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이와 숙제

 


1. 백이(伯夷)
2. 숙제(叔齊)
3. 사기 백이열전
4. 여담


1. 백이(伯夷)


'''백이
伯夷
'''

'''시호'''
백이(伯夷)
''''''
(子)
''''''
묵태(墨胎)
''''''
(允)
''''''
공신(公信)
'''아버지'''
아미(亞微) 묵태초(墨胎初)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년
''' 고향'''
고죽국(孤竹國)
''' 무덤'''
수양산(首陽山)
고죽국후작인 아미(亞微) 묵태초(墨胎初)의 세 아들 중 맏이. 장남인 자신에게 군주의 자리를 넘겨주려는 동생의 뜻을 거절하고 나라 밖으로 피신한다. 백(伯)은 첫째라는 뜻이고 이(夷)는 시호인데, 후세에 이 둘을 합한 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2. 숙제(叔齊)


'''숙제
叔齊
'''

'''시호'''
숙제(叔齊)
''''''
(子)
''''''
묵태(墨胎)
''''''
(致) / 지(智)
''''''
공달(公達)
'''아버지'''
아미(亞微) 묵태초(墨胎初)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년
''' 고향'''
고죽국(孤竹國)
''' 무덤'''
수양산(首陽山)
고죽국의 후작인 아미 묵태초의 세 아들 중 막내. 자신이 물려받은 군주의 자리를 거절하고 장남인 백이에게 양보하려 한다. 백이가 도망치자 형제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따라서 도망쳐나온다. 숙(叔)은 셋째라는 뜻이고 제(齊)는 시호인데, 후세에 이 둘을 합한 숙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후한 말에 황번이라는 사람에게 '백이의 동생'이라는 시신이 자신을 묻어달라고 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3. 사기 백이열전


고죽국 후작인 삼형제의 아버지 묵태초는 삼남 숙제에게 군주 자리를 물려주려 했다. 묵태초 사후, 백이는 부친의 뜻을 따르고자 했지만 숙제는 관례에 따라 큰형 백이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이에 백이는 막내아우를 아낀 부친의 뜻이라며 사양하고 나라 밖으로 피신해 버렸다(...). 이에 숙제도 형제간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형을 따라 도망쳐 버리는 바람에 그 나라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둘째 아들 아빙을 왕으로 세웠다. 이후 백이와 숙제는 서백(西伯) 희창(姬昌)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으나[1] 이미 서백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슬픔에 잠겨 있던 백이와 숙제는 서백의 아들 무왕이 부친의 상중에 은나라 주왕(紂王)을 정벌하는 것을 보고 경악한다. 그리고 무왕의 수레를 말고삐를 잡아 막으며,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아직 장사도 지내지 않았는데 전쟁을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주나라상나라의 신하 국가인데 신하가 임금을 주살하려는 것을 어찌 인(仁)이라 할 수 있겠는가?

라며 만류하려다가 목숨을 위협받았다. 강태공은 형제를 죽이려는 신하들을 만류하며 "이들은 의로운 분들이다" 라고 변호해 형제는 목숨을 건졌다. 무왕의 주나라가 강국이 되자 형제는 주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에 은거해 고사리(薇)를 캐먹으면서 여생을 보냈지만... 야사에 따르면 나중에 주나라 백성 중 한 사람이 '어차피 이 수양산도 주나라의 땅이 아닙니까?'라고 하자 형제는 크게 상심하여 결국 고사리까지 캐먹지 않고 스스로 굶어죽었다.
사마천사기에서 이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인 '백이열전'을 쓰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백이숙제가 고사리를 캐먹다 굶어죽은 모습을 현실과 대비해 보면서 세상의 모순을 상기한 모양.

'"천도(天道)는 공평 무사하여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을 든다."고 한다.[2]

하지만 백이·숙제와 같은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을 것인가. 그들은 이와 같이 인과 덕을 쌓고 청렴 고결하게 살다가 이렇게 굶어 죽었다. 또한 공자의 고제 칠십인(高弟 七十人) 가운데 중니(仲尼)는 오직 안연(顔淵)만을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추상(推賞)했다. 그러나 회(回)는 가끔 쌀뒤주가 비어 있었으며, 지게미나 쌀겨도 배불리 먹지 못하다가 끝내 요절했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도대체 어찌된 셈일까? 도척(盜跖)[3]은 날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사람 고기를 회를 쳐서 먹으며, 포악한 짓을 멋대로 저지르고 수천 명의 패거리를 모아 천하를 마구 휘젓고 다녔지만 결과는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이것은 무슨 덕을 따랐단 말인가? 이런 것들은 크게 드러난 예들이다.

근세에 이르러서도 소행(素行)이 도(道)를 벗어나 오로지 악행만을 저지르고도 종신(終身)토록 일락(逸樂)하여, 부귀가 자손 대대로 끊이지 않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정당한 땅을 골라서 딛고 정당한 발언을 해야 할 때만 말을 하며, 항상 큰 길을 걸으며 공명 정대한 이유가 없으면 발분(發憤)하지 않고, 시종 근직(謹直)하게 행동하면서도 오히려 재화(災禍)를 당하는 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래서 나는 천도라는 게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참으로 의심스럽다.'

반면 사기 열전과 반대로 본기에서는 서백이 '''멀쩡히 살아있어''' 백이와 숙제가 멀쩡히 도착했고, 무왕은 문왕이 세상을 떠난 후에 바로 주왕을 치지 않았다. 사기 본기에서 진시황장양왕의 아들이라고 서술하고, 사기 열전에서는 여불위의 아들이라고 서술한 것과 같이 받아들이면 될 듯.

4. 여담


'백', '숙'은 백중숙계 항렬이고, '이'와 '제'는 두 형제의 시호다. 따라서 차남인 아빙후 풍의 시호는 중□이겠지만 군주가 되었으므로 따로 전하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절개를 지키는 충신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인물들이지만, 일각에서는 단순히 왕에게 절개를 지키는 것만을 지키는 걸 중시하는 소극적인 의미의 충신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의 주장은 잘 보면 현실성이 없다고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도 극소수나마 있다. 기실 은나라는 필연적으로 거의 망해가서 왕조교체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은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한 걸 생각해보면 아래에서 들고 일어나도 이상할 거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인이니 뭐니 하고 들먹이면서 왕조 교체를 바라는 세력들을 말려봤자 결국 의미가 없다는 것.
사육신 중 한 명이었던 성삼문이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에게 등을 돌렸다고 하면서도 그들이 먹은 고사리는 결국 주나라의 것이 아니었냐며 썼다는 시조가 전해진다.[4]
주나라 건국 이후 후일담격으로 나오는 일설 중에는 이런 얘기도 있다.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산나물 캐러 다니던 아낙네에게 성삼문이 한 것과 같은 지적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불쾌하게 여기고 무시했다가 나중에 학식이 높은 어떤 사람이 이를 똑같이 지적하자 그제야 오류를 인정하고 식음을 전폐한 뒤 아사했다."
중국의 문호 루쉰(魯迅)도 백이와 숙제를 그가 가장 미워한 유교적 위선자의 대표로 보고, 한 단편에서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의 고사리도 주나라의 것임을 깨닫고 식음을 전폐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옥황상제가 하늘나라 암사슴을 내려보내 암사슴의 젖을 먹여 그들을 살려냈는데, 막상 기력을 차린 백이와 숙제는 고기가 먹고 싶어 그 암사슴을 잡아먹으려 했고 이에 노한 옥황상제가 암사슴을 하늘로 다시 불러올려 결국 백이 숙제는 아사했다."라는 결말을 써서 백이와 숙제를 대차게 폄하했다.
역사학자 임용한은 국방TV에서 사기의 백이,숙제 편을 이야기하면서, 고사리만 캐먹고 살았다는 내용 자체가 진짜로 왕족이 고사리 캐먹다 죽었다는 것이 아닌, 함축적인 의미를 지녔을 것이라 이야기하였다. 당시 봉건제 특성상, 왕족이었던 백이, 숙제는 타국에서도 어느 정도 대우를 받고 있었으나, 상나라 멸망 이후 귀족으로서의 특권을 버리고 시골의 평민으로 살다 죽은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했을 것이라고.
육각수의 노래 흥보가 기가 막혀에 '백이 숙제 주려죽던 수양산으로 가오리까'라고 언급된다. 실제 판소리 흥보가에서 따온 가사이다.
[1] 참고로 백이와 숙제 이야기를 실은 사기열전에서는 둘이 어떻게 다시 만났는지, 그동안 이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실려있지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들이 재회한 시점에서는 이미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고 한다.[2] 노자 79장에 나오는 구절이다.[3]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도적이다. [4]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이야기한다는 시조 맞다. 여기서 수양산이 의미하는 것은 말 그대로 수양산이지만 동시에 이 사람을 빗대서 디스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