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문제
problem of evil
"...나는 더 이상 종교적인 주장들과 삶의 현실들을 조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 세계의 상황을 볼 때 선하고 전능한 신이 존재하는지, 그 분이 이런 세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는지 더 이상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은 고통과 괴로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나는 선하고 친절하게 행동하기 원하는 통치자가 있고, 그가 이 세상을 책임진다는 사실을 순순히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신은 신이 사랑과 능력이 많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머니를 위해 꽃 몇 송이를 손에 들고 집으로 걸어가던 어린 소녀가 음주 운전자의 차에 치여 즉사했고 신이 그것을 가로막지 않은 것에 대해 당신은 설명해야 한다..."
'''바트 어만'''(Bart D. Ehrman)[1]
'"천도(天道)는 공평 무사하여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을 든다."고 한다.[2]
하지만 백이·숙제와 같은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을 것인가. 그들은 이와 같이 인과 덕을 쌓고 청렴 고결하게 살다가 이렇게 굶어 죽었다. 또한 공자의 고제 칠십인(高弟 七十人) 가운데 중니(仲尼)는 오직 안연(顔淵)만을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추상(推賞)했다. 그러나 회(回)는 가끔 쌀뒤주가 비어 있었으며, 지게미나 쌀겨도 배불리 먹지 못하다가 끝내 요절했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도대체 어찌된 셈일까?''' 도척(盜跖)[3] 은 날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사람 고기를 회를 쳐서 먹으며, 포악한 짓을 멋대로 저지르고 수천 명의 패거리를 모아 천하를 마구 휘젓고 다녔지만 결과는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이것은 무슨 덕을 따랐단 말인가? 이런 것들은 크게 드러난 예들이다.근세에 이르러서도 소행(素行)이 도(道)를 벗어나 오로지 악행만을 저지르고도 종신(終身)토록 일락(逸樂)하여, 부귀가 자손 대대로 끊이지 않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정당한 땅을 골라서 딛고 정당한 발언을 해야 할 때만 말을 하며, 항상 큰 길을 걸으며 공명 정대한 이유가 없으면 발분(發憤)하지 않고, 시종 근직(謹直)하게 행동하면서도 오히려 재화(災禍)를 당하는 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래서 나는 참으로 의심스럽다. 이른바 천도라는 것은 과연 옳은가, 그른가?(余甚惑焉 儻所謂天道 是邪非邪)'''
1. 개요
절대선인 신과 악이 공존하는 것에 대한 모순을 다룬 종교 철학, 신학 상의 문제. '''전지전능하고 절대적으로 선한 신이 있는데 왜 악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악에 대한 일반론과는 다른 일종의 고유명사화가 되었다. 한편 신학에서는 이 주제를 다루는 분야를 신정론(theodicy)이라고 한다.
데이비드 흄이 정리했다고 알려진 요약은 다음과 같다.
- 신은 전지하다.
- 신은 지선하다.
- 신은 전능하다.[5]
- 하지만 악은 존재한다.[6]
- 1, 2, 3, 4가 일반적으로는 동시에 성립되는 건 불가능하며 그로 인해 모순이 발생한다. 즉 이 중에 최소 한 가지는 틀렸다는 결론이 나온다.
- 신이 전지하지 않을 경우: 신은 악을 없앨 의지와 능력이 있으나 악이 있는 걸 알지 못한다. 이 경우 신은 언제라도 악을 인지하면 없애려 들지만 그게 언제인지를 기약할 수 없다.
- 신이 지선하지 않을 경우: 신은 악을 없앨 능력이 있지만 신이 선하지 않거나 사악해서 악을 인지하고도 일부러 방치한다.
- 신이 전능하지 않을 경우: 신은 악을 없앨 의지도 있고 악의 존재도 알고 있지만, 능력이 부족해서 관여하지 못한다.
- 악이라는 게 사실 존재하지 않을 경우: 일단 1~4번 중 각자 하나씩 존재하지 않는 경우의 수를 따지는 것이라 '악은 없다.'라는 수 자체가 고려되긴 하지만 사실상 없는 취급이다. 윤리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종교적으로든 대부분 '악'의 존재에 대해 확실히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7]
주의할 점은 이하 서술하는 내용은 주류 기독교 및 여러 일신교에 비판적 견해가 전제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자못 편향적 서술도 존재하므로 여타 나무위키 문서가 그렇듯 걸러읽을 필요가 있다.
2. 해결 방법
일단 확실히 알아둬야 할 것은 '악의 문제'는 대부분 인격신을 믿는, 그것도 일신교(一神敎/Monotheism)적인 종교에 해당하는 문제다. 분명히 전능하지 않은 신이 나오는 그리스 고대 종교를 믿는 그리스인들도 에피쿠로스처럼 이 문제를 다루긴 했지만 넘어가자...
상술한대로 일신교에서 제일 자주 해당되는 문제며 그런만큼 일반적으로는 일신교중 최대세력을 자랑하는 아브라함 계통의 유일신교인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에서 난제로 여기는데, 종교의 특성상 교리 내에서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은 당연히 피하고 있다. 그런데 '신이 있다면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고정되어 있는 일신교인일수록 오히려 그 하나의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으로 선회하기가 쉬워서[8] , 실제로 이 악의 문제에 대해 '무신론의 암초(the rock of atheism)'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이다.
반대로 위에서 언급했듯 다신교 특히 세상을 '''아직 세상의 질서가 정립되는 과정'''이라고 보는 종교에서는 특히나 먹히지 않는 문제인데, 대표적으로 힌두교의 시바가 이런 케이스다. 시바의 경우 폭력적이며 권능의 발현 과정에서 수많은 파괴아 파멸, 혼란을 초래하지만 '''정작 교리상으로는 시바 또한 선한 신이며 아예 삼주신 중 하나다.''' 이렇게 된 이유는 힌두교에선 교리상 '파멸을 통해 창조가 이루어진다.' 좀 쉽게 말하면 '헌 것을 부숨으로서 새 것을 마련한다.'와 비슷한 논리로 창조를 위해선 파괴가 불가피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렇다보니 다른 삼주신인 비슈누, 브라흐마교도들과 시바교도들 사이엔 비정기적으로 벌이는 신학적 논쟁이 있는데, 저 둘의 교도들은 '시바가 때려부순 걸 우리가 모시는 신들이 개고생하며 수습한 것이다.'라고 말하며 시바 신들은 '우리 신은 짱짱해서 파괴고 창조고 다 완벽한데, 아직 파괴를 수행하던 중에 창조조차 제대로 못하는 나머지 둘이 멋대로 일처리를 해서 이런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즉 이들 모두 시바를 보는 관점의 차이는 어느정도 있을 지언정 '파괴 이후의 창조'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긍정한다.[9]
그 외에 조로아스터교의 앙그라 마이뉴나 이집트 신화의 아포피스 같이 선신에 맞먹는 능력을 지닌 '''순수한 악'''을 증명하는 악신이 있는 종교면 그냥 죄다 저 신 탓이라고 돌리면 되므로 '악의 문제'가 먹히지 않는다[10] . 이 경우 좀 더 자세히 가면 결국 앙그라 마이뉴 조차 절대신의 피조물이고 악은 옳지 않으므로 언젠가 사라질 운명이라곤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라'''[11] 악은 남아있다고 주장한다. 아포피스의 경우는 라의 쌍둥이[12] 로 악신이기는 하나 라와 괴수물을 찍는 등 단편적인 묘사만 존재하기에 앙그라 마이뉴나 사탄의 그것과는 양상이 다소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다신교 문화권에서 악의 문제에 대한 화두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곤란한데, 문서 상단에 기재된 사마천의 사기부터가 중국 신화를 기반으로 한 한나라 시대의 저작물이며 중국 신화 역시 다신교를 모태로 하고 있다. 다만 동양에서 논하는 '천도'란 비인간적인 추상적 개념이기에 후술할 "악이라는 것은 인간의 관점일 뿐, 신(천도)의 관점에서는 악이 아닐 수 있다" 라는 변론이 가능하기에 사마천 역시 "천도가 옳은가? 그른가?"라는 열린 결말로 문단을 끝맺을 뿐 끝내 결론을 내리진 못했다. 하지만 일신교 문화권에서는 상술한 전지전능, 지선한 인격신이라는 전제를 포기할 수 없기에 딜레마가 발생하는 것.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이럴 경우에는 '''존재하는 유일한 신이 악한 존재''' 라고 말한다면 이 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어서 '''그런 대담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종교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종교를 알지 못한다고도 말한다. 당연하지만 존재하는 유일한 신이 악신이라면 그 신을 믿어야 하는 이유가 없고 이러면 종교 자체가 성립하기 어려울 테니까. 어쩌면 세상에 악한 유일신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이 생각은 "악신론"(dystheism/misotheism)이라고도 불리곤 한다. 소설가 김영하는 이를 두고 '신은 비대칭의 사디스트'라고 하기도 했다.
3. 지금까지 제시된 해결책과 그 반박들
이에 대해 고대로부터 여러가지 답안들이 제시되어 왔으나 아직도 기존의 종교 교리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사실 세부적으로 본다면 이거 말고도 굉장히 많다. 한 사람 한 사람 이 악의 문제를 설명하는 논리는 조금씩 다르다. 그렇기에 여기는 포괄적이며 대표적인 것 몇 개만 서술한 것이다.
3.1. 그나마 여기가 가장 좋은 세상이다.
'변신론' 혹은 '신의론'이라고 번역되는 주장이다. 독일의 철학자 고트프리트 폰 라이프니츠는, 여기가 그래도 있을 수 있는 세상 중에서는 가장 좋은 세상이라고 주장했다.신의론(神義論)이라고도 번역되는 이 단어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theos(神)와 dike(義)이며 ‘신의 의로움’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세상에 존재하는 악으로 인해 생겨나는 신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려는 주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변신론에서 연구의 주요한 초점은 “우주에 명백히 존재하고 있는 악의 실재에도 불구하고 신의 선(善)과 섭리를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가”이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악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서 많은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숙고해 왔다.
페르시아 종교와 같은 이원론에서는 세계란 선과 악이 서로 투쟁하는 전쟁터이고, 결국에는 선이 승리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일신교의 경우에는 신의 전능과 사랑이 현세의 악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오리게네스는 악의 존재를 피조물이 자유를 남용한 죄의 결과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계몽주의시대의 회의주의자 베일(P. Bayle, 1647-1706)은 매력적인 변증법을 사용하여 악이 실재한다는 사실과 신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 격론을 불러일으켰다. 라이프니츠(C.W. Leibniz)는 그의 저서 ≪변신론≫(Essais de Theodicee, 1710)에서 이에 답하여 현실의 세계는 가능한 한 최고선의 세계이고, 회화(繪畵)에서 그림자가 전체의 미와 조화를 산뜻하게 부각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처럼, 가시적인 악은 보다 높은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인정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 그의 극단적인 낙관론을 피력하였다. 이렇게 변신론이란 단어는 라이프니츠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근대에 들어오자 자연적인 악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악이 크게 부각되면서 '''변신론은 신학적인 중심논제의 위치에서 밀려났다.''' 즉 사회악이 신의 사랑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근대신학은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을 통해서만 신의 사랑과 섭리가 관철될 수 있음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특히 1, 2차 세계대전은 인간성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를 뿌리째 뽑아 버렸기 때문에 인간생활에 존재하는 악의 실재와 신의 사랑에 대한 문제가 논쟁의 촛점이 되었다. 이제 변신론은 이 문제의 중대성에 밀려 더 이상 논급되지 않는다.''' 다만 신에 대한 형이상학의 한 부분적 학문인 자연신학(natural theology) 속에서 언급될 뿐이다.
'''가톨릭 대사전, <변신론> 항목 中'''
이 주장은 현대신학에선 거의 폐기된 주장이다.
- 현실에선 한낱 인간들조차 법을 만들고 치안을 확립하며, 도덕과 윤리를 교육하여 사회를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 중 상당수는 실제로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다. 인간도 할 수 있는 일을 전지전능한 신이 못한다는 것인가? 인간 사회의 변화는 지금 이 세상이 완성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이 주장은 그 자체로 신의 전지전능함에 한계를 인정하고 있는 셈.
- 당시의 계몽주의 지식인들에게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이 가장 크게 반박받은 것은 이미 1755년 포르투갈 대지진이라는 반례가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해당 항목 참고. 아닌게 아니라 이 사건 이후로 유럽인들은 세계관이 완전히 뒤흔들려서 "섭리하는 선한 신" 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엉망진창이 되었고 계몽주의가 큰 호응을 얻었다.
- 볼테르는 자신의 소설 《캉디드(Candide)》에서 라이프니츠의 이런 주장을 풍자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온갖 불행을 겪지만(위의 포르투갈 대지진도 경험한다) 자신이 그래도 가장 행복하다고 착각하면서 살고 있다. 애초에 신에 비하면 지성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인간조차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할 수 있고 그것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신이라는 존재가 그런 세계를 상정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눈으로는 악으로 보이는 것이 신에게는 선한 것으로 정당화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인간을 해치는 재앙을 일으키거나 방조하면서 선한 것으로 간주하는 그런 신을, 인간은 왜 따라야 하는가? 신의 선한 의지로 발발한 최악의 결과에서 인간이 얻을 것이 과연 무엇인가? 인간은 느낄 수도, 얻을 수도 없는 '선'을 신만이 인지한다면, 그 선은 인간에게 어떠한 가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세상을 가꾸고 보다 좋은 제도를 도입하거나 정책을 실시하는 것이 신의 의지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신은 악이 가득찬 세상에 인간을 내던지고 인간이 악전고투하며 문제를 해결하도록 내버려둔다는 게 된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 때문에 신을 섬기는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신에게 '선한 의지'로 '악한 상황'을 초래하게 하는 신은 인간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이프니츠의 논리가 오늘날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단순히 볼테르가 편협하다거나 라이프니츠의 사고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 논리 수준이 빈약하여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장 현재 신실한 신학자들조차 라이프니츠의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만 봐도 이 사실은 자명하다.
3.2. 자유의지 때문이다.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고 인간이 그 자유의지를 사용했기에 악이 발생한다는 주장이다. 기독교 내에서는 악에 대한 해명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으나, 여전히 허점이 많아 악의 문제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이 되기엔 부족한 상황이다.
3.2.1. 자유의지의 존재유무
당장 자유의지 문서만 참고해도 알겠지만, 자유의지가 존재하는가부터 확실치 않다. 애초에 자유의지의 정의는 천차만별이고 결정론 계통에서는 근본적인 입장으로 자유의지를 부정하기도 한다. [13]
이 문제에 대해 한 신학자는 '신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지만 너는 신이 아니라 정답을 모르고 선택의 순간에 네 의지대로 행하였으니 전지전능함과 자유의지는 충돌하지 않는다.'라는 답을 한 적이 있으나, 이런 식의 답변은 결국 ‘선택의 결과가 정해져있는데 과연 그게 진짜 자유의지인가’하는 제일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는 바로 아래의 문제로 이어진다.
3.2.2. 기회의 문제
높은 자리에 있으면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모두 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그러나 나쁜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높은 사람에게는 천부의 저주다. 왜냐하면 나쁜 일이라면, 제일 좋은 조건이 그러한 마음을 먹지 않는 것이요, 그 다음이 그럴 수 있는 여건에 놓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베이컨, "베이컨 수필집(김길중 역, 문예출판사)" 중 '높은 지위'
어째서 자신의 피조물을 사랑하사 그들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길 바라는 전지전능한 신은 악을 행할 가능성이 있는 자유의지를 주었는가? 본래 야훼를 비롯한 아브라함 계열 종교의 입장으로는 창조주는 인간을 만들 때 자신을 닮도록 했고, 인간을 자신의 아들 딸이라고 부른다. 현 세태를 생각하자면 옆집에 도박장이 있는 집에 이사간 거나 다름없다.(전략)그때 현문스님이 다니던 성당의 주교님은 폴란드에서도 가장 존경 받는 카를 보티라[14]
추기경이었다. 이분이 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되신 바로 그분이다. 현문스님은 카를 보티라 추기경이 교황이 되기 1, 2년 전에 견진성사 의식에 참여한 것이다. 그러니 그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얼마나 영광된 일이었겠는가.수련 마지막 날, 추기경님은 학생들에게 그 동안 가르침에 대해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현문스님이 번쩍 손을 들었다. 그는 당시 어린 나이였는데도 일찍 삶과 죽음의 근원적 의문에 휩싸였다. 세상의 많은 불공평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그였기에 견진성사를 받기 전에 반드시 이 의문을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문스님이 입을 열었다.
“신부님, 하느님께서 우리를 똑같이 사랑하신다면 왜 장애인들을 만드셨을까요?”
신부님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건 우리가 장애인들에게 동정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우리가 나쁜 일을 하면 그렇게 태어날 수 있다[15]
는 것을 경고하시기 위함이지.”현문스님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만약 그러한 신이라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순간 성사를 받을 수 없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신부님 말씀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성당을 나와버렸다. 그리고 난 뒤 성당에는 아예 발길을 끊었다.
(열림원) 중 '나의 도반 스님들'
다른 관점에서는, 많은 현명한 부모들이 자기 자식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며 자기 자식의 꿈이 자신의 생각과 달라도 인정 해주는 것처럼 신 또한 피조물들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구약을 통째로 부정하는 것이다. 이집트 인들이 유태인을 어떻게 억압했건 간에 그건 이집트 인들의 자유의지로 이루어진 결과이기 때문에 신이 직접 나서서 이집트인들을 학살하면서까지 유대인들을 가나안으로 이끌면 안 되는 것이다. 신이 유태민족을 이끌면 유태인들과 이집트인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이에 관하여 기독교에서는 천국은 창조주와 함께 하는 자리고 지옥은 창조주의 결여하는 장소라 표현하는데, 교리에 따르면 사후 그 자가 어떤 삶을 (그것이 악하든, 선하든) 살아왔든 간에 그는 우리 모두를 사랑하기에 이대로 자신과 함께하길 원하지만 함께하길 원치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를 존중한다고 말한다. 신과 함께하고 싶지 않은 자가 당도하게 되는 자리가 바로 지옥, 즉 신이 결여된 장소인 것이다. 따라서 구약과는 달리 신약 이후의 기독교에 가장 중요한 방향성이라면 이와 같이 무조건적인 자비와 선이고, 이는 종파에 따라 다르지 않다. 한 때 동성혼에 대해서 찬반논란이 과열되고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동성애자들은 천벌 받을 죄인이라고 매도할 때 당대 교황이었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비록 동성애자가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내 앞에서 진실로 하느님을 구한다면 내 어찌 이들을 품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고 한 것이 이와 일맥상통한다. 예수가 과거, 현재, 그리고 앞으로 지을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임당한 이래, 무조건적인 자비와 사랑은 현 기독교의 핵심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다만, 이는 '''교리가 그렇다는 것이며 여전히 믿음의 문제로서 이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이 바라는 합리적인 답변은 되지 못하는, 다시 말해 내수적으로나 해결책이 될 수 있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단순히 개인이 신을 거부하여 지옥에 간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고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상황을 신이 바로잡아 주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식의 의사를 존중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이 아닌 삶을 택하는 것을 인정해준다 하더라도, 그가 타인과 사회에 해를 입히는 행위를 하는 것까지 내버려두고 방관한다면 대체 그를 어떻게 좋은 부모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3.2.3. 자유의지가 있든 말든 악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아예 주지 않으면 되지 않는가?
상제가 아당(亞黨)을 만들어서 인류의 조상으로 삼았다면 그 신성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찌 상제가 마귀의 거짓말을 곧이 듣고 마귀를 시켜서 아당의 마음의 진솔성 여부를 시험하였겠는가.[17]
설사 아당이 참람되고 망령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상제로서는 의당 다시 주의를 주고 권면하여 고치게 하기를 훌륭한 아버지가 자식에게 하듯이, 좋은 스승이 제자에게 하듯이 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 상제로서 이런 일을 하였겠는가.
신이 인간을 사랑하고 전지전능하다면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들이 서로 싸우지 않도록 안배하는 것이 옳다. 식량이 부족해서 싸우지 않도록 모든 이들에게 만나를 베풀고 땅이 부족하지 않게 아름다운 목초지를 약속해야 한다. 그러나 재화는 늘 부족하고 불공평하게 분배되며 이로 인하여 싸움과 전쟁이 끊이질 않는다. 요약하자면 자유의지는 허락하되 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방도를 '''전지하다면 알아야 하고, 전능하다면 가능해야 하고, 절대선이라면 이를 이행해야 한다.'''"예수요? 예수는 남조선에만 사는 겁네까? 남한 북한 이렇게 차별해도 되는 겁네까? '''세상 사람 다 구하러 왔다메?'''"
창세기에서만 해도 사시사철 푸르른 목초지에 과실이 무한히 열리며 댓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는 나무 등이 있었다고 하나, 인간의 범죄 이후로 지구 전체가 야훼에게 저주를 받아 무한한 생명력을 잃었다고한다. 비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천하의 억지일 수도 있지만, 신의 관점에서 보면 스스로 죄를 지어 저주를 받아놓고 왜 자신들에게 무한한 자원을 베풀지 않는 것이냐며 원망하는 꼴이다.
그러나 전지하며 전선한 존재가 세상을 창조했다면 이 이야기는 성립하지 않는다. 전지하기 때문에 그 결과를 미리 알고 있었을테고, 전선하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인간"들이 죄를 범하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과학자 A가 인공지능을 탑재한, 인간과 같은 외관을 가진 로봇을 만들었다고 가정하자. A는 로봇이 단순한 기계를 넘어서길 원했기 때문에 위험성을 알면서도 몇몇 행위(이를테면 살인)를 금지하는 프로그램을 탑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로봇은 연구실을 벗어나자마자 한 행인을 살해했다. 이 경우 A는 그저 만들었을 뿐 로봇에게 살인을 명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사실 자유의지가 없더라도 주어진 환경이 좋지 않다면 악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지전능하고 선한 신이라면 자유의지를 주는 동시에 상황도 더욱 좋게 이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앞으로 위험에 처할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막을 힘도 갖추었지만 상황을 통제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에피쿠로스의 말처럼, 그런 존재를 선하다고 하기는 문제가 있다. 실제로 창세기에는 이 땅이 저주를 받았다고 나와있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아무런 조건 없이 무한히 소산을 내놓던 땅은 이제 인류가 스스로 경작해야 했으며 경작을 방해하는 잡초나 엉겅퀴들이 생겨났다. 즉 성경에 따르자면 원래 이 세상은 100% 완전하게 창조되었으나 죄가 들어오면서 야훼의 저주를 받아 이 꼴이 되었단 얘기다. 그러나 또 반복되듯이 전지전능한 신이 실재한다면 그러한 저주도 해결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럴 수 있는데 그러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선이 아니라는 의미다.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오류가 없어야 하며 야훼는 행동을 번복할 수 없다. 때문에 에덴은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최후의 날에 현 우주를 멸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고 한다. 즉, 언제인지도 모르는 최후에는 가능하지만 당장은 안 된다는 것인데, 전지전능한 존재치고는 많이 궁색한 변명이 아닐 수 없다.
신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 어떤 자원도 부족하지 않고 풍족한 지구라고 해도 과연 다툼이 없을 것 같은가? 답은 그래도 있을 것이다. 당장 학생들이 밥 한 숟갈 더 먹자고 교실에서 다투는 일이 얼마나 되는가.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싸움은 기본적인 자원이 부족해 싸우는게 아니라 풍부한 자원의 토대 위에서 싸우는 것이다. 즉 있는 사회라서 싸운다. (애초에 이 또한 무신론자들이 기회의 문제에서 내세운 주장에 따르면 과연 서로 싸우지 않도록 안배하는 자유의지가 진정한 자유의지인지 논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싸움과 전쟁이 끝나지 않는 건 인간의 욕심이 만든 그들의 자유의지지, 누구의 탓도 아니다. 더구나 시대가 발전하면서 그 전쟁과 다툼도 점점 잦아들고 있다. 세간에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지만, 인간은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총력전을 통한 강대국끼리의 전쟁보다는 평화가 더 최선이고 이롭다는 것을 알았고, 점점 많은 것들이 나아지고 있다. 그리고 애초에 신이 욕심 이라는 개념을 만들지 말았음 모두 해결될 문제다. 이건 신이 아닌 인간의 성과고 그 외의 비극적인 건 신이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서 생겨난 책임이다? 인간이 서로 싸우는 것이 신의 책임이라면 인간이 21세기에 이르러 점점 평화의 시대로 나아가는 것 또한 신의 안배가 아니겠는가?' 라는 논조는 문제가 있는 것이 윗 글이 말하는 '평화의 시대'는 상대적인 평화로 애초에 싸우게 됨을 초래한 책임이라는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 발언이다.
그러나 모든 전쟁이 욕심이라는 개인적 동기로 인해 발생하지는 않는다. 토마스 무어의 유토피아에 나오는 구절을 빌리자면, "결핍의 공포가 없음에도 욕심을 부리는 동물은 없다". 학생들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마찰과 자원전쟁을 동급으로 놓는 것은 무리다. 단순히 국가의 창고를 좀 더 채우려는 욕망에 엄청난 희생을 가져올 수도 있는 전쟁을 일으킬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구나 노력에 따라 균일하게 자원을 얻을 수 있다면 다른 이가 가진 영토나 재산에 눈독 들일 일은 없겠지만, 애석하게도 자원은 대개 특정 지점에 편중되어 있다. 국가 간 무역이 진행되면 이러한 차이로 격차가 생길 수 밖에 없고, 이것은 장기적으로 국가 간의 다툼을 불러오게 된다. 역사상의 거의 대부분의 전쟁은 이러한 경제문제 해소나 요충지 확보를 위해서였다. 근대에 제국주의가 등장한 근본적인 원인도 단순히 유럽인들이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다른 지역의 자원이 유럽에는 없고, 이를 각국이 들여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경쟁이 발생하기 때문에, 여기서 뒤쳐지는 것을 장기적으로 큰 위협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혹은 지금은 안전해도 언젠가 자원이 부족하리라는 위기의식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국가를 경영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복잡하며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지도자들이 탐욕스럽지 않아도 전쟁만이 돌파구인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어떤 독재자나 전제군주가 개인의 영달을 위하여 전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역사를 돌아볼 때 그런 강력한 체제가 등장한 배경 자체가 거의 분배 문제로 인한 혼란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놓인다고 누구나 똑같이 악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나, 사실 인간 본성에 대해서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결국 누군가가 손에 피를 묻힐 것임은 거의 확실하다.
이에 대한 신학적 반론으로 장 칼뱅과 마르틴 루터는 자유의지는 분명 존재하고, 또 인간에게 주어졌으나 인간 본성의 악함(원죄로 인한)으로 인간은 자연히 악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아우구스티누스-히에로니무스의 은총 교리는 애초에 인간이라는 족속 자체에 신 없이는 구원- 참된 선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보며 인간이 자유의지와 그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논리는 가톨릭, 개신교 구분 없이 이단이다(펠라기우스주의 참조).
물론 이 반론은 애초에 반론이 되지도 못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성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요소라는 것이다. 제작자가 나몰라라 할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만든 당사자가, 자기 말 안 들으면 무조건 나쁜 놈이고 지옥간다고 협박하는 꼴이니 적반하장이다. 종교에서 어떻게 보는지가 대체 무슨 답이 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보는 것에 어떤 납득할 만한 근거가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특히 이러한 논리는 도덕, 윤리가 종교에 귀속될 수밖에 없어서, 실제 도덕, 윤리가 종교적 교리로 왜곡될 위험성이 있다. 즉, '신의 뜻 = 진정한 선'이 되기 때문에 현실에 맞지 않는 비윤리적인 행위들이 신의 이름 하에 버젓이 행해지는 근거가 된다.
신학에서는 위에서 말한 조건들, 모두에게 자원이 공평하면서도 풍족하게 분배되는 조건 하에서만 선하고 그렇지 않으면 바로 악해지는 게 어찌 선한 것이냐며 반론하기도 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진정으로 선한 사람이라면 풍족하고 평화로운 상태가 충족되어야만 선한 것이 아니라 설령 지옥불에 온몸이 활활 타고 있어도 선함을 잃지 않아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는 풍족한 지역, 가난한 지역, 고귀한 태생, 천한 태생, 천재와 범재 등등 사람을 선하게도 악하게도 만드는 이루 말 할 수 없이 다양한 삶의 양식이 스며들어 있고 그 안에서 삶의 기쁨을 누리던 고단함에 고통을 받든지 간에 인간 스스로의 자유의지로서 선하게 살아야 구원 받는다고 한다. 신적인 존재가 선하게 살 만한 오만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줘서 비로소 선하게 산다면,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신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선하게 살도록 신적인 힘으로 유도, 혹은 강제하는 것이기 때문. 신의 은총 아래에서 운명의 과실이 그 즙이 줄줄 흐르는 속살을 알아서 벌려주는 삶, 그렇게 삶의 고통을 모른 채 오직 즐거움만 누리면서 선해봐야 무의미하다. 삶의 단맛뿐 아니라 쓴맛, 매운맛, 떫은맛을 보았음에도 그래도 스스로 선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로서 구원의 길을 걷는 것이다...라는 게 그들의 논리다. 문제는 인류 개개인마다 태생이나 환경 등의 차이가 있어 모두가 공평하게 삶의 단맛 매운맛 떫은맛 다 적절히 보면서 살다가 어떻게 살아갈지 선택권이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부유한 집안에서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 경우는 상대적으로 삶의 단맛을 다른 이보다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하층민 집안에서 장애까지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 경우는 당연히 삶의 떪은맛 매운맛만 주구장창 맛보게 된다. 이렇게 서로 다른 태생과 환경은 그 사람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과 자세, 행동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정말로 인간의 인생에 오만가지 유형의 맛이 주어지고 그러한 것들을 모두 경험해보면서 자기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게 신의 의도라면 지금 70억 인류에게 각각 빈부, 외모, 국적 등의 차이가 있는 것이 설명이 안 된다. 시험을 치를 것이라면 당연히 같은 문제지를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3.2.4. 전지전능한 신과의 모순
특히 유일신을 기반으로 한 종교에선 신을 전지전능한 존재로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하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신이 알아야 한다.''' 즉 신이 전지전능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이 창궐하는' 자유의지를 주었다면 신은 실제로는 전지전능하지 않든지, 아니면 전지전능하지만 해결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든지 한다는 자체적 모순에 빠지게 된다. 쉽게 예를 들자면, 전지한 신이라면 뱀이 인간을 유혹하여 인간이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신은 뱀을 창조했고, 결국 인간에게 벌을 내린다. 즉, 인간이 죄를 짓도록 자신이 설계한 주제에, 정작 인간이 죄를 지으니 그에 대한 벌을 내리는 것이 된다.
3.2.5. 자유의지는 정말 악의 근원인가?
모든 악이 자유의지로 인해서 나타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이코패스만 보더라도 순수하게 자유의지 때문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이런 답은 악을 개인의 의지 문제로 국한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만하다. 어떤 이들은 선천적인 결함을 지닌 존재가 모두 악인이 된다는 것은 아니며, 장애가 있거나 뇌해부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그들에게는 순수한 자유의지가 없냐고 주장한다. 단적으로 말해 왜 사이코패스와 장애인들의 자유의지가 우리와 같은 순수한 자유의지가 아니라고 멋대로 단정 짓는 것인가? 이다. 그러나 이것은 얕은 생각인데, 사이코패스는 의학적 정의상 공감 능력 자체가 없는 이들이다. 이들도 자유의지는 있다. 오히려 자유의지가 있는데 공감능력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자유에 따를 때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다. 겉으로 선량하게 행동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들 역시 악에 대한 처벌을 분명히 인지하기 때문이고, 자신의 천성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공감능력의 부재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자유의지에 따라 그들이 선택한 특성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자유는 있지만 그 자유로 택하게 되는 것은 자유롭게 택할 수 없고, 그것의 궁극적 원인이 신이라면 책임을 물 수도 있는 것이다.
여차 저차 하지만 무신론자들과 기독교인과의 기본적인 의식의 차이는 현실에서의 죽음과 고통이 '악'인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갈리게 된다. 무신론자들은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사후의 보상으로 현실에서의 고통이나 죽음을 상쇄할 수 없고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위해 현재 이런 고통을 치르는 이유에 의문을 던지며, 기독교인들은 사후의 영생과 구원을 믿고 현세의 고통이나 죽음을 신의 의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관점을 받아들이면, 현세에서의 가치판단 기준이 모호해진다는 것이다.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나도 신의 의지로 받아들이면 끝이니 문제 해결에 적극적일 수가 없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또한,이 부분에 대해 어폐라는 주장도 있다. 정말 오래 살았거나 미치지 않은 이상 고통과 죽음이 왔을 때 신을 원망하지 않는 자는 없다는 말인데,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 원망할 대상이 필요한 것이 일반적인 사람으로서 당연하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운명이나 남을 원망하는 등 신자들이라면 그 대상이 신이 되기가 쉽다. 게다가 애초에 이 이야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관점에서 무신론자보다는 덜하다는 것이지 기독교인도 신을 원망하게 된다고 해서 어말이 되지 않는다. 사후세계를 믿는 사람이 죽으면 끝이라는 사람보다는 죽음에 대해 덜 나쁘게 받아들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무신론자 관점에서는 심판을 기다리는 죽은 자보다 오히려 걱정을 덜 한다고 본다.또한 심판을 기다릴 필요 없이 진정한 '끝'으로 받아들이므로 실질적으로는 무신론자가 편안히 죽는다고 볼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선과 악에 대한 판단 기준이 문화적, 사회적, 시대적 배경에 따라 조금씩 바뀌는 것 때문에 개인의 자유의지와는 무관하게 악이 일어날 수 있다. 이 경우엔 선악에 과연 절대적 기준이 있는가 하는 점이 먼저 문제가 된다. 종교인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악의 판단 기준이 아니라 신의 뜻을 선의 기준으로 삼는다고는 하는데, 문제는 신의 뜻이랍시고 나오는 종교 교리조차도 문화적, 사회적, 시대적 배경에 따라 바뀌어 왔다는 것이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신의 뜻이 변하면 안 된다는 것 또한 무신론자들이 만들어낸 편견일 뿐이라고 하는데, 사실 논점이 매우 어긋난 반박이다. 또한 근본적으로 기독교인들의 유일한 근거인 '성경은 100% 사실이다'가 무너진다 .여기서 말하는 변하는 교리란 것은 무슨 구원이나 심판에 대한 교리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건 어차피 종교인들에게만 중요한 내용이니 비종교인들이 그런 부분까지 문제삼는 경우는 드물다. 여기서 말하는 교리는 선악에 대한 부분, 윤리적인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는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비윤리적인 행위들이 많이 나오는데, 야훼가 그 당시에는 그런 행위들을 방조하거나 조장한 뒤에 이제 와서 변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한다면, 과연 그런 신이 선악을 논하는 것에 어떤 위엄이나 권위가 있겠냐는 말이다. 다른 부족을 공격해서 갓난아기까지 몰살시키는 행위에 대한 선악 판단이 시대에 따라 바뀌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그 판단 주체가 '''인간'''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신은?
이것 역시 기독교에서는 야훼가 당시 사람들의 문화와 윤리 수준을 맞춰준다고 한다. 당장 적은 삼대를 멸하고 여자는 끌고 가서 종으로 부리는게 아주 합당한 시절에서 불살주의를 주장하며 신약의 예수마냥 다 용서해라.라고 한다면 어느 인간이 미쳤다고 신을 따르겠는가? 당시 유대 민족으로부터 자신의 거룩함과 영광을 알려 만민을 구원하려는 계획을 가진 야훼로서는 추후 자신의 계획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것들은 모두 제거하는게 답이기는 하다.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하는 격. 심지어 당시만 해도 유대인들은 야훼가 주는 이익을 믿고 야훼를 따랐지 야훼가 신이라 따른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가나안 입성 전부터 삐긋거리더니 입성 후에는 뒤통수만 수십 번...
물론 이것도 같은 수준에서 반박이 가능하다. 애초에 신이 당시 사람들의 문화와 윤리 수준에 맞춰준다고 하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전지전능한 신이 인간들을 일깨워주고 계몽하기는 커녕 비위를 맞춘다는 뜻이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잘못된 윤리기준을 바로잡아야 할 신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스스로의 윤리, 도덕적 기준이 아닌 인간들의 윤리 기준에 맞춰준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 무엇보다도 어느 인간이 감히 대홍수를 일으키고 도시를 통째로 불태우는 신이 말하는 것을 자신들의 문화에 어긋난다고 안 따를리가 없다. 신으로서의 위엄 한번 선보이면 자신들의 문화고 뭐고 당장 따르지 않았을까? 심지어 아브라함은 신이 자신의 아들을 바치라고 하자 실제로 바치려 들었을 정도다. 도저히 이익을 믿고 따른 자의 행동이라고 볼 수 없다.
3.2.6. 자유의지를 논하는 것으로는 어떤 식으로도 답이 되지 않는다.
자유의지에 해당하는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악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는 이야기. 쉽게 이야기해서 길 가던 의사가 뺑소니 사고를 목격했다고 치자. 이 의사가 사고 피해자를 구해주는 것이 뺑소니 운전자의 자유의지를 침해하는 일일까? 전혀 아닐 것이다. 자유의지를 존중해서 뺑소니 운전자가 사고를 치는 것을 방관하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그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가 생겼을 때 충분히 도와줄 능력이 있음에도 구해주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한낱 인간들조차 무고한 피해자들을 돕고자 하는데, 충분한 능력을 갖춘 신이 방관한다는 것은 변명이 불가능하다.
원죄론은 답이 될 수 없다. 원죄론으로 악의 문제를 답하려는 시도는 전형적인 애드혹으로서, '''너네는 기억도 없겠지만 태어날 때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나 고통스러운 것이니 그런거 따지지 말고 열심히 믿기나 해라'''는 식의 회피에 불과한 것이고, 실질적으로는 악의 문제에 대해 아무런 답도 안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니, 사실은 그 이상으로 매우 악질적인 행위다. 상대가 잘못했다고 윽박질러서 주눅들게 하고 스스로가 잘못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노예 농장주들이나 인신매매범들, 독재자들이 자주 하는 행동이다. 또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언제일지 모를 먼 훗날의 보상이 과연 지금의 고통보다 나은 대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고통이란 게 무슨 숫자로 치환되는 대상도 아닌데, 지금 아프리카 내전에서 산채로 불에 타죽은 어린아이의 고통이 과연 훗날 천국에 드는 것으로 보상이 될 리 없다. 제아무리 극상의 기쁨과 즐거움이 주어진다고 해서 산채로 불에 타 죽거나 그에 준하는 고통들에 대한 보상이 과연 될지 생각해보자. 그런 생각을 가진 신이 과연 인간의 관점에서 선한 신이 될 수 있을까?
3.3. 신의 악에 대한 대응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지금은 구약 시절 때마냥 죄악이 난무한다고 소돔과 고모라에 신이 손수 메테오를 후려치던 시절이 아닌 예수가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모두 짊어지고 죽음으로써 인간의 죄악이 모두 면제된 신약 이후의 시대다. 구약과는 달리 인간의 죄로 인해 신과 인간 사이에 단절이 이어진 지금 같은 시대에서 더 이상 신은 구약 시대마냥 직접적으로 함께하지 않는다. 다만 영적으로 함께하며 피조물이 시련이나 위기에 빠졌다면 이를 이겨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올바른 길로 비춰줄 뿐이다. 그것에 응하고 자신의 의지로 걸어갈지는 피조물의 선택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우화로도 제시된다.
기독교 교리의 기본은 예수가 인류 대신 피흘려 죄를 면제해 주었다는 것, 즉 '''사람과 신 사이에는 단절이 없다'''이다. 그렇다면 '신은 최소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도 실질적으로 개입하여 구원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는 간절히 기도하면 들어준다는 구절도 많이 있다.[19] 이런 구절들의 의미를 위에 사례에서 구조대를 보내준 것 처럼 기회를 주어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지나친 폭우로 인해 홍수로 침수될지 모르는 마을에 한 청년이 있었다. 라디오에서 이를 경고하며 경찰들이 조기에 주민들을 피난시키려 하자 마을 사람들이 피난하는데 청년은 피난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네, 도망치지 않고 뭐하는 건가?" 라고 물으니 청년은 기도하면서 "괜찮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지켜주실 거니까요." 라고 말했다. 이윽고 마을이 침수되기 시작하고 구조대의 구조선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도착했으나 다른 주민들과는 달리 여전히 청년은 주님이 지켜주실 거니까 괜찮다며 구조를 거부했다. 조금 있은 후, 이번엔 구조 헬기가 아직 구조되지 못한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날아왔지만 마찬가지로 청년은 주님이 지켜주실 거라며 구조를 거부하고 가만히 기도했다. 그리고 결국 마을 전체가 침수되면서 청년은 익사했다. 사후, 청년은 하느님 앞에 서게 되자 굉장히 억울한 얼굴로 따지고 들었다. "주님! 전 주님이 절 지켜주실 거라고 믿고 마지막까지 기도했는데 어찌하여 절 지켜주시지 않으신 겁니까!" 그러자 하느님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서 내가 너한테 세 번이나 구조대를 보냈잖아!"
허나 이 문제의 논점은 잘못을 저지른 자가 자기의 실수로 악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을 저지른 이의 행위 결과를 아무 상관없는 이가 받았다고 할 때 그 책임은 분명 저지른 자에게 있지만 그것의 결과를 '무고한' 이가 당한다면?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남의 행동에 피해를 입는 일은 일상다반사이고, 이것이 부당함에도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신이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어떤 신의 뜻이 있다 해도 그것을 모르는 인간이 이에 항의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위의 우화가 묘사하는 바와는 달리 현실에서는 설령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재난이나 사고로 미처 도움을 구할 여유도 없이 목숨을 잃거나 돌이킬 수 없는 고통에 빠지는 사례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충분한 비유로 보기에 어려움이 있다.
3.4. 신 또한 악의 코드를 가지고 있으나, 악을 행하지 않는다.
신은 선의 코드와 악의 코드를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 "오직 선만을 행하는" 존재라고 규정하는 방법이다. 이 경우 천사와 같은 신의 수족은 "선의 코드만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아브라함계 종교의 사탄과 같은 적대자는 "악의 코드만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규정된다. '''인간은 마치 신과 같이 선과 악의 코드를 모두 가지고 있으나 둘을 같이 행하는 존재'''로 규정된다.
대표적으로 헤겔은 악도 신 자신에 의해 정립되는 것으로,“세계의 모든 것은 신적 정신 혹은 靈(Geist)으로서의 신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여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변증법적 운동으로부터 온다.악은 정신의 변증법적 자기활동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요한 요소이며 정신에 의하여 부정되고 고양 된다”고 했다.[20]
이것은 굉장히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설명으로, 결국 '''신은 자신과 같은 존재를 원해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계 종교의 야훼를 설명하는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는데, 야훼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므로, 야훼의 창조목적이 자신과 같은 존재를 얻는 것이라면, 인간이 그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야훼처럼 "스스로 존재할 수 있어야한다." 따라서, 악은 인간이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즉, 선택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인 "악이냐 선이냐?"를 구성하기 위하여 악과 선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이 해석은 신의 창조 사유가 인간이 자손을 얻고싶어 하는 욕구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전제를 요구한다. 따라서 이 전제를 사용하지 않는 종교에서는 이 해석을 사용할 수 없다. 또한 이 해석은 인간이 신에게 악의 방치를 항의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신의 목적이 애초에 스스로 선을 선택하는 존재의 생산에 있기 때문에 신이 악을 제거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가톨릭에서도 이레나오와 같은 교부들이 이와 비슷한 논지의 말을 남긴 바가 있다. 이레네오의 경우에는 흔히 이단논박으로 알려진 "거짓 지식의 폭로와 반박"에서 세상을 인생이 인간이 스스로 선택을 통해 신적 존재로 훈련받는 곳으로 보았고, 아예 신으로 불리는 존재는 "하느님과 그의 아들, 그리고 '입양된 자' 뿐이다."란 서술을 했다.
성 바오로의 서신중에는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가 언급된다. 또한 욥기에서도 사탄은 정죄의 대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이것은, 신을 악과 선을 둘다 행할 수 있으면서 선만을 골라 행하는 존재로 보는 해석과 상당히 부합하는데, 이 해석 하에서는 사탄이 그저 인간이 선을 행하는 연습을 하기 위한 스파링 상대에 불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접근법에도 약점은 있다. 신이 만일 인간이 자신과 같은 권한을 수행할 수 있는 위치에 서기를 바랬다면, 전지전능한 신이 아직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또한, 신이 두 코드 중 항상 선 만을 택한다고 주장함은 기존 죄의 문제에서 논란이 되었던 사항을 그대로 반복하는 선에서 그친다.
3.5. 악은 경고이다.
악은 신이 인간이 무엇인가를 잘못하고 있을 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다.
- 악은 경고가 아니라 결과이다.
- 경고는 화를 피하기 위함이다.
- 전지전능하고 선하신 신이 악을 보냈다?
3.6. 신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다.
신은 우리를 훨씬 초월하였고 우리의 판단과 사고를 통해 이해하지 못하며 신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기에 악하다고 주장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카렌 암스트롱이 저서 《신을 위한 변론》에서 주장한 논리다. 이를 통해 신을 악의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카렌은 동시에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는 신이 선하지도 지혜롭지도 않다'고 말하고 있어 악의 문제로 논할 만한 주장이 아니다.
어쨌거나 암스트롱의 견해를 채택하는 순간 신은 악의 문제를 피해가는 동시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버리는 문제가 발생하는 건 마찬가지. 이렇게 되면 우리가 악의 문제를 토론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인 '아니, 그럼 전선 전능 전지하지도 않으며 이해할 수도 없는 존재를 대체 왜 우리가 돈과 마음까지 써 가며 믿어야 하나?'는 질문은 그냥 집어던지는 격.
외적인 문제로는 캐런이 동일한 저서에서 "신은 절대적인 선과 아름다움, 질서, 평화, 진실, 정의"의 상징이라고 '''표현'''했다는데, 이 점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일단 이 문제는 '전지전능'에서부터 문제를 일으킨다.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며 애초에 어떤 이유로든 '의사를 전달할 수 없다' 라는 것 자체부터가 성립될 수가 없다. 차라리 '''신은 죽어라 말하는데 인간이 듣지 않는다'''가 더 합리적이다. 다만 이 역시도 자유의지 문제로 이어진다.“암스트롱의 책은 상당 부분 회피와 모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증거적 악의 문제 같은 반박이 제기되면, 암스트롱은 자신이 믿는 ‘신’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라며 망토를 덮어 자신의 주장을 보호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편리할 때는 살짝 걷어내 세속의 종교인들이 그 안들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동시에, 그녀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신성한 존재’-절대 선과 아름다움, 질서, 평화, 질서, 정의로서 묘사될 수 있는-의 속성을 슬쩍 내비친다. 이러한 행동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의미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의미 사이를 편의에 따라 시소처럼 왔다 갔다 하는 의미적 시소 전략의 예이기도 하다.
스티븐 로, “왜 똑똑한 사람들이 헛소리를 믿게 될까”, 와이즈베리,(2011), P. 192
3.7. 악은 선의 결여이며,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중략)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에 내재하는 ‘악’의 사실을 설명하기 어려웠었다. "왜 신은 만든 자유로운 존재인 인간과 천사가 그 자유를 악 때문에 남용함을 막지 않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노는, 악이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선’한 것으로서 만들어진 의지가 자신의 놓여 있는 질서에 배반할 때에만 악이 존재한다는 것, 이 의지의 반역 즉 ‘죄’를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그 악에 대하여 당연한 벌을 받게 되며, 이리하여 악도 신의 섭리 안에 들어 있음을 밝혔다. 성서 가운데에는 신의 전능과 악의 존재에 관한 논리적인 해석이 제공되어 있지 않으므로, 근대에 와서 여러 각도에서의 신학적인 주장이 펼쳐졌다.
(중략)
여기서 특히 가톨릭에서 해석하고 있는 ‘악’이라는 용어를, evil과 wrong의 경우 두 가지로 나누어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evil : 당연히 있어야 할 선, 자연히 본질적으로 속해 있어야 될 '''선의 결여'''를 ‘악’(evil)이라 한다. 즉 자연히 갖추어져 있고, 어떤 존재에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을 이 경우의 ‘악’으로 본다.
② wrong : 바르지 않은 것, 틀린 것을 이 경우의 ‘악’(wrong)이라고 말한다. 인간 행위에 적용하였을 때, 당연히 나아가야 할 길, 인간의 최종 목적인 천국에 다다르는 길에서 벗어남을 지칭한다. ①②가 마찬가지로 ‘악’의 의미로 쓰이지만, 엄격히 말해서, ‘wrong’은 ‘진리’에 반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evil’은 ‘선’에 반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가톨릭 대사전, <악> 항목 中
현재 가톨릭의 주류를 이루는 설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는 신학자들, 대표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러한 주장을 했으며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악은 선의 부재(nicht gut)로 보았다. "선은 옷이고, 악은 옷에 생긴 구멍이다."와 같은 비유를 통해 선과 악의 관계를 설명하려 하는 경우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가톨릭의 자세한 교리를 보고 싶다면, 악의 문제/가톨릭 문서를 참조하자.악이 없는 선은 존재하지만, 선이 없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악은 사실 존재하지 않고 단지 선이 결핍된 상황을 뜻할 뿐이라는 것. 즉, '''악은 선의 결여(privatio boni)'''라는 주장.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에 명사를 부여해서 그것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 가령 어두운 방에 대해 '어둡다'라고 표현하는 경우를 보자. 이 때 어둠은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취급되지만 사실 어둠이란 대강 말해 빛의 유무에 따른 현상이며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악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악'이라고 호칭하기 때문에 악이 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 악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단지 선이 결핍되어 나타난 현상일 뿐이다. 빛이 비치지 않는 곳은 어둡다. 이는 '어둠'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빛이 거기에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 선과 악의 관계도 이와 같다는 것이 이쪽 계통의 주장이지만, 비유는 근거가 아니다. 선이 없는 상태가 악인 건지, 악이 없는 상태가 선인 건지 알 수가 없으니 악을 빛에 비유해도 반박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가톨릭에선 이것이 '인간이 선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교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악은 '창조된 것'이 아닌, '선의 결핍', '창조된 것의 결핍',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설명되기에, 인간이 초월자로부터 나온 '선'을 따라야할 이유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주의할 점은, 악은 선의 '결핍적 부재'이지 '부정적 부재'는 아니라는 점이다. 악이란 '있어 마땅한 것'의 결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가톨릭에서조차 "있어 마땅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는 그것이 뭔지 모른다"는 입장이다.
예를 들어 거리에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모으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여기에 성금을 낸다면 '선'이다. 그렇다면 여기를 지나쳐버리는 사람은 악한 것일까? 이 사람을 악하다고 하는 것에는 많은 사람들이 머뭇거릴 것이다. 가톨릭에서는 이걸 악이라고 단정하지는 않지만, 지금 당장 1000원짜리 지폐 한 장 쥐어주지 않으면 하루를 못 버틸 사람을 지나친다면 '있어 마땅한 것'의 결핍이고, 그런 의미에서 가톨릭적 관점에선 악이라고 한다. 상기한 사례들에서 한 개인이, 타인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인식하고 완전한 자유의지로 그 기회를 거부했다면 소죄로 취급된다. 애초에 '인식'과 '자유의지'를 둘다 갖추었는데 무관심으로 타인을 죽게 만들었으니 어쨌든 죄라는 것. 게다가 현대 사회에선 평범한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자신의 용돈을 아껴서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단돈 얼마가 없어서 굶어죽는 사람들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소죄를 짓고 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교리상 모든 인간은 원죄가 있다는 것과 연결된다.
하지만 이 주장도 당연히 헛점이 많다.
선과 악이 정확한 동량(同量)의 상대성을 가진다는 점을 오인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즉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선하다면, 그 다른 것은 어떤 것보다 악하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직관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우리는 어떤 행위는 다른 행위보다 '''보다 더''' 선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가령 목숨을 걸고 물에 빠진 아이를 구출하는 것은, 길을 가다가 쓰레기를 줍는 것보다 더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행위임은 일반적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쓰레기를 줍는 행위가 아이를 구하는 행위보다 '''더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합당할까?[21] 우리는 쓰레기를 줍는 행위가 어떠한 악덕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선이 악의 부재라는 명제를 인정한다면, '덜 선하다'는 것은 '더 악하다'는 말과 같은 의미가 되어야 한다. 선을 열에 비유한 위 글에 비유하자면, A가 B보다 뜨겁다는 것은 B가 A보다 차갑다는 말과 의심의 여지없이 같다. 그러나 A가 B보다 더 선한 행위라는 것이, B가 A보다 더 악한 행위임과 같은 뜻이라고 말하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 주장은 결국 '자유의지'와 거의 똑같은 비판을 받게 된다. 즉 신이 인간에게 허락해준 자유의지로, 인간이 '선이 결여된 언행'을 하여서 타락하게 되는데 왜 신이 이것을 바로잡아 주지 않느냐는 점이다. 세부적인 비판은 자유의지와 거의 겹친다.
또한 악을 선의 결여로 표현하면서 사용한 비유들은 그대로 선을 악의 결여로 표현하는데에도 사용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수많은 역사를 통해 선의 기준에 어느 정도 공통된 요소가 존재한다고 반론하는 경우가 있는데, 똑같은 이야기는 악에도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간과한 이야기다. 악 역시도 역사를 통해 어느 정도 공통된 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선과 악 어느 쪽으로 결정하기 힘든 문제들에 대해서는 결핍적 부재, 부정적 부재라는 모호한 말로 분리해서 넘어가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다. 악이 명확하게 존재해서가 아니라 선 역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카르네아데스의 판자 같은 문제를 보자. 결핍적 부재에 해당하는 사례지만, 그렇다고 그게 악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다같이 빠져 죽는 것이 '있어 마땅한 것'일까? 이에 대해 가톨릭에선 그것도 악이고 소죄라는 식으로 넘어가지만, 냉정히 보면 악의 문제에 대한 답이 못 된다. 그냥 신이 그런 상황에서 구해주거나 애초에 그런 상황이 오지 않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즉, 악의 문제에 다시 걸리는 것이다.
세상은 단순히 선 VS 악이 아니다. 상당수의 사례는 오히려 선 VS 선인 경우다. 만약 사람이 자신은 100% 선이라고 믿고 그것을 추구했는데 결과가 악하게 나왔다면 어쩔 것인가? 히틀러도 원래의 목적은 그저 1차 세계대전 이후 망해버린 독일을 구하는 것이었다. 이를 이행하기 위해 그 자신은 악이 아니라고 생각한 대학살을 저지른 것이다. 만약 선의가 악을 초래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이 논리대로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이 전파되기 전에는 세상이 온통 악의 구렁텅이였어야 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옷을 재단사에게 맡겼는데, 옷에 구멍을 뚫려 있어서, “왜 구멍이 있습니까?”라고 따졌는데, 재단사가 “구멍은 천의 결여이지, 구멍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한다고 옷의 결함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악의 문제는 선악의 정의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 왜 무고하게 고통받는 경우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인데 악은 선의 결여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현실에 있는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 때문에 “왜 그러면 신은 결핍을 채우지 않는가?”라고 질문이 바뀔 뿐이다.
이것저것 길게 늘여 써놨지만, 이 답은 사실 악의 문제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악의 문제 자체를 무효화하려는 논리로서, '악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신에게서 멀어지면 그게 악이다'는 지극히 간단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 '악이 선의 결여'라는 주장에는 '''근거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진짜 문제인 것이다.
게다가 선이 신으로부터 온다는 부분에 이르면, 신과 관련을 맺지 않는 세속윤리(secular ethics)는 불가능한가?라는 의문과 반박에도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고 있다.
3.8. '''악이란 건 인간의 관점이고 신의 관점에서는 악이 아닐 수 있다.'''
이들의 주장은 인간마다 모두 악의 기준이 다르며 시대마다 악의 기준이 다르다. 그렇기에 '인간이 악이라 판단하는 바는 단순히 자신들의 생각과 손익계산을 통해 판단한 개념에 불과하고 신의 관점은 완전하기 때문에 그가 보는 것은 전부 선이다 or 악이 아닐 수 있다' 라는 주장 조금 변형된 주장으로는 인간이 이미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정확한 선의 판단이 불가능 하다라는 주장도 있다. 좀더 경박하게 서술하자면 '''인간이 신의 뜻을 어찌 알랴!'''라는 관용구가 내포하는 바와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절대선이라는 단어는 그 어떤 존재가 보기에도 상대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고 절대적으로, 공통적으로 선하다고 평가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상대선을 의미하는 이 주장은 앞서 서술했듯 다신교의 입장에서라면 모를까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입장에서 이러한 의견을 제시한다면 '''논점을 처음부터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2]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인간은 결국 초월적인 신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 주장 또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전지전능한 신 개념과 상충한다는 점이다. 만약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어째서 인간에게 자신과는 다른 관점을 주었단 말인가? 신은 인간 또한 살인과 폭력 같은 행위들을 선으로 여기게끔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신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위의 문항과 유사하게 종교인들 스스로의 행위를 부정한다는 점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종교인들은 그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신의 뜻을 교리 혹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확신하고 연구하며 실천하는 동시에, 그 기준을 타인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그들의 믿음이 틀리거나, 진정한 신의 뜻이 전혀 다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예정설을 주장하는데, 어차피 태초부터 인간은 은총으로 택함받아 천국으로 들어갈 무리와 지옥으로 갈 무리로 나뉜다는 것이다. 소위 전도행위란 이미 예정된 사람을 부르는 행위일뿐, 비신자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어차피 비신자들은 애초에 신이 선택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 신의 뜻을 영원히 알 수 없다는 것이 교리이다. 그리고 성경에 그렇게 쓰여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 밖의 관점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변명하고자 만들어낸 궤변에 불과하고, 일종의 Ad Hoc 같은 주장이다.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그러한 신의 뜻 자체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럴 것이라고 믿을 뿐이다. 애초에 악의 문제 자체가 악의 존재에 대한 논리적 의문에 의하여 제기된 것인데 신이 원래 그렇게 정해놓아 인간은 알 수 없다는 식으로 논리 자체를 막아놓는 것이므로 반박이나 답변이 될 수 없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신의 기준으로 볼 때 인간 기준의 악행은 선으로 보인다고 한다면, 그러한 행위를 긍정하는 신을 어째서 믿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믿음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나오게 된다. 소소한 것에서부터 차마 형용하기 힘든 것까지 모든 악행을 선, 하기에 마땅한 행위라고 간주한다는 점에서 이는 그저 '''강자에 대한 복종'''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반박이나 '''악마숭배자의 사상'''이 혼재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악의 방치와 같이 인간 입장에서 비상식적으로 보이는 신의 행동을 절대선이라고 믿는다면, 신은 보통의 선한 인간보다 더 신뢰할 수 없는 예측불허의 존재가 된다. 따라서 언제든 언약을 저버리고 천국 갈 사람을 지옥 보내는 등 인간 입장에서 온갖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수 있고, 비위를 맞추고 숭배할 의미가 없다.
창작물에 따라서는 이 주제에 더더욱 극단적으로 몰아가는 경우도 있는데, 바로 '''신은 인간에게 있어 지극히 악하고 해로운 존재지만 너무 강해서 어쩔 수 없이 복종한다'''는 시추에이션이 그것이다. 이것은 코즈믹 호러와도 맥을 같이하며, 특히 크툴루 신화로 가면 선악의 개념이 다른 초월적 존재 앞에서 무력한 인간[23] 이란 꿈도 희망도 없는 전개로 가기 일쑤. 더군다나 이 세계관의 중심에는 바로 그 야훼에 대응하는 절대자가 존재하며 '''이 존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부하격인 초우주의 신들조차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야말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절대자'를 극단적으로 잘 드러낸 사례.
반대로 이를 뒤집어 '''인간 입장에서 신을 악으로 간주하고 죽여버리는''' 충격적인 전개와 결말을 보여주기도 한다. 바로 '''신 죽이기'''란 클리셰. 이 문서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YHVH가 인류의 적으로서 처단당하는 진 여신전생 2/진 여신전생 4 FINAL이 가장 직접적으로 이 문제를 찌르고 있다.
3.9. 기타
대표적인 기타 이론은 혼돈-질서 대립 이론인데, 신은 창조에는 전지전능하지만 질서와 혼돈의 개입 영역에는 전능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주장이 있다. 다만 이것은 '신이 전지전능하다'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셈이기 때문에 정론으로 굳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혹은 이 모든 게 신의 섭리이고 따지고 보면 선도 악도 다 필요했다고 말도 있다. 이스카리옷 유다가 예수를 팔았기에 예수가 인류를 구원할 수 있었다는 식으로, 결국 인간은 신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한 존재라는 주장. 하지만 이렇게 되면 불쌍한 유다 가롯은 하나님으로부터 배신자로 만들어졌고 배신자로서 지옥에 떨어지는 운명이 고정된 것이기에 당연히 명확한 해답이 되지 못한다.[24][25][26] 밀턴의 실낙원 같은 경우, 이런 부류로 야훼를 해석해서 루시퍼의 타락도, 아담의 타락도 알았던 것으로 나오며, 대개 이런 주장의 경우 욥기를 같은 맥락으로 해석해 범위를 넓게 잡아놓는 편이다.[27] 대표적으로 c.s. 루이스가 이 부분에 대해 고통의 문제를 서술한 바 있고, 그는 타락한 우주, 부분적으로만 구원받은 우주에 있는 악과 선에 대해 4가지의 분류를 제시했는데, 곧 (1)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순수한 선, (2) 반항하는 피조물들이 만들어 내는 순수한 악, (3) 하나님이 구원의 목적을 위해 그 악을 이용하시는 경우, (4) 그 결과 만들어지는 것으로서 고난을 받아들이고 죄를 회개함으로써 증진될 수 있는 복합적인 선이다. 다만 하나님이 순수한 악으로부터 복합적인 선을 만들어 내실 수 있다고 해서 순수한 악을 저지른 사람들의 책임이 면제되는-하나님의 자비로 구원받을 수는 있어도-것은 아니다. 이런 구분은 아주 중요하다.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지만,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화가 임한다. 죄는 확실히 은혜를 더하게 하지만, 그것을 빌미로 계속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전 체계는 선한 자와 악한 자의 충돌을 '고려해서' 만들어졌으며, 어떤 행동을 하든 위의 분류에 따라 결국에는 하나님의 계획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다처럼 섬기느냐 요한처럼 섬기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자유의지의 존재 여부를 모호하게 만드는 데다가 인간이 마치 도구처럼 쓰이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전지전능이라는 것은 제약의 부재를 의미한다. 손가락을 튕겨서도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데, 그걸 굳이 유다같은 사람이 자살할 정도로 정신적인 충격을 받게 하는 방식을 채용하는 존재가 과연 절대선일까?
리스본 대지진은 이 문제에 관해 신학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종교적 축제일에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 교회와 성당에 모인 신자들은 큰 피해를 입었으나 집창촌은 피해가 적었기 때문. 자세한 사항은 문서 참고.
전도서에서 전도자(코헬렛)은 악의 문제와 같은 철학/신학적 난제, 곧 선결문제가 존재하며 그 선결문제가 끝 없이 이어지는 부류의 문제에 대한 썰을 간간히 풀어놓는대, 이에 대한 전도자의 조언은 다음과 같다.
전도자는 지혜를 추구하며 그 누구보다도 큰 지혜를 얻기도 하였고, 이런저런 뛰어나고 공정하고 공평한 치리를 하기도 하였고, 세상의 온갖 악한 것과 미친 것을 연구하여 살피기도 하였으나, 결국 전도자와 같은 지혜자가 이러한 인생의 어리석음에 대하 설파하여봤자, 이런 지혜자가 무엇을 이루는 지와 상관없이, 인생은 그 교훈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므로, 전에 있던 세대가 그러했고, 지금 세대가 그러했듯, 후에 올 세대도 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니, 지혜자와 우매자의 결국이 일반이다, 즉, 해봐야할 생각이긴 하나, 그것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뻘짓이라 말한다. 이 문제의 근본적 실체에 대하여, 전도자는 "인생의 목표는 하느님의 안식에 드는 것임을 명심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 한, 전도자가 작성한 잠언의 첫 가르침임을 되세겨라."는 결론을 제시한다.
그리스도교 영지주의는 악의 문제 때문에 구약의 하느님(데미우르고스)과 신약의 하느님(아이온)을 서로 다른 이원적 존재로 보았다.
또 다른 이론으로는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이 있다. 이는 악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이 완벽하지 않는다는 주장, 그리고 신이 왜 인간을 완벽하지 않으며 악한 존재로 만들었냐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결국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고 그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고 욕망 대로 선택하게 되었고 결국 이러한 인간의 선택에 악은 부가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것이며 악이 단순히 나쁜 것만이 아니라 뒤에 따라오는 행복과 선을 조금 더 극대화시켜주는 역할까지 하며 세계를 최선의 형태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악은 음악에 있어서 순간의 불협화음적 요소로써 오히려 음악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존재이다.[28] 유한한 존재에게는 아무리 선을 행하려 한다 해도 그 선 때문에 누군가 피해 보거나 고통 받는 악이 뒤따르게 되며 인간은 악을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의지가 있는 세상이 오히려 의지가 없는 세상보다 최선의 세상이며, 결과적으로 악도 하나의 선을 실행할 수 있는 방편이며, 결국 선이 존재하기에 악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악은 결국 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4. 결론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이 문제를 바라보자면, 먼저 '''"전지(全知)란 무엇인가", "선(善)과 악(惡)은 무엇인가", "전능(全能)이란 무엇인가" "신(神)이란 무엇인가"''' 같은 주제들이 명확히 정의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절대적인 선(善)'이 무엇인지 증명되지 않는 한, '''신은 인간이 아직 이해하지 못하면서 신만이 알고 있는 절대적인 선에 따라 인간이 악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존재하게 했다'''고만 해두면 내부 논리적으로는 문제가 없다.[29] 하지만 이런 논리는 '절대선신 = 인간의 관점에선 악신'이라는 결론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아무리 절대선신이라도 인간의 관점에서 악하다면 인간의 입장에서 반가운 일은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의 다른 모든 생물들을 지키기 위해 인간을 멸종시키는 신을 생각해보자. 아무리 숭고한 이유가 있다고 해도 우리 인간이 그런 신의 존재를 반길 수 있겠는가.[30] 전지전능하며 지선한 신을 증명하고자 하는 입장에서는 웬만하면 논의를 여기서 멈추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온갖 종류의 복잡다단한 설명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
이런 개념과 악의 문제는 그리스도교 신학 외에도 윤리학 및 종교철학, 종교사회학 등의 분야에서 뜨겁게 불타고 있는 주제이며, 여러 창작자들이 작품을 창작할 때 소재로 삼기도 했고, 심지어 종교에 관심있는 일반인들도 가끔씩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한다. 이 주제에 대한 좀 더 심도있는 개관을 원한다면 《신과 인간 그리고 악의 종교철학적 이해》 등의 저서를 추천한다. 개신교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룬 책으로는 《고통과 씨름하다》,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 등이 있다. 해당 저서(고통의 문제)에서는 위 항목들에서 서술한 의문들이 대개 제시, 설명되어 있으며,[31] 개중에는 전능과 선함에 대한 정의 또한 포함되어 있다. 대략 이 문제를 개신교적 관점에서 다룬 저술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이 문제에 관심있는 종교인이라면 나무위키보다는 여러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전공을 집약적으로 서술한 서로 반대되는 전문서적들을 찾아보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힘을 기르자. 그것이야말로 이러한 문제들의 새로운 해결법과 또한 새로운 반박을 내놓게 되는 건전한 과정이 될 것이다.
사실 모든 종교적인 답변들은 아무리 정교한 논의라고 할지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따지다보면 결국엔 어느 부분에선가 믿음을 요구하는 시점이 오게 된다. 그것은 이런 종류의 호교론에선 어쩔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인 것이다.# 이쪽 계통의 신학서적 등을 파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하나의 예외도 없이 끝에 가서는 이성적인 논리가 아니라 믿음을 요구하는 부분이 반드시 나타난다. 결국 악의 문제에 대한 논쟁은 어떤 형태로 시작했던지 나중에는 '''이성 vs 믿음'''의 형태가 된다는 것이다. 본래 논쟁이란 이성에 의거해 이치를 따지는 행위이기 때문에, 한쪽이 믿음을 들고 나오면 논쟁의 의미가 없게 되어, 결국 남을 사람은 남고[32] 떠날 사람은 떠나는[33] 결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