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삼흠
1. 소개
前 KBO 리그 선수. 포지션은 투수. 야간 경기에 강해서 "부엉이"라는 별명이 있다. 안경 쓴 게 부엉이 닮았다고 붙여졌다는 말도 있는데 나름 닮았다.
LG 트윈스가 "신바람 야구"를 이끌며 승승장구하던 1990년대의 에이스로, 뒤늦게 터진 김태원, 신인 이상훈[2] , 소방수 김용수[3] 와 함께 LG의 마운드를 이끌었다. 최고 145km/h 내외의 빠른 패스트볼을 던질 수 있었지만 사실 평균구속은 138km/h 전후, 본인이 인터뷰에서 신문 기록지에 그날의 최고구속을 위해[4] 서 주자없을때 있는 힘껏 패대기를 치면 144나 145 정도가 나와서 그렇게 한다고 했다. 전성기 때에는 체인지 오브 페이스를 적절하게 구사하면서 완급 조절에도 능한 모습을 보였다.
특유의 심리전과 체인지 오브 페이스 덕분에 90년대의 두뇌파 에이스 하면 빠질 수 없는 투수이기도 하다. 장호연-양상문 이후 KBO 아이큐 피쳐의 대표주자.[5]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지금은 야구부가 존재하지 않는 명지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6] 문제는 명지고 야구부가 당시 고등학교 야구부들 중에서는 약체였다는 것. 그래서 고려대학교(경제학과 1981학번,중퇴)로 진학하고 난 뒤 투타를 오가며 열심히 뛰었음에도 선동열-안언학-한영준 등의 더 힘세고 강했던 유망주급 동기들에 묻혔다. (..)[7]
거기다 이미 들어와 있던 선배들, 그리고 그 뒤로 들어오는 후배들에게도 치이던 정삼흠은 팔꿈치 부상으로 신음해야 했고, 이것은 정삼흠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정삼흠은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중퇴하고 1984년 일종의 파견 형식으로 한국실업야구 팀 포항제철에 입단해 실업 신인왕을 수상하고 1985년 드래프트에서 MBC 청룡에 입단하게 된다.
2.2. MBC 청룡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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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해에 선발과 계투를 겸업한 정삼흠은 무려 192이닝을 소화한다. 이 후유증 때문인지 2년차에는 부진했고, 3년차인 1987년부터 다시 선발투수로 자리를 잡는다. 고려대 동기인 선동열과의 취중 대결도 이 때 벌어졌는데, 1987년 9월 2일 경기를 앞두고 둘이서 술을 왕창 마신 다음[8] 취한 상태로 등판. 그리고 그 결과 정삼흠은 7이닝 5실점으로 패전 투수가 되고, 선동열은 완봉승 (..) '''“새벽까지 아무리 먹여도 다음 날 보면 싱싱하니, 결국 나만 망가졌지 뭐.”'''- 정삼흠의 회고#[9]
1988년 시즌 종료 후 새로 취임한 배성서 감독이 강압적인 스파르타 훈련을 강행하자[10] 이에 반발해서 '''여기가 공산당입니까?'''라는 공개 발언으로 항명하기도 했다.[11] 이런 하극상 때문에 1989년은 시즌 후반부가 되어서야 겨우 출장했을 정도로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였다. 배성서 감독은 선수단과의 갈등과 성적 부진으로 시즌 종료 후 백인천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다만, 1989년 9월 24일 열린 해태 타이거즈와의 동대문 더블헤더 2차전에서 세이브를 거뒀는데, 당시 선발승을 거뒀던 김태원은 이 날 열린 동대문야구장 마지막 프로야구 경기의 승리투수가 됐다.
2.3. LG 트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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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MBC 청룡을 인수한 럭키금성은 팀을 "LG 트윈스"로 바꾸었고, 백인천이 선수들의 지지를 받으며 첫 감독이 되었다. 백인천은 정삼흠에게 고정 마무리 투수 자리를 주었고, 8승 23세이브를 거두며 기대에 보답했다. 그리고 첫 한국시리즈에서도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2차전(연장 끝에 10회말 밀어내기승)을 제외한 나머지 3경기에서 마무리 투수로 등판했다.[12] 마지막 4차전에서 삼성의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잡고 우승의 순간을 마운드에서 함께 했던 것도 정삼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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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정삼흠, 노찬엽, 김용수, 김상훈
그 후 1991년부터 1994년까지 4년 연속으로 두자릿수 승수를 거두며 선발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했다.
1995년 163이닝에 8승9패에 3.81의 방어율로 스탯이 하락했다. 전반기에는 다소 부진하다가 후반기에 페이스가 돌아왔지만 유독 그가 나오는 날에 득점지원이 적었다.[13] 그래도 롯데와의 플레이오프에서 LG는 2승4패로 탈락했지만 그가 선발등판한 2경기에서는 모두 이겼다.[14][15] 1996년에는 4월 28일 광주 해태전에서 통산 6번째로 100승을 달성했다. 이상훈이 척추분리증으로 이탈하고 김기범이 부진에 빠진 가운데 1선발 역할을 하며 김태원과 함께 무너진 선발진을 이끌었다. 올스타브레이크 전 전반기 8승5패를 올리며 1선발 역할을 충실하게 했지만 후반기에는 승리 없이 3패만을 떠안았고 그 해를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 현역 마지막 승리경기는 1996년 7월 14일 잠실 해태전으로 해태의 에이스 이대진을 상대로 승리투수가 됐다.
후문으로는 사실 2-3년 더 뛸수 있었는데, 이후의 감독직을 노리고 코치경력을 쌓기 위해 일찍 은퇴했다고 한다. 코치를 거부하고 현역을 연장하려던 김용수와는 대조적인 부분이다.
통산 성적은 12시즌 106승 121패 47세이브 1,894.2이닝 ERA 3.62 50완투 11완봉승.
노송 김용수가 워낙 대단해서 그렇지 정삼흠도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맹활약했고 2번의 우승을 견인한 핵심 멤버였다.
LG 최전성기의 대표 투수진이었던 김용수, 이상훈, 김태원, 정삼흠 4인방[16] 중 한 명.
특이한 점으로 포스트시즌이나 잠실 라이벌 OB, 당대 최강팀 해태에게 강했지만 이상하게도 태평양, 쌍방울, 빙그레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패전이 많았다.
3. 지도자 경력
현역에서 깨끗하게 물러난 정삼흠에게 LG 트윈스는 코치직을 제안했고, 정삼흠은 이를 수락했다. 하지만 트윈스가 기대한 만큼의 실적을 내지 못한 채 LG를 떠나게 되었다.[17] 당시 외야수로 잘 뛰던 심재학에게 투수 전향을 꼬드겨서 커리어를 망친 것(?)도 코치 정삼흠이다![18] 물론 천보성감독의 지시가 있긴 했지만. 심재학 항목 참조.
2004년에는 SUPER ACTION에서 일본프로야구 해설을 하기도 했으며, 이후 신일고, 부천고 감독을 지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선수 스카우트와 관련한 비리 문제로 구속되었던 일로 인해 사실상 지도자로 다시 서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2012년 12월 현재 성남 분당구 야탑동의 한 야구교습센터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포착되었다.
2016년 10월 현재 중국야구리그 장쑤(江蘇) 천마팀에서 총괄코치로 활동 중이며 내년에 4년 정식계약을 체결하기로 되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2017년 5월 초 팀 운영과 성적을 둘러싼 장쑤성 측과의 시각차가 주요 원인으로 인해 퇴임했다.
2020년 현재 성남시 SB리그 토요 루키팀에서 뛰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4. 연도별 주요 성적
[1] 경제학과 1981학번,1983년 까지 이후 중퇴[2] 두 선수와의 공통점이 있다면 LG시절 장발로 마운드에 등장했던 적이 있었다.[3] 1990년 우승당시에는 김용수가 선발, 정삼흠이 마무리였다. 한국시리즈 4차전 마지막을 삼진으로 잡고 포효한 것도 정삼흠[4] 그 당시 스포츠 신문 기록지들은 승패와 최고구속 얼마를 같이 적어주곤 했다.[5] 기자들과 훌라를 쳤는데 계속 이기자 기자들이 서로 짜고 쳤는데, 거기서도 이기자 기자들이 두뇌파라는 별명을 붙여줬다는 일화가 있다(...)[6] 보통 한국프로야구 선수들이 초~중학교 때부터 야구에만 몰두하는 점을 생각해 보면, 정삼흠의 경우는 대단히 늦은 편이다.[7] 나중에 정삼흠이 프로에서 나름 활약하자, 고려대학교 고위 관계자가 야구팀 코칭스텝에 "저런 재목감을 왜 4년간 썩힌거냐?"며 아쉬워했다는 후문이 전해진다.[8] MBC 청룡 감독이 선동열의 컨디션을 영 좋지 않게 만드려고 지시했다고 하는 소문도 있다. 그러나 인과 관계가 제대로 확인된 건 아니니, 설레발은 금물.[9] 그런데 다른 말로는 정삼흠이 7이닝 2실점을 했다거나 5실점 완투패를 했다거나 심하게는 조기강판을 당했다고도 한다. 서로 음주등판을 자주 한 듯? 그러나 상대편인 선동열에 대한 증언은 9이닝 완봉승. 딱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10] 참고로 배성서 감독은 이현세의 만화 외인구단에 나오는 캐릭터인 손병호 감독의 실제 모델이다.[11]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이견이 있는데, 김재박, 이광은, 신언호 등 고참 선수들이 배성서 감독의 강압적인 훈련을 꺼려했고, 당시 주장이던 김재박은 배성서가 자신의 대학 시절 스승이었기 때문에 직접 나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서 신진급인 만만한 정삼흠을 사주하여 항명 사태를 일으켰다는 카더라도 있다.[12] 한국시리즈 1차전은 팀이 크게 이기고 있는 상황에 경기감각을 익히는 차원에서 등판한것이다.[13] 후반기에는 이광환 감독의 3일휴식 4인선발등판간격이라는 무리한 운영도 원인이었다.[14] 이상훈이 나온 2경기에서 패배한 것이 탈락의 원인이었다.[15] 이상훈이 나온 경기도 이겼으면 한국시리즈에 올라갔고 우승했을지도 모른다.[16] 90년에는 김기범이 힘을 보탰고, 94년 우승에는 인현배가 있었다. 다만 위의 네명은 확고부동한 에이스 급들[17] 2003년 김재현이 음주측정 거부로 입건 되었을때 김재현의 차량에 같이 동승했었는데, 이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서 시즌 후 잘렸다.[18] 커리어를 망쳤다는건 지나친 비약이다. 당시 심재학은 분명 기대치만큼 성적을 내지 못했고 그 이후에도 많은 팀으로 트레이드를 당했다. 심재학은 고교시절까지 투수경험이 있었으며 타자로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길게 억지로 투수생활을 한 것도 아니었다. 김광삼처럼 계속 투타를 왔다갔다 한 것도 아니었다. 2020년 현재 백승현이 팀의 권유로 유격수에서 투수로 전향중인데 이런 일은 자기 포지션에서 성적을 내지 못하는 선수에게 심심치않게 종종 일어난다. 심재학의 경우 부진한 시절 잠시 투수를 했다가 다시 타자로 돌아와 꽤나 나중에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기 때문에 커리어를 망쳤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