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봉
1. 대한민국의 코미디언
白南峰
1939년 2월 6일 ~ 2010년 7월 29일
대한민국의 원로 코미디언. 본명은 박두식(朴斗植). 종교는 불교다.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계서리 방화마을 출신#이며 1944년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어릴 적 전쟁과 피난을 경험한 그는 한때 고아원에서 자랐다. 구두닦이와 장돌뱅이 등으로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서민의 정을 느낀 그는 1962년 유랑극단을 거쳐 1967년에 물랑루즈쇼단으로 희극인 활동을 시작하여 1969년에 동양방송 라디오 《장기자랑》이란 프로를 통해 방송에 데뷔했다.
성대모사란 특기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는데 《석양의 무법자》 휘파람 소리와 각종 동물 울음소리, 뱃고동 소리, 총소리과 말이 달리는 소리 등을 흉내내 큰 인기를 얻었다. 취객·오징어구이 연기에도 능하였다. 또 선배 남보원과 함께 투맨쇼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팔도 사투리에도 능했던 그는 원맨쇼의 달인으로도 평가받기도 했다.
또 영화에도 출연해 1970년에 편거영 감독의 영화 《팔도 가시나이》와 《예비군 팔도 사나이》등에도 출연하였다. 또 KBS 1TV《전국일주》, SBS 출발! 모닝와이드등에도 나왔으며 케이블TV 방송 실버TV의 TV 프로그램《백남봉 쇼》를 2009년 4월까지 진행하였다.
그의 딸은 피겨 스케이팅선수 출신의 탤런트 박윤희로, 드라마 《간 큰 남자》에도 출연하는 등 연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또 아버지와 함께 백남봉 쇼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2009년, 자전거를 타던 중 사고로 인한 부상으로 생긴 늑막염 수술 도중 왼쪽 가슴에서 폐암이 확인되어 10시간의 대수술을 받고 이후 회복되는가 했지만 상태가 다시 악화되면서 2010년 7월 29일 목요일 아침 8시 40분에 폐렴 증세의 악화로 인해 72세로 사망했다. 사후 화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백남봉이 사망하자 그를 동생처럼 아끼던 선배 코미디언 구봉서가 고령의 불편한 몸을 이끌고 문상와서 '''"(백남봉)이 놈이 살아 생전 성질이 급하더니... 형을 놔두고 동생이 먼저 갔다. 아주 나쁜 놈이다."'''라고 통곡하기도 했다.
이 분도 남보원과 마찬가지로 프로스트 교수로 리다이렉트되어 내용이 없다가 한참 후에 내용이 작성되었다.
여담으로, 비디오 아티스트로 유명한 예술가 백남준과 앞글자 두자가 동일하고 연령대도 비슷한데다[2] 두 사람 모두 국내에서는 이름이 잘 알려진 관계로, 80~90년대에는 대중들이 두 사람의 이름을 은근히 헷갈려 하거나 백남봉이 '''백남준의 짝퉁 취급'''[3] 을 받는 안습한 경우도 많았다. 물론 최근인 2006년 백남준의 작고와 더불어 2010년 백남봉까지 작고하면서 이런 논란은 완전히 사그라든 듯하다.
딸의 회고한 생전의 백남봉은 굉장히 엉뚱하면서 유쾌한 사람이였다고 한다. 딸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면서 명절용 식용유 세트를 준비했다거나, 사람들 많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딸 준답시고 여성용 속옷을 거리낌없이 주는 바람에 딸이 처음에는 많이 당황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들을 90년대 초중반 예능 프로그램에서 백남봉 부녀가 직접 재연하기도 했다.
2. 닥터 프로스트의 본명
프로스트 교수 문서 참조.
[1] 이렇게 웃는 영정사진인 것은 백남봉의 장례식이 희극인 장으로 치러졌기 때문이다. 원래 번잡스럽지 않게 치르려고 가족들이 바라서 가족장으로 치르겠다고 했던 영정 사진은 일반적인 모습의 영정이었다.[2] 백남준은 1932년생, 백남봉은 1939년생으로 두 사람은 7살 차이밖에 안 난다.[3] 참고로 백남봉의 경우 본명은 박두식으로 백남봉이라는 이름은 연예인 활동을 위한 예명인데, 백남준이 국내에 알려지기 십여년 전부터 이 예명을 사용했기 때문에 백남준의 명성을 노린 것과는 전혀 관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