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
[clearfix]
1. 소개
삼재도희의 강태공 상
중국 상주 시대 제나라의 초대 국군. 후대에 오호십육국 때 후량을 건국한 여광에 의해 시조(始祖)로 추존되었다. 다른 유적에는 묘호가 문조(文祖)로 나온다.[2]
지금은 한족처럼 여겨지지만 당시 기록엔 강족이라 나온다.[3]
2. 상세
중국의 상고 시대인 은주 혁명기(서기전 11세기경)의 정치가이자 전략가이자, 제나라의 초대 군주. 성은 강(姜)이고, 씨는 여(呂), 이름은 상(尙). 자는 자아(子牙), 아호는 비웅(飛熊)이다. 대한민국에는 흔히 별명들인 '''태공망'''(太公望), '''강태공''' 등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4] , 그 외에도 강자아, 여상, 여망으로도 부른다.
은주 혁명기에서 주나라#s-1의 재상으로 활약한 인물. 낚시꾼의 대표로도 유명하다. 웹상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을 강태공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웹상에서 저질 떡밥을 내놓는 인터넷 낚시꾼과는 비교가 안 되는 인물 중 하나.
저서로는 병법서인 육도와 삼략이 있다고 하며,[5] 당서의 내용에서는 전차는 기병 8기분의 전력이며 기병은 보병 8기분의 전력이라고 했다. 실제로 마종이 개량되고 기마 궁술이 개발되는 춘추시대 말기 이전까지는 전차가 주 병종이었고, 이후에도 한동안 전차는 기병 몇 기분의 전력을 보여줬다. 전차가 훨씬 비쌌기 때문에 결국 전국시대 말로 가서는 도태되지만. 채리엇 항목 참조.
조상이 여(呂)땅의 제후로 봉해져 여씨 성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여상(呂尙)이라고도 불린다. 도가에서 부르는 호칭은 비웅(飛熊)이다.[6]
태공망이란 '창의 아버지 태공(太公)이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望) 사람'이란 뜻이다. 나이도 제법 비범한데, 기록에 따르면 주문왕을 따랐을 때 이미 70대의 노인이었으나, 주나라가 성립되고도 한참을 더 살았다. 이 강태공의 장수에 대하여 나온 말이 궁팔십달팔십(窮八十達八十). 태어나서 여든 살이 되도록 궁하게 살았으나, 나이 팔십에 서백 창을 만나 등용되면서 주나라를 세우고 영화롭게 80년을 더 살았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160년을 살았을 리는 없겠지만, 이후 반평생을 어렵게 살다가 나머지 반평생을 성공한 인생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7] 우리 나라로 비교하자면 명림답부급의 인물. 물론 고대 인물이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다.
3. 생애
3.1. 70세까지 무위도식
강상은 공부를 대단히 좋아했던 모양으로 70세까지 관직에는 나가지 않고 공부만 했다고 한다. 부인은 계속 뒷바라지하다 견디지 못하고 가출하였고 식량이 떨어진 그는 위수가에서 낚시를 했다.
이때 휘어있지 않은 낚싯 바늘로 낚시를 하고 있었다고 하여 강태공이 '물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낚고 있었던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오지만, 실제로는 곧은 낚싯 바늘도 낚시용 도구로 사용했었다.[8]
또는 낚시를 하긴 하였는데, 그 낚시대가 수면에서 세치는 높은 곳에 있었다고 해서 나온 이야기가 '태공조어 이수삼촌(太公釣魚 離水三寸)'.[9]
3.2. 역성 혁명
백수로 지내며 낚시를 하던 중 그 근처에서 사냥을 하던 서백(西伯) 창(昌), 즉 훗날의 주나라 문왕의 눈에 뜨여 중용된다.[10] 강태공은 그 뒤 서백 창이 은나라의 주왕에 의해 유배되자 미녀를 바치라는 조언을 하여 유배에서 풀려나게 하는 등의 활약을 한다. 이후 문왕과 아들 무왕을 보좌하여 역성 혁명을 달성했다. 주의 재상이었고, 제(산동 반도)의 공(公)으로 봉해졌다. 춘추시대 패자의 시대를 열었다는 제나라의 환공은 바로 이 사람의 후손이다. 단, 전국시대의 제나라는 나라의 주인이 전씨로 바뀌었기 때문에 태공망의 후손은 아니다.
나중에 역성 혁명을 성공하고 개선하는 그의 앞에 과거 도망갔던 그의 아내가 폭삭 늙어서 돌아와 받아달라고 엎드리자 그는 그릇에 담긴 물을 바닥에 쏟은 후 "엎어진 물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覆水不反盆)"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이 복수불반분의 고사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70살 때까지 관직에는 안 나갔어도 수년간 활약하고, 부인도 살아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론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제나라는 훗날 강성해져 춘추오패의 한 사람인 제 환공 때는 춘추 시대의 패권국이 되기도 한다. 그 이후에도 꽤 강국으로 남아 진시황의 천하 통일 시에는 가장 마지막에 멸망한 국가이기도 했다.
유명한 전략가였기 때문에, 문신인 공자와 더불어 무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후대에 유교적 사상에 충실한 관우가 급부상하면서, '''도교적 성향이 강했던''' 태공망은 밀려나게 된다.
인의와 덕이 아닌 극형으로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인의 중심의 이상적인 정치를 중시하는 유가 계열이 득세하는 후세엔 공자 등에게 까이긴 하지만, 유가, 법가, 도가, 병가 등 다수 학파들이 강태공을 선조로 모시는 관계로 백가종사(百家宗師)라 불린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 아들인 급(級/伋)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제정공(齊丁公)이다.
4. 강상을 선조로 모시는 성씨
한국과 중국의 강씨, 그리고 여씨의 시조로 꼽힌다. 한국에서는 진주 강씨와 함양 여씨, 성산 여씨가 있으며 중국에는 천수 강씨가 있다.
5. 대중매체에서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계보)
[1] 고본 죽서기년에 "강왕 6년에 제 태공망이 죽었다(康王六年齊太公望卒)."라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장붕정의 논문에 따르면 주 강왕 원년이 기원전 1010년이다.[2] 출처.[3] 출처가 필요하다.[4] 태공이 기다리고 바라던 인물이라는 뜻에서 태공망이라는 별칭이 붙었으며, 원래 태공은 국왕의 생부를 가리키는 별칭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한 고조 유방의 아버지인 유태공. 그런데 태공이라는 호칭이 그대로 여상을 가리키는 칭호가 되어버렸다.[5] 하지만 이 서적들은 후대에 작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더러는 강상이 육도를 저술하고 그것을 황석공이 다시 개량하여 쓴 저서가 삼략이라고도 한다.[6] 때문에 주문왕이 꿈에 곰을 보았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온다.[7] 임진왜란 때 활약한 권율은 40이 넘어서까지 관직을 얻을 생각은 안 하고 놀고 먹기만 했는데, 이걸 친구들이 뭐라 그러자 "그 옛날 강태공도 80대까지 놀고 먹었는데 뭘~" 이러면서 넘겼다는 일화가 있다. 그래도 팔도 도원수까지는 달기는 하셨다.[8] 현산어보를 찾아서 - 학꽁치 관련 내용[9] 이중에서 태공조어는 원자상구(願者上鉤)와 더해져서 다른 고사를 형성하기도 하고, 사조영웅전의 이막수가 무공 초식명으로 사용한 이래로 무협 소설의 초식 중 하나로 사랑받게 되니 이것도 아이러니.[10] 여기서 그 유명한 '오늘 큰 것을 낚았소' 이야기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