군인으로 여자 대하는 데 서툴렀던 나폴레옹은 조제핀을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 그녀의 매력에 홀딱 빠져 있었다. 나폴레옹이 편지에다가 "당신의 편지를 보고 있으면 결혼한 지 50년 된 부부 같아!"라고 적어 보내기까지 했다. 그는 훗날 '내가 여자의 매력에 무관심한 건 아니지만 나는 여자 때문에 정신을 놓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여자와 함께 있으면 수줍어지고 불편하다. 그러나 조제핀은 나에게 자신감을 준 최초의 여자였다' 라고 회상한다.
결국 나폴레옹은 1796년 어느날 밤 자고 있던 시장을 두들겨 깨워 약식 결혼을 치르기에 이른다. 당시 혁명 정부 하에서 유행하던 이 약식 결혼은 일반적 의사와 달리 본인들의 뜻에 따라 언제든지 파기가 가능했다. 나폴레옹을 별로 사랑하지 않았고 마지못해 결혼하던 조제핀은 나중에 쉽게 헤어질 생각으로 이렇게 결혼을 올렸으나 이는 나중에 결정적으로 그녀의 발목을 잡게 된다.
이런 마인드로 결혼했으니 조제핀이 나폴레옹을 사랑할 리가 없었고, 나폴레옹이 결혼 이틀 만에 이탈리아 원정을 떠나자 미모의 연하남 이폴리트 샤를을 불러들여 거의 대놓고 애정행각을 벌이기에 이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폴레옹은 신혼의 아내가 보고 싶다며 아내를 보내주지 않으면 파리로 철군해 버리겠다고 바라스에게 징징댔고, 바라스와 총재 정부는 조제핀의 등을 떠밀어 반강제로 원정지까지 보내는데 그때까지도 연인 샤를을 데려갔다고 한다.
급기야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조제핀의 아들 외젠을 데려갔을 때 그녀는 파리 근교의 저택에서 연인과 밀회를 즐기기에 이르는데, 이 소식은 파리 전체에 퍼졌고 귀환한 나폴레옹은 분노하여 아예 이혼을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상황도 복잡했고, 본인도 울며 사죄한데다 나폴레옹과 사이가 좋던 그녀의 아이들까지[6]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만류하는 바람에 화해하게 되었다고. 그러나 이후 조제핀은 반성하고 정숙한 아내로서 살게 된 반면 나폴레옹은 더 이상 조제핀에게 열중하지 않고, 유명 여배우나 귀부인들을 총애하게 된다.
낭비벽이 심한데다가 결정적으로 후사마저 없었던 조제핀은 결국 1810년 나폴레옹과 이혼하였다. 자신의 무수한 바람과 냉담함에도 자신을 기다려주는 나폴레옹에게 감동해 조제핀이 마침내 정말 나폴레옹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정작 나폴레옹은 이미 조제핀에 대한 애정이 식은데다[7] 자신의 합법적인 후계자를 얻는 동시에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하고자 했다. 조제핀은 나폴레옹에게 이혼을 통보받았을 때 충격을 받아 눈물을 흘리고 졸도까지 했으며 이혼하지 않겠다고 버텼다고 한다. 나중에 상황이 돌이킬 수 없음을 안 아들 외젠의 설득으로 이혼에 동의했다고 하는데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졸도한 건 완전히 쇼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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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통보에 졸도 한 조제핀
나폴레옹에 대한 애정은 있었지만 젊어서부터 많은 시련을 겪었기 때문에 그런 일로 졸도할 성격이 아니었다고. 나폴레옹도 조제핀에 대한 애정이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라서 이혼할 때도 나폴레옹은 그녀가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충분히 지원해 주었다. 유명한 말메종 궁전이 바로 그녀가 말년을 보낸 궁전이다. 더불어 조제핀에게 황후로서의 지위와 의전 절차를 계속 유지시켜 주었고, 이혼 후에도 계속해서 서신 교류와 만남을 이어갔다. 나폴레옹 퇴위 이후에도 탈레랑은 조제핀의 생활에 부족함이 없을 것을 약속해 주었다.
혼란스러운 혁명기 시절에 살아남았던 처세술의 달인답게 파리에 연합군이 입성한 후 러시아 제국알렉산드르 1세의 방문을 받기도 했는데 알렉산드르 1세는 조제핀을 여전히 황후인 것처럼 매우 공손하게 대했다고 한다. 탈레랑루이 18세의 새로운 정부도 조제핀의 재정적 지위를 보장해줄 것을 천명하면서 그녀는 나폴레옹의 제1제국 시절과 마찬가지로 잘 지낼 수 있었다. 한편 이들과의 교류를 피하지 않아 이득을 본 조제핀이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전 남편에 대한 어떠한 배신행위도 단호히 거부하였다. 또한 그녀는 나폴레옹의 몰락에 대해서 무척이나 슬퍼했다.

"때때로 나는 우울해서 절망감에 죽을 수도 있을 지경이다. 나는 보나파르트의 운명을 견딜 수 없다."

그러던 중 5월 말에 알렉산드르 1세와 같이 승마를 하던 조제핀은 갑자기 오한을 느끼고 폐렴에 걸려 앓아 누웠는데 5월 29일에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사망하고 만다. 그녀의 유언은 "보나파르트, 엘바, 로마 왕."이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나폴레옹은 이틀 동안 방안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심적 괴로움에 시달렸다. 후에 나폴레옹의 유언은 "프랑스, 군대, 선봉, 조제핀"이었다. 후일 엘바 섬을 탈출해 백일천하 기간 동안 워털루 전투에서 대패한 후 퇴위하고 유배를 떠나게 된 나폴레옹은 도중에 조제핀이 말년을 보낸 '말메종' 성을 방문해 눈물을 흘리며 "나의 불쌍한 조제핀, 그렇게 좋아하는 장미꽃을 꺾으며[8] 길을 걷는 그녀의 모습을 지금 볼 수 있을 것만 같다."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조제핀을 버리고 마리 루이즈와 결혼한 것을 정치적 실수로 보기도 한다. 당시 조제핀은 "승리의 부인(마담 드 빅투아르)"이라고 불리며 병사들의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조제핀과 함께 하던 시기는 프랑스와 그 자신이 잘 나가던 시기였다. 그런데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손녀인 마리 루이즈[9] 결혼한 후 국내적으로는 국민들이 마리 루이즈를 오스트리아 여자라고 비난하기 시작하고, 대외적으로는 러시아와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몰락이 시작된다.
게다가 프랑스 혁명이 대체 어떤 사건인가. 민주주의, 자유주의, 전체주의 이런 후세에야 완성된 이념은 집어치우고, 아베 쎄예즈가 했던 "제 3계급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다"라는 말처럼 민족주의를 새로운 시대의 정치 이념적 글로벌 스탠다드로 각인시킨 사건이다. 안 그래도 '프랑스인', '프랑스 민족'이란 담론이 뜨겁게 달아오르던 시절, 그 험악한 혁명 시기를 다른 파리 시민들과 함께 겪으며 어찌 국모의 자리까지 올랐던 조제핀은 프랑스 민중의 입장에선 사생활의 일탈이나 사치와는 별개로 '그들 중 하나', '동네 언니에서 황후까지 올라간 자랑스런 혁명의 딸'로 인식했다. 본인의 배경이 '서민'은 좀 오바라 할지라도[10][11] 어쨌든 조제핀은 프랑스 혁명기의 평지풍파를 남들과 똑같이 겪으며 서민들의 고충과 정서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국뽕 쩔게 나라 위엄 세워주는 황제의 아내이면서도 민중과 정서적으로 가까웠던 황후를 쫓아내고, 전통적인 적국이자 프랑스 혁명이 타도하려 했던 구 체제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녀를 새로 들였으니 민중의 반응이 좋을 리가 없었다.
조제핀이 나폴레옹과 결혼했을 때 33세이며 프랑스 제국의 황후가 되었을 땐 이미 41세였다. 조제핀의 대부분의 초상화는 그녀가 황후가 된 이후에 그려졌으며 그녀도 30대까지만 해도 파리에서 잘나가는 미모의 소유자였던 것을 잊지 말자. 미모로 한가닥하는 여자들로 우글거리던 당시의 파리 사교계에서도 손꼽히는 미인이었다. 괜히 당시 최고의 권력자 바라스의 정부가 되고 6살 연하의 나폴레옹이 그녀에게 빠져든 게 아니다.

3. 일화


  • 검열삭제 냄새까망베르 치즈 같다거나, 암내가 심했다(!)는 소문이 있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직후 어느날 연회를 벌였는데, 아무리 봐도 황제가 보이지 않자 사람들이 찾다보니 그는 소파에서 편안히 을 자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노는 시종들이 황제를 그냥 깨우면 무례하니 나폴레옹이 좋아하는 치즈를 가져와서 에다가 대고 맡게 하면 일어나리라고 의견 합의를 보았는데, 막상 치즈를 들이대니까 나폴레옹의 에서 튀어나온 말은 조제핀,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못하겠어. 영어로는 "Not tonight, Joséphine"이라고 해서, 남성이 여성의 성관계 요청을 거절하는 관용구로 쓰인다. 이건 부인병인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여성의 체취에 성욕을 느끼던 나폴레옹의 독특한 성적 취향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나폴레옹은 검열삭제 냄새나 암내에 페티쉬가 있었는데 오죽하면 전쟁 나갔다 돌아오며 조제핀에게 쓴 편지 중에 씻지 말고 기다리시오가 있었다고... 이 일화는 나름 재밌긴 하지만 부위가 부위인지라 대중적으로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뭐하기 때문에 어린아이같은 대상에게는 그 냄새가 아니라 암내라고 자주 바꿔서 전파된다.
  • 바라스의 또다른 정부였던 테레사 탈리앵과는 절친이었는데 소문에는 3P 관계까지 있었다고 한다. 바라스 외에도 당대의 권력자나 재력자들과 염문이 꽤 많았고 실제로 그렇게 남자들에게서 뜯어낸 돈으로 생활을 유지했다. 하지만 사치벽이 있었기 때문에 빚을 많이 져서 나폴레옹이 집권한 뒤에도 그녀의 빚 문제로 골치를 썩였다고 한다. 게다가 황후가 된 이후로는 사치가 더 심해져 매년 수백 벌의 드레스와 수백 켤레의 구두와 장갑을 각각 구입했는데 나중에는 나폴레옹의 눈치가 보여 자식들에게 비밀리에 돈을 빌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사치벽 때문에 오히려 당대의 유행을 선도했고, 밑바닥에서 자수성가한 벼락출세자들이 득실거리던 나폴레옹 궁정의 품위를 유지하는데 기여했다고.
  • 사실 엄청나게 남자를 밝히고 사치가 심해서 나폴레옹의 골치를 썩이기는 했지만, 그런 한편으로는 선량하고 인정이 많아서 인망이 높았다. 어려운 처지의 친구나 이웃도 제법 도와주었고 고아가 된 남편의 당질녀 스테파니를 데려다 키우기도 했다. 남편이었던 보아르네 장군은 인성이 그리 좋지 않았던지라 조제핀과의 사이도 좋지 않았고,[12] 때문에 장군이 혁명으로 죽기 얼마전에 이혼한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조카도 아니고 이혼한 남편의 5촌 조카를 데려다 키운 거다.[13] 스테파니는 덕분에 조제핀이 나폴레옹과 결혼하자 나폴레옹의 피부양자가 되어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와 함께 단숨에 황족 신분이 되고, 외국의 왕자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나중에 외손녀가 벨기에 왕가로 시집을 가면서 벨기에 국왕의 직계 조상이 된다. 스테파니의 경우 완전히 인생 자체가 로또 맞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때 조제핀이 거둬주지 않았다면 스테파니는 운이 아주 좋아야 교회가 운영하는 고아원 같은 곳에 들어가 자란 뒤 약간의 재산 있는 남자에게 시집 가는 거였고, 운 나쁘면 거리를 떠돌다 굶어 죽거나 창녀가 될 가능성도 다분했다. 실제로 당시 프랑스에서는 스테파니 정도의 신분으로 고아가 된 경우 그렇게 풀리는 경우가 득실득실했다. 그런 처지에서 맘씨 좋은 친척 아줌마가 자기를 데려가더니 어느날 갑자기 신분이 황족으로 급상승 하고 옛날 같으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진짜 왕자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 오스만 제국의 태후 나크시딜 술탄이 조제핀의 사촌인 에메 뒤비크 드리베리(Aimée Dubuc de Rivery)라는 설이 있다. 프랑스 출신으로 알려진 나크시딜 술탄은 수녀원에 가기 위해 배를 탔다가 바르바리 해적에게 납치되어 이스탄불로 끌려갔고 압뒬하미트 1세의 눈에 띄어 황후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는 친프랑스식 개혁을 시행하였기에 퍼진 소문으로 한때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소개되었지만 사실이 아니다. 출처
  • 나폴레옹이 프랑스 혁명 이후 1794년 폐지된 흑인 노예제를 1802년에 부활시킨 것은 조제핀의 부탁 때문이었다. 마르티니크 섬에 있는 조제핀의 친정이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했고 흑인 노예 없이는 사업이 불가능하다는 이유였다. 조제핀 사후 마르티니크의 생가에는 조제핀의 흉상이 만들어졌는데 머리가 한 번 잘려나가고 복원한 이후에도 누군가 계속 잘라간다고 한다(...). 단순한 에피소드 같지만 실제로 아직까지는 극단으로 치닫지 않았던 아이티 혁명을 강경 진압하고 재침공하면서 혁명 초기만 하더라도 적지 않은 조류였던 식민지의 유색인종이지만 프랑스 국가와 프랑스 혁명의 이상엔 공감하던 흑인 크레올, 해방 노예 계몽주의자들의 전통을 박살낸 게 나폴레옹이었다. 인종 정책에 있어서 제정은 확실히 공화정보다 더 후퇴한 면을 보였고, 아이티에서 벌어진 대참극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자국 프랑스인들에게는 위대한 국가와 자유주의적 제국을 선물했지만, 프랑스 혁명의 보편적 이상주의는 후퇴시킨 나폴레옹 치세의 성격에 있어 상당히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1] 외래어 표기법영어를 제외한 로망스어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2] 사실 조제핀은 진짜로 바람을 피웠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그것은 의처증과는 거리가 멀다.[3] 국내에서는 조세핀으로도 불리지만 불어 발음으로는 조제핀이 올바른 발음.[4] 그녀는 바라스 총재를 비롯해 수많은 연인을 두었는데, 그중에는 나폴레옹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라자르 오슈 장군도 있었다.[5] 얼굴 자체는 미남이었다. 다만 프랑스 황제가 되기 이전의 나폴레옹은 정말로 너무 말라 볼품없어 보이긴 했다고.[6] 나폴레옹은 조제핀의 아들딸을 몹시 아꼈다. 혼사도 자기 집안이나 유럽 굴지의 명문가와 엮어주었고 이후 유배 갔을 때는 '내 유일한 가족은 외젠뿐이었다'고 회상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그녀의 딸 오르탕스는 자기 남동생과 결혼시켰는데, 이후 오르탕스가 바람을 피워 사생아를 낳아왔을 때조차 이혼하겠다는 동생의 요청을 거부한다.[7] '평범한 이들의 잣대를 위대한 이들에게 들이대지 말라'고 말하며 피차 바람을 피워댔기 때문에 애정 문제는 아니었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자신의 다른 정부까지 아이를 낳은 상황에서 자신의 생식 능력은 증명이 되었으니, 합법적인 후계자를 얻고 싶었을 것이라는 의견.[8] 조제핀은 장미를 매우 좋아해서 나폴레옹과 이혼한 후 '말메종' 성에서 생활할 때 250 종류의 장미를 말메종의 뜰에 심고 장미를 채집하러 돌아다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후세 사람들을 배려해 자신이 모은 장미를 식물 화가 피에르 조제프 르두테(Pierre Joseph Reduote, 1759-1840)에게 그리게 하여 기록에 남겼을 정도였다.[9] 마리 루이즈의 친할아버지인 레오폴트 2세의 막내 여동생이 바로 마리 앙투아네트다. 마리 루이즈에게 앙투아네트는 고모할머니인 셈.[10] 조제핀의 출생지는 마르티니크 섬으로 부유한 설탕 농장 경영자의 집에서 태어났다. 물적으로는 풍족하지만 신분 자체는 평민이었는데, 본래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세력은 이렇게 돈과 교육 있는 평민, 즉 제 3계급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물적인 의미에서 '서민'은 아니었어도 나름 혁명기의 '전형적' 사례에 해당되는 인물이었다.[11] 사실 유럽은 귀천상혼 배제가 심하기 때문에 왕실에서 신분이 맞지 않는 결혼, 즉 왕가보다 급이 낮은 가문과 결혼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괜히 현대까지도 영국에서 캐서린 미들턴이 결혼 당시 평민 왕세자비라며 화제가 되었던 게 아니다. 하물며 시대를 감안하면 아무리 재벌가라도 제3신분 출신이 황후까지 되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컸던 셈.[12] 독일 왕족 여성인 아말리아 제피린을 애인으로 두고 있었으며, 아이들에게도 무심했기 때문에 조제핀의 아이들이 친아버지 보아르네보다는 양아버지 나폴레옹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13] 조제핀은 귀족에다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바라스의 정부였으니 빽이야 있었지만 워낙 낭비벽이 심하다보니 재정적으로는 완전히 파산 상태였다. 살고있던 집도 남의 것인데다 생활도 완전히 빚으로 꾸려가고 있는 상태였다. 아직 미모가 남아 있고 여기저기 인맥이 남아있어서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있었지만, 바라스에게 버림받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게 분명한 상태였기 때문에 바라스도 그녀가 부담이 되나 그냥 버리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 나타난 나폴레옹에게 바톤 터치하는 식으로 넘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