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와 아키히로
1. 개요
일본의 싱어송라이터, 연출가, 배우. 1935년 5월 15일생. 나가사키 현 나가사키 시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마루야마 아키히로(아명: 신고)이다. 1971년까지 본명인 마루야마 아키히로로 활동했다. 5남매 중 차남이며 부모님이 큰 카페를 운영하다 카페를 폐점하고 금융업으로 전업하였다. 이때 부모님의 카페 경영으로 다양한 사람을 접하게 되고 이는 연예계 활동에 큰 도움이 된다. 1945년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으나 다행히 큰 상처없이 구조되었다. 그러나 원폭으로 인해 집안 재산이 거의 다 날아가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종전 직후 영화에 나온 보이 소프라노를 보고 가수를 꿈꾸며 고교진학을 위해 상경한다. 여자로 오해받지만, 사실은 '''남자'''다. 흔히 오해 받는 사실인데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남성 정체성을 확실하게 지닌 남자다. 주로 1세대 오카마로 보지만 미와 본인이 오카마나 여장남자로 스스로를 부른 적은 없다. 그냥 스타일이 저런 것.인간은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비타민제나 영양보조식품은 찾지만 정신을 유지하는 것에는 너무 무관심 합니다. 정신에 있어서 비타민제는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문화'입니다.
저서 천성미어(天声美語) 중
2. 생애
1935년 나가사키 현에서 5남매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재혼을 해서 미와 아키히로의 동생들은 이복동생이다. 본래 카페를 하며 지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으로 적성 문화를 장사하지 못하게 되며 부득이하게 금융업으로 전업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 어린 시절 가정부 둔 생활을 지냈다.
1945년 8월 9일, 여름 방학 숙제로 그림을 그리고 있던 중 나가사키 시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이에 형과 가정부와 함께 방공호에 숨었다고 한다. 일본의 패전 이후 폭심지 근처에 있던 조부모를 뵈러 갔으나 모두 사망한 상태였다고. 전쟁 이후 아버지의 대부처들이 모두 죽거나 파산해 반환을 받을 수 없게 되자 가난하게 되었고 새어머니도 죽는 등 불행을 겪었다고 한다.
자신이 감상했던 영화에 출연하던 가가미 이치로의 보이 소프라노에 충격을 먹고 성악과 피아노 레슨을 받다 17살의 나이로 프로가수로 데뷔했다. 1957년 메케메케, 1966년 요이토마케의 노래[1] 가 대히트했으며 당시 중성적이고 잘생긴 미소년 미모로 인기를 끌었다. 연극 연출가 테라야마 슈지는 그의 연기력에 감탄해 오직 그를 위한 작품을 2개나 만들어 줬다고. 그리고 그때부터 이미 게이라는 소문이 많았다. 이후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커밍아웃 하는데, 그 당시엔 게이에 대한 사회의 편견이 심해 살해협박까지 받았다고.
1967년 연극 ‘아오모리현의 곱사등이 남자’, ‘모피의 마리’[2] , 1968년 미시마 유키오가 시나리오를 쓰고(원작은 에도가와 란포)후카사쿠 킨지가 감독을 맡은 영화 검은 도마뱀(黒蜥蜴) [3] 에서 '''여배우'''로 주연을 맡은 이후(훗날 외전인 흑장미의 관에서도 주연을 맡게 된다. 검은 도마뱀에서 미시마 유키오 본인이 잠깐 나온다.[4] 이 영화는 킬빌에 영향을 주었다.) 연극, 노래를 중심으로 여러 장르에서 활약하고 있다. [5] 인생노트 같은 많은 저서를 내놓기도 했다. 연예계에서는 주로 오카마기믹으로 나온다. 그렇지만 성전환 수술은 일절 받지도 않았고 받을생각도 없다고 한다. 가끔 애니메이션 더빙에 참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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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도마뱀 주연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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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라이브 음반 발매 당시)
3. 주요 출연작
3.1. 영화 출연작
- 여자라는 것 (女であること:1958)
- 개미 거리의 마리아 (蟻の街のマリア:1958)
- 신혼열차 (新婚列車:1959)
- 사냥꾼 일기 (猟人日記:1964)
- 검은 도마뱀 (黒蜥蜴:1968)
- 흑장미의 관 (黒薔薇の館:1968)
- 일본인의 배꼽 (日本人のへそ:1977)
- TAKESHIS' (2005)
3.2. TV 출연작
- 긴자의 산적 (銀座の山賊 : 1962)
- 프로 (プロ:1963)
- 플레이 걸 (プレイガール:1969)
- 유키노죠 변화 (雪之丞変化:1970)
- 비정의 라이센스 (非情のライセンス:1973)
- 요시츠네 (義経:2005) - 키이치 호겐[6]
- 하나코와 앤 (花子とアン:2014) - 나레이션.
3.3. 성우 출연작
4. 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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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와 연인 관계였다는 설로 유명한데 정확히는 미시마가 일방적으로 미와 아키히로에게 대시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미시마 유키오는 일명 미시마 사건으로 유명한 극우 소설가인데 미와 아키히로는 반대로 반자민당파인 평화주의자이기 때문에 애인이 아니라는 의견도 나오기도 했다. 다만 미시마 유키오가 그의 뒤를 봐준 것은 확실하다.
미시마와 관련된 일화에는 재밌는 것이 많은데, 미시마가 "마루야마(미와 아키히로의 본명)군. 당신에게는 한 가지 결점이 있다. 그것은 나에게 반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미시마는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영화 《검은 도마뱀》에 출연한 적도 있는데, 출연 동기가 '검은 도마뱀' 역으로 출연한 미와 아키히로와 키스하고 싶어서라는 이야기도 있다.
더불어 미시마는 육체와 관련된 콤플렉스가 많았기 때문에 미와 아키히로가 이를 놀릴 때마다 화를 냈었는데, 미와와 무도장에서 춤을 추다가 미와가 미시마의 어깨, 팔뚝을 만지며 "패드, 패드밖에 없네, 미시마 씨 어디 있나요??"라고 웃으며 농담을 던지자 미시마는 버락 소리치며 "파트너 교체다, 나는 가겠다." 하곤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난 후 헬스클럽에서 육체미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5. 여담
일본에서 영능력자로 유명하기도 하다. 스피리츄얼 카운셀링 프로인 오라의 샘[7] 에서 무속인 에하라 히로유키 TOKIO의 고쿠분 타이치와 함께 방송을 진행했다.
한 때 휴대폰 대기화면을 미와 아키히로의 사진으로 설정하면 애인이 생긴다라는 도시전설이 있었으나, 본인 스스로가 “'''쓸데없는 헛소리 하지 말라'''”며 한 방에 부정했다.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과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은 인물인지라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아베와 자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먼저 전쟁터로 나가야 한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1] 당시 건설업 종사자를 비하하는 단어('''도카타''' 등)가 들어가 있었다고 논란이 되어 정작 TV나 라디오에는 방송되지 못했다.[2] 극작가 테라야마 슈지가 순전히 미와 아키히로를 위해서 쓴 작품으로 일본 연극계에서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의 작품으로 회자된다. 1967년을 시작으로 2016년 현재까지도 상연이 계속되고 있으며, 미와 아키히로는 주연뿐만 아니라 연출, 미술까지도 담당하고 있다. [3] 원작은 아케치 코고로가 나오는 추리소설이지만 미시마 유키오는 탐미주의를 담아서 온갖 에로신으로 가득하고 추리는 뒷전인 영화를 만들어놨다. 그래서 미와 아키히로의 연기는 전설이 되었지만 영화의 평은 그저 그렇다. 심한 평 중에는 미시마 유키오가 미와에게 야한 짓을 시키고 싶어서 만든 영화라는 소리까지 나온다.[4] 출연한 이유가 "'''미와 아키히로와 키스하고 싶어서'''"였다나...[5] 아래 리스트에는 영화나 드라마 리스트가 많은데 사실 미와 아키히로가 정말로 인정을 받는 예술 분야는 연극이다.[6] 교토 쿠라마데라에서 살며 샤나오라고 불리던 어린 시절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히에이 산의 텐구에게서 병법을 배웠다는 전설에서 등장하는 인물이다. 작중에서는 추격군을 도술로 바람을 일으켜 내쫓는 등 병법가라기보다는 도사에 가까운 이미지로 등장한다.[7] 연예 문화 스포츠관련 인물들이 게스트로 출연하여 에하라가 오라의 색으로 성격을 알아맞추거나 전생을 알려주거나 수호령에 대해 알려주며 현재의 어려움을 헤쳐나갈 방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나름 치유계 버라이어티 방송으로, 한동안 스피리츄얼 붐의 중심에 있기도 했다. 2008년 종영. 이 방송에서 미와는 나름대로 명언을 많이 남겼는데, 한국과 중국은 일본처럼 서양 문물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지 않아서 사람들이 진중하고 예절바르지만, 일본은 서양의 슬럼 문화도 함께 받아들여 슬럼화가 진행되어 문란해졌다고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물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외국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들이 매우 피상적이고 한정적임을 고려하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무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