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내전

 

1. 개요
2. 역사
2.1. 공화정 시대의 내란
2.1.1. 배경
2.1.2. 동맹시 전쟁
2.1.3. 술라의 내전
2.1.4. 카틸리나 음모
2.1.6. 옥타비아누스의 내전
2.2. 제정 시대의 내란
2.2.1. 네 황제의 해
2.2.2. 다섯 황제의 해
2.2.4. 사두정치의 예정된 결렬과 연이은 내전
2.3.3. 슬라브인 토마스의 난
2.3.4. 레온 토르니키오스의 난


1. 개요


로마 공화정제정 시대의 국가 운영 방식, 혹은 제위를 둘러싸고 일어난 각종 내전들을 다루는 항목.

2. 역사



2.1. 공화정 시대의 내란



2.1.1. 배경


포에니 전쟁을 통해 강적 카르타고를 제압한 이후 로마는 지중해 전역의 패권자가 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문제점도 발생하는데, 바로 자영농이 붕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원로원 귀족층은 속주에서 얻은 광대한 토지를 이용하여 대농장[1]을 운영했고, 여기서 수확된 값싼 농작물이 이탈리아 본토로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가격 경쟁에서 밀린 자영농들은 몰락하기 시작한다. 로마 공화정 시기 자영농은 군역의 의무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영농의 몰락은 국방에 있어서도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이에 그라쿠스 형제를 비롯한 몇몇 세력들이 자영농을 보호하려는 시도를 펼치기도 했지만 기득권을 진 원로원에 의하여 무참히 진압당한다. 그라쿠스 형제 이후, 로마에서는 양당체제와 비슷한 정치구도가 성립되는데 하나는 귀족들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벌족파(혹은 원로원파), 다른 하나는 대중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는 평민파(혹은 민중파)이다. 공화정 시기[2] 로마에서 일어난 내란은 이 두 세력 간의 헤게모니 싸움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다.

2.1.2. 동맹시 전쟁


BC 90~ BC 88. 기원전 4세기 후반에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했지만, 형식상으로는 정복한 지역의 자치권을 부여했다. 물론 그냥 준 것은 아니고 조건이 있었는데, 로마와의 동맹을 체결[3], 유사시 병력지원, 세금 납부 등이었다. 이렇게 조직된 로마 동맹은 상당한 결속력을 발휘해서 포에니 전쟁 시기 로마가 한니발이라는 희대의 먼치킨에게 굴복하지 않고 끝내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속으로는 서서히 내분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됐던 것은 로마 시민권 부여문제였다. 이에 호민관 드루수스가 기원전 91년 이탈리아 전역의 동맹국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발의했지만 법안은 민회에서 부결됐으며 드루수스 역시 반대파에게 살해당한다.
이에 분노한 동맹국들은 로마 동맹에서 탈퇴하여 자신들만의 정치적 연합체인 이탈리아 공화국을 결성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로마에게 실력행사를 시작한다. 즉 과거의 동지끼리 칼을 맞댄 것이다. 전쟁은 전반적으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눈부신 전략을 앞세운 로마가 주도했지만, 내전은 로마에게도 썩 달가운 것이 아니었고 루키우스 술라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하던 루키우스 카이사르[4]가 동맹국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민회에서 통과시키면서 해소된다.

2.1.3. 술라의 내전


1차: BC 88~BC 87 / 2차: BC 82~BC 81.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등장한 이후 고대 로마에서는 장병들이 지휘관의 클리엔테스, 즉 피후원자[5]가 되는 일종의 사병(私兵)화가 이루어지고, 이러한 현상은 술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기원전 88년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이끄는 민중파가 자신의 군대 지휘권을 박탈하자 이에 격분한 술라는 자신들의 장병들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감행, 마리우스와 민중파를 국가의 적 으로 선포하고는 동방으로 원정을 떠난다.
그런데 술라가 원정을 떠나자마자 술라의 정치적 동지였던 킨나[6]가 술라의 통수를 때린다(...)[7] 이에 따라 마리우스가 다시 권력을 잡고 무시무시한 피의 복수를 단행하지만 이미 70세의 노인이었던 마리우스는 금방 사망하고, 킨나 역시 술라와의 내란을 대비하는 과정에서 뜬금없이 자신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한편 술라는 급선무였던 동방원정을 성공적으로 치룬뒤 기원전 82년 이탈리아에 상륙한다. 민중파 역시 술라에게 맞서려고 온갖 발버둥을 쳐봤지만, 술라는 당대 로마 최고의 명장이었으며 그 옆에는 폼페이우스크라수스, 루쿨루스 등 술라 뺨치는 인재들이 있었다. 결국 1년간의 전쟁 끝에 로마는 다시 술라의 손에 들어왔으며 6년 전 마리우스가 그랬듯이 술라 역시 피의 숙청을 감행하고는 독재관에 오르게 된다. 한편 마리우스와 킨나의 오른팔이었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이베리아 반도로 도망쳐서 10년 넘게 술라에게 저항했지만 결국은 폼페이우스에게 진압당하고 만다.

2.1.4. 카틸리나 음모


BC 62.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를 비롯한 일련의 [8] 반체제 인사들이 공화정을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몄지만, 애초에 음모 자체도 너무 엉성했던데다가 당시 집정관을 맡고 있던 키케로에게 딱 걸려서 일망타진당한다.[9]

2.1.5. 카이사르의 내전


BC 49~ BC 45. 로마의 내전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내전. 카이사르가 이끄는 민중파와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벌족파들이 로마의 국가 운영 방안을 놓고 격돌을 벌인 내전이다. 전력은 전반적으로 폼페이우스 측에 유리했지만 파르살루스 회전에서 카이사르가 한판승을 거두면서 폼페이우스 세력은 와해됐으며, 도피 중이던 폼페이우스가 이집트로 망명을 시도하다가 살해당하면서 사실상 종지부를 찍게 된다. 물론 폼페이우스 사후에도 카토나 폼페이우스의 맏아들 등이 폼페이우스의 세력권이었던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등지에도 계속 저항했지만 미미한 수준이었으며 카이사르에게 격파당한다. 기원전 45년 3월의 문다 전투를 끝으로 잔존 세력들마저 궤멸되었지만 그로부터 불과 1년 뒤에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면서 로마 정국은 다시 혼란으로 빠지게 된다.

2.1.6. 옥타비아누스의 내전


BC 32~ BC 30. 카이사르의 사후 후계자로 부상한 인물은 둘이 있었다. 하나는 유언장을 통하여 카이사르가 양자로 입적시킨 옥타비아누스, 다른 하나는 카이사르 생전 내내 카이사르의 최측근이자 부사령관으로 활동한 안토니우스. 카이사르의 암살 직후 양측은 카이사르의 암살 세력을 타도하기 위해서 삼두정치라는 정치적 동맹을 결성했지만, 물밑에서는 서로를 견제하기 위한 치열한 암투가 연이어 일어난다. 필리피 전투에서 카이사르 암살 세력을 궤멸한 이후, 양측은 로마 세력을 양분하여 옥타비아누스는 제국 서부를 안토니우스는 제국 동부를 담당하게 된다.
동부로 간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사랑 에 빠지게 되고, 연이어 거한 사고를 터뜨린다. 파르티아 원정을 감행했다가 실패한 데 이어서, 클레오파트라에게 로마 동부 영토 중 상당부분을 선물(...)해준다. 그것도 모자라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결혼을 한 데 이어, 아예 알렉산드리아에 독자적인 정부를 세울 움직임을 보이자 옥타비아누스가 조종하는 원로원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다.
악티움 해전을 통하여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세력은 궤멸됐고, 두 사람이 자결하면서 로마의 동방은 옥타비아누스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가장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경칭을 원로원으로부터 선사받고, 명목상으로는 로마 제1의 시민이라는 뜻의 프린켑스, 실질적으로는 황제가 되어 제정을 창시하게 된다.

2.2. 제정 시대의 내란



2.2.1. 네 황제의 해


'''네 황제의 해
Annus Quatuor Imperatorum
'''
68년
'''주요 황제'''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로마 제국의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1> 플라비우스 왕조
AD 68. 네로의 자살 이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붕괴됐고 갈바가 황제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갈바는 70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갖은 삽질만 저지르다가 오토에게 살해당한다. 오토가 제위에 오르자마자 갈바의 똥을 치워야했는데, 바로 게르마니아 속주 총독이었던 비텔리우스 역시 갈바가 살해당할 즈음 갈바에 대항하여 황제를 칭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10] 오토는 비텔리우스와 협상을 시도해봤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두 세력의 충돌은 비텔리우스의 승리로 돌아간다. 절망한 오토가 자결하면서 제위는 다시 비텔리우스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비텔리우스마저 끊임없는 삽질을 저지른다. 오토의 지지층을 가혹하게 탄압했으며[11], 자신의 병사들을 로마 시내에서 야영시키는가 하면, 하라는 통치는 안 하고 허구한 날 향락만 즐겼던 것. 결국 비텔리우스에 대항하여 한 번 더(...) 봉기가 일어난다. 이번에 봉기를 일으킨 인물은 당시 유대 총독으로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던 베스파시아누스. 다행히도 베스파시아누스는 비교적[12] 유능한 인물이었으며, 아들 티투스를 비롯한 측근들 역시 유능했다. 게다가 이탈리아 본토의 비텔리우스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욱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를 시전해 준 덕에 베스파시아누스는 손쉽게 비텔리우스를 제거하고 제위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제위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는 내란을 방지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원로원을 설득하여 제위 상속제를 실시했고 그 결과 플라비우스 왕조가 창설된다.
한편 '갈바의 살해 - 오토와 비텔리우스의 전투 - 오토의 자살 - 비텔리우스와 베스파시아누스의 충돌 - 베스파시아누스의 즉위'라는 일련의 과정이 모두 68년 한 해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이 해를 '네 황제의 해'라고 불렀다.
여담으로, 먼 훗날의 동쪽 로마에서도 641년 한 해에 황제가 4명 존재했다. 고대 로마와의 차이점은, 한 왕조 내의 집안 싸움이었다는 점이다.

2.2.2. 다섯 황제의 해


'''다섯 황제의 해
Annus Quinque Imperatorum
'''
193년
'''주요 황제'''
페르티낙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로마 제국의 왕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세베루스 왕조
193년.
콤모두스가 서기 192년 암살당한 이후 페르티낙스가 제위에 오른다. 페르티낙스는 피폐한 제국 재정을 개선하고자 노력했으나 그 과정에서 각종 경비와 군사 예산을 삭감하려던 것이 군의 반발을 샀다. 결국 페르티낙스는 어처구니없게도 병사들에게 보너스를 안 줬다는 이유로(...) 근위대와 근위대 대장[13]에게 집단구타살해당했다.] 페르티낙스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것은 근위대에게 화끈한 보너스 하사를 약속(...)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14] 그런데 근위대의 지지를 사서 황제 자리에 오른 그도 정작 근위병들에게 살해당했다(...)
하지만 아무런 검증된 능력도 없는 율리아누스가 제위에 오르자, 각지의 야심가들이 하나 둘 황제를 칭하기 시작한다. 시리아 총독 가이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브리타니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도나우 강 총독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까지.
그래서 다섯 황제의 해 이후 196년까지 3년이라는 세월 동안 각 세력 간의 치열한 투쟁이 벌어진 끝에 최종적으로 승리한 쪽은 바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였고, 세베루스 왕조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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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군인 황제 시대


AD 235~ AD 284.
50년 동안 공동 황제 포함 20명 이상의 황제가 등극. 평균 재위 기간 2년 미만. 그야말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자세한 내용은 군인 황제 시대 항목과 각 황제들의 개별 항목을 참고할 것.

2.2.4. 사두정치의 예정된 결렬과 연이은 내전


우선 영어 위키백과Civil wars of the Tetrarchy(사두정치의 내전) 일단 참고.

2.2.4.1. 밀비우스 다리 전투

312년 10월 28일, 콘스탄티누스 대제막센티우스가 제국 서방의 통치권을 두고 로마 근교에서 붙은 전투. 전투 자체보다는 다른 것으로 역사에선 유명한 전투이다. 바로 전투 전날 밤 콘스탄티우스가 천사에게서 십자가(크리스토그램)와 함께 '이것으로 정복하리라(In hoc signa vinces)'라는 문구를 전달받고는 다음날 휘하 장병들의 방패에 십자가를 그려넣게 했고 그 결과 콘스탄티누스가 대승을 거두었다는 야사. 물론 신빙성은 글쎄(...) 어쨌든 콘스탄티누스는 이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승인한다.

2.3. 콘스탄티노폴리스(동로마) 시대의 내란


영어 위키백과List of Byzantine revolts and civil wars(동로마의 반란과 내전 목록) 일단 참고.

2.3.1. 니카의 반란


532년에 서로 대립하던 두 파벌 녹색당과 청색당이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왕권 강화에 반발하며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사건

2.3.2. 20년간의 혼란


695년부터 717년까지 약 20년간 6명의 황제가 갈아치워졌던 혼란기이다.

2.3.3. 슬라브인 토마스의 난


미하일 2세레온 5세를 살해하고 제위를 찬탈한 것에 대해 슬라브 혈통의 동로마 군인 토마스가 일으킨 내전.
제6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참고

2.3.4. 레온 토르니키오스의 난


1047년에 동로마 군인 레온 토르니키오스가 콘스탄티노스 9세에게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사건.
제1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참고

2.3.5. 팔레올로고스 내전


1차 내전: 1321, 1322, 1327 ~ 1328 (안드로니코스 2세 vs 안드로니코스 3세)
2차 내전: 1341~1347 (요안니스 5세 vs 요안니스 6세)
3차 내전: 1352~1357 (요안니스 5세 vs 요안니스 6세, 마테오스)
4차 내전: 1373~1379 (요안니스 5세, 마누일 2세 vs 안드로니코스 4세, 요안니스 7세)
로마 제국 최후의 왕조인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내전. 동로마 제국을 회생 불가 상태로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다. 자세한 내용은 팔레올로고스 내전 참고.

[1] 흔히 라티푼디움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2] 대략 기원전 2세기 초중반부터 아우구스투스에 의하여 제정이 수립되기까지의 시기.[3] 오로지 로마와만 동맹을 체결해야했다. 다른 도시국가 혹은 부족과는 동맹을 체결하는 것이 금지됐다.[4] 우리가 아는 그 카이사르가 아니다. 우리가 아는 카이사르의 작은 아버지 뻘이다. 이 시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고작 12세였다. [5] 그렇지만 일방적인 피후원자는 아니고, 패트로누스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후원자와 일종의 기브 앤 테이크 관계였다.[6]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장인이기도 하다.[7] 여담이지만 킨나는 술라를 배신하지 않는다고 신전에서 맹세까지 해놓고는 술라가 원정을 떠나자마자 배신해버렸다.[8] 농담이 아니라 이들이 체제전복을 노린 이유는 막대한 빚을 탕감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애꿎은 카이사르도 빚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기에 가담한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었다.[9] 다만 이것도 말이 많았던게 키케로가 자기 업적을 쌓기 위해 음모가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않았는데도 선빵을 날려 카틸리나를 처형했기 때문이었다. 즉, 어떤 의미로는 생사람을 잡은 격이다.[10] 알다시피 이땐 교통이나 통신이 지금과 비교하면 매우 느렸기 때문에 오토가 갈바를 살해한 것도 모르고 비텔리우스는 갈바에게 반란을 일으켰다.[11] 특히 정신나간 짓거리가 있었는데 오토의 지지층이자 로마 국경 방어의 핵심이었던 도나우 강 수비대의 백인대장들을 싸그리 처형시켜버렸다. [12] 물론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 같은 먼치킨이랑 비교하면 후달리지만, 그래도 명군의 자질은 충분히 갖춘 인물이었다.[13] 근위대 대장 역시 페르티낙스에게 삐쳐있었는데, 페르티낙스를 제위에 올린 1등공신이었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이집트 총독 자리를 원했는데 페르티낙스가 거부했기 때문. 게다가 갈수록 커지는 근위대를 경계하며 이들을 통제하려고 시도해왔었는데 덕분에 근위대와 서서히 적이 되어가고 있었다.[14] 이 사람이 다름아닌 경매 매물(...)로 올라온 당시 황제 자리를 돈으로 산 양반이다. 일단 약속은 지켜서 근위대에게 많은 하사금을 줬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