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제2차 대오스만 전쟁

 


'''제2차 오스만 전쟁'''
'''시기'''
서기 1430년 6월 ~ 1432년
'''장소'''
세르비아, 보스니아, 헝가리, 그리스
'''교전국'''
[image] '''신성 로마 제국'''
[image] 헝가리 왕국
[image] 프랑스 왕국
[image]
[image] 교황령
[image] '''동로마 제국'''
[image] 알바니아 왕국
[image] 구호기사단
[image] '''오스만'''
[image] 왈라키아 공국
'''지휘관'''
[image] '''지기스문트 폰 룩셈부르크'''
[image] 후녀디 야노시
[image] '''샤를 7세'''
[image] 질 드 레
[image] 잔 다르크
[image] '''마르티노 5세'''
[image] 가브리엘레 콘둘메르
[image] 줄리아노 체사리니†
[image]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시스 팔레올로고스'''
[image] 토마스 팔레올로고스
[image] 안드로니코스 팔레올로고스
[image] 돈 프란시스코 데 톨레도
[image] 할리드 무르타트
[image] 토마스 마기스트로스
[image] 데미클레오테스
[image] 니키포로스
[image] 제르지 카스트리오티
[image] '''무라트 2세'''
[image] 아흐메트
[image] 찬다를르 할릴 파샤
[image] 이스하크 파샤
[image] 투라한 베이
[image] 이브리함 베이
[image] 라두 2세‡
[image] 단 2세
'''병력'''
총원: 29,400명
신성로마제국군: 12,000명
프랑스군: 2,000명
잉글랜드군: 1,000명
후스파 용병: 1,000명
로마군: 12,000명
에피루스군: 1,000명
구호기사단: 400명
약 30,000여 명
'''피해'''
십자군: 9,000여 명
로마군: 1,500명
13,500여 명
'''결과'''
'''십자군의 패배.'''
세르비아 공 주라키 브란코비치의 즉위와 헝기라의 베오그라드 할양.
오스만의 교황에 대한 테오도로스 팔레올로고스의 대관식 요청.
'''영향'''
밀라노 공국의 세력 확장, 베네치아 공화국제노바 공화국의 분쟁.
로마 제국제노바 공화국의 동맹 체결.
교황 마르티노 5세의 혼절과 콘클라베 개최.
구호 기사단의 로마 제국 합류.
1. 개요
2. 모레아의 북진과 세르비아의 배반
3. 십자군 vs 오스만
4. 코소보 전투
5. 급변하는 정세와 종전


1. 개요


소설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의 오스만과 모레아, 그리고 헝가리를 비롯한 주요 유럽 국가들의 행적에 대해 다루는 문서. 대략적으로 1432년 5월부터 7월까지의 시기를 담고 있다.

2. 모레아의 북진과 세르비아의 배반


모든 준비를 마친 황제의 모레아군은 크루여를 떠나 이전 제르지가 급히 가느라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디라키움으로 무혈입성한다. 거기서 알바니아 봉기를 유도한 니케포로스 주교를 오랫만에 재회하여 그의 공을 치하한다. 그리고 잠시 머무르면서 디라키움을 요새화한 흔적들을 보며, 제르지의 능력이 그냥 말로만 대단한게 아니구나라고 생각하는 한편, 다라키온의 항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베네치아 주재상인을 만나 알바니아 반군의 물자 지원을 시인하면서 결국 우려했던 자신의 파문이 이루어졌다는 나쁜 소식을 듣는다. 그와 동시에 왈라키아에 군사정변이 터져 라두 2세가 피살되었고, 이 때문에 십자군의 전력이 분산되었다고 하자 황제는 사드라잠인 찬다를르 할릴 파샤가 배후로 서있다는 걸 직감하며, 베네치아 원로원에게 모레아군에 대한 전폭적인 보급 지원을 요청한 뒤 다시 북진하여 알바니아를 완전히 평정하고, 세르비아 남부 접경지역인 제타 지방으로 진군한다.
이를 옆에서 불편한 기색으로 따라다니던 제르지는 처음엔 자기가 황제에게 말한 것처럼 오스만에게 저항하는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지만, 모레아군이 지나다니던 땅의 농민들과 수도사들이 해방군으로 맞이하며 환영하자 자신의 사고관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한번 붙은 적이 있던 할리드와 신경전을 벌이며[1] 여러 번 말싸움을 한 끝에 결국 알바니아 사람들의 자유와 주권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황제를 신뢰하며 따르는 길로 향한다.
한편 투라한이 지휘하는 오스만군의 오랜 초토화 작전으로 스메데레보베오그라드를 비롯한 몇몇 도시들을 제외한 마을과 소도시들이 페허로 전락되어 전쟁피로도가 감당할 수 없게 커져진 세르비아, 스메데레보를 지키던 후녀디 휘하 의용병들은 오스만군이 농촌을 휩쓸던 말던 간에 십자군이 올 때까지 이 도시를 끝까지 지키자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었으나 성 밖의 페허를 지켜만 보던 주라지는 저항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에 휩싸이며 의용군을 제외한 십자군이 1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소식이 없다는 것에 분노를 토하다가 잠시 후녀디가 스메데레보 교외에 있던 오스만 정찰대를 상대하고 피난민들을 구출하러 잠시 도시 밖으로 나간 사이 결국 주라지가 총대를 메고 스메데레보와 베오그라드의 성문을 개방하여 '''세르비아가 오스만에 굴복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다행히 후녀디는 오스만군과 적이 되어버린 세르비아군으로 둘러싼 스메데레보 시가지에서 무쌍과 돌파로 기적적으로 탈출하긴 했으나 300여명의 병사들을 제외한 전 병력과 자신의 중군까지 그곳에서 잃는다.
이 소식을 들은 황제와 모레아 참모진은 세르비아가 적이 되어버린 이상 북진은 무리라고 생각하면서 베네치아의 보급 지원이 원활한 슈코더르 호수에 본부를 설치하고 그 주변에 있던 버려진 전초기지와 요새들[2]을 재활용해 우주방어를 이루면서 십자군의 전황을 지켜본다.

3. 십자군 vs 오스만


후녀디는 추격대를 뿌리치고 가까스로 스메데레보 교외로 탈출해 부근에 접근한 '''잔 다르크'''와 '''질 드 레'''가 이끄는 프랑스 의용군과 접촉한다. 허나 이곳에 1만 명 이상의 십자군 본대가 아닌 프랑스군만 왔다는 걸 알게 되자 후녀디는 지기스문트 폰 룩셈부르크 황제가 뭔 생각으로 안 온거냐고 미친듯이 날뛰었으나 그 이유가 이미 파문까지 한 주인공이 십자군의 두번째 주력이라 할 수 있는 모레아 십자군을 인수하고 그대로 잠정적 탈퇴를 시전한 것 때문이라는 이유를 듣고 그대로 벙찐다.
어쨌든 이유를 들었으니 후녀디는 부하들이 잠들어 있는 스메데레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다가 프랑스군의 인도하에 2주일 정도의 행군 끝[3]에 십자군 본대가 주둔 중인 평원에 도달한다. 그곳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그것은 본대가 쉽게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가 십자군 본대가 다음 표적임이 명백한 상황에서 드라가시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자'''[4]를 보내기 위함이었음을 알고, 만나기 직전까지 갖고 있던 의심과 오해를 떨쳐버리고 지기스문트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다.[5] 허나 모레아로 떠난 10명의 전령들은 모두 오스만 군에게 잡히거나 사살당함으로써 결국 모레아가 오스만 군의 후방을 들이박는 사이다 같은 장면이 연출되지 못하고, 십자군 본대의 위급함도 알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이런 상황을 모르는 십자군 측은 일단 사용할 수 있는 병력들로 오스만 본대를 막아야 겠다는 생각으로 좌익에 후녀디가 이끄는 제국군 4천과 후스파 출신 용병들이 다루는 전투수레와 핸드캐논 부대를, 중앙에 황제 본인과 체사리니 추기경이 예비대를 포함한 5천 병력으로 포진, 그리고 우익에 잔 다르크와 질 드 레가 이끄는 프랑스 출신 기사대 및 영국군을 비롯해 전체 병력의 절반 가까이에 해당하는 나머지 가용병력 7천 병력을 몰빵하는 승부수를 써서 전투에 대한 준비를 갖춘다.
반면 오스만 군은 최전방에 노예병들이 중심으로 이루어진 경보병대 "아잡"을 배치하고 그 후방에 아흐메트 왕자가 직접 이끄는 장창병이 메인인 중익을 중심으로 정규병들이 따라나서는 상당한 병력 손실을 감수한 듯한 뭔가 이해가 되지 않는 전략을 펼친다.
그렇게 전투가 시작되자 오스만의 경보병대들은 많이 약했기에 추풍낙엽으로 무너졌고 그렇게 전세가 처음부터 좋게 흘러가자 잔 다르크의 우익 부대는 그대로 밀어붙여 오스만의 지휘부로 돌입해, 무라트의 목을 딸 각오로 미친 활약[6]을 펼치며 깊숙히 들어간다. 그런 우익의 활약에 고무받은 지기스문트의 중익 부대도 우익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따라 돌격하게 되던 와중에 뭔가 이상한 점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쓰러지는 경보병마다 금화 주머니가 달려있었고 이에 눈이 먼 십자군 병사들은 한 명이라도 더 족쳐 금화를 얻기 위해 기껏 짜놓은 진형을 망가뜨린다.[7] 이렇게 흐트지게 되니 오스만의 역공이 수월해져 그 동안 숨어있던 정규군이 나타나 뒤늦게 물러나려는 십자군이 빠지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으면서 포위 섬멸을 하려 하자 프랑스의 기사들은 시파히가 보병대에게 돌격하는 걸 막기 위해 일부러 전면으로 맞섰고, 중익 부대도 위기에 빠지자 체사리니 추기경이 예비대를 이끌고 방진을 이루어 중익 부대가 뒤로 물리는 동안 시간을 최대한 끌다가 그대로 전멸당하는 희생적인 행보[8]를 펼친 덕분에 오스만의 처음 계획대로 십자군이 전멸당하진 않는다.
허나 오스만 군의 위력은 대단했기에 핸드캐논전투수레의 위력을 모르고 달려들던 투라한 휘하의 우익 부대가 후녀디의 부대에게 큰 피해를 입은 것 이외엔 모두 십자군을 물량으로 밀어붙었고, 결국 우익 부대는 중익 부대와 단절된 채 싸우다 절반 가량의 전력을 잃고 먼저 철수했고, 중익도 엄청난 압박을 받다 후녀디와 좌익 부대의 전멸을 각오한 분전으로 시간을 끈 사이 간신히 뒤로 철수했으나, 이번 전투로 약 9천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여 전력은 반토막나고 거기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잉글랜드 군도 십자군 탈퇴를 선언하면서 십자군 전력은 고작 7천명밖에 남지 않았다.[9] 그래도 다음을 위해 다시 재정비를 하는 사이 오스만 쪽에서 한 예니체리 병사가 협상 서한을 가지고 나타난다. 이에 지기스문트는 모레아군의 행방이 어디있는지 몰라 많이 망설였고, 잔 다르크를 중심으로 협상에 응해선 안된다고 거센 반발이 있었으나, 후녀디가 직접 일단 협상 테이블에 앉아 최대한 헝가리 쪽에 유리한 쪽으로 오스만과 휴전을 맺고 힘을 길러 나중에 복수하자고 건의함으로써 협상 제의에 응한다.
그 다음날 협상에 나선 지기스문트와 후녀디에게 무라트는 아흐메트 왕자가 십자군의 중군을 상대한 지휘관이라는 걸 말하며 그들을 놀라게 한 뒤, '''이번 협상이 교회와 오스만 사이의 오해를 풀 수 있을 기회일지도 모른다'''라는 이상한 망언을 시작으로 다음과 같은 후한(?) 조건들을 제시한다.

'''1.''' 헝가리의 도시였던 베오그라드에서 오스만군이 퇴거하는 대신, 그 도시를 세르비아에게 완전히 양도한다.

'''2.''' 헝가리와 기독교 세계는 세르비아의 지배자가 주라지 브란코비치라는 것을 인정한다.

'''3.''' 세르비아는 전쟁 전과 똑같이 오스만과 헝가리의 이중봉신으로 남는다.

'''4. 교황은 테오도로스 팔레올로고스를 유일한 제국의 황제로써 공인하고 대관식을 준비한다.'''

이에 후녀디는 다른 조건은 어쩔수 없지만 마지막 조건은 뭔 미친 소리냐는 반응을 보이며 끝까지 내켜하지 않자 그런 후녀디에게 무라트는 '''백색 기사'''[10]라고 부르면서 그렇지 않는다면 계속 전쟁을 진행, 세르비아의 주라지처럼 '''헝가리의 귀족들을 오스만의 보호를 받는 봉신으로 만들어버리겠다'''고 협박을 함으로써 어쩔 수 없이 지기스문트 황제는 침통한 심정으로 이 조건들을 모두 받아들인다.

4. 코소보 전투


십자군을 아작냈지만 여전히 모레아군이 건재했기에 많이 초조한 무라트는 세르비아인으로 이루어진 가짜 십자군 패잔병들을 만들어보내 모레아군을 코소보 평원 지역으로 끌어들였으며 이를 이스하크 파샤가 지휘하는 별동대가 살짝 견제만 하자 황제도 무라트의 계략를 바로 눈치챘는지 코소보 일대의 마을에 징발을 감행하고 바로 회군을 결정하여 빠른 속도로 철수하려 한다. 이런 회군에 무라트는 수적 열세긴 하지만 모레아군이 다시 산간 요새 지대로 돌아가는 걸 최대한 저지하라고 명을 내리면서 추가 지원군도 더 보내 총 7천명의 전력을 만듬으로써 모레아와의 충돌이 불가피해진다.[11]
한편 모레아 참모진은 다들 이러한 정세에 대한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 터라 "이미 십자군이 와해되고 술탄의 본대가 남하를 시작했다"는 공통적인 의견으로 통일되었으나 지금까지 볼모로 있던 가브리엘레 추기경은 혼자서 십자군이 반대로 이길 가능성도 있지 않느냐고 행복회로가 담긴 주장을 하였고 이에 황제는 오히려 십자군이 이겼더라면 모레아군은 파문된 군주가 이끌고 있으니 둘 사이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회군해야 한다며 가브리엘레에 대한 적의와 십자군에 대한 구원에 대한 생각이 없음을 보여주어 추기경과의 대화를 끝내버린다. 허나 할리드도 이렇게 철수만 해도 되는 거냐고 하자 다 생각이 있고 나름의 계략이 있음을 토마스를 통해 전하면서 약간의 불만도 다 풀게 만들었고 그와 동시에 주변을 순찰하면서 행군을 계속 이어나간다.
회군 시작한지 3일 후부터 모레아군 주변에 오스만 정찰병이 등장하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프란치스코가 위력 정찰을 한 끝에 부근에 오스만군이 포착되었다고 전한다. 그러자 다들 살짝 긴장하게 되었고, 점점 접근하는 오스만 추격대를 본 가브리엘레 추기경도 며칠 동안 바라만 보다 십자군이 진짜로 무너졌구나라는 걸 실감하게 되면서, 전쟁 전 신중하지 못했던 자신의 지난 행적을 뉘우치며 사색에 빠진다. 잠시 후 프란치스코로부터 마지막 정찰 보고를 받았는데, 오스만 군의 수가 더 늘긴 했으나 이상하게 적들이 지친건지 정찰대에 대해 소극적으로 반응했고 마침 모레아군의 물량도, 사기도 높았기에 한번 일전을 다투어도 괜찮다고 판단. 추격대를 그대로 무너뜨리기 위해 장창병 스쿠타토이를 중심으로 중익을 이루었고, 좌익에 할리드와 무트라티를, 우익에 제르지 휘하 알바니아 군을 배치함과 동시에 후방에 프란치스코가 지휘하는 라티니키 이피스와 스트라디오테 기병대를 배치하여 전열을 이루고 전투를 준비한다.
이후 마침내 교전이 시작되자, 오스만군이 무리한 강행군으로 지친 것도 있고, 거기다 이미 도태되었으리라고 생각했던 스쿠타토이 보병대의 장창 방진으로 심각한 출혈이 발생하자 오스만군이 그대로 동요하여 무너지게 되었고, 그나마 곡도를 들고 알바니아 군과 잘 싸우던 좌익도 제르지가 약점을 알아채고 적과 붙어서 싸우며 밀어내기 시작하자 이렇게 밀릴 줄은 몰랐는지 이스하크 파샤를 비롯한 오스만의 지휘관들은 경악에 빠진다. 설상가상으로 그 알바니아 군 사이에서 실종된 걸로 알고 있던 제르지가 적장으로 서있다는 걸 알게 되자, 그것만으로도 얼마 없는 사기마저 더 떨어진다. 한편 시파히 기병대를 이끌고 지원하러 온 투라한도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장창병의 약점인 측후방으로 편전을 쏘면서 틈을 찾아보았지만 중장갑 갑옷과 방패로 무장한 모레아군에겐 별 효용이 없었고, 마침내 패배를 직감한 이스하크는 인재라도 살리기 위해 알바니아군을 상대하던 이브라힘 파샤를 후방으로 호출하여 철수를 준비하였고, 마침내 오스만군이 이스하크의 퇴각 명령을 받고 철수를 시작하자 후방에 대기하던 프란치스코와 기병대들이 학살하다시피 쳐냈으며, 이스하크 파샤는 그런 상황을 예상은 했지만 참혹한 심정으로 바라만 보며 시파히와 함께 안전하게 철수한다.
이렇게 이날 오스만 군은 추격대 전력의 대부분이었던 6천명을 그 자리에서 상실하였고, 반면 모레아군은 1천 5백명의 피해[12]만 나오는 대단한 승전을 거둠과 동시에 그동안 제국 시민들 의식 속에 망령처럼 따라붙던 '''제국의 몰락'''이 마침내 끝난다.

5. 급변하는 정세와 종전


엄청난 승전을 거두었음에도 여전히 회군을 멈추지 않고 원래 계획했던 대로 슈코더르 호수로 행군을 이어나가자, 모레아 군에 큰 감명을 받은 가브리엘레 추기경을 비롯해서 많은 장병들이 이제 그대로 밀어붙어도 되지 않냐는 반응들이 있었지만 드라가시스 황제는 여전히 요지부동인 채로 있어서 다들 아쉬워하던 찰나, 며칠 뒤 토마스가 놀라운 소식을 알려주게 되는데, 구호기사단 기사들이 이피루스군과의 합류하는 것에 응하며[13] 데미클레오테스와 마기스토로스가 이들을 대신 이끌며, 현재 무주공산인 마케도니아로 진격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이에 그 동안 황제와 토마스의 진의를 몰랐던 참모진들과 추기경은 다들 감탄한다.
한편 이 소식은 무라트 입장에선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기에 할릴 파샤가 급히 보낸 서한을 받자마자 엄청나게 맨붕하였고, 그 직후 세르비아에 있던 본군을 그리스로 회군시켜 그들을 막으려고 지시를 내릴 뻔 했으나 할릴 파샤가 그 뒤에다 그렇다고 회군하는 건 더 위험한 행동이라고 말리면서, 자신이 계략으로 막아보겠다고 함대 지휘권 인수를 요청해줌과 동시에 '''오스만이 기적 한번에 무너지도록 나두지 않겠습니다.'''라고 함으로 무라트는 이를 승인한다.
그 후 양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가 엄청나게 바뀌게 되는데, 일단 십자군의 실패로 북이탈리아에 대한 교황의 입지가 상당히 축소되다 못해 결국 교황 마르티노 5세마저 큰 충격을 받다가 쓰러져 혼절을 해버렸고, 이로 인해 잠잠하던 밀라노 공국이 다시 북이탈리아의 패권을 놓고 주변 도시국가들과 베네치아에 대한 침략 전쟁이 벌어진 상태에서 그리스 지역에 대한 베네치아의 양면 전선을 만들 목적으로 할릴 파샤의 주도로 오스만 함대를 이끌고 지나가던 베네치아 상선들을 습격했고, 그 후 제노바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베네치아-제노바 2차 전쟁을 유도하게 만든다. 워낙 이탈리아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치열했는지, 베네치아는 이런 사태를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테살로니카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베네치아 해군을 격퇴하고 베네치아령 테살로니카를 비롯한 에게 해 일대의 베네치아 식민지 섬들이 거의 다 제노바에 점령당한다. 이로 인해 베네치아의 보급에 의존하던 모레아 군의 전투수행능력이 급락했고, 이에 할릴 파샤는 이미 상황이 안 좋긴 하지만 이로써 모레아와 베네치아의 동맹이 무너지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고 생각한다.[14]
다시 모레아 군영으로 돌아와서 테살로니카 반환[15]과 보급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황제에게 헝가리의 십자군 해산에 반발하여 오스만과 싸우고 있는 모레아를 지원하기 위해 온 잔 다르크와 질 드 레의 프랑스 의용군을 만난다. 허나 프랑스에서 정식으로 잔 다르크의 귀환을 요청하는 서한을 교황령에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을 받아들이기엔 큰 부담이 있었고 결국 곧 개최될 콘클라베에 참석할 가브리엘레 추기경의 호위를 맡기고 아쉽게 보내버린다.[16]
추기경과 프랑스 의용군이 로마로 떠난 후 절묘한 타이밍에 오스만 평화 사절이 오게 되는데, 예전과 달리 매우 공손해졌지만 지금 모레아는 테살로니카라는 독배를 들이킨 상태인데 전쟁을 더 지속할 수 있겠냐는 말과 함께 그 동안 모레아가 장악한 '''알바니아, 제타 지방, 마케도니아 남부 지방'''까지 다 인정해 주겠다는 나름 나쁘지 않은 제의를 한다. 이에 황제는 아직 승산은 제국에게 있다며 거절하려 하자, 그리스를 지키던 베네치아 함대도 본국으로 철수했고, 제국은 함대가 아예 없는데, 만약에 오스만 해군이 모레아와 제국 상선들을 박살내면서 해상 봉쇄를 시전한다면 그 생각이 변할 수도 있다며 현실적인 협박을 하자 결국 황제는 잠시 침묵하다 제의에 승인하게 되면서 마침내 2차 대 오스만 전쟁이 끝난다.
전쟁이 끝나고 제국의 모든 도시가 환호하는 동안 황제는 조용히 테살로니카 교외에서 제노바의 대표 주스티아니를 만나게 되는데, 추궁하는 황제에게 주스티아니는 그동안 오스만에 협력할 수밖에 없던 제노바의 사정들을 해명하면서, 이전의 동맹인 베네치아는 테살로니카 때문이라도 적이었던 오스만과 손을 잡게 될 것이며[17], 제노바는 각자의 적으로부터 서로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요청한다. 거기다 베네치아와는 다르게 조차지 요구가 아닌 무역권과 도시 거류권만 요청한 좋은 조건을 내걸자, 베네치아만큼 제노바도 이번 문제에 사실상 모든 걸 걸었구나고 생각하며, 주스티아니의 제안을 들어준다.

[1] 할리드와 제르지는 출신 배경부터가 정반대고 예니체리에 대한 관점도 달랐으며, 거기다 적으로써 서로 싸우기도 했기에 갈등이 생긴 걸로 보인다.[2] 제르지가 이탈리아에서 넘어올 십자군을 저지할 목적으로 만들고 있었던 방어선이었으나 비딘 쪽에 있었던 황제의 적극적인 인력 강탈로 공사가 지지부진하다 결국 중단되고 만다. 허나 그때의 악감정은 다 사라졌는지 제르지가 앞장서서 이걸 쓰자고 건의했으며, 황제도 훌륭하다며 대놓고 칭찬한다.[3] 북동쪽, 아니면 동쪽으로 2주 정도 행군해야지 도달할 수 있는 평원으로 추정[4] 드라가시스가 파문 받았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결단이 아닐수 없다.[5] 이런 지기스문트의 결정에 체사리니 추기경도 그렇게 반대는 하지 않고 이 사태를 교황청과 자신의 판단 미스였다는 걸 순순히 인정하였고, 동시에 무언가의 책임감도 느꼈는지 이전의 행적과 완전히 다른 행보를 보여준다.[6] 말 그대로 칼에 실은 힘으로 물푸레나무같이 단단한 나무로 만들었을 게 분명한 창자루를 일격에 아작내고, 그대로 창자루의 주인인 병사마저 그냥 완력으로 밀어내다못해 날려버려 적 진형에 내다꽂아 스플뎀을 입히는 수준.[7] 알고 보니 이는 무라트의 계략으로 수비군의 장점인 전열을 처음부터 흐트려놓으려는 작정으로 한 것이기도 하면서, 약간 반동분자 급인 노예 출신 경보병들에게 여기서 공을 얻고 살아남는다면 그 금화가 병사들의 소유가 되고 거기다 더 퍼주겠다고 꼬드기며 사지로 내보내는 잔혹한 생각이 드러난다.[8] 아마도 드라가시스 황제의 자기희생적인 영웅적인 행위에서 어느 정도 영감를 가진 것으로 보이며, 이런 멋진 최후에 대해 적인 무라트 2세도 감탄한다.[9] 오스만은 대략 7천 5백명의 손실이 발생했고 이들 중 기사 급인 제벨루, 시파히를 비롯한 투라한 휘하에 있었던 고급 병과 쪽 손실이 예상보다 큰 편이다.[10] 오스만의 장래에 거대한 위협이 되는 인물이 될 거라며 그를 인정한 것이다.[11] 병력이 열세였던지라 자칫하면 패배할 수 있었지만, 모레아군의 한축을 맡고 있던 알바니아군이 오합지졸이라고 생각(착각)했고, 모레아 군대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음을 파악한지라 그냥 시간만 끌려고 보낸 걸로 보인다.[12] 이중 알바니아군이 1천여명에 달한다. 순수 모레아군 피해는 500명 내외 밖에 안나온 상황.[13] 모레아 측이 내준 조건은 4차 십자군 이후 구호기사단이 점거 중이었던 로도스 섬의 제국 영유권을 정식으로 포기 및 할양하고, 제국 영토 내에 구호기사단 지부 설치를 허가하는 것이었다.[14] 허나 테살로니카 해전 와중에 이탈리아의 정세가 또 다시 뒤집어지는데 한참 베네치아를 치던 밀라노에 대한 반국가동맹 형성+반란으로 혼란에 빠지던 와중에 밀라노의 속국으로 있었던 제노바가 해방되어 주권을 회복하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더이상 오스만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바로 테살로니카를 그대로 모레아에게 바치고 베네치아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모레아와의 동맹을 요청한다.[15] 제노바의 요청을 받아들이면 100% 베네치아와의 동맹 파기, 거절하면 반환되리라고 기대하던 시민들의 분노와 반란 떡상.[16] 그렇게 길지 않았던 만남이었지만 황제에 대한 두 사람의 평은 매우 호의적이었고, 이후 어찌 될지는 알수 없으나 서유럽에서 황제에 대한 우호적 여론을 조성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듯 하다.[17] 1차 전쟁 이후 테살로니카가 베네치아 소유로 넘어갔을 때 베네치아는 이 도시를 그리스 무역의 최대 거점 도시로 키우려고 무려 '''10년 치 예산'''을 투자해 둔 상태이다. 그런 도시를 동맹 모레아가 사실상 먹튀를 했으니 투자금 때문이라도 베네치아가 빡돌 수밖에 없는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