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타니 히사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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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치 드래곤스 시절(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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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청룡 코치 시절
1. 인물 개요
2. 현역 시절
3. 지도자 시절
4. 이후


1. 인물 개요


水谷 寿伸(1941.1.3~ )
일본 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현역 시절 포지션은 투수. 신장은 177cm. 우투우타.
본명은 미즈타니 노부히사(水谷 伸久) 였으나, 1964년 히사노부로 개명했다.[1]

2. 현역 시절


1941년 일본 아이치나고야 시 태생으로 아이치 상고를 졸업하고 1959년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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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시절의 야구카드
입단 직후에 오른쪽 어깨 통증으로 오랫동안 등판하지 못하고, 그저 배팅볼 투수를 전전하면서 후보선수로 있었으나 7년차인 1965년부터 실력이 만개하면서 활약을 보였다. 이해 15승, 1966년 10승으로 2시즌 연속 두 자리수 승수를 올리며 나름 활약을 보였고, 1971년, 1972년엔 올스타전 출장 경력도 있다[2]. 이당시 일본도 투수분업이 없었던 때라서 선발, 중간계투를 가리지 않으면서 던졌으나 속도로 승부하는 파이어볼러가 아니라 변화구(주 무기는 슬라이더)의 각도로 승부하는 기교파 선수였다 . 사실 일본 팬들의 평가로는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셋업맨으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선수로 꼽힌다.
1974년 시즌[3]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으며 14시즌 동안 423경기에 출장하여 71승 75패, 평균자책 3.04의 통산 성적을 남겼다.
일본웹의 게시판들에 쓴 올드팬들의 글을 읽어보면 성격이 매우 상냥하고 온화했다고 하며 [4], 이 때문에 한국에 코치로 왔을 때 불같은 성격의 김동엽 감독과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3. 지도자 시절


이 후 미즈타니는 1975~1976년 나고야TV 에서 해설가로 일하다가 1977년 주니치의 공식 기록원으로 채용되어 약 2년간 근무했다. 1979년 주니치 기록원을 그만두고 다시 나고야TV 해설가로 복귀했다가 1981년 주니치 2군 투수 코치로 현장에 복귀, 1985년까지 코치직을 수행했다.
미즈타니의 이름이 한국 야구팬들에게 알려진 계기는 1986년 MBC 청룡의 투수 코치로 영입되면서부터이다. 당시 주니치와 자매 결연을 맺고 있던 MBC가 주니치에 코치 파견을 요청하였고 이에 주니치가 보낸 인물이 2군 투코였던 미즈타니. 미즈타니는 연봉 4000만원에 MBC와 계약했다. 계약금은 첫해에는 없고 1987년 재계약 때 보너스조로 1400 만원 (+연봉 4000)을 받았다. 24승 투수인 선동열이 연봉 4000만원(1986년)을 받았던 때고, 10승투수 문희수가 1400만원을 받던 때이며, 우승감독이었던 김응룡이 3500만원을 받았을 때니, 미즈타니는 현재로 치면 거의 10억원 가까운 연봉을 받는 셈이었으며, 한국 지도자들의 시샘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사실 이당시에도 일본인 코치가 없는 것은 아니라서, 롯데에는 유명한 도위창 코치, OB베어스에는 사노 요시유키(佐野嘉幸) 코치가 있었다. 다만 도위창 코치는 한국에 워낙 잘 적응해서 한국야구인들이 그다지 반발이 없었고, 사노 코치는 1986년에만 OB에 머물렀기 때문에 그다지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다만 미즈타니는 워낙 구단의 신임을 받아 입김이 쎘던지라 언론의 주목을 받고, 한국 야구인들의 시샘을 받기 딱 좋은 위치였다.
그는 김동엽 감독 휘하에서 야수로 입단한 신인 김건우에이스급 투수로 키웠고, 유망주이던 김용수를 붙박이 마무리 투수로 육성하는 등 성과를 보였다 당시 경향신문 (1986년 2월 26일자)의 보도에 의하면 김동엽 감독이 "미즈타니 코치는 선수관리 훈련계획에 있어서 합리주의를 제일로 한다"고 극찬하며 그를 "친동생처럼 보살핀다"며 전폭적인 신임을 준 것처럼 말했지만, 이건 완전 언플일듯. 김동엽 자신이 스파르타 훈련 지상주의자이기 때문에 미즈타니가 선호하는 미국식 훈련을 좋게 보았을 리 없다. 이 보도를 본다면, 1987년 김동엽이 부진한 성적을 거두자 미즈타니가 실질적인 감독노릇을 했다는 그간의 야구계 통설과는 달리 ''' 한국에 온 직후인 1986년부터 동계훈련을 지휘하는 등, 미즈타니가 이때부터 사실상의 MBC 감독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MBC 구단 수뇌부와 프런트 측은 자기관리에 문제점을 보이는 김동엽에 대한 신임도는 낮았고, 사실상 김동엽을 바지사장으로 앉히고 미즈타니를 실질적인 감독을 시키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5]
이렇게 미즈타니는 김동엽을 못미더워 하던 구단 수뇌부에 의해 투수 육성은 물론 감독의 고유 권한인 투수 기용권을 비롯한 선수단 전체 운영권한을 얻으면서 야구계 안팎으로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심지어 "김동엽은 허수아비고 사실상 미즈타니가 MBC의 감독" 이란 소문이 퍼졌는데 이는 김동엽이 시즌 도중에 경기 시작 30분 전에야 운동장에 도착해서는 허둥지둥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식사를 하며 주변의 기자에게 무심코 "오늘 우리 선발투수 누구래?" 라고 묻는 장면이 심심찮게 보이는 통에 고개를 든 소문이었다. 실제로 김동엽이 1987년 시즌 중도해임 당하고 유백만 수석 코치가 감독대행이 되었음에도 MBC는 미즈타니 에게 계속 선수단 운영권을 부여했다. 수도 서울의 연고팀이 일본인 코치 한명에 휘둘린다는 소문은 국내 야구인들은 물론 야구팬들의 자존심과 민족적 감정이 허락치 않는 일이었고, 언론에서도 미즈타니에 대해 "2군 코치나 하던 듣보잡이 팀을 독단적으로 막 쥐고 흔든다" 는 악의성 보도가 나올 정도로[6] 그에 대한 여론은 상당히 안좋았다. [7]
한편으로 직접 미즈타니와 같이 활동한 MBC의 선수와 프런트는 대부분 주변의 여론을 무색케 하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예를 들어보자면,
  • 배수희(당시 MBC 프런트)[8] : 투수들의 투구내용과 상대 타자들의 타구 방향을 차트화 할 때 미즈타니는 투구수와 안타를 맞은 내용빨간색으로 기입하도록 지시하였다. 다른 건 몰라도 투수의 투구수와 안타를 때린 상대 타자를 한눈에 파악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그리고 한계 투구수란 개념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선보인 인물이기도 하다. 시즌 중 선발 등판한 오영일이 3회까지 무실점으로 호투하고 있었는데 미즈타니가 "오영일은 한계 투구수 50개를 넘겼으니 바꿔야 한다" 며 김동엽 감독에게 건의했고 감독은 물론 코칭스탭 모두 "잘 던지고 있는 투수를 갑자기 바꾸라니 무슨 소리냐" 는 반응이었다. 어느 날은 미즈타니가 자신의 수첩을 보여 줬는데 동계훈련 때 부터 파악한 우리 팀 투수들의 한계 투구수가 줄줄이 적혀 있었다.
  • 김건우 : 설령 다른 사람들이 미즈타니를 나쁘게 말할 지 몰라도 나는 그를 욕할 입장이 아니다. 나를 완투형 투수로 키워준 분이 미즈타니 였으니까. 그리고 그는 투수들의 심리를 이용할 줄 아는 지도자였다.
  • 김재박 : 기존의 국내 코치들과는 지도하는 스타일이 달랐다. 지금도 그를 좋은 코치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미즈타니가 오기 직전 시즌인 1985년 신인으로 9승을 거두었던 주축 투수 정삼흠은 직설적이고 팔팔한 성격 탓에 미즈타니와 충돌하면서 1986년 한해 벤치를 데우기도 했지만, 이듬해부터는 감정을 풀고 서로 신뢰하는 사이로 돌아서기도 했다.
사실 미즈타니는 언론에서 씹어대던 것과 달리 일본에서 전혀 이름이 없는 야구인은 아니었다. 위에 얘기했듯 현역 시절 어느정도 활약도 있었으며, 단지 미국식 야구를 신봉했기 때문에 일본 야구계에서 '''이단아'''로 몰려 따돌림 당하던 입장이었다.

4. 이후


미즈타니는 1987년 까지 MBC 코치로 일하다가 시즌 종료 후 일본으로 돌아갔고, 1993~1994년 주니치 코치 직을 수행한 것 외엔 현재까지 주니치 스포츠 등의 해설가로 활동 중이다.
[1] MBC 청룡 코치 시절 한국 내에서는 어째서인지 노부히사로 통했다. 당시 등록명도 옛날 이름의 한자를 한국발음으로 읽은 '신구'였다. 당시 코치가 일본이름을 그대로 유니폼에 표기하고 관중앞에 나온다는 것이 상당히 힘들 정도로 반일정서가 심했기 때문일 듯. 롯데 자이언츠의 도위창도 일본이름 도이 쇼스케를 등록명으로 그대로 쓰지 못했을 정도였다.[2] 1971년 올스타전 1차전에서 센트럴 리그가 합작 노히트 노런 승리를 거둘 때 4번째 투수로 등판했다.[3] 이 해 주니치는 당시 기준으로 20년 만에 센트럴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4] 전 버전에는 괴팍했다고 하는 기술이 있었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다만 MBC에 부임했을 때 김동엽식의 스파르타야구는 강력하게 반대한 것으로 보인다. 그당시는 줄빠따가 기본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런 것을 강력히 제지한 사람은 한국인의 눈에 오히려 괴팍하게 보였을 듯. 당시 일본야구도 근성론, 혹사, 구타와 체벌이 활성화되던 시절이라(아직도 이 시절 야구관을 고수하는게 김성근)이런 것을 고스란히 겪었을 미즈타니란 사람 자체가 보통 천사표가 아닌듯 하다. [5] 이렇게 외국인에 대한 내국인 지도자의 텃세는 축구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보다 훨씬 이후인 1991년에 데트마어 크라머를 기술고문이라는 어정쩡한 이름으로 데려왔다. 1995년에 부임한 비쇼베츠도 처음에 감독이 아니라 기술고문이라는 어정쩡한 이름으로 데려온 것이다. [6] 예를 들어서 한 기레기는 미즈타니의 친정팀 주니치와 다른 리그인 퍼시픽 리그에서만 선수생활을 했고, 미즈타니의 전성기 시절만 해도 일본어가 서툴렀던 백인천이 미즈타니를 몰랐다는 것을 근거로 그를 듣보잡으로 주작할 정도였다(...)[7] 비교적 최근인 2012년에도일부 언론은 내국인 코치보다 고연봉을 받는 일본인 코치 채용에 시비를 걸 정도로 비판적이다. # [8] MBC 청룡의 원년 멤버로 입단했으나 한 시즌 만에 은퇴하고 프런트로 전향했으며, 뒤에 LG, 한화 코치를 역임했다. 일본어에 능하여 미즈타니가 왔을 때 통역을 맡은 것은 물론 친밀한 사이를 유지했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그를 배즈타니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