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데를레이 루솀부르구
1. 개요
브라질의 축구선수 출신 축구감독. 2021년부터 CR 바스쿠 다 가마 감독을 맡고 있다.
2. 선수 경력
1952년 5월 10일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의 노바 이구아수[2] 에서 태어나 보타포구 유스팀에 입단해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포지션은 윙백이었다. 1971년부터 1981년까지 플라멩구와 SC 인테르나시오나우, 보타포구 같은 명문 클럽에서 10년간 선수생활을 했지만 주전으로 출장하지는 못했고 10년 동안 총 51경기를 소화하는데 그쳤다. 1981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3. 지도자 경력
3.1. 1980년대
1981년 선수생활을 정리한 뒤 바스쿠 다 가마의 수석코치를 2년간 역임하였다가 1983년 캄포 그란데, 히우 브랑코, 프리부르구넨세 등 브라질 리그의 여러 클럽들에서 감독직을 맡았고, 히우 브랑코를 이끌고 주별 리그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1984년에는 사우디 아라비아로 건너가 알 이티하드에서 수석코치직과 감독직을 잠시 수행했으며 1985년 다시 브라질로 넘어와 데모크라타의 감독으로 재직했다. 그러다가 1985년부터 1987년까지 명문 클럽 플루미넨시의 유스팀 감독으로 활동했고, 1987년 아메리카[3] 에서 감독으로 잠깐 재직하다가 또 사우디의 알 샤바브로 건너가 1988년까지 1년간 수석코치로 재임했다. 1988년 다시 브라질로 돌아온 루솀부르구는 상파울루 주의 하위팀인 브라간티노의 감독을 맡는데, 1년만에 팀을 전국 리그의 2부 리그에서 브라질 세리 A로 복귀시키는데 이어 이듬해인 1990년 상파울루 주별 리그에서 우승시키는 기염을 토한다. 브라간티노에서의 거둔 위업으로 루솀부르구는 저니맨 감독에서 브라질의 전국적인 명장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3.2. 1990년대
1991년 Guarani와 플라멩구 감독직을, 1992년부터 1993년까지 폰테 프레타의 감독직을 역임한 루솀부르구는 1993년 브라질의 명문 클럽 SE 파우메이라스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1993년 상파울루 컵대회를 우승시킨 것을 시작으로 그는 파우메이라스에서 1993년과 1994년 두 시즌간 상파울루 주별 리그와 브라질 세리 A를 각각 연속해서 동시에 우승하며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 파우메이라스에서의 대성공 이후 루솀부르구는 1995년 파우메이라스를 떠나 파라나와 플라멩구 감독직을 역임하였는데, 그가 파우메이라스를 떠나자 파우메이라스의 성적이 곤두박질쳤고 1995년 말 다시 파우메이라스로 복귀해 1996년 주별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1997년 산토스로 자리를 옮겨 산토스에서도 상파울루 컵대회를 우승한 루솀부르구는 1998년 코린치안스 감독으로 부임해 브라질 세리 A 우승컵을 안긴 뒤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다.
3.3.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준우승에 그치자 경질된 마리우 자갈루의 후임으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선임된 루솀부르구는 1999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이 무렵인 1999년 3월 잠실종합운동장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친선경기를 가졌는데 김도훈에게 실점하는 바람에 0:1로 패했다.
이후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하고[4] 뒤이어 있었던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5] 준우승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호마리우를 대표팀에서 제외하자 팬들의 반발을 사서 리더십이 흔들렸고, 결국 2000 시드니 올림픽 남자축구 8강전에서 카메룬 축구 국가대표팀에 1:2로 패해[6] 8강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경질되었다.
3.4. 2000년대 초반
2001년 코린치안스로 복귀해 상파울루 주별리그 우승컵을 다시 선사했다. 2002년 SE 파우메이라스로 또 복귀했으나 이번에는 성적이 신통치 않아 얼마 못 가 물러났으며, 크루제이루로 자리를 옮겼다. 2003년 크루제이루를 이끌고 미네이루 주별리그와 브라질 세리 A, 그리고 브라질 전국 컵대회 우승이라는 3관왕을 달성했고, 2004년 산토스 감독직을 또 맡아 브라질 세리 A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처럼 브라질 내에서는 명실상부한 우승 청부사로 꼽히자 플로렌티노 페레즈 당시 레알 마드리드 회장이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3.5. 레알 마드리드 CF
2004년 12월 20일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갈락티코로 불리던 우수한 선수단에도 불구하고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감독과 레몬 감독대행 체제에서의 삽질로 8위에 머물고 있던 레알 마드리드를 잘 추스려 7연승 행진을 기록했고, 나머지 경기들도 잘 치러 2004-05 시즌을 챔피언 FC 바르셀로나에 승점 4점 뒤진 2위로 마무리시켰다. 그러나 다음 시즌인 2005-06 시즌 홈구장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엘 클라시코 경기에서 호나우지뉴에게 유린당하며 0:3으로 패배[7] 하자 경질되며 마드리드를 떠났다.
3.6. 2000년대 중, 후반
2006년 산토스로 또 복귀해 2006, 2007 시즌 주별 리그 2연패를 달성시켰고 2007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준결승에 진출시켰다. 2008년 SE 파우메이라스로 네 번째 복귀해 주별 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렸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는 8강에 진출시켰다. 2009년 7월 파우메이라스 감독직을 사임한 뒤 다시 산토스로 돌아왔으나 전국 리그인 브라질 세리 A에서 12위에 그치자 12월 산토스를 떠났다.
3.7. 2010년대
2010년 아틀레치쿠 미네이루로 돌아와 그 해 미네이루 주별 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린 뒤 플라멩구로 떠나 2011년 카리오카 주별 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렸으며, 2012년까지 플라멩구에서 재직했다. 2012년에는 그레미우로 소속을 옮겼으나 2013년 5월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다. 2013년 7월 플루미넨시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나 팀이 강등 위기에 처하자 11월 경질당했다.
2014년 7월 강등 위기에 처한 플라멩구로 돌아와 팀을 강등위기에서 구해냈다. 2015년에는 크루제이루의 감독직을 맡았으나 성적부진으로 중도에 경질당했다. 2016년 중국 슈퍼리그의 톈진 취안젠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알렉산드르 파투와 카카를 데려오겠다고 공언했으나 데려오진 못했고(...) 자신도 7월에 해고당했다. 참고로 후임이 칸나바로다. 2017년에는 스포르트 레시페, 2019년에는 바스쿠 다 가마 감독직을 역임했다.
3.8. 2020년대
2020년 SE 파우메이라스로 '''또''' 복귀했다. 무려 '''파우메이라스 5기'''다.
그리고 10월 성적 부진으로 경질됐다.
4. 여담
- 흔히 룩셈부르고 감독으로 알려져있다. 성씨 Luxemburgo는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 레알 마드리드와 톈진 취안젠, 사우디 아라비아의 몇몇 클럽에서의 짧은 감독생활을 제외하면 브라질에서만 감독직을 수행했기 때문에 뛰어난 경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있지 않거나 레알에서 실패한 혹은 한국 대표팀에게 패한 브라질 감독(...)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당장 이 문서조차도 나무위키 축구 프로젝트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성되지 않았다가 프로젝트가 종료된 지 한참 지난 2020년 3월 6일에야 겨우 생성되었다.
- 브라질 세리 A는 팬들이 워낙 극성맞고 내부 경쟁이 치열해 몇 경기만 실수해도 바로 감독직이 위험한 감독으로서는 상당히 빡센(...) 리그다. 루솀부르구가 한 팀에서 오래 감독생활을 하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엄청 떠돌아다닌 것은 비단 본인이 저니맨이라서만은 아니고 브라질 리그의 이러한 특성상 감독 교체가 잦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만큼의 성적을 198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꾸준히 내온 것을 보면 실력이 대단한 명장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