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 9세
1. 전반적인 생애
세니갈리아 출신으로, 베드로를 제외한 역대 교황 중에서 최장기로 재임하였으며(31년 7개월 23일) 1천년 이상 존속한 교황령을 지배한 마지막 교황이기도 하다. 그가 오랫동안 교황좌에 있었다는 건, 그만큼 다른 교황들에 비해 여러 시련에 맞닥뜨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주의와 끊임없는 투쟁을 벌였으며, 이 때문에 반동적인 교황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여 이후로 교회가 한동안 보수반동적인 자세를 견지하게끔 한 교황이기도 하였다.
2. 재위기간
2.1. 자유주의에서 보수주의로
초기에는 자유주의자로 간주되어 자유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에게 지지를 받았으나, 보수 반동적인 정책 및 반이탈리아 정책으로 민심을 잃었다. 초기의 교황은 분명 전임들에 비해 자유주의적이었는데, 전임 교황들의 보수적인 법을 폐지하고 교황령에 철도와 가스등을 설치했으며, 교황령에 헌법을 승인하고 의회를 설치하기까지 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교황이 이탈리아 통일 운동을 지지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그 역시 교황청의 근본적인 보수성에서 완전히 탈피하진 못했다. 이는 이탈리아 통일전쟁이 시작되면서 분명해졌는데, 당시의 통일 세력들은 북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를 침략자로 규정하고, 이 전쟁을 '침략자를 몰아내는 성전'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이는 가톨릭 국가가 가톨릭 국가를 공격한다는 점에서 성전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교황령의 존재가 이탈리아 통일의 장애물이었다는 것이다. 통일 세력들은 결국 로마를 점령하고 교황의 거의 대부분의 세속 영토를 박탈할 것이었다. 결국 교황은 1848년 4월에 이탈리아 통일을 반대한다는 훈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1848년 혁명기에는 로마에서도 봉기가 일어나, 교황은 도피하였다가 오스트리아 군대의 도움을 받아 귀환해야 했다. 이후 교황의 반동정책은 더욱 강고해지고 분명해졌다.
1858년 반유대주의가 강한 가운데, 교황령인 볼로냐 시에 살던 유대교 가문인 모르타라 가에서 일하던 가톨릭 신자 하녀가 모르타라 가의 아이인 에두가르도에게 몰래 세례성사를 주었다는 진술을 하였다. 이에 교황청 경찰은 아이를 가족에게서 떼어내어 교황에게 데려왔다. 사실 그 당시 교황령의 법으로 비 기독교 신자(= 유대인)가 그리스도교 신자를 양육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기는 했다고 하지만, 애초에 이 세례가 아이의 부모 등 양육자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전혀 변명거리가 될 만한 내용이 아니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아이의 친부모는 본 적도 없고, 친부모 동의란에는 전혀 엉뚱한 사람의 도장이 찍혀있는 입양 서류를 근거로 멀쩡한 남의 집 애를 뺏어가는 것과 비슷한 수준. 게다가 한 가지 웃긴 것은, 가톨릭 신자가 유대교 집안에서 하녀나 하인으로 일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하녀가 세례성사를 준 이유도 꼭 투철한 신앙심에서 기인했다기 보다는,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의 하녀가 '세례를 받지 못한 아기는 죽은 뒤 천국에 못 간다'라는 교리를 믿고 세례를 준 것.[2]
교황은 아이를 돌려달라는 가족 및 각국의 탄원을 외면한 채 "세례를 받은 아이를 유대교도 가정에 맡길 수 없다"고 하였고, 교황궁에서 길러 사제로 키웠다.사건 이듬해인 1859년에 이탈리아 내 유대계 대표자들이 교황과 면담을 가졌는데, 비오 9세는 이들에게 '세계가 뭐라고 생각하든지 나는 신경쓰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고, 이후 주세페 코헨이라는 아이에게 이러한 일이 다시 발생하자 더 많은 신망을 잃게 되었다. 이는 유럽은 물론 미국에까지 반가톨릭 여론을 조성하였다. 다만 유럽 내에서는 가톨릭 신자들과 반유대인 편견도 많아 비난 여론이 약화되었고, 미국에서는 아직 남북전쟁 이전이라 부모에게서 강제로 떼어내진 노예 아동들의 매매가 지속되어서 정부가 이 사건을 비난하기 어려웠다. 대대적 비난은 프로이센이나 영국 등 비 가톨릭 국가들에서 이루어졌다. 다만 정작 당사자인 에두가르도 모르타라 신부는 후일 "부모님은 나에게 집으로 돌아가자며 눈물로 호소하고 회유했으나, 내가 초자연적 은총의 힘을 목격했다는 사실 외에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실낱같은 욕망도 보이지 않았다."라고 회고하였다.[3][4]
2.2. 교황령의 상실
모르타라 사건에서 교황청 경찰력이 발동되었듯, 교황은 당시까지 교황령에서 세속적 권한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 민족주의 바람이 불면서 통일 전쟁이 발발, 교황령이 상실될 위기에 처했다.
비오 9세는 처음에는 프랑스의 손을 빌렸다. 다행이 루이 나폴레옹[5] 이 그를 도와주었다. 프랑스는 민중 봉기가 일어난 로마에서 비오 9세가 도피하도록 도와줬으며,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끌던 로마를 재점령하는 데에 성공했다. 비오 9세는 1850년에 바티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6] 하지만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 견제 차원에서 이탈리아 통일을 지지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고, 그 덕에 북이탈리아의 대부분이 사르데냐 왕국에 통일되어 버린다. 하지만 여기서 이탈리아라는 거대 세력의 등장을 경계한 나폴레옹 3세가 제동을 걸어 교황령은 무사할 수 있었다.
이후 이탈리아 통일 운동은 지속되어 1861년에 이탈리아 왕국이 선포되었고 교황은 로마를 제외한 모든 교황령을 무력하게 잃었다. 가톨릭 국가에서 소집된 국제의용군 수준이었던 교황군은 근대 국가의 군대를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로마만은 아직 교황의 손에 있었다. 이탈리아의 재상이자 통일 운동의 주역었던 카보우르는 교황령과 로마의 독립을 지지하는 쪽이었으나 이는 이탈리아 국민들의 거센 반대에 직면했다. 비오 9세는 1864년에 '오류 목록'이 첨부된 회칙을 발표했는데, 이 '오류 목록'은 진보, 자유주의를 조목조목 비판하는 반동적인 논조로 가득하여 교황령 외의 성직자들조차 이를 비판하는 정도였다. 이미 교황령의 보전은 교황령 외의 성직자들에게서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는 교황령의 반동적인 논조가 가톨릭 교회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교황령 외의 성직자들의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오 9세는 이를 무시하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어 교황무류성을 승인했다.[7]
프랑스 제2제국이 보불전쟁에서 패하자 로마를 보호할 마지막 수단은 사라졌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비오 9세에게 협력을 구하는 마지막 서한을 보냈지만 비오 9세는 무력에서만 굴복할 것이고, 그 후에도 형식적으로라도 저항하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1870년 9월 20일에 이탈리아군이 로마에 입성하면서 이탈리아 왕국은 교황령을 멸망시켰다. 이탈리아 왕국은 로마를 점유하는 대신 교황청을 존속시키고 교황에게 매년 보상금을 주며, 이탈리아의 주교 서임권을 교황에게 양도했다. 하지만 비오 9세는 스스로를 '십자가에 매달린 주님의 목자'로 선언했고, 가톨릭 교도들에게 이탈리아 왕국의 정치 참여를 금지했으며, 이탈리아 왕가를 파문했다. 비오 9세는 바티칸에 칩거하며 마지막 7년 반을 보냈으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죽었을 때는 마지막 성찬례를 받을 수 있도록 파문을 해제해 주었다.
2.3.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자유주의와 진보주의, 공산주의에 대해 극도의 혐오를 표출하던 교황은 이미 수차례에 걸쳐 이들을 비난한 바 있었고, 주교들에게 '오류 목록'을 보내 이러한 사조를 단속할 것을 명하기도 했다. 이는 교회내의 자유주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런 성향은 1869년 개최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교황은 여기서 신학적 면에서의 교황의 무류성을 선언하고자 했다. 이것은 프랑스의 자유주의적 추기경 뒤팡류나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 될링거, 영국의 가톨릭 귀족이자 학자이던 액턴 경 등의 반대를 불렀으나 교황은 이를 강행했다. 알프스 이북 출신 주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알프스 이남의 주교들은 교황권 옹호 여론이 강했기에(울트라몬타니즘), 결국 다수가 참석했던 이들에 의해 교황무류성이 교리로 인정받았고, 교황은 이를 이용해 성모무염시태를 선언하면서 성모 마리아의 권위와 더불어 교황의 권력을 신장시켰다. 그밖에도 공의회에서 교황과 보수파들을 중심으로 진보사조에 대한 단죄 또한 이루어졌다. 이렇게 진행되던 공의회는 이탈리아군의 로마 점령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이런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론에 반발한 독일 등의 알프스 이북의 개혁적 성향의 가톨릭 세력이 가톨릭 교회에서 떨어져 나갔는데, 그것이 바로 구 가톨릭교회이다.(…)
2.4. 일본 26위 성인의 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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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의 일본 천주교 박해[8] 때 나가사키에서 십자가형을 당한 순교자들을 비오 9세가 시성했다. 20세기 이후에는 성공회에서도 이들을 기념하고 있다.
3. 개인적인 면모
'''역대 교황 가운데서 처음으로 사진을 찍은 교황으로''', 주변의 추기경들은 사진찍는 것을 몹시 싫어하였지만,[9][10] 비오 9세는 사진 찍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사적으로는 검소한 사람으로 사치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또한 아이들을 많이 귀여워했는데, 납치했던 유대인 아이 에두아르도도 귀여워하며 친히 키웠다. 에두아르도는 교황의 애정을 받으면서 성장해 사제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개인적 면모가 아동 납치를 정당화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비오 9세는 유괴와 같은 흉악범죄를 자행한 부도덕하고 반사회적인 인간이며, 납치해 온 아이를 귀여워하며 직접 키웠다는 것은 그저 유괴의 목적이 '양육'이었음을 의미할 뿐이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심이 강한 사람이기도 했는데, 이는 그가 성모무염시태 교리를 선포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여겨진다. 몸이 허약하여 어릴 때부터 성모신심이 강했다고 한다.
통일 이후 바티칸의 수인을 자처하며 자신의 불행을 호소하는 교황의 모습은 독실하고 보수적인 신자들에게 안타까움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대세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4. 선종
30년 넘게 재위하면서 이탈리아와 대립각을 세우던 비오 9세는 1878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파문을 해제하는 대인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1달 후인 1878년 2월 7일, 묵주기도 도중 심장마비로 85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유언은 "나의 사랑하는 교회를 부디 거룩하게 잘 지켜주십시오"였다. 유해는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무덤에 안장되었다가 3년 뒤인 1881년 7월 13일에 산 로렌초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는데, 비오 9세에 반대하던 과격파 폭도들이 이장 행렬에서 교황의 관을 탈취해 테베레 강에 던지려고 했다가 사태를 알고 출동한 민병대에 의해 진정되어 사후의 수난을 모면했다.
교황청에서는 비오 9세에 대한 시복 절차에 들어갔지만 그와 악연이 깊었던 이탈리아 정부가 교황 선종 이후 1백년 넘도록 시복을 집요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1985년 7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탈리아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복자의 전 단계인 가경자로 선포했으며, 프랑스의 한 수녀가 치유된 것이 비오 9세의 전구에 의한 기적으로 인정됨에 따라 2000년 9월 3일 교황 요한 23세와 함께 시복되었다.
[1] 복자이며 교황이었기 때문에, 교회법에 따라 공적인 축일은 로마 교구에서만 지낼 수 있다.[2] 원칙적으로 세례는 사제가 줘야 하긴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성삼위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라면 평신도나 이단자, 심지어는 이교도가 준 세례라도 유효하다[3] 물론 공정하게 말한다면 당사자 역시 유괴당한 후 유괴 주도세력에 의해 양육되며 사실상 세뇌당한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해있던 피해자로써 정상적인 판단을 기대하기 어려운 처지였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4] 게다가 가족에게 돌아간다면 할례부터 받아야 하며, 사실상 남남과 다를 바 없는 부모와 형제들에게 적응해야 하는 등 상당한 애로 사항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에두가르도는 이미 기독교 문화에 젖은 사람이다. 그리고 사제가 되면 좋고 설령 사제가 못 된다 하더라도 교황청과의 친분이 있어 범죄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일정의 출세는 보장된 셈이다. 반면, 유대인 가정으로 돌아가면,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사회적 신분이 하층민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과연 그렇게까지 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5] 이 때는 아직 황제가 되기 전이었다.[6] 이전까지의 교황들은 바티칸이 아니라 퀴리날레 궁에서 거주했지만, 이 때 비오 9세가 바티칸으로 들어간 후로 이후의 교황들은 바티칸에서 머물게 되었다.[7] 다만 교황무류성은 어디까지나 신앙과 도덕에만 국한되었다. 해외 성직자들의 압력에 의해 비오 9세도 어느 정도는 절충해야 했던 부분.[8] 급증하는 천주교 신자에 당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켰다.[9] 쥬세페 페치(Giuseppe Pecci) 추기경(교황 레오 13세의 형)은 사진 찍는 것을 몹시 싫어하여, "초상화를 그리는 것 만큼 인간의 내면을 잘 표현하는 것은 없는데 굳이 사진을 찍으려 하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렸다고 한다.[10] 다만 당시는 사진 찍는 기술이 막 시작된 단계라 지금처럼 금방 금방 찍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사진찍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려 사진 촬영이 고역이기도 했다. 게다가 초상화의 경우 당연히 뽀샵 처리가 행해진다. 높으신 분들 입장에서는 적당히 미화해주는 초상화가 더 좋았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