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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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남보원(南寶元)
'''본명'''
김덕용(金德容)
'''본관'''
경주 김씨
'''가족'''
아내 주길자, 슬하 1녀
'''출생'''
1936년 3월 5일
평안남도 순천군 은산면 금창리[1]
(現 평안남도 은산군 연합리)
'''사망'''
2020년 1월 21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순천향대학교병원
'''종교'''
불교
1. 개요
2. 활동
3. 세대 차이


1. 개요


대한민국의 원로 코미디언.
본명은 김덕용. 평안남도 순천군 은산면 금창리(북한 행정구역상 은산군) 출신.# 이른바 실향민 1세대였다. 예명인 남보원은 No.1음차한 것이다.[2]

2. 활동


1963년 영화인협회 주최 '스타탄생 코미디' 1위로 데뷔. 무대에서 벌어지는 극장식 코미디가 주종이던 1960년대부터, TV가 보급되는 1970년대의 쇼 프로그램 전성시대를 거쳐 1980년대까지 한국 코미디계의 대표 주자로서 활동해왔다.
이북5도 출신인 점을 활용하여 평안도 사투리를 구사하면서 팔도 사투리가 지역민 수준으로 가능하다. 실향민의 아픔을 희극적으로 묘사한 콩트와 사물의 소리를 그대로 복사해내는 성대모사가 주특기. 그의 사물효과음 성대모사는 콤비를 이루었던 후배 백남봉과 더불어 본좌급으로 인정받았고, 이후 정종철이 특기로 삼는 사물모사의 원조라고 할 수 있었다. 전투기가 출격할 때의 엔진소리부터 이륙 모사음 등은 정종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완벽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6.25 전쟁을 겪은 세대만이 알 수 있는 폭격기의 폭격음 모사 등의 수준은 전쟁 당시의 처절했던 상황을 어느 정도 간접 경험도 가능했을 정도이다. 폭격기 모사와 더불어 부두에서 출항하는 통통배의 모사, 기차가 역에서 출발해서 철로를 따라 운행하다가 다음 역으로 진입하는 성대모사[3] 등도 특기중 하나였다.
본좌급의 실력을 잠시 감상해 보자. 19금 노래인 '''성냥공장 아가씨'''. 심지어 히로히토의 항복 방송인 옥음방송이나 카미카제#까지도 성대모사했다.
부인이 매니저를 맡아 왔으며, 2019년부터 노환으로 인한 폐렴 증세로 투병하다가 2020년 1월 21일 별세했다. 향년 83세. 이로써 대한민국의 1세대 코미디언들은 송해를 제외하고 대다수가 고인이 되었다.

3. 세대 차이


지금 코미디계에서 레전드니 하는 세대들[4]조차도 일단 이 분이 떴다 하면 누구든 기본이 허리 90도로 숙여서 인사다. 선배라고 해 봐야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은 송해 정도로[5], 이주일보다도 대선배였고, 심지어 '''자니 윤과 동갑내기에 동기였다'''. 가요계로 치면 조상급인 패티김이 같은 세대였고, 원로 대접 받는 신중현이 두 살 아래, 국민 가수 조용필이 무려 14년이나 어리다. 다만 2016년까지는 남보원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은 대선배이자, 해방 후 한국 코미디계의 영원한 대부 구봉서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아주 최고 선배는 아니었다. 구봉서는 송해보다도 선배였기 때문에...[6]
지금은 종영된 개그콘서트남성인권보장위원회가 약칭으로 "남보원"이라 불리기도 했다. 리그베다 위키 시절, 항상 시건방을 컨셉으로 잡는 모 개그맨 정도는 당연히 감히 얼굴도 쳐다보지 못한 코미디계의 원로였지만, 나이 때문에 활동도 뜸했고 TV에 안 나온 지도 꽤 오래 되었다.

[1] 경주 김씨 집성촌이다.[2] 람보와는 당연히 무관하다. 그의 데뷔 시기는 영화 람보는 물론이고 영화의 원작 소설이 나온 시점보다도 훨씬 이전이다.[3] 이것도 정종철의 특기 중 하나. 시대가 시대인지라 정종철의 모사가 지하철인 반면, 이 분의 모사는 증기 기관차다.[4] 유재석, 강호동 등은 이 분에 비하면 꼬꼬마 수준. 이경규, 심형래, 임하룡, 최양락, 이성미, 주병진, 이홍렬 등은 뭐 말할 것도 없고, 그보다 조금 더 선배들인 배일집, 배연정, 전유성 세대들까지도 해당된다. 정확히는 자니 윤동갑이다. 데뷔는 자니 윤이 조금 빨랐다.[5] 연예계 전체로 넓히면 배우 이순재도 있다.[6] 구봉서는 1926년 생. 1927년 생인 송해가 1925년 생이란 인터뷰가 나왔을 때, 이 소식을 들은 구봉서가 '송해 그 아이는 무슨 그 나이에 나이를 속이냐'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했다. 훗날 구봉서가 사망하자 송해가 추도사에서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25년 생이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잘못된 정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