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휴 이사금
1. 개요
신라의 제9대 국왕. 칭호는 이사금. 약 200여 년간 지속된 신라 초기에 석씨 왕조의 1번째 국왕.
삼국사기 기록대로라면 석탈해의 손자이며 탈해 이사금의 아들 각간 구추(仇鄒)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지진내례부인(只珍內禮夫人)이다. 박씨 마지막 왕인 아달라 이사금에게 아들이 없어 그가 왕이 되었다고 한다.[1] 탈해 이사금의 손자라고 하는데 삼국사기 기록을 적힌대로 믿는다면 탈해 이사금이 서기 80년에 사망했고 벌휴 이사금은 184년에 즉위하였으니 104년 차이가 난다. 탈해 이사금과 구추가 각각 할아버지 때 아들을 생산했다고 해도 너무 시간차가 크다. 그러므로 탈해 이사금 이후 신라에서 석씨 세력이 한 차례 쇠퇴하여 족보 기록이 제대로 남지 않았거나 벌휴 이사금을 비롯한 석씨 세력이 실은 탈해 이사금의 직계는 아니지만[2] 스스로 탈해 이사금의 후손으로 둘러댔기 때문에 기록이 이렇게 남았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3]
그의 왕비가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두 명의 아들을 둔 것을 보면 그에게 왕비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장남 골정의 아들들이 조분 이사금과 첨해 이사금이며 차남 이매의 아들이 내해 이사금이다.
2. 즉위 과정의 의혹
삼국사기에 따르면 벌휴 이사금이 바람과 구름을 점쳐 홍수, 가뭄, 풍흉을 예지하며 사람의 정직함과 바르지 못함을 꿰뚫어 봐 성인으로 불렸다고 하며 아달라 이사금의 왕비 내례부인이 벌휴 이사금의 차남 이매와 정분이 난 걸로 추정되는 기록[4] 이 있는 등 왕위 계승에 있어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대중역사가 박영규의 해석에 따르면 석씨계가 석탈해 이후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면서 정치보다는 주로 제사를 지내는 신관 가문으로 바뀌었다가 신진 세력인 김알지 계열 김씨계가 석씨계와 연계해 지마 이사금의 딸인 내례부인과 같은 박씨계 일부의 지지를 받아 당시 왕을 몰아내고 새로이 벌휴 이사금을 왕으로 삼은 것이라 한다. 그 외에도 벌휴 이사금이 탈해 이사금의 신성성을 빌어 왕위에 오른 것으로 해석한다. 보통 한 왕조의 건국자들이 미화되는 것을 추정해 보면 성인이라는 서술도 그런 맥락으로 추측된다.
어쨌거나 당시 신라는 아직 제정분리가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은 확실하며 아달라 이사금의 재위 기간 마지막 10년 부분이 비어있다는 점을 봐도 정치적인 혼란이 있었던 것도 명백해 보인다.
3. 업적
재위 기간이 신라 초기 왕치고는 다소 짧은 12년인데 그가 고령에 즉위했음을 암시한다. 재위 기간이 짧은만큼 역사 기록도 상대적으로 적지만 그 중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것은 백제와의 전쟁이다. 참고로 석씨 세력이 박씨 세력을 밀어낼만큼 당시에 힘이 있었기 때문인지 석씨 시대가 시작되면서 신라는 이전 박씨 시대보다 급격하게 세력을 확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재위 5년(188년)에 백제군이 먼저 서쪽 변경을 공격했는데 미추 이사금의 아버지인 파진찬 김구도가 막았고 재위 6년에는 구도가 반격해 구양에서 백제군을 격파해 500여 명을 죽이기도 했다. 그러나 재위 7년에 백제가 서쪽 국경의 원산향(현재의 경상북도 예천군으로 추정)을 공격하고 부곡성(현재의 경상북도 군위군으로 추정)을 공격할 때는 구도가 기병 5백명을 이끌고 백제군과 싸웠으나 백제군의 도망가는 척 하다 기습하는 전술에 말려들어 대패한다. 그 결과 왕은 구도에게 책임을 물어 벼슬을 깎아 부곡성주로 삼고 설지를 좌군주로 임명하는데 구도가 부곡성주가 되었다는 기록을 보아 부곡성을 뺏기지는 않은 것 같다. 아님 뺏겼어도 후에 되찾았든가. 아무튼 구도는 이 때부터 조용히 있었는지 기록이 없다가 나중에 아들이 왕이 된 뒤 갈문왕으로 추증된다.
185년에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 군주로 삼아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으로 추정되는 소문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정벌하기도 했다. 192년에 왜인 1천여 명이 기아로 신라에 피난을 와 식량을 구걸했다는 기록이 있다.
4. 삼국사기 기록
一年春三月 벌휴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다
二年春一月 시조묘에 제사 지내고 사면하다
二年春二月 소문국을 정벌하다
三年春一月 주·군을 순행하다
三年夏五月 일식이 일어나다
三年秋七月 상서로운 벼 이삭을 바치다
四年春三月 토목 공사로 하여 농사의 시기를 뺏는 일이 없도록 하다
四年冬十月 북쪽 지방에 큰 눈이 오다
五年春二月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해 오자 구도에게 막도록 하다
六年秋七月 구도가 백제와 구양에서 싸워 이기다
七年秋八月 구도를 부곡성주로 좌천시키다
八年秋九月 치우기가 각성과 항성에 나타나다
九年春一月 국량을 아찬으로 삼고 술명을 일길찬으로 삼다
九年春三月 서울에 큰 눈이 오다
九年夏五月 물난리가 크게 나다
十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年春三月 한기부의 여자가 한 번에 4남 1녀를 낳다
十年夏六月 왜인이 먹을 것을 구하러 오다
十一年夏六月 일식이 일어나다
十三年春二月 궁실을 중수하다
十三年春三月 가물다
十三年夏四月 왕이 죽다
특이하게 일식 기록이 무려 세 번이나 나오고 있다. 아마 박씨 왕실에서 석씨 왕실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혼란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1] 그러나 삼국사기의 신덕왕 부분을 보고 교차검증하면 아달라 이사금은 후손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적자가 없었다는 의미로 추정되고 있으며 신덕왕은 서계 후손일 가능성이 높은 것.[2] 물론 완전히 탈해 이사금과 관계없는 100% 족보 위조라기보다는 적어도 가문의 일원이기는한데 직계로 조작한 정도.[3] 다만 이런 사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고려 태조 왕건(877년생)과 그 손자 현종(992년생)은 105살 차이가 난다. 이는 태조가 안종(현종의 아버지)을 최소 60세 이후에 낳았고, 안종도 현종을 50대 후반 이후에 낳았기 때문.[4] 내해 이사금의 부모는 아버지가 석이매, 어머니가 내례부인으로 적혀 있다. 이 내례부인이 아달라 이사금의 왕비 내례부인과 동일 인물인지 동명이인인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