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샤오옌 사건

 



1. 개요
2. 바이샤오옌은 누구인가?
3. 사건의 개요
4. 사건 뒤의 이야기


1. 개요


白曉燕命案
1997년 4월 14일, 대만 신베이시에서 일어난 사건. 대만 범죄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사건이다. 물론 대만에서도 온갖 잔혹한 범죄가 발생하지만, 이것이 독보적으로 유명한 까닭은 이렇다. 피해자의 연령, 사건이 전개되는 상황, 잔혹한 살해 수법 때문이다.

2. 바이샤오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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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샤오옌(왼쪽), 그녀의 어머니 바이빙빙(오른쪽)
1990년대 중반, 중학생 시절의 바이샤오옌.
바이샤오옌(白曉燕:백효연, 1980년 6월 23일생)은 대만의 배우가수인 바이빙빙(白冰冰:백빙빙, 1955년 5월 17일~)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거인의 별 등으로 유명한 일본 만화 스토리 작가 카지와라 잇키였으나 카지와라의 폭력과 바람기를 견디다 못해 이혼한 바이빙빙은 바이샤오옌을 임신한 상태에서 대만으로 귀국했고, 출산한 뒤 자신의 성을 붙여 키웠다.
대만의 명배우로 소문이 자자한 어머니 덕에 TV에도 자주 모습을 보였지만, 바이빙빙은 딸을 유명인의 2세로 키우기보단 그냥 일반인처럼 키웠다. 이것이 사건의 원인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지만.

3. 사건의 개요


1997년 4월 14일, 바이샤오옌은 평소처럼 학교로 등교하는 도중에 범인들에 의해 유괴되었다. 범인들은 바이샤오옌을 납치하자마자 폭행윤간했고, 심지어 그녀의 새끼손가락을 절단하기까지 했다. 이들은 바이샤오옌의 반나체 사진과 절단한 새끼손가락, 그리고 그녀가 직접 쓴 메시지를 보내, 500만 신 대만 달러(오늘날 가치로 약 한화 3억 원) 가량을 몸값으로 요구하며 협박했다.
일주일 후, 바이빙빙은 어찌어찌 해서 500만 달러를 마련해 범인들에게 건네주고 딸을 되찾으려 했지만, 경찰측의 누군가가 언론에 바이빙빙의 딸이 납치되었다는 정보를 흘리는 바람에, 몸값을 건네주기로 한 장소에 '''기자들이 먼저 진을 치고 있는''' 사태가 발생했고, 범인들은 결국 몸값을 받는 걸 포기하고 아지트로 돌아왔다.
바이샤오옌은 몸값만 받으면 풀려날 것으로 기대했다가 범인들이 몸값을 받는 데 실패하자 울부짖었고, 이렇게 되자 범인들은 또다시 바이샤오옌을 윤간하고 집단 구타한 끝에 잔혹하게 살해하고 말았다. 이들은 시신의 손발을 묶어서 타이페이하수도에 내다 버렸다.
4월 25일, 경찰이 범인들의 아지트를 급습해 범인들 중 4명을 체포했다. 그러나 주범격인 3명은 도피한다.
바이샤오옌이 사망한지 약 일주일이 지난 4월 28일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은 훼손이 심각해, 발견자는 처음에 사람이 아닌 돼지의 사체로 생각했을 정도였다. 법의관의 부검 결과, 직접적인 사인은 질식사였으나 심한 구타로 간장이 파열되고 복강은 과다출혈로 부풀어 오른 데다, 늑골도 대부분 부러져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는지 머리카락이 별로 남아있지 않았고, 두 눈은 도려낸 데다 목이 졸려 죽는 과정에서 밖으로 튀어나온 것으로 보이는 혀도 잘려 있었다고 한다. 귀에는 폭죽을 집어넣어 그 폭발 때문인 듯 고막이 파열되어 있었고, 몸 안에는 두 개의 쇠파이프가 박혀 있었으며, 못도 무려 48개나 나왔다고 한다. 그녀의 시신을 검시한 베테랑 법의관은 "법의관 생활을 오래 했지만, 이토록 끔찍한 시체는 처음 봤다"고 크게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고 하니 말 다했다.
일부 대만 언론이 시신 발견시의 사진을 그대로 찍어 보도했고, 이 사진은 일본에까지 넘어가서 일본 언론들에도 보도되었다고 한다. 이런 기자들의 행태에 이전 피해자의 몸값을 건네려 할 때의 기자들의 기레기 행태까지 더해져 유족들은 크게 분노해, "기자 유죄"라고 적은 큰 플랜카드를 집 앞에 붙일 정도였다.
이렇게 참혹한 시신이었기 때문에, 피해자의 장례식은 가발을 씌우고 생전 얼굴을 본뜬 가면을 붙이고 치러질 수밖에 없었다.
대만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자, 당시 리덩후이 총통은 "'''범인이 저항하면 발포해 사살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문에 8월 18일 범인 세 명과 경관 800명이 타이페이 시내 한복판에서 총격전을 벌였고, 경관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범인 중 한 명은 6발의 총탄을 맞고 견디지 못해 자살했다.
10월 23일, 다른 한 주범이 타이페이 정형외과에 난입해 "'''자신의 얼굴을 성형하라'''"고 강요했다. 의사가 협박을 받아 수술을 마치고 나자, 그 범인은 "'''내 얼굴을 봤으니 죽어줘야겠다'''"라면서 의사 부부를 살해하고, 간호사는 강간한 뒤에 살해했다. 그러나 11월 17일에 다시 경찰에 발각되었고, 이 범인도 자살했다.
마지막 남은 범인은 도주를 계속하다가, 11월 18일남아프리카 공화국 대사관의 주재무관 관저[1]에 침입해 5명의 인질을 잡고 인질극을 벌였다. 그러나 민진당셰창팅이 범인을 설득해 보겠다고 나서 직접 교섭한 끝에 결국 투항하여 체포된다.
이후 재판에 넘겨진 범인은 1998년 1월 22일 5건의 유괴, 강도, 살인에 대하여 모두 사형, 다른 폭행 사건 등으로 징역 59년 6월형을 선고받았고, 이듬해인 1999년 10월 6일 사건 발생 2년 반 만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나머지 범인들 역시 사형까지는 아니지만 범죄에 걸맞은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바이빙빙은 이것으로 정의가 실현된 건 아니라고 주장했다.

4. 사건 뒤의 이야기


이 사건의 원인을 두고 바이빙빙이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자들(외성인)이 중심이 된 폭력단을 규탄, 반대하는 운동을 펼친 것이 원인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이들은 반일(反日)적인 성향이었는데, 바이빙빙이 일본인과 결혼해 딸을 두어 눈엣가시처럼 여기다가, 바이빙빙에게 보복하기 위해 피해자를 납치해 끔찍하게 살해했다는 것. 물론 명백한 증거는 없으며, 이를 진술할 범인 셋은 이미 자살 혹은 사형으로 모두 사망했기 때문에, 더 이상 추적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바이빙빙이 피해자 보통 사람의 아이처럼 키운 이유도, 일본인과의 사이에서 난 아이여서 세간의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아서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으로 피해자가 표적이 된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장본인이, 당시 리덩후이의 뒤를 이어 차기 총통으로 주목받고 있던 롄잔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언론에 피해자의 납치 사실을 흘린 장본인이 렌잔의 측근이고, 평소 반일 성향이었던 렌잔이 바이빙빙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탓이라는 것이다. 롄잔은 이를 부인했으나, 이 소문의 영향인지 결국 롄잔은 천수이볜에게 패해 민진당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만다. 물론 그의 패배에는 쑹추위친민당을 만들어 나가는 바람에 보수표가 나뉜 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
바이빙빙은 딸의 죽음을 계기로 사형제 폐지 반대 운동의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하며, 대만 정부는 이러한 흉악범죄를 이유로 사형제를 유지하고 매년 수 명씩 사형을 집행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난징에서도 잔혹도에서 쌍벽을 이룬 댜오아이칭 사건이 일어났으나, 해결되지 못하고 미제로 남아 있다.
일각에서는 이 사건에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바이빙빙의 과오가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 주장에 의하면 바이빙빙은 일본에서 카지와라 잇키를 통해서 야쿠자와 연관되게 되었고 대만에 돌아온 뒤에도 야쿠자와 관계를 유지했으며, 바이빙빙은 야쿠자가 소개한 대만내의 어떤 그룹과 함께 대만내의 파칭코 사업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그룹이 파칭코 사업에 실패하자 바이빙빙에게 투자금을 돌려줄것을 요구했지만 바이빙빙이 이를 거부하자 이 그룹은 바이샤오엔을 납치해 투자금을 받아내려다 실패하고 바이샤오엔을 잔혹하게 살해했다는것이 주장의 요지이다. 2015년, 바이빙빙은 1973년 대만 가오슝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던 다이쭝칭의 살인미수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다이쭝칭에 의하면 73년 가오슝의 자택에서 누군가에게 총을 맞았지만 겨우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다이쭝칭을 살해하려한 범인을 잡는데는 실패하고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는데, 공소시효가 끝난 이후 다이쭝칭은 누군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이 사람은 자신이 다이쭝칭을 살해하려한 범인이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고용한 사람이 바이빙빙이었고 300만 대만달러(한화로 약 1억 5천여만원)를 받았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이에 바이빙빙은 터무니없는 말이라며 반박하기도 했다. 관련기사 다이쭝칭의 발언이 사실이라면 세간에 알려진 바이빙빙의 이미지는 날조라는 의미가 된다. 왜냐하면 이 당시는 바이빙빙이 일본에서 임신한 채로 대만으로 돌아왔고 바이샤오옌을 낳은 후 15일만에 일을 했다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300만 대만달러가 있었다? 물론 다이쭝칭의 주장은 명백한 물증이 없긴 하지만, 대만 사람들 모두가 바이빙빙을 딸을 잃은 불쌍한 어머니로만 보고 있진 않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편 이와 별개로 이 사건이 (댜오아이칭 사건과 더불어) 상술한 반일성향과 연관지어서 삼합회와도 연관이 있을거라는 가설도 등장했다.
[1] 남아공은 대만과 1996년 11월단교선언을 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남아공 간 협상 지연으로 실제 단교는 1998년에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