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하르트 폰 뷜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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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제국의 4대 수상. 1900년부터 1909년까지 수상직을 역임하였다.[2]
2. 생애
2.1. 초기
1848년 홀슈타인 일대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하였다.[3] 아버지는 독일 연방 시기 연방 의회에 홀슈타인 대표로 참석할 만큼 명망있는 외교인이었으며, 아버지가 외교관이라는 집안 특성상 어려서부터 프랑스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보불전쟁에 기병으로 참전하여 소위로 임관하였지만 군생활은 성미에 안맞았는지 종전 이후 전역하였고 전역 후 다시 대학원에 가서 법학과 외교학을 전공한다.
2.2. 외교관 시기
대학원 졸업 이후 외교부 장관이었던 아버지의 연줄을 이용하여, 1873년 외교관으로 임관한다. 이후 유럽 각국을 오가면서 베를린 회의와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에도 참여하였으며 능력을 인정받아 1897년에는 황제 빌헬름 2세에 의하여 외무부 장관으로 발탁된다.[4][5] 외교관으로의 능력도 있었던데다가, 빌헬름 2세의 비위를 맞춰주는 능력도 출중했기 때문에[6] 황제는 뷜로우를 총애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뷜로우의 매일 아침 첫 스케줄로 황제를 알현하는 것이 고정되는 지경에 이른다.(...)[7] 그리고 마침내 1899년 수상 호엔로헤실링스 후작이 고령을 이유로 사임하면서 뷜로우가 독일 제국의 키를 쥐게 된다.
2.3. 총리 재임 시기
뷜로우가 수상에 재임했을 시기 독일 제국은 건함 정책과 세계 정책(Weltpolitik)으로 대표되는 제국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던 시기였기에, 뷜로우 역시 이런 흐름에 발맞추는 정책을 펼쳐나간다. 수상에 취임한 이후 뷜로우가 처음으로 처리한 중요한 사안 역시 의화단 사건에 대항하여 무렵을 투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제국주의 일변도의 정책은 독일 경제에도 큰 부담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의 성장에 공포심을 느끼고 있던 영국과의 마찰을 필연적으로 빚을 수 밖에 없었다.'''뷜로우를 등용한 이후로, 편안히 잘 수 있게 됐어.''' (Seit ich ihn habe, kann ich ruhig schlafen.)
- 1901년, 빌헬름 2세
그리고 1904년 독일을 경악시킨 영불협상이 체결된다. 독일은 이미 러불동맹으로 인하여 서쪽 국경선(=프랑스)와 동쪽 국경선(=러시아)에 막강한 적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제 영국까지도 프랑스에 붙어버리면서 완벽히 외교적으로 왕따가 되고 만 것이다.[8] 독일에게는 유럽의 외교 자체를 뒤흔들 필요가 있었고, 이에 뷜로우는 엄청난 도박을 감행한다. 바로 빌헬름 2세로 하여금 탕헤르를 방문하게 하여 모로코가 독립국임을 선포하게 한 것이다. 즉 1차 모로코 위기가 발발한 것이다. 일찍이 모로코에 침을 발라놓고 있었던 프랑스는 독일에게 모로코 문제의 해결을 놓고 양국간 담판을 제안했지만 빌헬름 2세는 이를 거부하고 국제 회담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6년 스페인에서 이 문제를 놓고 유럽 열강들의 회담이 열리는데, 뷜로우와 빌헬름 2세의 희망과는 정 반대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제외한 유럽 열강[9] 들은 모로코에서의 프랑스의 종주권을 승인해버린다. 즉 한 마디로 요약해서 본전도 못찾고 망했어요.
모로코 위기를 통해서 독일은 더 왕따가 됐고, 뷜로우는 러시아를 통하여 돌파구를 찾고자 시도했다. 빌헬름 2세와 니콜라이 2세 사이에서 '''두 나라가 다른 유럽 국가로부터 공격을 받을 경우, 성의껏 서로 원조를 한다는 내용'''의 조약이 체결되면서 뭔가 희망이 보이는가 했는데, 러시아의 의회 두마에서 들고 일어난 끝에 차르가 굴복하여 러시아 쪽이 '아 그 '''다른 유럽 국가'''라는 건 오스트리아에 한정한 거임 ㅋ'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해버린다. 즉 이번에도 또 쪽박(...)
외교적으로 실패가 잇따른 상황에서 발생한 추문들은 뷜로우 내각의 숨통을 점점 조여온다. 1907년 초 뜬금없이 뷜로우가 동성애자라는 스캔들이 터지면서 곤혹을 치르더니, 같은 해 11월에는 카이저 빌헬름 2세가 뷜로우와는 어떤 상의도 없이 멋대로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와 인터뷰를 진행했던 것. 빌헬름 2세의 주옥같은(...) 인터뷰 내용을 보자면
- 영국인들은 발정난 토끼(mad as a March hare) 마냥 이성을 잃었다. 왜 우리 독일과의 동맹 체결을 망설이느냐(...)
- 독일인들 대다수는 영국을 싫어하지만, 사실 난 영국 좋아함 ㅋ
- 난 보어 전쟁 시기 영국을 뒤에서 은밀히 도와줬음
- 일본 제국의 부상하는 해군력을 생각해보면 언젠가 영국은 우리 독일 제국의 해군이 필요할 것이다.[10]
빌헬름 2세는 인터뷰 내내 영국,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 거의 모든 열강들을 잘근잘근 씹어줬고, 안 그래도 외교적으로 고립된 처지의 독일에게 이는 감당이 안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나마 독일 내에서라도 이 인터뷰가 좋은 반응을 얻었으면 모를까 독일 민중들 역시 황제의 인터뷰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출한다.[11]
뷜로우는 빌헬름 2세를 오스트리아로 여행을 보내고 어떻게든 사건의 열기를 식히려고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웬만한 일이 아니었던만큼 파장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고, 세간에서는 '제국 총리라는 놈이 대체 황제 폐하를 똑바로 보필도 안하고 뭐하는 거냐'라면서 비난의 화살을 뷜로우에게로 돌린다. 심지어 빌헬름 2세 본인도 자신에게 제대로 된 충고를 안해줬다면서 뷜로우에게 삐져버린다.(...) 라이히스탁에서 공공연히 총리가 경질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1909년이 되면 재정 위기가 독일을 덮친다. 건함 경쟁과 세계 정책으로 인하여 독일의 국채는 엄청난 속도로 불어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뷜로우 내각은 직접세, 상속세와 소비세를 인상해버렸는데, 이것이 융커들의 불만에 불을 붙여버렸던 것. 결국 1909년 7월 13일 뷜로우는 사임을 발표하고, 후임으로는 베트만홀베크가 임명된다.
2.4. 여생
수상 사임 이후 뷜로우는 다시 본업인 외교관으로 돌아갔고 1차 대전 직전 주 로마 대사로 파견된다. 하지만 1차 대전 당시 이탈리아는 삼국 동맹을 배신하고 중립을 선언한 것도 모자라 아예 협상국 소속으로 참전해버리면서 강제로 추방된다. 그래도 로마가 마음에 들었는지 종전 후에는 다시 로마의 집을 얻어 거주했고, 그 와중에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로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지만 정계에 복귀하지 않은 채 1929년 80세를 일기로 로마에서 사망한다.
3. 여담
- 형 카를 폰 뷜로우 역시 독일 근대사에 꽤나 큰 족적을 남겼는데, 벨기에 침공 당시 독일 제2군의 사령관을 맡기도 했다.
- 수상 재임 초중반까지 빌헬름 2세의 비위를 잘 맞춰서 사이가 아주 좋았지만, 상술한 문제의 데일리 텔레그래프 사건 이후로 사이가 아주 틀어져 버렸다. 수상 사임 이후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을 정도. "독일 민중들의 용기: A+, 독일 정치인들의 사고능력: Z-"
[1] 외래어 표기법을 원칙대로 적용하면 '폰뷜로우'가 된다. 외래어 표기법상 로망어와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고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2] 비스마르크를 제외하면 독일 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수상이다. 알다시피 빌헬름 2세의 성격이 괴팍했던지라, 대부분 오래 버티지를 못하고 수상 자리에서 나가떨어진다. [3] 오늘날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함부르크이다.[4] 사실 이 시기 총리였던 호엔로헤실링스 후작은 외무부 장관에다가 제국 수상자리까지도 뷜로우에게 넘겨주고 은퇴하고 싶어했지만 뷜로우 본인이 호엔로헤를 뜯어말렸다고 전해진다.[5] 현대 국가에서도 외무부 장관은 상당한 파워가 있는 자리이지만 이 시기 독일은 영국과 건함 경쟁이 한창이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외무부 장관은 제국 수상에 버금가는 요직이었다.[6] 빌헬름 2세는 자신에 대한 직언을 결코 참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총리와 장관들이 골머리를 앓았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뷜로우가 쓴 방법이 상당히 재치있는데, 사소한 것에는 예스맨 노릇을 충실히 해주면서 빌헬름의 기분을 좋게 해주다가 중요한 사안에서 황제가 고집을 피우면 빌헬름이 과거에 저지른 비슷한 실수를 넌지시 언급했다곤 한다. 그러면 빌헬름이 그리 기분이 상하지 않은 채로 자신의 의견을 정정했다고.(...)[7] 반면 호엔로헤실링스 후작의 경우에는 하도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어 그림자 총리(Schatten Kanzler)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였다. 당연히 고집불통의 황제는 만날 생각도 없었고.[8] 다만 이 때는 아직 삼국협상은 체결되기 전이어서 러시아와 영국 사이는 여전히 개차반이었다. [9] 심지어 삼국 동맹의 일원이었던 이탈리아까지도 통수쳤다(...) [10] 빌헬름 2세는 황화론 신봉자로 유명한 인물이었다.[11] 물론 당시 민족주의에 찌들어 있던 시대 분위기 상 외교적으로 바보짓을 했다고 황제를 까지는 않았다. '영국이 우리의 주적 맞잖아. 근데 왜 카이저는 영국 좋아한다냐? 저 놈 첩자 아니여?' 가 일반적인 반응. 게다가 보어 인들이 혈통적으로 독일과 가까운 네덜란드인의 후손이었다는 점 때문에 보어 전쟁에서 영국을 지원한 점을 가지고 카이저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컸다.