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베르나베우
1. 개요
스페인 국적의 전 축구 선수 , 축구감독 , 축구경영인.
레알 마드리드에서 역대 최장 기간인 35년 동안 회장직을 역임하였으며, 유소년 선수 시절부터 한 번도 다른 클럽에 소속되지 않고 '''총 69년간 일하여 일생의 대부분을 보낸 축구, 아니 스포츠계 성골 끝판왕''' 되시겠다. 스페인 내전에 이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집권 이후 전대미문의 암흑기를 겪던 레알 마드리드에 엄청난 성공을 가져왔고, 농구 팀 또한 유럽 최고 명문으로 만들어냈다. 이로 인해 축구단 회장계의 전설이자 '''레알 마드리드의 수호성인과도 같은 존재'''로 인정받고 있다.
2. 생애
1895년 스페인의 알만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호세 베르나베우는 변호사였으며, 쌍둥이 형제에 이어 3남으로 태어났고 5살 때에 마드리드로 이주하였다. 1909년, 형제인 안토니오 베르나베우 (1890 ~ 1967 ) [1] 마르셀로 베르나베우 (1890 ~ 1973) 가 있던 레알 마드리드(당시 마드리드 FC) 유소년 팀에 입단하였다.
처음에 레알 마드리드는 산티아고를 골키퍼로 쓰려고 하였으나, 형 마르셀로 베르나베우의 주장에 따라 그는 중앙 공격수로 뛰게 되었다. 한동안 유소년 팀 선수로 생활을 하다가 1912년 3월 3일 잉글리시 스포츠 클럽이라는 팀을 상대로 한 친선 경기에서 1군 선수로 데뷔, 팀의 2:1 승리를 이끌었다. 이때 나이는 16세였다. 이후 선수 생활 18년 동안 총 689경기를 뛰며 340골 이상을 기록하였고, 이 중 공식 경기 기록은 79경기 68골이었다.[2] 우승은 지역 대회에서 9번, 코파 델 레이에서 1번을 기록했다. 1920년에 창설된 스페인 대표팀에서는 1922년 포르투갈과의 친선 경기에 소집되어 뛸 기회가 있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뛰지 않게 되었고, 이후 출전 없이 그대로 은퇴하였다.
1927년에 변호사 자격을 얻고 팀에서 은퇴했다. 그러나 베르나베우는 변호사가 되기보다는 레알 마드리드에 계속 있으면서 축구계에 종사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1927년부터 레알 마드리드 이사회와 프런트에서 일을 했고, 리카르도 사모라 영입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기도 했다. 감독직을 수행하던 1936년 스페인 내전이 터지자 프랑스로 피신해 변호사 일을 하다가, 내전이 끝난 뒤인 1943년에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스페인 내전 동안 파괴된 차마르틴 구장과 시우다드 데포르티바 훈련장을 재건하고, 1952년부터 자신의 영원한 오른팔이 될 라이문도 사포르타(1926~1997)를 단장으로 불러낸 뒤 페렌츠 푸스카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레몽 코파, 미겔 무뇨스, 프란시스코 헨토, 호세 산타마리아, 엑토르 리알 등 유수의 선수들을 영입하여 훗날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이 만들어낼 갈락티코스 시대의 원조 격이 되는 지구방위대 라인업을 구축했다. 이로써 스페인 내전 이후 침체되어 있던 레알 마드리드는 일약 유럽 최강으로 도약했다. 이 세대가 저문 이후에도 아만시오 아마로, 피리, 귄터 네처, 산티야나, 후아니토, 비센테 델 보스케,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등을 구단으로 불러들였다. 레알 마드리드는 베르나베우가 회장으로 일하기 시작한 이후, 53/54 시즌 라 리가 우승을 시작으로 16시즌 동안 라 리가 12회 우승과 3회 준우승, 유러피언 컵 6회 우승과 2회 준우승, 리그 15연승,[3] 121경기 연속 홈 무패[4] 등 전무후무한 대기록들을 쌓아나갔다.
한편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장 이름이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된 것도 이 시기이다. 1955년 1월에 새로 지어진 차마르틴 경기장의 개명을 위해 레알 마드리드 회원 총회가 소집되었다. 전술했듯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회장으로서 경기장 건설을 주도했었고, 이 회의에서 새 이름으로 '누에보 차마르틴'과 '카스테야나'라는 무난한 이름을 제안했다. 누에보 차마르틴은 '새로운 차마르틴'이라는 뜻이고, 카스테야나는 경기장이 위치한 거리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이때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앞에서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라는 이름이 제안되었고, 투표 결과 만장일치로 이름이 확정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1978년 사망할 때까지 무려 35년 동안 회장직을 역임했다. 충성심이 남달라 병세로 쓰러져 있는 와중에도 "창단 75주년 소시오 총회에 참석하지 못해 죄송하다"라는 말을 서포터들에게 전하게 했으며, 회장 임기는 그가 숨을 거두는 순간 종료되었다.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마침 클럽 창단 75주년과 때를 같이하는 이번 총회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건강 문제로 여러분과 함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망 전 마지막 공식 발언.
3. 평가
흔히 레알 마드리드의 최전성기를 상징하는 인물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꼽지만, 회장으로서 디 스테파노를 포함한 최정상급 선수들과 계약한 사람이 베르나베우이다. 게다가 유럽 최고 명문 농구단인 레알 마드리드 발론세스토도 베르나베우 집권기에 전성기를 누렸다. 사실상 레알 마드리드 프랜차이즈의 황금기와 현재 명성을 설계한 인물. 베르나베우 회장 재임기 동안 레알 마드리드가 들어올린 트로피는 '''축구 부문 30개, 농구 부문 46개, 총 76개에 달한다(공식 대회 기준).''' 때문에 성과 면에서 역사상 최고의 스포츠 회장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성과를 떠나 충성도 면에서도 전설적이다. 10대부터 죽을 때까지 레알 마드리드 외 다른 팀에 소속된 적이 없다. 축구계에 원 클럽 맨은 여럿 있지만, 그 중 유소년기와 은퇴 이후 경력까지 통틀어 오직 한 팀에만 속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일한 햇수만 거의 70년에 가까우며,[5]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회장이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4. 우승 기록
친선 대회는 제외함.
4.1. 선수
- 중부 지역 선수권: 9회 우승(1915-16, 1916-17, 1917-18, 1919-20, 1921-22, 1922-23, 1923-24, 1925-26, 1926-27)
- 코파 델 레이: 1회 우승(1917)
4.2. 회장
- 레알 마드리드 CF
- 프리메라리가: 16회 우승(1953-54, 1954-55, 1956-57, 1957-58, 1960-61, 1961-62, 1962-63, 1963-64, 1964-65, 1966-67, 1967-68, 1968-69, 1971-72, 1974-75, 1975-76, 1977-78)
- 코파 델 레이: 6회 우승(1946, 1947, 1961-62, 1969-70, 1973-74, 1974-75)
- 유러피언 컵: 6회 우승(1955-56, 1956-57, 1957-58, 1958-59, 1959-60, 1965-66)[6]
- 인터컨티넨탈 컵: 1회 우승(1960)
- 코파 에바 두아르테[7] : 1회(1947)
- 레알 마드리드 발론세스토
- 리가 나시오날: 19회(1957, 1958, 1959-60, 1960-61, 1961-62, 1962-63, 1963-64, 1964-65, 1965-66, 1967-68, 1968-69, 1969-70, 1970-71, 1971-72, 1972-73, 1973-74, 1974-75, 1975-76, 1976-77)
- 코파 델 레이: 18회(1951, 1952, 1954, 1956, 1957, 1960, 1961, 1962, 1965, 1966, 1967, 1970, 1971, 1972, 1973, 1974, 1975, 1977)
- 유로리그: 6회(1963-64, 1964-65, 1966-67, 1967-68, 1973-74, 1977-78)
- 인터컨티넨탈 컵: 3회(1976, 1977, 1978)
5. 기타
- 레알 마드리드는 베르나베우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홈 경기장 이름을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로 반 세기 넘게 유지하고, 트로페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라는 친선 대회를 매년 프리시즌에 개최하고 있다.
- [image]
케일러 나바스가 베르나베우의 선수 시절 얼굴과 닮은 편이다. -
[1] 볼로냐 FC 1909의 창립 멤버 중 하나이기도 하다.[2] 라 리가 출범 이전에 은퇴했으므로 몇 없는 마드리드 지역 대회 경기와 코파 델 레이 경기만 포함된 기록이다. 그 외 대부분의 기록은 친선 경기 기록이다.[3] 2010/11 시즌 바르셀로나가 16연승으로 경신하기 전까지 라 리가 최고 기록이었다. 2016/17 시즌 레알 마드리드가 역시 16연승을 달성하여 현재는 3위 기록이다.[4] 세계 최고 기록이자 유일한 3자릿수 기록이다. 이 부문 2위 기록은 최전성기 당시의 츠르베나 즈베즈다가 가지고 있다.[5] 재임 기간이 불확실한 경우가 있어 출처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6] 1966년 우승으로 트로피 영구 소장권 획득.[7]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의 전신 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